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북 PE (1disc)
볼프강 라이트만 감독, 필 해리스 외 목소리 / 월트디즈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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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브이디는 아직 안 나왔기에 다른 만화영화에다가 이 글을 붙인다.


..


숲책 (정글북)

The Jungle Book, 2016



  디즈니 만화영화를 바탕으로 새로 나온 영화 〈정글북〉을 아이들하고 보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영화를 ‘글(책)’로 제대로 본 적이 없구나 하고요. 어릴 적에 디즈니 만화영화를 퍽 자주 텔레비전에서 보기는 했으되 그무렵에도 이 이야기를 책으로 읽을 생각은 거의 못했다고 깨닫습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마땅한 동화책이 없기도 했고, 그무렵 나온 해적판 같은 어린이책은 디즈니 만화영화를 간추린 책이기 일쑤였습니다. 이제서야 《정글북》이라는 이야기를 오롯이 옮긴 책을 찾아서 읽으니, 책하고 영화는 꽤 다릅니다. 모글리가 사람 사는 마을로 들어갔다가 나오는 대목도 크게 다를 뿐 아니라, 모글리가 범을 어떻게 죽이는가 하는 대목도 너무 크게 다릅니다. 이밖에 암늑대가 범한테 어떤 말로 윽박지르면서 모글리(‘새끼 개구리’라는 뜻으로 암늑대가 붙여 준 이름)를 지키고 보살폈는가 하는 이야기도 영화에는 안 나옵니다.


  2016년 새 영화 〈정글북〉을 보고 나서 ‘책을 쓴 사람들이 이녁 책이 영화로 나오는 일을 무척 안 좋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이기 때문에 책을 고스란히 옮길 수 없는 노릇이에요. 영화는 영화대로 새롭게 살려서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디즈니 영화 〈정글북〉을 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여러 짐승이 곧잘 춤노래를 즐깁니다. 모글리라는 아이 앞에서 춤노래를 보여주지요. 어릴 적에는 이런 대목이 퍽 시큰둥했는데, 이제 어른이 되어 아이들하고 이런 영화를 보면서 마주하는 춤노래를 다시 보니, 영화에서 흐르는 춤노래는 영화를 더욱 재미나거나 맛깔스럽게 해 주는 추임새로구나 싶습니다. 이러면서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들도록 돕지요.


  아무튼 2016년에 새로 나온 영화 〈정글북〉을 보는 내내 예전 디즈니 만화영화가 새록새록 떠올라서 예전 만화영화도 찾아서 함께 보았습니다. 두 가지를 보면서, 아니 2016년 영화를 보면서, 이 영화에 나오는 짐승들 몸짓이나 움직임이나 발걸음이 무척 어설프다고 느꼈습니다. 모글리도 ‘숲에서 걷는 걸음걸이’가 몹시 엉성하다고 느꼈어요. 맨손에 맨발인데 어쩐지 홀가분하지(자유롭지) 않다고 할까요. 무엇보다도 ‘늑대’와 ‘늑대 무리’ 살림을 더 잘 살리지 못했구나 싶어서 이런 대목을 아쉽다고 느낍니다. 참말로 사람들은 들짐승이나 숲짐승도 잘 모르지만, 이 가운데 늑대는 더더욱 잘 모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나도 늑대 이야기를 ‘책’으로밖에 알 길이 없습니다만, 아무 연장이 없이 오직 맨몸으로 숲에서 지내는 살림이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참말 숲에서 혼자 살며 짐승들 말을 알아듣는다’면 무엇을 할까 하고 되돌아보았어요. 나는 곰이나 늑대 말만 알아들을까요? 나무나 벌레나 꽃하고는 말을 섞지 못할까요? 숲에서 살며 숲을 배우고 숲을 사랑할 수 있는 살림이 된다면, 나는 숲에서 어떻게 삶을 지을 만할까요?


  빼어난 화면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일도 틀림없이 뜻이 있을 테지만, ‘화면’에 마음을 쓰듯이 ‘화면으로 담으려는 이야기’에 조금 더 마음을 쓸 수 있다면 〈정글북〉은 더욱 훌륭한 영화가 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른바 ‘원작’이 밝히는 속뜻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를 새롭게 살려 준다면 더욱 눈부실 테지요.


