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이야기’



  요즈음 곳곳에서 ‘소통’이라는 한자말을 곧잘 쓴다. 그러나, 이 한자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疏通’은 “(1)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2)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가리킨다. 먼저, 첫째 뜻으로 ‘소통’을 살핀다. 막히지 않고 잘 뚫리는 일이란 무엇일까? 좋을까? 안 좋을까? 막히지 않은 모습으로만도 나쁘지 않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막히지는 않으나 그저 뚫리기만 한다면? 둘째 뜻은 무엇을 말할까? 서로 이어져서 ‘잘못 아는 일이 없다’고 하는 소통은 무엇일까?


  잘못 알지 않으려면 서로서로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내 눈길과 눈높이로 맞은편(남)을 재거나 따지는 일은 ‘소통’이 아니다. 이때에는 ‘일방통행’이다.


  잘 알아야 한다. 맞은편(남)이 나한테 어떤 말을 줄기차게 들려준다고 한다고 해서 일방통행이 아니다. 맞은편(남)이 나한테 하는 말이 어떤 뜻인가를 내가 귀여겨들으면서 알아차리려 한다면 ‘소통’이 된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맞은편(남)이 들려주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언제나 ‘소통’이다. 왜 그렇겠는가? 서로 ‘잘못 아는 일이 없다’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인터넷 공간이라는 데에서 글이 하나 있고 덧글이나 댓글이 있다. 자, 보자. 덧글이나 댓글을 달아야 ‘소통’일까? 아니다. 덧글이나 댓글은 소통이 아니다. 아니, 한자말 뜻풀이 (1)로 보는 소통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통’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1)가 아닌 (2)을 말하겠지. 아닌가? 그저 (1)로만 소통을 말하려나?


  그런데 (1)와 같은 소통이 되려 하더라도, 맞은편(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소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댓글을 붙이는 일은 ‘댓글놀이’이다. 댓글놀이를 두고 소통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댓글놀이는 그저 댓글로 노는 삶이다. 다만, 알아야 하는데, 댓글놀이라 해서 더 좋거나 더 나쁘지 않다. 그저 댓글놀이일 뿐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다.


  댓글이 있거나 없거나, 또는 댓글을 달거나 말거나, 무엇이 대수로울까. 마음으로 서로 사귀는 사람은 말이 없어도 서로 따사롭게 바라보면서 껴안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왜 말 한 마디 없이 서로 따뜻하게 품에 안겠는가? 이것이 바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지켜보지 않으면서 ‘소통’을 말하려 한다면, 아무런 소통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찬찬히 귀여겨듣지 않고서는 소통을 이룰 수 없다.


  그러면, 이야기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한국말사전에서는 한국말 ‘이야기’를 제대로 풀이하지 못한다. 한국말 ‘이야기’ 참뜻은 “생각이나 마음을 말하고 듣는 일”이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생각이나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속삭인다. 우리는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꿈을 키운다.


  토론이나 논의나 논쟁이 아니다. ‘이야기’이다. 찬반토론이나 찬반논쟁이 아니다. ‘이야기’이다. 이쪽에 있는 사람은 이쪽에서 살아온 긴 나날에 걸쳐 얻은 슬기와 생각을 들려준다. 저쪽에 있는 사람은 저쪽에서 살아온 긴 나날에 걸쳐 느낀 슬기와 생각을 알려준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따지는 일이 되면 논쟁이나 토론이다. 이야기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 이야기는 실마리를 찾는 일이다. 실마리를 찾고 느끼고 나누고 밝히고 가꾸면서 삶을 짓는 일이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부터 ‘이야기꽃·이야기잔치·이야기마당’ 과 같이 말했다. 이야기는 노래가 된다. 이야기는 사랑이 된다. 이야기는 삶이 된다.


  여기에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면 서로 눈길과 눈높이가 맞아야 한다. 어느 한쪽에서 어떤 말을 한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기까지 무엇을 보고 배우고 익히고 맞아들여서 삭혔는가 하고 돌아보면서, 스스로 새롭게 보고 배우고 익히고 맞아들여서 삭히는 몸가짐으로 새로운 말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서로 새롭게 배우면서 나누는 말이 ‘이야기’이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으로 내뱉는 말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언제나 새로 배우고 다시 배우는 말이 이야기이다. 고정된 지식으로 내 주의주장을 외친다면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고 하는, 토론이나 논쟁이나 찬반싸움에서 늘 맴돌기만 한다.


