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삶읽기 2023.11.7.

수다꽃, 내멋대로 54 귀신 보는 마음



  지난 2014년 1월까지 깨비(귀신)를 으레 맨눈으로 보면서 고단했다. 깨비가 무섭지 않은 줄 알기는 했으나, 왜 깨비가 늘 보이는지 몰랐고, 알려주는 이웃이나 어른을 못 만났다. 이해 이달에 어느 넋이 곰곰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서 눈을 떴다. 두 눈을 동여맨 채 둘레를 보는데 모든 사람이 빛줄기로 보이더라. 그래, 난 여태까지 ‘감은눈’인지 ‘뜬눈’인지 모르는 채 살았네. 겉으로는 ‘뜬눈’이었으나, 막상 ‘뜬눈인 척’이었을 뿐이다. 나만 이러할까? 숱한 사람들은 ‘뜬눈인 척하는 감은눈’이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뜬눈을 감은 채’ 태어난다. 그리고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어버이하고 어른한테서 사랑을 받을 적에 ‘뜬눈을 뜬다’고 여길 만하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은 어버이가 욱여넣는 배움터(유치원·학교·학원)에서 그만 억눌리고 길들면서 ‘뜬눈을 잊다가 잃고서 감은눈’으로 바뀐다. 나처럼 깨비를 맨눈으로 늘 보는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아마 다들 말도 못 하면서 스스로 바들바들 떨거나 걱정이나 근심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까? 서른아홉 해를 ‘깨비가 보이는 눈’으로 살아왔지만, 이 깨비를 어떻게 녹이거나 풀어내는지 아주 쉽게 깨달았다. “가렴. 넌 네가 있을 곳으로 가렴. 이곳에서 떠돌지 말고, 네가 이루고 싶은 곳에 있을 수 있도록 네 마음에 꿈을 그리렴.” 하고 속삭이면 된다. 넋씻이(한풀이·정령·해원)는 아주 쉽더라. 말 한 마디이면 된다. 다만, 오롯이 사랑으로 스스로 감싼 숨결로 부드러이 읊는 말 한 마디여야 한다. 2023년 11월 6일, 열여섯 살 큰아이하고 고흥읍을 다녀왔다. 곁님이 쓰는 셈틀(컴퓨터)이 먹통이 되었다. 속을 뜯고 먼지를 털고 이모저모 손보아도 먹통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셈틀을 안고서 흔들흔들 사나운 시골버스를 타고서 읍내로 갔고, 며칠 앞서 들이받침(교통사고) 탓에 도진 무릎을 누가 송곳으로 찌르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천천히, 그저 천천히 걸었다. 