  ‘숲아이’는 ‘숲책(숲이라는 책)’을 늘 온몸으로 배우는 ‘숲살림’으로 하루하루 자라면서 ‘숲사랑’을 배웁니다. 숲아이가 ‘숲사람’으로 거듭나는 이야기가 바로 《정글북》이라는 책이 다루는 줄거리요, 이 줄거리를 놓친다면, 2016년 디즈니 영화는 그저 ‘화면’ 놀음 얼거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2016.6.22.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영화읽기/영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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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Bicentennial Man/Mission to Mars (바이센테니얼 맨/미션 투 마스)(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Walt Disney Video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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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센테니얼 맨
Bicentennial Man, 1999


  나는 200이라는 숫자가 꽤 마음에 듭니다. 아니, 마음에 든다기보다 문득문득 200이라는 숫자를 떠올립니다. 누가 200이라는 숫자를 말하기 때문에 내 마음에 남는다기보다는, 어느 때에 불현듯이 떠올라서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100이라는 숫자를 ‘온’으로 여겨서 빈틈이 없는 모습을 빗대곤 하는데, 나는 ‘한 온(100)’보다는 ‘두 온(200)’이라는 숫자가 마음이 끌려요.

  로빈 윌리암스 님이 훌륭하게 연기를 선보이는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을 보면서 처음에는 ‘바이센테니얼’이 무엇을 뜻하는지 딱히 살피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같은 느낌이나 생각을 품고 싶은 로봇이 나오는 영화로만 여겼거든요. 이러다가 ‘Bicentennial’이라는 영어가 “200년을 잇는”을 뜻하는 줄 깨닫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영화를 다시 들여다보니, 아하, 영화에 나오는 로봇은 바로 ‘200살 나이’를 살아요. 200살에 걸쳐서 사람살이를 지켜보는 동안 이 로봇은 이 사람살이에서 스스로 무엇을 품을 때에 ‘즐겁게 살림을 지을’ 만한가 하는 대목을 깨닫습니다.

  로봇은 부품을 제때에 갈면 목숨이 끊어질 일이 없습니다. 로봇한테는 죽음이 찾아올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없는’ 로봇으로서는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없어요. 로봇으로서는 ‘할 일’만 있으면 됩니다. 놀이도 아닌 일만 주어지면 됩니다. 로봇한테 가장 두렵다고 해야 할 대목은 ‘할 일이 없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200해가 아니라 2000해도 살 수 있는 로봇인데, 2000해에 걸쳐서 ‘할 일이 없다’면 얼마나 괴로울까요? 아마 미쳐서 날뛰다가 전쟁병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어느 모로 본다면, ‘할 일을 모르는’ 채 사는 사람은 살림을 짓거나 사랑을 짓는 길이 아니라 전쟁무기로 전쟁을 일삼으면서 끝없이 배를 채우려고 하는 데에 매달리기 일쑤입니다. 전쟁무기로는 전쟁무기밖에 끌어들이지 못합니다만, 수많은 정치권력은 전쟁무기에만 매달려요. 평화나 사랑이나 살림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권력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정치권력을 손에 거머쥔 이들은 이 정치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데에만 마음을 쓸 뿐, 어떤 삶이나 사랑이나 살림을 지을 적에 즐거운가 하는 대목에는 마음을 쓰지 않거든요.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 나오는 로봇은 ‘주어진 일’에 온힘을 쏟습니다. 게다가 온힘을 쏟던 어느 날 ‘생각하는 힘’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생각을 지어서 눈부신 길을 갈고닦을 수 있으며,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돈을 법니다. 다만, 돈을 아무리 벌어도 이 로봇은 ‘돈을 쓸 곳’이 없을 뿐이에요. 돈을 쓸 일이 없고, 돈을 쓸 생각이 없으니 엄청난 돈이 있어도 부질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로봇은 오랫동안 여행을 하지요. 여행을 하는 동안 비로소 스스로 깨달아요. 로봇이든 사람이든 꼭 한 가지 빠지거나 모자란 대목은 ‘사랑·삶·살림’인 줄, 따로따로 있는 사랑이나 삶이나 살림이 아니라, 이 세 가지가 하나로 엮은 꿈일 때에 비로소 ‘보람’이 있어서 ‘일을 할 뜻’이 있는 줄 깨닫습니다.