  잘 생각해 보라. 소통은 삶이 되지 않는다. 소통은 그저 소통이다. 우리가 할 일은, 막히지 않게 하거나 서로 잘못 알도록 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이야기를 주고받아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생각을 살찌우고 가꾸어야 한다고 느낀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사진순이 5. 새 뜨개옷 찍기 (2014.8.19.)



  곁님이 오랜만에 뜨개옷을 새로 지었다. 누리모임에서 ‘함께 뜨기’를 하는 옷이기에 다 마친 뒤에 사진을 찍어 올려야 한단다. 작은아이더러 손전화 기계로 찍어 달라 하니, 큰아이가 어머니한테 달라붙는다. 산들보라는 이제 다른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줄 만큼 씩씩하게 잘 컸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야생초 편지 - 출간10주년 개정판 야생초 편지 1
황대권 글.그림 / 도솔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86



풀 한 포기와 나누는 사랑

― 야생초 편지

 황대권 글

 도솔 펴냄, 2002.10.1.



  어제 낮에 집부터 면소재지까지 걸어갑니다. 2킬로미터 길이니 가깝습니다. 잰걸음이라면 삼십 분이면 갈 만합니다. 그러나 굳이 서두르지 않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가을내음을 맡습니다. 아무도 들에 없기도 하지만, 들길을 걸어가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에 맞춰 살랑살랑 춤을 춥니다.


  깊은 가을로 접어들기에 살그마니 꽃을 피우는 환삼덩굴을 봅니다. 환삼덩굴꽃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새삼스레 들여다봅니다. 이제껏 나물로 신나게 뜯어먹기만 했을 뿐, 정작 환삼덩굴꽃은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쑥꽃을 본 지 몇 해 안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우리 보금자리 한켠에 쑥대를 그대로 두었기에 비로소 쑥꽃을 볼 수 있었어요.


  햇볕은 알맞게 따스합니다. 바람은 알맞게 시원합니다. 시골 논둑길이 예전처럼 흙길이라면 훨씬 싱그럽겠지만, 시멘트 논둑길도 그리 나쁘지는 않습니다. 시골마을이 예전처럼 농약 없는 들길이라면 한결 아름답겠지만, 비가 한 차례 지나간 들길인 터라 농약내음은 얼마 안 납니다.



.. 오늘 비디오를 보면서 영화로도 사람을 얼마든지 고문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주윤발이나 유덕화, 왕조현 등과 같은 톱스타들이 그토록 저질영화에 무분별하게 출연한다는 사실이다 … 교도소가 왜 이리 삭막해지는지 모르겠어.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해야만 잘 돌아간다고 여기는 건가? 심지어 구 척 담장 밑에 한 줄로 쪼로니 피어난 제비꽃마저 깨끗이 뽑아 버리니 말이야 ..  (27, 57쪽)



  환삼덩굴꽃을 한참 바라보는데 풀뱀 한 마리가 옆으로 슬슬 지나갑니다. 풀꽃을 보다가 풀뱀을 봅니다. 풀뱀은 나를 보았을가요. 풀뱀은 내 발자국이나 몸짓을 느꼈을까요.