셈틀집에 우리 셈틀을 맡길 적에 큰아이가 조곤조곤 얘기했다. 나는 옆에서 큰아이 말을 들으며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묵직한 셈틀을 내려놓고서 무릎을 달랜다. 둘이서 저잣마실을 하는데, 걷기 힘들 만큼 무릎이 쑤셔서 길가에 서거나 앉아서 쉬고, 다시 걷고 또 쉬기를 되풀이했다. 부릉부릉 쇳덩이(자동차) 소리가 좀 시끄러워서 읍내 안골숲을 걸었다. 바람에 일렁이는 잎노래를 들으며 무릎을 어루만졌다. 셈틀집에서 전화를 한다. “멀쩡한데요? 잘 움직이고 말썽인 데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큰아이가 웃으면서 말한다. “아버지, 이 아이(셈틀)가 바람을 쐬고 싶었나 봐요. 바람을 쐬니까 즐거워서 스스로 낫지 않았을까요? 다른 사람들은 컴퓨터가 마음이 없다고 여기지만, 컴퓨터한테 어떻게 마음이 없을 수 있어요?” “그래, 셈틀도 바위도, 우리가 멘 가방도, 우리가 쥔 붓과 종이도, 우리가 읽는 책도 모두 마음이 있어. 모든 곳은 모든 숨결이고, 이 숨결을 느끼면서 품는다면 총칼(전쟁무기)뿐 아니라, 허울(권력·재산·명예)을 모두 내려놓고서 어깨동무를 하겠지.” 언제 어디에서나 바람을 느낀다. 요새는 깨비를 얼핏 느끼기는 하되 거의 안 느낀다. 왜냐하면, 깨비가 아닌 숨결을 읽고 느끼면서, 내 숨결하고 이웃 숨결 사이에 사랑이라는 다리를 놓을 마음이거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택시를 부른다. 보임꽃 〈여섯결(식스 센스The Sixth Sense)〉은 ‘다섯결(오감)’을 넘어 ‘여섯째로 보고 느끼고 아는 결’을 잘 그려내었다. 나는 〈여섯결〉을 숱하게 다시 보았는데, 다시 볼 적마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어쩜 그렇게 ‘깨비 보는 아이’ 마음을 안 읽을 수 있을까? 그러나 마지막 아이는 끝까지 사랑으로 기다려 주었고, ‘눈감던 어른’은 마침내 눈을 뜨고서, 모두 사랑으로 녹여야 하는 줄 알아차리고서 몸을 내려놓지.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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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삶꽃

