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말 - 시인의 일상어사전
권혁웅 지음, 김수옥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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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5



나이도 모르면서 “너 몇 학번이야?”라는 반말

― 외롭지 않은 말

 권혁웅 글

 마음산책 펴냄, 2016.3.25. 13000원



  오늘 나는 시골에서 살지만, 아직 도시에서 살던 무렵을 문득 떠올려 봅니다. 도시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으레 나한테 이렇게 묻습니다. “몇 학번이시지요?” 그러면 나는 언제나처럼 “저는 대학교를 안 나왔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학번을 묻는 분은 다시 “아내 분은 몇 학번이시지요?” 하고도 묻기 마련입니다. 이때에 나는 다시금 “곁님은 고등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학번 숫자하고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 궁금해 하던 사람은 멋쩍은지 한동안 말이 없습니다. 이른바 ‘접점’이라고 하는 서로 이어질 만한 끈이 없는 이 사람들은 뭔가 하고 여기는 투입니다. ‘한놈은 대학교를 안 나왔고 한놈은 고졸도 아닌 고퇴라고?’ 하고 여길는지도 모릅니다.



귀요미도 이런 용어다. ‘그녀가 귀엽다’는 것은 그녀가 ‘예쁘고 곱고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뜻이지만, 그것은 사실 그녀에게 속한 속성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부여한 속성이다. (29쪽)


변한 건 당신이다. 기억은 마모 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형상을 깎아낸다. (47쪽)



  시를 쓰는 권혁웅 님이 쓴 《외롭지 않은 말》(마음산책,2016)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에는 ‘시인의 일상어사전’이라는 이름이 더 붙습니다. 권혁웅 시인 나름대로 ‘한국 사회 유행말’을 풀이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꾸러미예요. 이를테면 ‘교회 오빠’나 ‘친구 누나’나 ‘귀요미’나 ‘꿀벅지’나 ‘넘사벽’이나 ‘먹방’이나 ‘모태솔로’ 같은 말을 두고서 사회에서 주고받는 생각을 슬쩍 짚다가는 시인 나름대로 생각한 이야기를 곁들입니다. ‘네가 처음이야’나 ‘나 요즘 살쪘지’나 ‘너 몇 학번이야’나 ‘늙으면 죽어야지’나 ‘방법이 없네’나 ‘언제 밥 한번 먹자’ 같은 말이 겉뜻하고 속뜻이 얼마나 벌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짓궂거나 재미나거나 의뭉스럽게 건드립니다.



여자가 나 잡아봐라, 하고 외친다고 해서 남자가 아무 여자나 추격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빛일 때에만, 그러니까 빛의 속도로 달아날 때에만 남자는 슬로모션으로 그녀를 따르기 시작한다. (50쪽)


안타깝게도 ‘높임’이란 ‘낮춤’과 한 짝이어서 우리말에는 존대만큼이나 하대가 발달했다. 신분제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 말싸움의 결론이 늘 “당신 몇 살이야?”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며, 이것이 학벌과 결합해서 나온 말이 “너 몇 학번이야?”다. “학번이 깡패다”라는 단정과 짝을 이룬 말이지만 실은 이상한 질문이다. 몇 학번인지도 모르면서 왜 처음부터 반말일까? (62, 63쪽)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너 몇 학번이야’ 같은 말을 다루는 대목에서 쓰겁게 웃습니다. 권혁웅 님 말마따나 한국 사회는 아직 신분이나 계급으로 갈린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높임말 못지않게 낮춤말이 발돋움했어요. 이를테면 한자말 ‘변’은 높임말로 여기고 ‘똥’은 낮춤말로 여기지요. 한자말 ‘식사’도 높임말로 여기면서 ‘밥’은 낮춤말이라도 되는 듯이 여겨요. 회사나 공공기관 같은 곳에서 과장이나 부장이나 사장쯤 되는 분들은 ‘밥’을 먹지 않아요. 언제나 ‘식사’만 하시지요.


  그나저나 나이가 몇 살인지도, 학번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왜 처음부터 반말”로 “너 몇 학번이야?” 하고 묻는 사람이 많을까요? 왜 나이도 아닌 학벌까지 앞세우면서 목소리를 높이려고 할까요? 그나마 학번이라도 있으면 한숨을 돌리고, 학번조차 없으면 ‘대학교도 못 나온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오, 각선미 죽이는데? 가슴이 좀 작군. 입술이 섹시해. 남자들은 늘 이렇게 여성들을 대상화해 왔다. 그런데 그 각선미 죽이는 아가씨가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던 거다. 난 루저라고. (96쪽)


‘요즘은 자꾸 빨간 게 좋아’서, 2016년 현재 여당마저도 빨간 옷을 입고 다닌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색맹들께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종북, 종북, 종북. 정신의 딸꾹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131∼132쪽)