  뱀은 사람을 무서워 합니다. 뱀은 사람이 무섭습니다. 사람은 옛날부터 뱀을 잡아서 먹었고, 뱀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뱀을 끔찍하게 잡거나 죽입니다. 참말 뱀은 깃들 곳이 없습니다. 논밭에 하도 농약을 쳐대니 개구리나 도룡뇽뿐 아니라 작은 풀짐승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뱀은 먹이가 자꾸 사라져서 괴롭습니다. 뱀은 지구별에서 사라져야 할까요? 뱀이 지구별에서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 논둑길은 조용합니다. 그러나 저 먼 큰길을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는 퍽 멀리까지 울립니다. 몇 킬로미터쯤 떨어져야 자동차 소리를 안 들을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지 돌아봅니다. 자동차 바퀴소리가 우리 삶을 살찌울는지, 풀벌레와 멧새 노랫소리가 우리 삶을 북돋울는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어떤 소리를 들어야 할까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할까요. 방송과 인터넷에서 흐르는 대중노래가 우리 마음을 살찌울 만한가요. 사람들은 저마다 이녁 삶에 맞추어 스스로 노래를 지어서 부를 수 없는가요. 먼먼 옛날 누구나 일을 하며 노래를 불렀듯이, 놀이를 하며 노래를 즐겼듯이, 일노래와 놀이노래는 이제 어디로 갔을까요. 삶을 가꾸는 삶노래는 어디에 있을까요.



.. 우리는 이미 박통 시절에 이런 생태적 재앙을 겪었다. 바로 통일벼에 의한 싹쓸이 경작이 그것이지. 이 통일벼 심기는 새마을 운동과 결합되어 생태적 재앙뿐 아니라 우리 농촌에 문화적 재앙까지 몰고 왔다 … 우리 산야에 자라나는 풀꽃들의 이름은 참으로 예쁘고 친근한 것들이 많다. 그 많은 풀들에 일일이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 준 우리 민중들의 슬기에 감사드리고 싶다 ..  (106, 114쪽)



  황대권 님이 교도소에 갇혀서 지내야 하던 때에 쓴 짤막한 글을 모아서 엮은 《야생초 편지》(도솔,2002)를 읽습니다. 2002년에 처음 나온 이 책은 2012년에 새롭게 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은 책에 붙은 띠종이를 보면, “야생초는 단순한 풀이 아니라 새로운 문명을 여는 상징입니다”와 같은 글월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기울입니다. “단순한 풀”은 무엇이고 “새로운 문명을 여는 야생초”는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을 펼칩니다. ‘야생초(野生草)’는 “산이나 들에서 저절로 나서 자라는 풀”이라 합니다. ‘야초(野草)’는 “들에 저절로 나는 풀”이라 합니다. ‘산초(山草)’는 “산에 나는 풀”이라 합니다. ‘잡초(雜草)’는 “= 잡풀”이라 합니다. 그러면 ‘풀’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은 ‘풀’을 “초본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풀이합니다.


  요즈음 사회에서는 이런저런 한자말을 쓰는데, 이런저런 한자말이 이 나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모든 사람이 알 수 있습니다. 1950년대 시골에서 ‘야생초·야초·산초·잡초’ 같은 말을 썼을까요? 1900년대 시골이나 1800년대 시골이나 1500년대 시골이나 1000년대 시골이나 500년대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기원전 시골이나 단군 무렵 시골에서 이런 한자말을 썼을까요?


  턱없는 소리입니다. 고작 쉰 해 즈음 앞서만 해도 이런 한자말을 쓸 사람이나 쓰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지난날 시골사람은 누구나 ‘풀·들풀·멧풀·김(지심)’이라는 한국말을 썼어요. 여기에 ‘풀·나물·남새·푸성귀’라는 한국말을 썼습니다.


  2012년에 새로운 옷을 입고 나오는 《야생초 편지》라 한다면, “풀 편지”나 “들풀 편지”처럼 제대로 된 이름으로 고쳐서 제대로 내놓을 수 있기를 바랐는데, 글쓴이와 출판사 모두 풀이름 하나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 이담에 내가 살 집의 마당은 아마도 야생초 전시관이 될 거다. 어디 갔다 올 때마다 하나씩은 파올 테니까. 그러자면 마당을 아주 넓게 잡아야 하겠지, 그렇게 십여 년 가꾸다 보면 아마 자식놈은 꽃만 보고도 책 한 권 분량의 야생초 이름 정도는 줄줄 외워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집안엔 늘 야생초차 향기가 가득할 것이구 … 안동교도소 청소부는 야생초에게뿐만 아니라 내게도 천적과 같은 존재이다. 도대체가 풀이 좀 자라서 뜯어먹을 만하면 어느샌가 와서 엎어 버리니 ..  (155, 166쪽)



  풀이 없으면 사람은 죽습니다. 풀이 없으니 사람이 미칩니다. 풀이 없기에 사람이 싸우거나 다툽니다.


