- 2011.5.7. 

꽃을 꺾어 든 아이. 

 

머리에 꽃을 핀으로 꽂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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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2011.3.4 - 창간호
교육공동체벗 편집부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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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잡지 ‘우리교육’과 새 잡지 ‘오늘의 교육’
 [책읽기 삶읽기 57] 교육공동체벗 펴냄,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



 “진보적 교육 담론은 지금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어야 한다(8쪽).”는 이야기를 내걸며 새로 나오는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를 읽습니다.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은 또다른 교육잡지 《우리교육》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아는 사람은 그닥 안 많고,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뿐더러, ‘진보적 대중지’라 하는 언론매체에서조차 이러한 이야기를 기사로 다루지 않았습니다만, ‘(주) 우리교육’이라는 출판사에서 ‘잡지 우리교육’이 더는 돈이 안 된다고 여겨 이 잡지를 ‘전교조 회원 기관지’로 바꾸려 하면서 잡지를 만들던 일꾼을 모두 쫓아낸(정리해고) 일이 있습니다.

 마땅한 일이지만, 정리해고는 대통령이나 공공기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커다란 회사에서만 하는 정리해고는 아닙니다. 노동조합에서도 정리해고를 할 만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 해서 정리해고를 못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해고를 하는 나라’이니까, 이러한 나라에서 전교조 또한 ‘정리해고를 하는 권력’을 누렸을 뿐이라 할 만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라 하더라도 돈이 안 되는 사업이라면 얼른 접어야 할 노릇일 테니까요. 교사 노동조합이든 아니든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샘솟을 까닭이 없으니까요. 그예 돈을 퍼붓기만 하는 잡지라 한다면 마땅히 그만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잡지 우리교육’이란 무엇이며, ‘(주) 우리교육’이란 또 무엇일까요.


.. 오늘날 대한민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사실상 ‘여관’이다. 교육 당국과 일선 학교 관리자들은 어쨌든 모든 아이들을 깨워서 수업 과정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을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전제한 상태에서 교육행정을 펼쳐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그들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는 순간 많은 것이 달라지게 되므로 그들은 이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 오늘날 아이들의 이러한 일탈과 저항을 학교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익히 지켜보았다시피, 학교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저, 학칙의 처벌 규정을 턱없이 강화하고, 자퇴나 전학을 권고하거나 퇴학시키거나 아니면 아이들을 학교 바깥 기관에 떠넘기는 것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다 ..  (17, 21쪽)


 “진보적 교육 담론”을 다루겠다는 새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진보적 교육 담론”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보적 교육 담론”이 아니라 “보수적 교육 소론”이라 하더라도 나쁘지 않다고 여깁니다.

 교육, 곧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이란 진보나 보수하고 아랑곳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라서 더 좋은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보수라서 아주 나쁜 교육이 되지 않습니다. 자그마치 쉰 해만에 새롭게 빛을 보는 교육소설 《인간의 벽》(이시카와 다쓰조 씀,양철북 펴냄,2011)을 읽을 때에도 곳곳에 나옵니다만, 1950년대에 일본 교직원노동조합인 일교조가 지키려 하는 배움터란 ‘진보 교사가 진보 학생을 일구는 배움터’가 아닙니다. 일교조 여느 교사들이 지키려 하던 배움터란 ‘참답고 착하며 아름다이 살아갈 올바른 사람으로 배우거나 가르칠’ 터전입니다.

 진보가 옳대서 진보라는 길을 갈 까닭이 없습니다. 옳은 길을 가다 보니 진보와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착하게 살아가다 보니, 이 삶이 진보와 만나기도 할 뿐입니다.

 페스탈로치이든 야누쉬 코르착이든 ‘진보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최현배이든 성내운이든 이오덕이든 ‘진보 교육’을 외친 적이 없습니다. 나라 안팎 훌륭한 교육자들은 한결같이 ‘옳은 배움길’을 이야기하고, ‘착한 배움길’을 온몸으로 살아냈습니다. 《이 여자 이숙의》(삼인 펴냄,2007)에 나오는 이숙의 님 또한 ‘진보’라는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페스탈로치와 야누쉬 코르착과 최현배와 성내운과 이오덕과 이숙의 어느 누구도 ‘민주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는 말마디, 그러니까 구호로 떠드는 민주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바르며 착하고 아름다이 살아내는 ‘참배움’만을 조용히 읊었습니다.