  재미나면서도 의뭉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권혁웅 님은 2016년 오늘날 ‘빨갛게 물든 옷’을 입고서 허리를 깊게 숙여서 절을 하는 여당 정치꾼 이야기를 살며시 섞습니다. 왜 한입으로는 ‘빨갱이’나 ‘종북’을 외치면서, 왜 한손에는 ‘빨갱이 옷’을 걸치고 ‘빨갱이 깃발’을 펄럭일까요? 참말로 “정신의 딸꾹질”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런 딸꾹질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사회 모습일는지 몰라요. ‘차카게 살자(착하게 살자)’ 같은 말이라든지 ‘바르게 살기’ 같은 말은 착함이나 바름하고는 동떨어진 자리에서 흔히 쓰이거든요. 착하게 살기로 하지 않으면서 ‘착함’을 외치는 사회요, 바르게 살지 않으면서 ‘바름’을 사람들한테 윽박지른 정치이니까요.



〈우정의 무대〉는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모아서 만든 이상한 극장이다. 프로그램 제목이 내세우는 덕목은 ‘우정’이며, 사회자가 경례할 때 내세우는 구호는 ‘충성’인데, 무대 위의 공연이 보여주는 콘셉트는 ‘섹시’이고,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요구되는 감정은 ‘모성애’다. 거기에 홍보 영상 속 사병들이 내보이는 저 눈빛은 적의 어떤 도발에도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살기’다. (224∼225쪽)



  어제 낮에 큰아이하고 밭뙈기를 일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할 적에 으레 ‘1등이 반장’이라면 ‘2등이 부반장’을 맡습니다. 반장 선거는 다른 말로는 ‘부반장 선거’이기도 해요. 그리고, 이 선거에 나온 모든 아이들이 으레 ‘총무부장’이든 ‘청소부장’이든 뭔가 하나씩 맡기 마련이에요.


  이런 얼거리처럼 나라에서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를 뽑을 적에 ‘1등만 뽑지’ 말고, 2등도 3등도 4등도 모두 나라살림을 함께 맡도록 자리를 나눈다면 어떠할까 싶더군요. 이를테면 51:49로 한 사람이 붙고 한 사람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셔요. 51로 붙은 사람만 일을 하기보다는, 51인 사람은 ‘반장’ 노릇을, 49인 사람은 ‘부반장’ 노릇으로 서로 도우면서 일을 할 적에 나라살림이 아늑하면서 다툼도 가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만히 본다면 오늘날 선거는 민주 제도이기는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는 ‘1등 뽑기’이기도 합니다.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되고 말아요. 우리 사회가 보이는 모습은 바로 ‘1등주의’에 ‘성적주의’에 ‘경제개발주의’이거든요.


  먼저 심은 씨앗도 나중 심은 씨앗도 함께 돋고, 오늘 심은 씨앗도 어제 심은 씨앗도 모두 돋아요. 어버이도 씨앗을 심고 아이들도 씨앗을 심어요. 함께 기쁨으로 짓는 살림이 되고, 서로 사랑으로 나누는 말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오늘도 아이들하고 밭을 더 일구려 합니다. 시골은 온통 봄일로 바쁜 사월 한복판입니다. 바쁜 봄철이라서 국회의원 뽑는 일은 ‘미리’ 느긋하게 했습니다. 2016.4.1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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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 앉아서 읽는 책



  아침에는 마을 할배가 경운기에 땅갈개를 싣는 일을 거들었다. 땅갈개가 망가졌는데 이튿날 이웃마을에 농기계를 고쳐 주는 사람들이 온다고 해서 오늘 미리 실으신단다. 할배도 할매도 이제 나이가 많아서 좀처럼 힘을 쓰기 어렵다면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힘껏 일을 거들었다. 일을 거들고 보니 젊은이가 힘을 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할배는 “애들은 많은데 다 도시로 나갔고 ……” 하신다.


  낮에는 큰아이하고 밭을 일군다. 아이들하고 곁님이 좋아하는 옥수수를 이레씩 틈을 두면서 마당하고 밭 가장자리에 차곡차곡 심는다. 해바라기씨를 심을 자리를 골라 놓고는, 씨앗은 이튿날이나 그 다음 날에 심기로 한다. 엊그제 갈아서 씨앗을 심은 자리에는 새로 물을 한 번 주고는, 열흘 즈음 앞서 심은 콩에서 돋는 싹을 한참 들여다본다.