수다꽃, 내멋대로 53 잡초는 없다



  1999년에 보리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가기 앞서 진작에 《잡초는 없다》를 읽었다. 열린배움터(대학교)를 그만두고서 몸일(육체노동)을 하며 살림돈을 벌던 그무렵, 고졸내기로서 마음일(정신노동)을 하는 길을 헤아리며 헌책집을 ‘책숲(도서관) + 배움숲(학교)’으로 삼았다. 새벽 두 시∼다섯 시 사이에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하고서, 아침 여섯 시부터 저녁 열한 시까지 오롯이 ‘나를 스스로 바라보고 일깨우는 배움살이’로 하루를 보냈다. 열린배움터를 그만두었으나, 그곳을 다닐 적에 열린책숲(대학도서관)하고 책집(대학교 구내서점)에서 곁일을 했다. 두 곳에서는 “최종규 씨는 자퇴를 하셨어도 이곳에서 일하고 싶으면 언제든 오셔요. 당신처럼 부지런히 일하는 대학생을 여태 못 봤어요.” 하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교를 그만둔 뜻은, 배우고 싶어 대학교에 들어왔는제 정작 대학교는 술판·노름판에 허덕이는 민낯이라, 저 스스로 배움길을 찾으려는 마음이에요. 그래서 밥벌이로 삼을 밑돈만 조금 벌고, 하루를 온통 스스로 배우는 길에 쓸 생각이에요. 쫄쫄 굶을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배워 보려고요.” 하면서 두 곳(대학도서관 + 대학 구내서점)에서는 더 일하지 않기로 했다. 헌책집을 배움숲이자 책숲으로 삼을 만한 까닭을 모르는 분이 많다. 헌책집은 “우리가 읽은 모든 책”이 드나든다. 새책집은 “바코드를 찍어서 팔 수 있는 책”만 드나든다. 비매품·정부간행물·옛날 신문·지역문인 문집·소장학자 자비출판 논문은 오직 헌책집에서만 만난다. 나는 우리말을 스스로 익히는 길을 갈 생각이었던 터라, ‘우리나라 모든 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책’을 다 훑으려고 헌책집을 드나들었다. 모든 대학교 국어국문학과는 그들 대학교에서 낸 책이 아니면 안 다루고 안 갖추더라. 이러던 어느 날 《잡초는 없다》를 읽으며, 이런 책이름을 붙일 줄 아는 사람이 있구나 싶어 반가웠지만, ‘없다’란 대목은 걸렸다. “잡초는 없다”라는 말은 “잡초는 있다”란 말하고 나란하다. 스스로 풀꽃나무하고 사람을 ‘잡초냐 아니냐’로 바라보기에 ‘없다·있다’로 말장난을 했을 뿐이다. 참말로 몹쓸풀이 없다고 느끼는 삶이라면 이런 말을 안 쓰고 “풀이 있다”라고만 한다. 또는 “풀이다”라 할 테고. “나쁜 아이란 없다”가 아니라 “모두 아이야”인걸. “착한 아이·나쁜 아이”를 가르려는 마음이 “나쁜 아이란 없다”란 말에 깃든다. 모든 아이는 서로 다르면서 스스로 새로운 숨결인 사람이니, “아이입니다”나 “모두 아이입니다”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쁜 사람은 없다”라 말하는 누가 있다면, 이이는 거짓말이나 눈속임을 하는 셈이라고 느낀다. 나는 “나쁘거나 좋다고 가르는 잣대(지식·이론·논리·종교·철학·사상·정치·문화·예술·학문)가 있을 뿐, 사람은 그저 사람입니다.” 하고 얘기한다. 모든 풀은 쓰임새가 다르고, 잎이며 줄기에 뿌리가 다르다. 다 다른 풀은 다 다르게 숨살림이요, 다 다른 사람은 저마다 새롭게 별빛님이다. 온누리를 보라. 사람이 있고, 숲이 있고, 들이 있고, 바다가 있고, 바람이 있고, 풀벌레가 있고, 새가 있고, 헤엄이가 있고, 비구름이 있고, 별이 있고, 너랑 내가 있어, 우리가 오늘 이곳에 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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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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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2023.11.4.