  우리가 먹는 밥이란, 쌀알이고, 쌀알이란, 벼이며, 벼란, 풀이요, 쌀알이란, 풀알, 곧 풀 열매입니다. 풀 열매인 풀알이 없으면 사람은 모두 굶을 뿐 아니라 죽습니다. 밥으로도 풀알을 먹지만, 사람이 먹는 돼지이든 소이든 닭이든 풀을 밥이나 모이로 삼아서 먹고 자라요. 예부터 한겨레가 먹은 고기란, 그냥 살점이나 살덩이가 아니라 ‘풀을 먹고 자란 고기’입니다. 고깃덩이를 먹어도 고기가 아닌 ‘풀로 이룬 살점’을 먹은 셈입니다.


  풀이 있기에 나무가 살 수 있습니다. 나무가 있기에 둘레에서 풀이 씩씩하게 자랍니다. 숲은 풀과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우거진 곳입니다. 풀과 나무가 어우러져 숲이 될 때에, 사람들은 숲에서 나무를 얻어 집을 짓고 장작을 패며 다리를 놓습니다. 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짓습니다. 풀이 없으면 밥도 못 먹지만 옷도 못 입습니다. 풀이 있기에 싱그럽게 바람이 붑니다. 나무뿐 아니라 풀이 지구별 온누리에 싱그러운 바람을 일으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온누리에 돋는 풀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썼어요. 첫째, 먹는 풀입니다. 둘째, 옷을 짓는 풀입니다. 셋째, 지붕이나 울타리로 삼는 풀입니다. 넷째, 약으로 쓰는 풀입니다. 다섯째, 그대로 지켜보면서 푸른 바람을 얻도록 해 주는 풀입니다.



.. 문명이란 그 풀 냄새를 점차로 지워 없앤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야채가 그것이지. 야생의 풀 냄새를 제거하고 인간의 미각에 맞추어 특정한 맛만을 선택하여 육종, 발전시킨 것이 오늘의 야채이다 … 어제 이감을 오는데 대구 시내에 들어서서 다시 화원읍으로 빠지는 길이 마침 퇴근 시간과 겹쳐서 어찌나 밀리던지. 호송차의 창 틈 사이로 간신히 보는 풍경이었지만, 저 엄청난 차와 매연과 시멘트덩이 속에서 어찌들 살아가고 있는지. 참으로 나로서는 엄두가 나질 않는다. 괴물이 아니고서야 저런 환경 속에서 어찌 사나 싶었다 ..  (176, 194쪽)



  《야생초 편지》라는 책에 나오듯이 “풀내음을 자꾸 지워서 없애는 오늘날 사회요 정치이고 문화이며 교육이자 과학”입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풀을 끔찍하게 미워할 뿐 아니라, 없애느라 바쁩니다. 왜 풀밭에 농약을 칠까요? 곡식이나 남새를 망가뜨리는 풀일까요? 아니에요. 나물을 뜯을 줄 모르고 약풀을 건사할 줄 모르니 함부로 농약을 칩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모시풀을 함부로 베어 없애거나 태워 없애는 까닭은, 지난날처럼 모시에서 실을 얻어 모시옷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골에 모시풀이 많이 돋는 까닭은 지난날 어느 시골에서나 모시풀에서 실을 얻어 옷을 지었기 때문이에요.


  풀을 모른다면 시골에서 살 수 없습니다. 풀을 아끼지 않는다면 농사를 짓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풀을 알려 하지 않는다면 인문학 지식이 아무리 넘쳐도 바보스러운 삶으로 나아가고 맙니다. 풀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채식도 육식도 무엇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풀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구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풀 한 포기에서 평화가 자랍니다. 모든 꽃은 풀줄기에 달립니다. 풀씨에서 풀뿌리가 내리고, 풀씨에서 풀줄기가 오르며, 풀씨에서 풀잎이 돋아야, 비로소 꽃망울이 맺히고 꽃봉오리가 터져서 꽃잎이 벌어집니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을 쓰는 밑마음



  면소재지 고등학교 푸름이와 만난 자리에서 ‘글쓰기’를 이야기한다. 글쓰기를 할 적에, 그러니까 글을 쓸 적에, 내가 마음에 새기는 다짐이라고 하면 무엇이 있는지 들려준다. 어떤 글을 쓰든 내가 세우는 잣대는 꼭 하나인데, 내 글쓰기 잣대는 “열 살 어린이가 읽어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다”이다. 어떤 글을 쓰든 이 잣대는 늘 같다. 열 살 어린이한테 내 글을 맞춘다. 이러면서 네 가지를 생각한다.



