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쓰기와 시골 들일



  시골마을 푸름이와 글쓰기를 이야기하다가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재미있었다. 일기를 날마다 못 쓰겠다고 하는 푸름이한테, 또 여느 글을 쓰기도 어렵다고 하는 푸름이한테, 너희는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는 시골아이인 만큼, 시골사람이 들일 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날마다 논밭에 가서 풀을 베거나 김매기를 하더라도 힘들지 않다. 늘 하는 일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다가 시골로 온 사람더러 날마다 풀베기를 하라고 시키면 못 한다. 곧 등허리가 끊어질듯 아플 테며, 이러다가는 골병이 든다.


  어릴 적부터 십 리이든 이십 리이든 걸어서 다닌 사람은 다섯 리쯤 걷는 일이란 수월하다. 어릴 적부터 십 리이든 이십 리이든 거의 안 걷고 지낸 사람은 다섯 리뿐 아니러 석 리를 걸어도 벅차다.


  시골일이 아직 낯선 사람은 날마다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차근차근 천천히 알맞게 하면서 몸을 맞추어야 한다. 걷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너무 많이 걷거나 오래 걸으면 안 된다. 조금씩 걸음을 늘려야 한다.


  일기를 쓰든 다른 글을 쓰든, 부디 날마다 쓸 생각은 하지 말고, 잘 쓸 생각도 하지 말며, 길게 쓸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준다. 마음속에서 샘솟는 이야기가 있다든지, 마음에 갇힌 응어리 같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 이야기를 남김없이 적으면 되지만, 이야기가 샘솟지 않거나 응어리가 없다면 굳이 글을 안 써도 된다고 알려준다.


  나는 글을 어떻게 쓰는가 하고 돌아본다. 내 글쓰기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서 아이들과 나누는 살림하고 같다. 내 글쓰기는 시골사람이 풀을 베거나 뜯어서 거름으로 삼거나 나물로 먹는 삶하고 같다. 내 글쓰기는 아침에 일어나서 해바라기를 하는 삶하고 같다. 내 글쓰기는 밤마다 별바라기를 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삶하고 같다. 내 글쓰기는 물을 마시고 바람을 마시는 삶하고 같다.


  학교에서 숙제로 시킨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글쓰기가 아니다. 보고서를 내야 하거나 독후감을 써야 한다 하더라도 갑자기 글을 쓸 수 있지 않다. 첫째, 글은 삶과 같이 쓴다. 둘째, 글은 이야기가 흐를 때에 쓴다. 셋째, 글은 마음을 풀거나 맺을 때에 쓴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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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글 긴글



  어제 면소재지 고등학교에 가서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두 시간 이야기를 하려고 보름쯤 미리 이야깃거리를 생각하고 마련했다. 두 시간에 걸쳐 여러 이야기를 간추려서 들려주는데, 이야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기운이 없다. 이튿날이 되어도 낮까지 기운을 되찾지 못한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는 교사가 되어 일하는 이들은 하루 내내 말을 하고 들을 텐데, 날마다 어떤 기운을 끌어내야 할까 헤아려 본다. 날마다 온힘을 다해 말을 하고 듣는다면, 하루 일을 마친 뒤에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겠구나 싶다. 알맞게 힘을 가누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교사와 같은 일을 할 수 없겠구나 싶다. ‘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많이 기운을 쏟아야 할까.


  ‘글쓰는 일’도 말하는 일과 같으니, 참으로 온힘을 기울여서 글을 하나 내놓는다. 그냥 쓰는 글이란 없고, 쉽게 보여주는 글이란 없다. 이웃과 나눌 글을 한 꼭지 쓸 적을 헤아려 본다. 짧든 길든 똑같이 기운을 쏟는다. 짧게 쓰는 글이라서 쉽게 쓰지 않는다. 아주 마땅한 노릇 아닌가.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모두 똑같은 글이다. 짧게 썼든 길게 썼든 모두 내 넋을 기울여 힘을 쏟는다.