수다꽃, 내멋대로 52 병원을 안 가는



  이웃님 쇳덩이(자동차)에 같이타서 구례읍을 지나는데, 다른 쇳덩이가 뒤에서 꽝 들이받았다. 꽤 세게 받아서 덜컹 흔들렸고, 목이 삐끗했고, 왼무릎이 욱씬거렸다. 뒤에서 우리를 들이받은 이는 할아버지. 늙은 우리 아버지보다 조금 젊은 할아버지인데, 너무 서두르면서 빨리 몰더라. 왜 꽝꽝 치거나 부딪히겠는가? 느긋하게 안 달리니까 들이받는다. 차근차근 안 모니까 그들 스스로도 다치거나 죽고, 이웃도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 예전에 서울에서 아직 살던 무렵, 곧잘 두바퀴(자전거)로 서울 한가람길을 달렸는데, 숱한 ‘달림이(레이서)’가 그야말로 쌩쌩 바람을 가르는 소리까지 내면서 휘젓더라. 요새도 똑같으리라. 값나가는 두바퀴를 몰고서 자전거옷까지 차려입은 그들은 거의 다 쇳덩이도 몬다. 사람들은 쇳덩이나 두바퀴만 지나치게 빨리 몰지 않는다. 삶도 똑같이 지나치게 휘몰아친다. 책을 빨리 읽어치워야 할 까닭이 없고, 아이들이 빨리 어른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글을 빨리 깨쳐야 하지 않고, 책을 빨리 많이 팔아치워야 하지 않고, 돈을 빨리 많이 쌓아올려야 하지 않고, 이름을 빨리 높이 날려야 하지 않고, 그러니까 빨리 달려서 빨리 살다가 빨리 죽어야 할 까닭이 없다. 엊저녁에 들이받히고 나서 왼무릎이 내내 부어서 욱씬거렸고, 밤새 몸앓이를 했다. 그러나 돌봄터(병원)에 갈 마음은 터럭조차 없다. 나는 1992년에 마지막으로 돌봄터를 갔고, 이듬해 1993년에 발목이 접질려서 뼈맞춤을 하는 곳에 절뚝거리면서 한 달을 드나든 적이 있지만, 돌봄터에는 안 간다. 서른 해 넘게 돌봄터와 등진다. 그동안 나를 들이받은 쇳덩이가 여럿 있다. 새뜸나름이(신문배달부)로 일하던 1998년에 뺑소니를 겪었고, 2003∼2007년에 충북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이오덕 어른 글을 갈무리하며 두바퀴(자전거)로 충주와 서울을 오가는 길에 석 판 뺑소니를 치른 적 있다. 뺑소니이든 끼어들기이든 뭐든, 길에서 벌어지는 모든 ‘들이받기(교통사고)’는 “서두르며 빨리빨리 달리는 버릇” 탓에 싹튼다. 다른 이를 들이받은 이는 하루빨리 쇳덩이를 버려야 한다. 종이(운전면허증)도 내려놓아야 한다. 이분들은 걸어다녀야 한다. 걷기에 멀다면 택시를 타야 한다. “서두르며 빨리빨리 달리는 버릇”에 사로잡힌 이들은 쇳덩이를 몰아서는 안 된다. 30으로 달리는 길을 70으로 내달리거나, 100으로 달리는 길을 150을 밟거나, 120까지 달리는 길을 170으로 휘젓는 이들은 모조리 종이(운전면허증)를 걷어치워야 한다. 죽음길에 뛰어드는 바보짓을 멈추도록 옆에서 도와야 한다. 쇳덩이를 몰다가 말썽을 일으킨 사람은, 아무리 조그맣게 들이받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외판(원 스트라이크 아웃)’으로 끝맺고, 다시는 쇳덩이를 몰지 못 해야 맞다. 그래야 이 땅에서 어린이가 마음껏 걸어다니거나 뛰놀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시골이며 서울(도시)에서 할매할배가 느긋이 걸어다닐 수 있다. ‘가벼운 접촉사고’라고? 웃기지 마라. ‘가벼운 교통사고’란 아예 없다. 그저 ‘말썽(사고)’이다. 가볍게 건드리거나 부딪혔어도 종이(운전면허)를 멈춰야 한다. 그만큼 쇳덩이는 길에서 사람을 아슬아슬하게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총칼(무기)이 된다. 그나저나 나는 돌봄터에 안 간다. 여러 판에 걸쳐 뺑소니를 겪었어도, 달포쯤 앓아눕거나 끙끙대면서 나았다. 시골로 삶터를 옮겨 풀꽃나무를 곁에 품노라면, 모든 몸앓이를 천천히 녹여서 풀어낼 수 있다. 한동안 다리를 푹 쉬어서 살리자고 생각한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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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수다꽃, 내멋대로 51 책지게