  뜨거운 볕이 살짝 기울 무렵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면소재지에 간다. 일요일 늦은 낮, 면소재지 초등학교 운동장은 조용하다. 두 아이는 집에서도 내내 놀았지만 학교 놀이터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논다. 놀이를 할 적에는 그야말로 쉴 겨를이 없이 내처 논다. 나는 이제서야 비로소 책을 손에 쥔다. 두 아이가 놀이터에서 이리 달리고 저리 뛰는 동안 바지런히 책을 넘긴다. 해가 기울 즈음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을 차리랴 집 안팎을 치우랴 아이들을 재우랴 하다 보면 그야말로 하루 가운데 책을 손에 쥘 틈은 매우 적다고 할 만하다.


  그래도 밥을 짓는 동안 국물하고 밥물이 끓는 사이에 살짝살짝 몇 쪽씩 넘긴다. 밑반찬이 다 떨어진 날은 이마저도 못하지만, 밑반찬을 넉넉히 해 두어서 국만 끓이면 될 적에는 밥상을 차리는 틈에 열 쪽이나 스무 쪽쯤 읽을 만하다.


  저녁을 먹이고 밥상을 치운 뒤에 등을 톡톡 치면서 또 몇 쪽을 펼쳐 본다. 책이란 무엇일까. 집안일이나 집밖일을 하면서 바쁜 사람들한테 책이란 무엇일까. 평균독서량 같은 통계를 말하기도 하는데, 종이책을 읽는 일이란 그야말로 ‘일’이 아닌가 하고 느낀다. 틈을 내고 쪼개고 마련해서 새롭게 힘을 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일, 또는 즐길 수 있는 일이라고 느낀다. 2016.4.1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삶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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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탄카 세계 거장들의 그림책 7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글, 타티야나 코르메르 그림, 이수경 옮김 / 살림어린이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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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647



개 한 마리는 ‘새 삶’ 찾는 홀로서기를 할까?

― 카시탄카

 안톤 체호프 글

 타티야나 코르메르 그림

 우시경 옮김

 살림어린이 펴냄. 2015.8.25. 12000원



  안톤 체호프 님이 쓴 글에 타티야나 코르메르 님이 그림을 넣은 《카시탄카》(살림어린이,2015)를 가만히 읽습니다. 이 그림책에 나오는 ‘카시탄카’는 개입니다. 꼭 여우를 닮았다고 하는 개예요. 그런데 이 개 카시탄카는 처음 태어나서 자란 집에서 그리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밥을 주는 아저씨도, 그 집 아이도 카시탄카를 아끼거나 따스히 보살피기보다는 함부로 다루고 마구 괴롭히기 일쑤였습니다.


  그렇지만 여우를 닮은 개 카시탄카는 그 집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 집 말고는 다른 보금자리나 삶자리를 그리지 못합니다. 오직 그 집에서만 지내야 ‘밥을 먹을’ 수 있다고 여겨요. 괴롭힘을 받으면서도 씩씩하게 떠날 줄 모르고, 이래저래 시달리면서도 새로운 길로 나설 줄 모릅니다.


  어쩌면 카시탄카를 낳은 개도 카시탄카와 같은 삶을 보냈을 수 있어요. 카시탄카 어미를 낳은 어미도 모두 똑같은 삶을 보냈을 수 있어요. 사람 눈으로 보자면 ‘사람 곁에 있는 짐승’이지만, 짐승으로서는 집에 얽매인 채 다른 곳으로 씩씩하게 떠날 수 없는 ‘굴레에 갇힌 목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긴긴 겨울밤, 예전 주인이 대패질을 하거나 소리 내어 잡지를 읽을 때면 아들 페듀시카와 장난치곤 했던 일을 떠올렸지요. 페듀시카는 카시탄카를 작업대 밑에서 끌어내기 위해 카시탄카의 뒷발을 잡아당기는 장난을 즐겼습니다. 얼마나 힘껏 당겼는지 카시탄카는 눈앞이 노래지고 온몸 마디마디가 아플 정도였습니다 … 또 어떤 때는 종을 치듯이 꼬리를 힘껏 잡아당겨 카시탄카가 비명을 지르게 했고, 담배 냄새도 강제로 맡게 했습니다. 그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장난은 …… (10쪽)



  그림책이기 앞서 짧은소설로 나온 이야기 ‘카시탄카’를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1860년에 태어나 1904년에 숨을 거둔 안톤 체호프 님이 러시아에서 겪은 삶이나 그무렵 러시아에서 마주하던 사람들 삶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사람들을 모질게 다루는 전제 군주와 땅임자를 생각해 봅니다. ‘땅을 짓지 않아’도 계급하고 신분하고 돈을 물려받아서 ‘땅을 짓는 이’를 얼마든지 부리거나 괴롭히던 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림책 《카시탄카》에 나오는 개 한 마리는 그저 개 한 마리를 보여줄 뿐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개 한 마리 이야기를 빌어서 러시아 사회를 이야기하고, 러시아 정치를 다루며, 모진 사회와 정치에 억눌린 채 그만 홀로서기를 잊거나 잃고 만 수많은 사람들을 보여주는 셈이라고 느껴요.