  죽을 까닭이 없는 로봇이지만, 사람들하고 어울려 사는 동안 이 로봇은 ‘사람들처럼 살기’를 바라면서 ‘죽음(늙음·노화)’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을 바랍니다. 웃고 울 뿐 아니라 아프고 괴로운 느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요. 바야흐로 ‘사람보다 사람다운 숨결’로 거듭나는 길을 걷습니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로봇이 아니기에 사람입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로봇하고 다른 사람으로서 하루를 짓습니다. 새봄을 맞이하고, 씨앗을 심고, 아이들을 돌보고,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살림을 가꾸고, 또 이 일 저 일을 하면서 가만히 돌아봅니다. 내가 바라는 200이라는 숫자는 한낱 200이 아닙니다. ‘내 온(내 모든 숨결)’이 ‘네 온(네 모든 숨결)’하고 만나서 어우러지기를 바라는 ‘두 온(200)’입니다. 200살을 사는 로봇인 ‘바이센테니얼 맨’은 ‘혼자서만 살 수 없다’는 대목을 깨달아서 ‘죽음으로 가지만, 막상 죽음이 아닌 삶으로 가는 길’로 씩씩하게 나아가려 합니다. 오롯이 사람이 되고, 옹글게 삶이 되며, 오순도순 살림이 되는 자리에서 빙그레 웃으면서 고요히 눈을 감습니다. 2016.3.2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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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Molly Moon And The Incredible Book Of Hypnotism (몰리 문의 놀라운 최면술 책)(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Arc Entertainment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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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문의 놀라운 최면술 책
Molly Moon: The Incredible Hypnotist, 2014


  갓난쟁이일 무렵부터 고아원에서 사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 아이들은 여러 가지 까닭 때문에 고아원에서 사는데, 제법 나이가 들 때까지 새 어버이를 만나지 못합니다. ‘입양’을 바라는 어버이는 좀처럼 이 아이들이 지내는 고아원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거의 꿈을 잃다시피 하면서 자라고, 이 고아원을 지키는 원장은 아이들을 괴롭히는 재미로 하루하루 산다고 할 만한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럴 수 있을까 싶지만 이 너른 지구별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과 삶과 살림이 있습니다. 응달진 곳에서 그림자에 가려진 채 하루하루 보내는 사람이 있고, 햇볕이 듬뿍 내리쬐는 곳에서 밝은 빛을 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저마다 왜 다 다른 나날을 보낼까요? 저지른 잘못이 커서? 짊어진 굴레가 커서? 갓난쟁이조차? 어린이조차? 어릴 적부터 사랑받지 못한 채 큰 어른까지?

  ‘몰리 문’이라는 아이는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아이를 ‘동무’로 둡니다. 고아원에서 어떤 아이들은 ‘문’하고 ‘로키’를 ‘남자친구·여자친구’라고 가리키지만 ‘문’하고 ‘로키’는 서로 ‘동무(친구)’로만 여깁니다. ‘이성친구’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사이’로 여겨요.

  영화 〈몰리 문〉에 나오는 아이 ‘몰리 문’은 책읽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여러 까닭이 있을 텐데, 고아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나 놀이가 없고, 책은 깊은 밤에도 빨래방(세탁실)에 몰래 들어가서 조용히 즐길 수 있기도 합니다. 고아원 원장은 책조차 좋아하지 않아서 고아원에는 책마저 없지만, 문은 마을도서관에서 몰래 책을 빌려서 밤새 빨래방에서 읽어요.