― 쓰러지는 나날



  책으로 가득한 등짐을 짊어지고 한참 걷는다. 나는 왜 책짐을 이렇게 짊어지고서 한참 걷는가. 버스를 탈 수 있고, 택시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택시를 탈 만한 삯도, 버스를 탈 만한 삯까지도 몽땅 책값에 들이부었다. 2002년 10월 2일을 돌아본다. 워낙 날마다 여러 책집을 돌면서 책을 잔뜩 사들이는 탓에 ‘책값은 늘 맞돈(현금)만으로 치르기’로 다짐을 한다. 날마다 꼬박꼬박 돈터(은행)에 가서 조금씩 찾는다. 그리고 이 돈은 날마다 책값으로 송두리째 날아간다. 책 한 자락을 덜 사면 집으로 버스를 타고 돌아갈 수 있다. 책 서너 자락을 덜 사면 집으로 택시를 타고 돌아갈 수 있다. 책 예닐곱 자락을 덜 사면 짜파게티 하나에 밥 한 그릇으로 하루 끼니를 채울 일이 없으리라. 그러나 나는 날마다 책을 서른 자락이고 쉰 자락이고 사들여서 읽고 만다. 책을 서른 자락 사들이는 날은 책집에 서서 삼백 자락을 살폈다는 뜻이다. 책을 쉰 자락 사들이는 날은 책집에 서서 오백 자락쯤 헤아렸다는 뜻이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살피고 헤아리고 읽느냐고 묻는 사람은 어리석은가, 아니면 어진가? 나는 나보다 책을 훨씬 많이 사들여서 훨씬 많이 읽는 책벌레를 여럿 안다. 나는 이 책벌레 어르신과 동무한테 “님은 왜 이렇게 책을 많이 삽니까?”라든지 “님은 왜 이렇게 책값에 살림돈을 몽땅 쏟아붓습니까?” 하고 여쭙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는 나한테도 딱히 묻지 않는다만, 나는 스스로 읊는다. 주머니에 100원조차 남지 않았으나 헌책집 일꾼은 내 손에 삼천 원이나 오천 원을 도로 쥐어 준다. “최종규 씨, 집에 걸어가지 말고 버스나 전철이라도 타고 가십시오.” 때로는 “최종규 씨, 집에 버스나 전철을 타고 돌아가서 라면이라도 하나 사서 끓여 드십시오.” 사랑스러운 책집지기님이 내 손에 도로 쥐어 준 삼천 원이나 오천 원을 쥐고서 버스도 전철도 안 타고서 한두 시간을 그냥 걷는다. 걷다가 지치면 길불(가로등)에 기대어 서서 책을 읽는다. 등과 팔다리에서 흐르던 땀이 조금 식으면 다시 책짐을 지게처럼 짊어지고서 걷는다. 드디어 우리 집에 다다라 책짐을 모두 풀어놓고 나면, 어느새 홀가분한 차림새로 밤길을 나선다. 서울 독립문 〈골목책방〉 아저씨는 밤 열두 시에라야 비로소 가게를 닫는다. 〈골목책방〉 아저씨가 책집을 닫기 앞서 얼른 밤길을 달린다. 이러고는 마침내 삼천 원이든 오천 원이든, 남은 돈을 다 쓰고야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먹는가? 책에 적힌 이야기를 먹는다. ‘오롯이 나무로만 세운 나머지집(적산가옥)’은 골마루를 지나거나 디딤칸을 오르내리거나, 내가 사는 윗칸(2층)에 드러눕거나 책상맡에 앉을 적에도 늘 삐끄덕 소리를 낸다. 물꼭지를 틀어서 물을 마신다. 이튿날 일터(《보리 국어사전》 편집실)로 가면 낮밥이나 저녁밥을 얻어먹자고 생각한다. 책벌레는 밥을 먹지 않고 물을 먹고 바람을 먹고 이야기를 먹는다. 책벌레는 버스도 전철도 택시도 자가용도 타지 않는다. 책벌레는 책짐을 이고 진 채 걷는다. 걷다가 팔뚝이 결리면 살짝 멈추어 땀을 훔치고는 또 책을 읽으면서 쉬다가 다시 걷는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기에 밤나절에 마지막 책집마실을 마치고서 집으로 돌아오면, 더는 책을 펼 기운이 남지 않아 꼬르륵 쓰러지고야 만다. 날마다 쓰러진다. 날마다 까무룩 꿈나라로 간다. 밤이면 마치 죽은듯이 몸을 쉰다. 이른새벽이면 번쩍 눈을 뜨고는 어제 산 책을 되읽으면서 글을 쓴다. 어제 다녀온 책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글을 짓는다. 책벌레가 왜 책벌레인지 밝히는 글을 여민다. 책짐을 부여잡고서 서울 시내 골목골목 거닐면서 ‘아직 내가 찾아내지 못 한 마을책집이 틀림없이 어느 골목에서 고즈넉이 나를 기다릴는지 몰라’ 하고 혼잣말을 한다.


ㅅㄴㄹ


2002년 10월 2일 일기를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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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삶읽기 / 숲노래 마음노래