한 달 뒤에는 이집트 피라미드에서 표도르 티모페이치를 대신할 정도로 잘할 수 있었지요. 아줌마는 열심히 배웠고 스스로도 자신의 능수능란한 동작에 만족했습니다. 훈련용 밧줄에 묶여 혀를 빼고 달리는 것, 둥근 테를 뛰어넘는 것, 나이 든 표도르 티모페이치를 타고 달리는 것은 아줌마에게 아주 큰 기쁨을 주었습니다. (22쪽)



  《카시탄카》에 나오는 카시탄카는 어느 날 길을 잃습니다. 여느 때처럼 ‘주인 아저씨’를 따라서 집 밖으로 나왔다가 군악대 행진을 보고는 그만 넋이 나가라 구경하다가 주인을 잃어요.


  길도 집도 모두 잃은 카시탄카는 그만 떠돌이가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할는지 모릅니다. 카시탄카를 부리던 사람도 이 개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길조차 두지 않습니다. 아끼지도 사랑하지도 보살피지도 않은 채 그저 먹이만 주었을 뿐이니까요.


  어쩌면 ‘주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카시탄카가 어디로 사라진지도 모르거나 아예 생각조차 안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고달프거나 힘겹게 살림을 꾸리는지를 모르는 전제 군주나 독재자처럼 말이지요.


  길도 집도 없이 배고픈 카시탄카는 한길에서 어떻게 먹이를 찾아야 하는가를 모릅니다. 어디에 깃들어 자야 하는가도 모릅니다. 이러다가 따스한 손길을 만나요. 예전 주인하고는 너무도 다르게 따스한 손길을 만나지요.


  다만, 새로운 주인은 ‘서커스’를 하는 사람입니다. 서커스를 하는 사람은 카시탄카를 거두어 알뜰히 보살피다가 재주를 가르칩니다. 카시탄카는 예전과 달리 괴롭힘도 시달림도 없는 터전에서 즐겁게 재주를 익힙니다. 새로운 동무를 사귀고 아무런 걱정이 없는 나날을 누려요. 오직 한 가지가 없다면 ‘스스로 일어서서 스스로 살아가기’를 할 마음이 없다뿐입니다.



카시탄카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봤습니다. 마치 자신이 오래전부터 그들 뒤를 따라가고 있었고, 삶이 단 한순간도 자신을 내버리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카시탄카는 그 순간 지저분한 벽지가 있는 방, 거위, 표도르 티모페이치, 맛있는 식사, 훈련, 서커스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마치 복잡하게 얽혀 있는 기나긴 꿈처럼 느껴졌습니다. (39쪽)



  그림책 《카시탄카》는 카시탄카가 서커스를 하는 새로운 주인 곁을 떠나서 예전 주인한테 돌아가는 줄거리로 끝을 맺습니다. 서커스 공연 무대에 옛 주인하고 아들이 보러 왔고, 옛 주인 아들은 카시탄카를 알아봅니다. 카시탄카는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나서 아무 걱정이 없이 살았지만, 걱정도 괴롭힘도 시달림도 없는 새로운 터전을 내버리고 예전 주인한테 달려갑니다.


  카시탄카는 아무래도 예전 주인한테 돌아갈 수밖에 없는 마음결이었지 싶습니다. 스스로 옭매인 삶인데 옭매인 줄 모르는 마음결이기 때문이겠지요. 스스로 설 줄 모르고 남이 시키는 몸짓만 하면서 밥을 얻어먹는 데에서 삶을 그치는 터라, 새롭게 나아가는 길을 생각하지 못한다고 할 만해요.


  그러면, 나는 얼마나 홀로서기를 한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나는 굴레나 쳇바퀴에 안 갇힌 삶이라고 할 만한가 하는 대목을 되새깁니다. 내가 걷는 길은 그야말로 스스로 다스리거나 보살피거나 가꾸는 삶길이라고 할 만하느냐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안톤 체호프라는 분이 살던 백 몇 해 앞선 러시아하고 2010년대 오늘날 한국은 얼마나 다르거나 같은가 하고 가늠해 봅니다. 카시탄카 이야기를 읽는 나는 얼마나 ‘나다운 새로운 살림’이라고 할 수 있는지 곰곰이 짚어 봅니다. 2016.4.1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 아버지 그림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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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 - 반다나 시바의 나브다냐 운동 이야기 생각을 더하면 7
반다나 시바.마리나 모르푸르고 지음, 알레그라 알리아르디 그림, 김현주 옮김, 전국여성농민 / 책속물고기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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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읽는 삶 144