.. 전공과목을 가르치는 목적은 전공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습득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유로이 사고할 수 있겠는가. 물론 최근 학문은 대부분 영어권 국가가 주도하고 있고, 전공 용어를 한국어로 바꾸면 제대로 뜻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게 강의를 영어로 해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 카이스트에서 강의하는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생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태도는 은연중에 드러나 왠지 이걸 물어 보면 바보 취급을 받을 것 같은 불안감을 갖게 하여 학생들이 자유롭게 질문을 던질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 ..  (119, 120쪽)


 나는 생각합니다. 옛 교육잡지 《우리교육》이든 새 교육잡지 《오늘의 교육》이든 ‘진보’도 ‘민주’도 ‘평화’도 ‘평등’도 말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잡지라 한다면, 말 그대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이야기를 말하면 넉넉합니다. 가르치거나 배우는 이야기는 입으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교실 안쪽에서만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살아내는 배움이고 살아가는 가르침일 뿐입니다.

 교사가 되든 어버이가 되든, 입으로 아무리 옳고 바른 소리를 읊는다 하더라도, 삶으로 고스란히 보여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어느 하나 옳고 바르게 배우지 못합니다. 옳고 바르다는 책을 천 권쯤 읽었기에 옳고 바르게 살아가겠습니까. 옳고 바른 책을 구백구십구 권쯤 읽었기에, 구백아흔여덟 권쯤 읽었기에, 구백아흔일곱 권쯤 읽었기에 …… 오백한 권쯤 읽었기에, 오백 권쯤 읽었기에, 사백아흔아홉 권쯤 읽었기에 …… 아흔아홉 권쯤 읽었기에, 아흔여덟 권쯤 읽었기에, 아흔일곱 권쯤 읽었기에 …… 다섯 권쯤 읽었기에, 네 권쯤 읽었기에, 세 권쯤 읽었기에, 옳고 바른 가르침과 배움을 ‘안다’거나 ‘산다’고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옳고 바르다는 책은 한 권조차 안 읽어도 됩니다. 나부터 옳고 바르게 살아가면 됩니다. 옳고 바르게 살아왔다는 훌륭한 교육밭 어르신을 아무도 몰라도 됩니다. 나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가면 됩니다.

 “진보 교육 담론”이든 “보수 교육 소론”이든 부질없습니다. 어떠한 목소리이든 아름답지 않습니다. 따스한 땀방울과 사랑스러운 손길과 믿음직한 눈동자이면 넉넉합니다. 왜냐하면 ‘가르침과 배움(교육)’이거든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한테는 더 많은 돈이 있으면 더 많은 물건을 사거나 더 큰 집을 장만해서 더 많은 놀잇감을 사들이며 더 넉넉히 누린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더 많은 돈이 있더라도 참다운 사랑이 없으면 어떡하나요. 더 많은 물건을 사들여서 누린다지만 착한 손길이 없으면 어찌하나요. 더 큰 집에서 떵떵거리며 자가용 씽씽 몬다지만 고운 마음이 없으면 무슨 보람이 있나요.

 아이는 돈을 먹지 않습니다. 아이는 사랑을 먹습니다.

 어른도 돈을 먹지 못합니다. 어른도 사랑을 먹습니다.