수다꽃, 내멋대로 50 고양이와 개



  고양이를 가리키는 이름이 많다. 개를 가리키는 이름도 많다. 개는 열두띠에 들어가고, 고양이는 열두띠에 안 들어가는데, 열두띠에 들어가는 범은 ‘범 갈래’가 아닌 ‘고양이 갈래’이다. 이렇게 보면 고양이도 범하고 한동아리로 열두띠에 깃든다고 여길 만하다. 온누리에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하고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이에는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 온누리에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하고 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 틈바구니에는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고양이나 개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가까이하지도 멀리하지도 않는다. 어릴 적부터 따로 가까이하고프거나 멀리하고픈 것이 드물었다. 그러나 몸에 안 받는 것은 많았다. 김치도 치즈도 소젖(우유)도 요거트도 찬국수(냉면)도 동치미도 시큼이(식초)도 하양이(크림)도 달콤이(케익)도, 몸에서 안 받아 몽땅 게워내기 일쑤였다. 혀짤배기에 말더듬이라서 못 읽거나 못 읊는 소리가 있고, 못 부르는 노래가 수두룩하다. 그러나 내 몸에 안 받거나 내 몸이 못 받아주더라도 싫어하거나 멀리할 마음은 없다. 좋아하거나 곁에 두고픈 사람들은 그들대로 즐기는 삶일 테니까. 곰곰이 보자면, ‘나로서는 몸에 안 받지만, 둘레에는 다들 몸에 잘 받는 살림이나 밥이나 옷’이 퍽 많기에, 어려서부터 ‘좋고 싫고’를 가를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함부로 ‘좋다 싫다’를 따져서는 안 된다고 느끼고 배웠다. 어려서부터 못 읽는 소리에 못 부르는 노래가 넘치다 보니 ‘말을 잘 못 하거나 글을 잘 못 쓰는 이웃’을 마주할 적에는 이웃님 마음속을 헤아리고 읽는 데에 스스로 더욱 기운을 들였구나 싶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숲노래 씨를 처음 볼 적에 팔뚝이나 허벅지에 힘살(근육)이 많아서 “어디서 운동하셨어요?” 하고 묻는데, 숲노래 씨는 집안일과 손빨래를 하고, 아이를 업고 안고서 돌보았으며, 지게처럼 책짐을 짊어지고 나르기를 1982년 어린이일 적부터 했다. 어린이로 살던 때부터 어머니하고 저잣마실을 함께 가서 두 손하고 등짐에 살림거리를 이고 지고 들면서 날랐고, 겨울에는 땔감도 언니하고 두 손으로 낑낑낑 나르면서 보냈다. 그저 손으로 일하고, 발로 걷고, 등으로 지고, 몸으로 맞아들여서 하노라니, 힘살이 저절로 팔다리에 붙을 뿐이다. 덧붙인다면, 쇳덩이(자동차)를 안 몰기에 두바퀴(자전거)를 몬다. 언제나 신나게 두바퀴를 달리기에 힘살이 또 붙을 수 있다. 이러저러하다 보니, 누가 이쪽을 좋아하든 저쪽을 좋아하든 언제나 시큰둥하게 사이에 서서 지켜보았다. 누가 저쪽으로 몰리든 이쪽으로 쏠리든 늘 심드렁하게 가운데에 서서 어느 길에도 끼지 않았다. 스스로 어느 하나를 좋아하려 한다면, ‘나를 뺀 숱한 사람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안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어느 하나를 싫어하려 한다면, ‘나를 뺀 숱한 사람들은 내가 싫어하는 것을 안 싫어할 수 있다’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중용·중도’라는 어려운 한자말을 쓰지 말자. 그저 ‘가운데·복판·사이’라는 쉬운 우리말을 쓰면서 생각하자. ‘가슴 = 가운 몸씨’이다. 우리 가슴이란 ‘가운데에 있는 씨앗을 이루는 몸’이다. ‘가슴 = 마음’이다. ‘복판 = 봄을 이루는 즐거운 수다판’이다. ‘사이 = 새’이다. 이쪽이나 저쪽으로 쏠리면서 뭘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물결이 되면, 누구나 어느새 ‘가슴·마음’을 등지고 ‘복판·봄·보다’를 등돌리고 ‘사이·새로움·멧새노래’를 잊어버리더라. 숲노래 씨는 책을 허벌나게 읽지만, ‘좋아하는 책이나 글님’이 아예 없다. 숲노래 씨는 어느 책을 읽든 ‘살펴보고 지켜보고서 배우는 책이나 글님’이 있을 뿐, 어느 누구도 안 좋아하고 안 싫어한다. 다만, ‘사랑하는 책이나 글님’은 있다. 하려면 사랑을 할 일이요, 하려면 살림을 할 일이며, 하려면 노래를 하고 놀이를 하면서 별빛잔치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양이를 다룬 만화책이나 개를 담은 사진책을 으레 장만하지만, 고양이도 개도 안 좋아하고 안 싫어한다. 이웃 숨결을 포근히 담아내는구나 싶으면 장만해서 읽을 뿐이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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