숲을 사랑하는 멋진 ‘씨앗지기’가 될 수 있어요

―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

 반다나 시바·마리나 모르푸르고 글

 알레그라 알리아르디 그림

 김현주 옮김

 책속물고기 펴냄, 2016.3.25. 11000원



  뒤꼍에서 괭이를 들고 밭 한쪽을 갑니다. 겨우내 시든 풀잎으로 덮인 땅은 폭신폭신합니다. 짚을 걷어서 한쪽으로 쌓고, 씨앗을 심을 자리를 고릅니다. 잔돌은 그대로 두고 커다란 돌을 골라서 씨앗자리로 삼는 테두리에 하나씩 놓습니다.


  아이들한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괭이질을 하는데, 큰아이는 집안이나 마당에 아버지가 없는 줄 어느새 알아채고는 두리번두리번 살피다가 뒤꼍에서 아버지를 찾아냅니다. 그러고는 호미를 챙겨서 뒤꼍으로 다시 와서 “나도 해 볼래!” 하고 외칩니다.


  이내 두 사람은 호미질을 하며 제법 굵은 돌을 고르고 자리를 반반하게 다스립니다. 까무잡잡한 흙에서는 까무잡잡한 냄새가 나고, 이 냄새를 두 손이랑 온몸으로 느끼면서 알맞게 땅을 갑니다. 이렇게 흙을 만지니 지렁이도 기웃하고, 굼벵이도 놀란 모습을 보입니다. 개미들이 왁자하게 오가고, 새끼 딱정벌레라든지 아직 알인 벌레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싱그럽고 좋은 흙이로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한 떡갈나무 숲은 숲 전체게 망가져 있기도 했는데, 사과를 대량으로 생산할 큰 농장을 만든다더군요. 큰돈을 벌려고요. 떡갈나무가 쓸모없어 보였나 봐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떡갈나무 숲은 장마철 폭우가 내릴 때 빗물을 흡수했다가 조금씩 흘려보내는 역할을 해서 홍수도 막아 주고, 가뭄도 막아 줘요. (8∼9쪽)


그리고 환경이 파괴되는 것과 가난한 사람의 수가 늘어나는 현상이 관계가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알게 되었지요. (11쪽)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책속물고기,2016)라고 하는 작고 야무진 책을 읽습니다. 아버지가 이 책을 읽으니 큰아이는 고개를 가만히 내밀면서 “무슨 책 읽어?” 하고 묻습니다. “나도 읽고 싶어.” 하고 말하는 큰아이한테 “기다리렴. 아버지가 먼저 다 읽고 나서, 너도 읽을 만한지 살펴서 줄게.” 하고 얘기합니다.


  반다나 시바 님하고 마리나 모르푸르고 님이 글을 쓰고, 알레그라 알리아르디 님이 그림을 넣은 책이에요. ‘어린이 생태환경 인문책’이라 할 텐데, 100쪽이 살짝 안 되는 가볍고 작은 책이지만, 속에 깃든 이야기는 참으로 알차고 야무지네 하고 느낍니다.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를 함께 쓴 반다나 시바 님은 인도사람입니다. 처음에는 히말라야 멧골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하고, 나중에는 핵물리학자라는 길을 걸었다고 하는데, 어느새 ‘흙을 만지며 씨앗을 사랑하는 새로운 길’로 삶을 바꾸었다고 해요.



오늘날 쌀, 밀, 옥수수, 콩, 사탕수수 등 고작해야 몇 가지 작물만 상품으로 재배해서 세계 시장에서 팔리고 있어요. 원래 사람들이 먹었던 작물이 무려 8500가지나 됐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13쪽)


우리가 기르는 농작물은 농사를 지을 때도 그다지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해서 대규모로 경작하는 쌀은 1년에 2500밀리미터의 빗물이 필요하지만, 농민들이 대대로 이어온 농사법으로 재배한 토종 쌀은 200∼300밀리미터 정도면 충분해요 … 농약을 사용하는 작물이 1명을 구할 때, 토종 작물로는 400명을 구할 수 있는 거예요! (18쪽)



  오늘 갈아서 오늘 심는 씨앗은 앞으로 여러 날이 지나야 비로소 싹이 틉니다. 그리고 여러 달이 지나야 열매를 맺어서 거둘 수 있습니다. 씨앗 한 톨에서 열매 한 줌을 얻기까지 한철이 흘러야 해요. 이동안 우리는 지난해에 갈무리한 열매를 먹을 수 있고, 풀잎이나 남새를 얻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지구별 어느 곳에서나 이렇게 손수 심고 가꾸고 거두고 갈무리하면서 살림을 지었어요. 그리고, 밥짓기를 하는 사이사이 풀줄기에서 실을 뽑아서 옷을 짓지요. 그리고, 밥짓기랑 옷짓기를 하는 틈틈이 숲에서 나무를 알맞게 얻어서 집을 짓고 집살림을 장만해요.