.. 교대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대충’이었다. 밑도 끝도 없는 ‘대충’이다. 무엇을 이야기하든 “대충 해”라는 말이 돌아온다. 미술 과제가 재미있어서 “나 어제 미술 했어. 은근 재밌더라.”라고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대충 해.”였고, 물리 과제가 너무 어려워 물어 봤을 때도 대답은 설명 대신 “대충 해.”였다. “이건 어떻게 할까?” “이건 뭐야?” “재미있지 않아?” “네 생각은 어때?” 이 모든 것의 대답은 대부분 “대충 해.”로 돌아왔다. 특히 과제를 할 땐 ‘대충’이 정석이었다. 잘하려고 너무 ‘오바’하지 말고, 과제도 아닌 것에 관심 갖는 그런 ‘오바’하지 말라는 얘기다 ..  (183쪽)


 나는 다시금 생각합니다. 옛 교육잡지 《우리교육》이 잘 안 팔리면서 빚을 자꾸 지고 말았다면, 옛 교육잡지인 《우리교육》 스스로 사랑을 잃거나 사랑하고 등돌리거나 사랑하고 멀어진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 주식회사 우리교육은 ‘스스로 잃거나 버리거나 놓거나 등돌린 사랑’을 다시금 찾아서 북돋우도록 힘써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교육잡지를 빚으려 하는 분들이라면 무엇보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어버이·교사·이웃)’으로서 착한 사랑과 참다운 사랑과 고운 사랑을 되찾으면서 아끼는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이 없이 ‘담론’만 있으면, 사랑은 없는데 ‘진보’라는 옷만 걸치면, 사랑하고는 동떨어진 채 ‘교육’만 들먹인다면, 참배움도 참사랑도 참사람도 참말도 참나라도 참꿈도 참길도 이루어질 수는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교육》이 지식조각에 얽매이는 잡지이기보다는 참말과 참사랑을 바탕으로 참배움과 참삶을 차근차근 보살피어 어루만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1호에는 딱딱하거나 어려운 말로만 이루어진 지식조각 글이 너무 많습니다. (4344.5.8.해.ㅎㄲㅅㄱ)


― 오늘의 교육 1호(2011년 3·4월) (교육공동체벗 펴냄,2011.3.1./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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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에 새벽에


 곤죽이 되도록 일한 날이라면 밤에 일어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이 또한 곤죽이 되도록 논 날이라면 밤에 기저귀에 쉬를 할 뿐, 못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이는 어느 날부터 밤오줌을 가립니다. 곧 세 돌이 다 차는 아이는 잘 때에 기저귀를 대지만, 이제 기저귀에 오줌을 누는 일은 퍽 드뭅니다. 한 주에 한 번쯤만 기저귀에 쉬를 합니다. 밤에 “쉬 마려.”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합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가 밤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곧바로 깹니다. 아이 기저귀를 풉니다. 졸음에 겨워 해롱거리는 아이를 안고 오줌그릇에 앉힙니다. 아이는 꾸벅꾸벅 졸면서 쉬를 눕니다. 쉬를 다 누면 팔을 벌려 안깁니다. 번쩍 안아서 자리에 눕히면 이내 곯아떨어지고, 다시 기저귀를 채운 다음 이불을 여밉니다.

 아이가 갓난쟁이일 때에는 밤에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밤새 오줌기저귀를 가느라 누워서 눈을 감았다 하면 도로 떠야 하는 판이었습니다. 요즈음은 밤에 한 번만 깨면 되고, 아이 쉬를 누인 다음 아버지도 쉬를 누자며 바깥으로 나옵니다. 아이 쉬를 누이며 바깥으로 나와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또는 새벽하늘을 바라봅니다. 별이 알뜰히 빛나는 하늘을 껴안습니다. 밤에 우는 새와 새벽에 우는 새를 헤아립니다. (4344.5.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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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69] TODAY ISSUE

 오늘은 오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제는 어제 이야기가 있어요. 하루하루 새롭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신문마다 ‘오늘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신문부터 ‘오늘 이야기’를 다룬다면 신문을 찾아 읽는 사람들은 ‘오늘 이야기’를 살피며 생각할 텐데, 거의 언제나 “TODAY ISSUE”만을 말하니까, 영어로 살피며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REPLAY’라 말하지 않고 ‘다시보기’라 적는군요. 고맙다고 해야 할는지 반갑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4344.5.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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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5.7. 

마을 볕 잘 드는 논은 벌써 논삶이를 한다. 왜가리가 옆에서 개구리를 집어먹으려고 내빼지 않고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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