  짧게 쓰는 글은 모든 이야기를 짧게 갈무리해서 들려준다. 길게 쓰는 글은 모든 이야기를 낱낱이 풀어서 들려준다. 갈무리해서 들려주든 풀어서 들려주든 기운이 들기는 똑같다. 짧게 쓸 때와 길게 쓸 때가 다르다면, 손목에 드는 힘이 좀 다를 뿐이다. 길게 쓰는 글은 손목이 살짝 아픈 대목이 다르다. 원고지 서른 장 길이를 십 분 만에 쓸 때가 있는데, 원고지 한 장 길이를 삼십 분에 걸쳐서 쓰거나 사흘이나 석 달 만에 쓸 때가 있다.


  글을 읽는 사람은 ‘길이’를 읽으면 안 된다. 글에 깃든 숨결을 읽어야 한다. 글을 읽는 사람은 ‘갯수’를 읽으면 안 된다. 글에 흐르는 노래를 읽어야 한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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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새 노랫소리가 흐르는 영화



  큰아이가 일곱 살이 한창 무르익어 여덟 살을 곧 앞둔다. 이제 큰아이는 생각이 많이 깊다. 그래서 큰아이가 아주 어릴 적에 보던 영화를 요즈음 다시 보면 큰아이는 느낌이 아주 새롭다고 받아들이는 듯싶다. 큰아이는 어릴 적 보던 그림책이나 만화책도 요즈음 다시 읽으면서 아주 새롭게 맞아들이기도 한다.


  만화책 《미요리의 숲》을 큰아이가 엊그제부터 새로 읽기에 오늘 만화영화 〈미요리의 숲〉을 다시 본다. 몇 달 앞서만 하더라도 큰아이는 만화영화 〈미요리의 숲〉을 보다가 재미가 없다면서 안 봤는데 오늘은 꽤 오랫동안,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들여다본다.


  나도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만화영화 〈미요리의 숲〉을 본다. 오늘 이 만화영화를 함께 다시 보면서 한 가지를 새롭게 느낀다. 이 영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풀벌레 노랫소리나 멧새 노랫소리가 흐른다. 아무래도 ‘시골’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니, 시골살이답게 시골노래가 흐르겠지.


  그러니까, 시골노래는 풀노래요 숲노래이다. 풀에서 풀벌레가 노래하고, 숲에서 멧새가 노래한다. 시골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이라면 언제나 두 가지 노래가 흘러야 한다. 두 가지 노래가 어우러지면서 삶이 되고 사랑이 된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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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이야기’



  요즈음 곳곳에서 ‘소통’이라는 한자말을 곧잘 쓴다. 그러나, 이 한자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문 듯하다. ‘疏通’은 “(1)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2)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을 가리킨다. 먼저, 첫째 뜻으로 ‘소통’을 살핀다. 막히지 않고 잘 뚫리는 일이란 무엇일까? 좋을까? 안 좋을까? 막히지 않은 모습으로만도 나쁘지 않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 막히지는 않으나 그저 뚫리기만 한다면? 둘째 뜻은 무엇을 말할까? 서로 이어져서 ‘잘못 아는 일이 없다’고 하는 소통은 무엇일까?


  잘못 알지 않으려면 서로서로 제대로 알아야 한다.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내 눈길과 눈높이로 맞은편(남)을 재거나 따지는 일은 ‘소통’이 아니다. 이때에는 ‘일방통행’이다.


  잘 알아야 한다. 맞은편(남)이 나한테 어떤 말을 줄기차게 들려준다고 한다고 해서 일방통행이 아니다. 맞은편(남)이 나한테 하는 말이 어떤 뜻인가를 내가 귀여겨들으면서 알아차리려 한다면 ‘소통’이 된다.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맞은편(남)이 들려주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언제나 ‘소통’이다. 왜 그렇겠는가? 서로 ‘잘못 아는 일이 없다’고 할 만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인터넷 공간이라는 데에서 글이 하나 있고 덧글이나 댓글이 있다. 자, 보자. 덧글이나 댓글을 달아야 ‘소통’일까? 아니다. 덧글이나 댓글은 소통이 아니다. 아니, 한자말 뜻풀이 (1)로 보는 소통은 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소통’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1)가 아닌 (2)을 말하겠지. 아닌가? 그저 (1)로만 소통을 말하려나?