농사를 짓는 사람들과 자연환경은 빈곤해지지만 일회용인 잡종 씨앗과 화학비료, 농약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고 있어요. (38쪽)


한국에는 원래 1450가지가 넘는 쌀이 있었다고 해요. 많은가요? 아니면 적게 느껴지나요? 그런데 이건 아주 오래전 이야기고요, 지금은 450가지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해요. 더 안타까운 것은 이 쌀들도 농촌진흥청 저장고에 보관만 되어 있어 지금 당장은 맛볼 수 없다는 점이에요. (49쪽)



  큰아이랑 둘이서 뒤꼍에서 흙을 만지니, 이제 작은아이도 어슬렁어슬렁 달라붙습니다. 함께 놀 ‘두 사람’이 안 보이기 때문이지요. 작은아이도 호미를 챙겨서 ‘아직 갈지 않은 자리’, 그러니까 며칠 뒤에 갈 자리를 콕콕 쫍니다.


  슬슬 쉬엄쉬엄 땅을 갈아 돌을 고른 뒤에 손바닥으로 반반하게 자리를 다집니다. 이제 씨앗을 심을 때입니다. 나는 손가락으로 콕콕 구멍을 내고, 두 아이는 저마다 씨앗을 손에 쥐어 한 톨씩 넣습니다. 우리 꿈을 담아서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 노래를 부르면서 씨앗을 심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얹어서 씨앗을 심습니다.


  씨앗을 다 심은 뒤에는 큰아이가 물을 길어서 골고루 뿌립니다. 나는 밭에서 나온 쓰레기를 거두어서 한쪽에 모읍니다. 연장에 묻은 흙을 물로 씻어서 한쪽에 놓습니다. 따스한 볕이 골고루 들면서 나무한테도 풀한테도 땅한테도, 또 마당에 넌 빨래한테도 기쁜 기운을 나누어 준다고 느낍니다.



다국적 씨앗 회사들은 씨앗을 서로 나누는 농부들을 골칫거리로 생각했어요. 씨앗을 보관하고 나누는 것이 원래 농부의 일이고 권리인데 말이에요. 씨앗 회사들은 농부들에게 씨앗을 팔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특허 제도를 도입하고 씨앗이 특허를 낸 사람의 지적 재산이 되도록 해서 농부들이 서로 씨앗을 교환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자는 것이었어요. (50쪽)



  어린이 인문책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는 씨앗하고 얽힌 수수께끼를 차근차근 풀어 줍니다. 옛날부터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이 손수 심고 가꾸면서 아낀 씨앗 이야기를 들려주고, 오늘날에는 이 씨앗을 다국적기업에서 돈벌이를 앞세우면서 독점과 특허와 유전자조작을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씨앗을 심거나 나누는 살림이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람들이 스스로 씨앗을 아끼면서 심고 갈무리하는 곳에서는 ‘가난’이 퍼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그렇구나 싶어요. 사람들이 시골에서 흙을 일구어서 밥이랑 옷이랑 집을 손수 얻으면 언제나 ‘자급자족’이에요. 자급자족을 하는 곳에서는 ‘경제성장’이나 ‘경제발전’은 딱히 없을 만해요. 상품으로 내다 팔려고 하는 땅짓기가 아니라, 한집하고 한마을이 조용히 오순도순 사이좋게 어우러지려고 하는 땅짓기요 땅살림이기 때문입니다. 반다나 시바 님하고 마리나 모르푸르고 님이 함께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바로 ‘세계경제’가 아닌 ‘마을살림·집살림’을 스스로 즐거우면서 재미나고 알차며 아름답게 가꾸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껴요.



여러분이 어른이 되면 가질 수 있는 직업 중에 ‘농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농부는 자연을 비롯해 살아 있는 모든 것과 항상 접할 수 있는 무척 멋있는 직업이랍니다. (88쪽)



  우리 집 아이들은 앞으로 ‘씨앗을 심고 가꾸고 돌보고 갈무리해서 누리는 삶’을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아이들이 이 시골집에서 ‘농사꾼’이 되든 안 되든, 또는 다른 일을 찾든 안 찾든, 그러니까 앞으로 아이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땅을 아끼고 살피면서 돌볼 줄 아는 손길하고 마음이 될 수 있기를 바라요. 그래서 어버이인 나부터 땅을 조물주물 만지면서 사랑하려 합니다. 손수 짓는 살림을 가꾸려고 합니다. 스스로 돌보는 살림을 스스로 북돋우면서 스스로 노래하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작은 씨앗 한 톨이 밥 한 그릇으로 거듭나요. 작은 손길 하나가 사랑스러운 살림으로 거듭나요. 작은 마음 하나가 아름다운 보금자리에서 피어나요. 《씨앗이 있어야 우리가 살아요》라는 책이 들려주듯이, 씨앗이 있기에 밥이 있어서 우리가 살지요. 땅에도 씨앗을, 마음에도 씨앗을, 보금자리에도 씨앗을, 골고루 심어요.