  이러던 어느 날 몰리 문은 ‘최면술’을 다루는 책을 만납니다. 책을 좋아하던 몰리 문은 ‘최면술’ 책도 찬찬히 읽었고, 이 책을 읽는 동안 ‘눈결(눈에서 흐르는 기운과 빛)’로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따라 움직이는’ 길을 익힙니다. 눈힘을 키우는 셈인데, 이 최면술은 그리 어렵지 않으면서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이 영화에서 나오는 최면술은 ‘다른 사람을 내 마음에 맞추어 움직이도록 이끌’려면, ‘나부터 다른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똑바로 읽어서 내 마음에 담아야’ 하거든요. 다시 말하자면, 최면술을 걸려면 나는 너하고 ‘서로 다른 마음인 줄 먼저 알아’야 하고, 이 다음에는 ‘서로 다른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데에 온힘을 쏟아’야 합니다. 두 마음이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이 다시 두 마음으로서 다른 두 사람 몸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놓아 주어야 해요.

  곰곰이 따지자면 최면술하고 ‘동무로 사귀기’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 가지 모두 ‘마음읽기’로 이루는 삶이니까요. 다만, 최면술은 내 마음대로 너를 움직이기만 할 뿐이요, 동무로 사귀는 삶이란 서로서로 홀가분하면서 사랑스럽고 즐거이 마음이 흐릅니다.

  영화에 나오는 아이 ‘몰리 문’은 최면술을 익힌 뒤에 맨 먼저 ‘고아원 개’를 동무로 삼고, 다음으로는 ‘고아원 밥차림’을 맛있게 바꾸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할까요? 바로 고아원 원장 마음을 ‘착한 사람’이 되도록 ‘고아원 원장이 어릴 적에 따스하게 사랑받은 일을 떠올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심어 주어요.

  영화를 보다가 문득 놀랐어요. 그래요, 고아원 아이는 다 알아요. 고아원 원장이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닌 줄 알아요. 어쩌면 어릴 적에 크게 마음이 다친 적이 있어서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자꾸 괴롭힐는지 모르지요. 우리 사회에서도 짓궂거나 거친 짓을 일삼는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사랑 아닌 생채기를 받았을 수 있어요.

  고아원 아이 ‘로키’는 늘 노래를 부릅니다. 동무인 문이 ‘웃음’이라든지 ‘고아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노래를 부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은 노래를 불러요. 그리고 이 영화에는 ‘나를 믿어요(believe in myself)’라든지 ‘그들 스스로를 볼 수 있다면’ 같은 노래가 늘 흐릅니다. 영화에 나오는 ‘인기연예인(star)’이 부르는 노래에서도 똑같이 ‘나를 믿어요’가 되풀이돼요. “maybe, this time I'll be fine. maybe, this time will be mine.”이라는 주제노래를 가만히 곱씹어 봅니다. 이 삶은 나한테 괜찮아. 이 삶은 내 것이 돼. 2016.3.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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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
숀 레비 감독, 벤 스틸러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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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 살아 있다 : 비밀의 무덤

Night at the Museum : Secret of the Tomb, 2014



  한국에 〈박물관이 살아 있다〉라는 이름으로 극장에 걸린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찍은 미국에서 붙인 이름은 〈밤 박물관(Night at the Museum)〉입니다. 2014년에 나온 셋째 이야기는 “수수께끼 무덤”이지요. 밤에 살아나는 박물관이니 “박물관이 살아 있다”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해요. 또 이렇게 고친 이름이 한국 관객한테 조금 더 깊거나 넓게 파고들 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영화이든 이 영화를 찍은 이들이 이름을 어떻게 왜 붙였는가를 잘 살펴야지 싶어요.


  〈밤 박물관〉은 말 그대로 밤에 새로운 이야기가 흐르는 박물관입니다. 낮에는 수수한 박물관이지만, 밤에는 새로운 박물관이에요. 낮에는 밀랍이나 고무로 만든 인형이라 하더라도, 밤에는 숨결이 새로 깃들어서 깨어나는 목숨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밀랍이나 고무 같은 몸뚱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옷(몸뚱이)’을 입은 모든 님들은 ‘넋’이 깃들면서 새로운 숨결로 살아요.


  자, 우리를 한번 돌아봐요. 우리 몸은 살덩이랑 뼈랑 피와 물과 털로 이루어졌어요. 이러한 몸이 ‘우리’일까요? 아니면, 이 몸뚱이에 깃든 넋이 ‘우리’일까요? 우리는 머리카락을 놓고 우리라고 할 만한가요, 아니면 살점이나 얼굴 생김새나 뼈다귀나 손발톱을 놓고 우리라고 할 만한가요?