ㄱ. 즐겁게 쓴다

ㄴ. 아름답게 쓴다

ㄷ. 사랑스럽게 쓴다

ㄹ. 착하게 쓴다



  스스로 우러나올 때에 쓰기 때문에 스스로 즐거운 마음이 되어야 글을 쓴다. 겉으로 보기에 이쁘장하게 쓰는 글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과 넋이 모두 아름다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내가 읽고 이웃이 있는 글인 만큼,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꿈을 북돋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글을 쓴다. 스스로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길을 걷는다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경기문화재단>에서 펴내는 격월간잡지 2014년 9-10월호에 싣는 글입니다.


..


말넋 35. ‘우수’상은 ‘덤’으로 준다

― 살아가는 대로 쓰는 말



  ‘우수’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 한 마디만 들려주면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요? 곰곰이 생각에 젖어 봅니다. 나는 이 낱말과 얽혀 어떤 이야기가 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꽤 어릴 적 일을 떠올립니다. 열 살 언저리나 더 어릴 적에 어머니 손을 잡고 저잣거리에 나들이를 가던 일을 그립니다. 그때 어머니는 저잣거리에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장만하면서 “‘우수’ 없어요?” 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할머니는 “우수? 우수 줘야지.” 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는 “‘우수’요? 우수가 뭐예요?“ 하고 되묻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그러니까, ‘덤’. 덤 없어요?” 하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였는지 이웃 할아버지였는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어떤 할아버지한테 내 상장을 자랑하듯이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우수’ 상장을 받았어요!” 할아버지가 상장을 받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더니, “우수상이라고? 더 얹어서 주는 상이 뭐가 좋다고 그러냐?” 하고 한마디 퉁을 놓았습니다. 이때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아리송했습니다. 못 알아들었습니다. 저잣거리에서 어머니한테서 들은 ‘우수’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말하고 이어서 생각하지 못했어요.


  한국말 ‘우수’나 ‘우수리’는 요즈음 아주 잊히거나 사라지거나 죽은 말이 됩니다. 이 자리에 한자말 ‘성과(成果)’과 ‘성과급(成果給)’이 또아리를 틉니다. 그리고, 이 한자말조차 밀어내고 영어 ‘인센티브(incentive)’가 밀려듭니다.


  지난 1991년에 《草家》(열화당 펴냄)라는 사진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책이름을 한자로만 적으니 아쉬운 노릇이지만, 그래도 이 사진책은 낱말을 잘못 적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흔히 ‘초가집’처럼 잘못 말하거든요.


  ‘초가’는 ‘풀(草) + 집(家)’입니다. ‘풀집’을 일컬어 ‘초가’라는 한자말을 예전 지식인이 지은 셈입니다. 그러니, ‘초가집’이라 말하면 ‘풀집집’ 꼴이 됩니다. 아주 우스운 말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겨레는 예부터 ‘풀집’을 지었을까요? 풀(이엉)로 지붕을 얹었거든요. 풀로 담을 이었어요. 기둥은 나무로 세우지만, 기둥 사이를 막을 적에는 풀(짚)을 이겨 넣은 흙을 댔습니다. 집이 온통 풀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풀과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집이 ‘한겨레 살림집’입니다. 풀을 여러모로 아주 많이 쓰기에 ‘나무집’이나 ‘돌집’이라고는 안 하고 ‘풀집’이라 했어요.


  지난날 우리 겨레는 옷을 지을 적에 풀에서 실을 얻었습니다. 모시풀이나 삼풀에서 실을 얻었어요. 모시옷은 모시풀에서 얻은 모시실로 지은 옷이요, 삼베옷은 삼풀에서 얻은 삼실로 지은 옷입니다.