  우리는 언제나 따사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생각도 살림도 사랑도 씨앗으로 심는 고운 이웃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누구나 ‘씨앗지기’가 될 수 있어요. 너른 논밭이 아니어도 손바닥만 한 짜투리 빈터에 씨앗을 심어서 돌볼 수 있어요. 집안에 작은 그릇을 놓아 씨앗을 심어서 가꿀 수 있어요. 너나 없이 다 같이 씨앗지기가 되고 씨앗동무가 되며 씨앗이웃이 된다면, 언제나 맛나고 싱그러운 밥 한 그릇을 누릴 만하리라 생각해요. 2016.4.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어린이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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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버린 사랑 문학과지성 시인선 482
이이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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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20



‘버리는 사랑’을 생각하는 젊은 넋이 많은 나라

― 인간이 버린 사랑

 이이체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6.3.25. 8000원



  아침에 일어나면서 무엇을 맨 먼저 할까 하고 잠자리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아침마다 잠자리에서 몇 분쯤 가만히 눈을 감고 하루를 그린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미적거리려고 하는 몸짓이 아니라 하루를 길고 즐겁게 누리려는 몸짓이에요. 게으른 몸짓이 아니라 하루 살림을 새롭게 지으려는 몸짓이고요.


  어제는 여러 날 미룬 빨래를 잔뜩 하며 아침을 열었어요. 며칠 동안 사월비가 주룩주룩 내린 탓에 미룬 빨래였기에 꽤 많았어요. 빨랫감이 많구나 싶어 다 하지는 않고 좀 남겼습니다. 아침에 신나게 빨래를 하고, 밥을 지어서 먹인 뒤에는 살짝 등허리를 펴고는 온 식구가 들길을 걸었어요. 여러 날 사월비가 내린 들판은 유채꽃이 활짝 터졌거든요.


  그래서 들길을 한참 걸어서 면소재지까지 제법 먼 길을 걸었습니다. 마침 4월 8일하고 9일에 걸쳐서 ‘미리 투표하기’를 할 수 있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아침 빨래를 하고 아침밥을 즐겁게 먹고는 옥수수 씨앗을 밭 가장자리를 따라서 심자고 생각해 봅니다.



잘못 온 편지를 읽고 운 적이 있다 (몸의 애인)


어떤 말을 하면 울고 난 것 같다 // 어린 개가 칭얼거린다, 간결하고 간절하게 (우상의 피조물)



  아이들을 이끌고 유채꽃 들길을 걷다가 다리쉼을 하는 사이에 《인간이 버린 사랑》(문학과지성사,2016)이라는 시집을 살짝살짝 읽었습니다. 봄들마실하고 어울릴 만한 시집인지 아닌지는 딱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람이 버린 사랑’을 이 봄들에서 읽을 만하지 않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렇지만 어느 한 ‘사람이 버린 사랑’이 있으면 어느 한 ‘사람이 새롭게 심는 사랑’이 있으리라 느껴요. 사랑은 버려질 수 없으리라 느끼기도 해요. 왜냐하면, 사랑을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이는 그이 목숨을 버리는 셈일 테니까요. 이 땅에서 더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없을 때에 그만 사랑을 버리고 목숨까지 내려놓는 셈일 테니까요.



육체는 빛을 이해하기 위해 그림자를 드리운다 // 나는 직업이 죄인이다 / 누구보다도 죄를 잘 짓는다 (푸른 손의 처녀들)


기억으로 / 숲이 우거지면 / 다 / 잊혀진다. (부제―무제)



  1988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이이체 님은 한창 대학원을 다니면서 배움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이제 막 푸른 숨결로 새로운 살림을 짓는 젊은 손길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이이체 님이 우리한테 싯말로 들려주려고 하는 노래는 ‘사람이 버린 사랑’입니다.