  그런데 (1)와 같은 소통이 되려 하더라도, 맞은편(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제대로 바라보고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소통’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댓글을 붙이는 일은 ‘댓글놀이’이다. 댓글놀이를 두고 소통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댓글놀이는 그저 댓글로 노는 삶이다. 다만, 알아야 하는데, 댓글놀이라 해서 더 좋거나 더 나쁘지 않다. 그저 댓글놀이일 뿐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다.


  댓글이 있거나 없거나, 또는 댓글을 달거나 말거나, 무엇이 대수로울까. 마음으로 서로 사귀는 사람은 말이 없어도 서로 따사롭게 바라보면서 껴안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왜 말 한 마디 없이 서로 따뜻하게 품에 안겠는가? 이것이 바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다.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지켜보지 않으면서 ‘소통’을 말하려 한다면, 아무런 소통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찬찬히 귀여겨듣지 않고서는 소통을 이룰 수 없다.


  그러면, 이야기란 무엇일까. 아쉽게도 한국말사전에서는 한국말 ‘이야기’를 제대로 풀이하지 못한다. 한국말 ‘이야기’ 참뜻은 “생각이나 마음을 말하고 듣는 일”이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 생각이나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사랑을 속삭인다. 우리는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꿈을 키운다.


  토론이나 논의나 논쟁이 아니다. ‘이야기’이다. 찬반토론이나 찬반논쟁이 아니다. ‘이야기’이다. 이쪽에 있는 사람은 이쪽에서 살아온 긴 나날에 걸쳐 얻은 슬기와 생각을 들려준다. 저쪽에 있는 사람은 저쪽에서 살아온 긴 나날에 걸쳐 느낀 슬기와 생각을 알려준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르다고 따지는 일이 되면 논쟁이나 토론이다. 이야기는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 이야기는 실마리를 찾는 일이다. 실마리를 찾고 느끼고 나누고 밝히고 가꾸면서 삶을 짓는 일이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부터 ‘이야기꽃·이야기잔치·이야기마당’ 과 같이 말했다. 이야기는 노래가 된다. 이야기는 사랑이 된다. 이야기는 삶이 된다.


  여기에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한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려면 서로 눈길과 눈높이가 맞아야 한다. 어느 한쪽에서 어떤 말을 한다면,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하기까지 무엇을 보고 배우고 익히고 맞아들여서 삭혔는가 하고 돌아보면서, 스스로 새롭게 보고 배우고 익히고 맞아들여서 삭히는 몸가짐으로 새로운 말을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서로 새롭게 배우면서 나누는 말이 ‘이야기’이다. 고정관념이나 선입관으로 내뱉는 말은 이야기가 될 수 없다. 언제나 새로 배우고 다시 배우는 말이 이야기이다. 고정된 지식으로 내 주의주장을 외친다면 내가 맞고 너는 틀리다고 하는, 토론이나 논쟁이나 찬반싸움에서 늘 맴돌기만 한다.


  잘 생각해 보라. 소통은 삶이 되지 않는다. 소통은 그저 소통이다. 우리가 할 일은, 막히지 않게 하거나 서로 잘못 알도록 하는 데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이야기를 주고받아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이, 생각을 살찌우고 가꾸어야 한다고 느낀다. 4347.10.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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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순이 5. 새 뜨개옷 찍기 (2014.8.19.)



  곁님이 오랜만에 뜨개옷을 새로 지었다. 누리모임에서 ‘함께 뜨기’를 하는 옷이기에 다 마친 뒤에 사진을 찍어 올려야 한단다. 작은아이더러 손전화 기계로 찍어 달라 하니, 큰아이가 어머니한테 달라붙는다. 산들보라는 이제 다른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줄 만큼 씩씩하게 잘 컸다. ㅎㄲㅅㄱ


(최종규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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