  밥은 어떻게 먹었을까요? 밥도 풀밭에서 얻었지요. 온갖 나물이란 바로 풀입니다. 사람이 손수 심어 ‘남새’이고, 들과 숲에서 스스로 자란 풀을 뜯어서 먹으면 ‘나물’입니다. 이런 삶이었으니, 한겨레 살림집은 ‘풀집’일밖에 없습니다. 풀옷이고 풀밥이니까, 이 흐름에 맞게 ‘풀집’이에요.


  노르웨이에서 날아온 어린이책 《비발디》(어린이작가정신,2014)를 읽다가 38쪽에서 “아침 식사를 하려고 식탁 앞에 앉았어요. 향긋한 차.”라는 대목을 봅니다. “아침밥”이라 안 하고 “아침 食事”로 적을 뿐 아니라, ‘밥상’이 아닌 ‘食卓’이라 적으니 아쉬우나, ‘향긋한’이라 적으니 반갑습니다.


  김혜영 님이 시골살이를 하면서 쓴 《암탉, 엄마가 되다》(낮은산,2012)라는 책을 읽다가 116쪽에서 “병아리가 어미닭과 첫 눈맞춤을 해요.”라는 대목을 보고, 196쪽에서 “낙엽이 지고, 첫눈이 내렸습니다”라는 대목을 봅니다.


  한국말사전에 ‘눈맞춤’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사람들이 곧잘 씁니다. 왜냐하면, 참말 서로 눈을 맞추면서 즐겁기 때문입니다. 눈을 찡긋 하면서 웃어요. 즐거운 눈맞춤입니다. 입을 맞추어 입맞춤이고, 마음을 맞추어 마음맞춤이며, 꿈을 맞추어 꿈맞춤입니다. 다만, “낙엽(落葉)이 지고”처럼 적으니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한자말 ‘낙엽’은 “진 잎”입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잎을 한자말로 ‘낙엽’이라고 해요. 다시 말하자면, “낙엽이 지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바닥에 구르는 잎이 ‘낙엽’인걸요.


  “잎이 진다”고 할 적에, 곧 가을에 잎이 진다고 할 적에는 “가랑잎이 집”니다. 한국말 ‘가랑잎’은 나뭇가지에서 마른 잎이에요. 나뭇가지에서 잎이 마른 뒤 지니까 “가랑잎이 진다”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또는 “잎이 진다”라 하거나 “가을잎이 진다”고 해야지요.


  한국사람은 “낙엽이 지다”와 같은 말을 언제부터 썼는 지 궁금합니다. 아마, ‘낙엽(落葉)’이라는 한자말이 들어온 뒤부터 썼겠지요. 그러나, ‘낙엽’이라는 한자말은 한자를 쓰던 옛날 지식인이 아니고는 안 썼어요. 여느 한국사람은 아무도 모르던 낱말이요, 쓸 일이 없던 낱말입니다. 먼먼 옛날부터 여느 한국사람, 그러니까 여느 시골사람은 ‘나뭇잎’이나 ‘잎’이나 ‘가랑잎’이라고만 했어요.


  일본사람 니시마키 가야코 님이 빚은 어린이책 《킁킁, 맛있는 냄새가 나》(시공주니어,2007)를 읽으면서 24쪽에서 “계란 프라이를 손으로 집어 먹고 있고”라는 대목을 보았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무릎을 쳤습니다.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계란(鷄卵) 프라이(fry)’ 같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아주 널리 쓰는 말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 어릴 적에 ‘우수’ 같은 말을 쓰실 줄 알면서도, 달걀을 부치거나 지질 적에 언제나 ‘계란 프라이’라 하셨고, 요즈음에도 똑같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계란 프라이’라 하지는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일본사람이 쓴 말이 한국에 잘못 들어와서 굳었다고 느낍니다. 한국사람은 ‘달걀부침’이나 ‘달걀지짐’입니다. 우리 삶을 스스로 아름답게 가꾸면서 우리가 쓰는 말과 글 또한 아름답게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4347.8.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우리 말 살려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