  다시 들길을 걷고, 또 다리쉼을 하고, 거듭 들길을 걷다가, 면소재지에 닿아 투표를 하고는, 다시 다리쉼을 하는 사이에 살짝살짝 시집을 더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새롭고 푸른 꿈이랑 사랑을 키울 만한 젊은 넋은 왜 ‘사람이 버린 사랑’을 자꾸만 마음속으로 그려야 할까요? 젊은 시인 이이체 님 마음자리에 생채기나 아픔이나 응어리나 피고름이나 멍에나 앙금이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아직 생채기나 아픔이나 응어리나 피고름이나 멍에나 앙금을 짊어지거나 떠안아 보지 못했다고 여겨서 이러한 것들을 가슴 가득 품고서 ‘이웃사랑’을 헤아려 보고픈 마음일까요?



마음을 가진 자에게서, 사랑은 언제 죽을까 / 사랑을 모르던 때에 만났던 사랑을 / 사랑이라고 불러도 될까 (피 흘리며 태어나는)


모든 이름은 가명이다 / 모순은 완벽하다 (누설)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은 아픔을 모르기 마련이라고 느낍니다. 열흘 동안 몸져누운 채 꼼짝을 못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나날을 알기 어려워요. 여러 해 동안 몸져누운 삶을 겪어 보지 못했다든지, 또는 서른 해 남짓 아픈 몸을 이끌고 살림을 꾸려야 하는 삶을 겪어 보지 못했다면, 이러한 나날을 마음속으로만 그리기도 쉽지 않아요.


  ‘사람이 버린 사랑’을 알자면, 아무래도 스스로 사랑을 버려 보아야겠지요. 내가 사랑을 버리든, 내 곁에서 누군가 사랑을 버리든, 나와 네가 함께 사랑을 버리든, 또는 이 지구별 숱한 사람들이 사랑을 버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든 할 때에 비로소 ‘사람이 버린 생각’을 몸으로 느낄 만하리라 생각해요.


  우리 사회는 젊은 넋한테 ‘짓는 사랑’이 아닌 ‘버리는 사랑’을 떠넘기는 얼거리는 아닌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우리 사회는 젊은 넋이 젊은 넋답게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기보다는, 젊은 넋한테 수많은 짐덩어리를 얹는 얼거리일 수 있겠다고 헤아려 봅니다. 입시지옥이나 학원지옥뿐 아니라 교통지옥도 있고 취업지옥도 있어요. 오늘날 사회에서는 첨단문명이 눈부시기는 하지만, 어디에나 ‘이런 지옥’하고 ‘저런 지옥’도 잔뜩 있어요.



일 년이라는 것은 그저 계절들이 차례대로 미치는 단위에 지나지 않는다. 찬란한 물이 고체의 언어를 발음할 때부터, 비로소 우리는 기형에 짓밟힐 수 있었다 (살해된 죽음)


살을 섞고 삶을 나누던 기억 / 당신을 잊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다 / 망각까지 잊을 수는 없다 (물의 누드)



  아침에 큰아이한테 옥수수 씨앗 여섯 톨을 건넵니다. 먼저 큰아이더러 혼자서 심어 보라고 얘기합니다. 네 온 사랑을 담아서 씨앗을 심으라고 속삭입니다. 이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서 우리 보금자리를 곱게 밝혀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심으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 집에서 함께 마음을 섞고 생각을 섞습니다. 우리는 이 보금자리에서 함께 손길을 나누고 꿈길을 걷습니다. 나는 아이한테 건네는 손길을 늘 마음에 아로새깁니다. 아이도 어버이한테서 받는 손길을 늘 마음에 되새겨요.



당신이 나에게 말했다. / 바람은 늘 누군가와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 같아 (편애, 사랑에 치우치다)



  봄바람이 붑니다. 따스합니다. 곧 여름바람이 불면 시원하겠지요. 이내 가을바람이 불면 상큼할 테고요. 다시금 겨울바람이 불면 추울 텐데, 추운 겨울에는 서로 옷을 나누어 입고 이불을 함께 덮는 살붙이가 있어서 포근합니다.


  바람은 나무를 사랑합니다. 나무는 풀을 사랑합니다. 풀은 흙을 사랑합니다. 흙은 풀벌레를 사랑합니다. 풀벌레는 구름을 사랑합니다. 구름은 해님을 사랑합니다. 해님은 다시 바람을 사랑해요. 사람은 이 모든 사랑 사이에서 가만히 꿈을 지어서 살림으로 잇습니다.


  가볍게 부는 사월바람에 민들레 씨앗이 가볍게 꽃대에서 떨어져서 나풀나풀 날아오릅니다. 노란민들레씨도, 흰민들레씨도, 저마다 사뿐사뿐 바람을 타면서 이곳저곳 흩어집니다. 오늘 하루도 아이들하고 새로운 들길이나 숲길을 걸어 보자고 생각하면서 작은 시집을 덮습니다. 그리고 내 손에 새로운 시집 하나를 품고서 씩씩하게 이 봄을 누리자고 생각합니다. 2016.4.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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