  조그맣거나 커다랗거나 돌이거나 쇠이거나, 그냥 이러한 껍데기(옷)일 적에는 그저 껍데기입니다. 이때에는 인형이라고도 하고 동상이나 석상이라고도 하지요. 그렇지만, 이 인형이나 동상이나 석상에 ‘넋’이 깃들어 새로운 숨결로 깨어나면, 이때에는 인형이 아니에요. 모두한테 이름이 새로 붙어요. ‘옥타’라든지 ‘렉시’ 같은 이름이 다 달리 있지요.


  우리 모습을 다시 헤아려 봐요. 우리는 ‘몸이라는 옷’을 입은 사람이에요. 〈밤 박물관〉에 있는 아이들은 밤에 깨어나면서 새로운 ‘이웃님’이 되지요. 서로 ‘몸을 이루는 틀’은 다르지만 ‘마음을 이루는 넋’은 같아요.


  〈밤 박물관〉 셋째 이야기를 보면, 이러한 바탕에서 ‘파란 숨결로 하늘을 가르면서 나는 별자리’가 첫머리에 나와요. 밤마다 모든 ‘죽은 것’을 ‘산 목숨’으로 바꾸어 주는 ‘금빛 수수께끼판’이 나오지요. 이 금빛 수수께끼판은 그저 달빛을 받으면 제 힘을 내요. 숨겨진 다른 것은 없어요.


  〈밤 박물관〉에서 ‘밤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저씨는 돈 때문에 이 일을 하지 않아요. 이 밤 경비원 아저씨는 ‘즐겁고 사랑스러운 꿈을 기쁘게 나누는 이웃님’이 있는 “밤 박물관”이 더없이 아름답다고 여겨서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밤 경비원 노릇을 하지요. 이 아저씨한테 대수로운 것은 대학교 졸업장이나 큰돈이 아니에요. 이 아저씨한테는 아름다운 이웃님이 대수롭고, 사랑스러운 동무님이 대단하며, 즐거운 ‘한집 사람(아들)’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 영화를 끝으로 더는 연기를 선보이지 못하는 로빈 윌리암스 님은 마지막에 우리한테 활짝 웃는 낯으로 해님을 바라보라는 말을 남깁니다. 이 말마따나 우리는 활짝 웃으면서 하루를 열고 하루를 살며 하루를 지을 노릇이에요. 웃음꽃일 때에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어요. 웃음꽃이기에 온누리에 아름다운 꿈을 심어요. 새롭게 뜨는 해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아침을 열지요. 고요히 지는 해님을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몸을 쉬고 마음을 달래지요.


  밤 경비원 아저씨는 ‘밤 경비원 아가씨’한테 이 경비원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 보람차면서 즐거운가 하는 살림짓기를 물려주었어요. 그리고, 영국에서 밤 경비원 아가씨로 일하는 그분은 미국으로 건너와서 ‘박물관 관장’을 하는 아저씨한테 ‘사는 기쁨’을 제대로 보여주지요.


  우리 함께 춤을 추어요. 삶은 춤이에요. 우리 함께 노래를 불러요. 삶은 노래이거든요. 웃고 노래하는 사람한테는 삶이 있을 뿐, 죽음이 깃들지 않아요. 웃고 노래하는 사람은 천 년도 삼천 년도 얼마든지 기다려요. 삶으로 깨어날 날을 언제까지나 기다려요. 2016.2.1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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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델마와 루이스
리들리 스콧 감독, 수잔 서랜든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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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1991



  한집에서 살기에 ‘한집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한집에서 살더라도 마음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남남’이에요. 멀리 떨어진 다른 집에서 살더라도 마음으로 이어지면 ‘한집 사람’이라고 할 뿐 아니라, 이때에는 ‘동무’도 되고 ‘이웃’도 되어요.


  이른바 주민등록등본에 함께 이름이 올라야 ‘한집 사람’이 되지 않아요. 법률로 따지는 뭔가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으로 서로 아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한집 사람’이에요.


  우리한테는 이웃이 있어야 할까요, 동무가 있어야 할까요, 곁에서 서로 지키거나 보살필 님이 있어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야 할까요, 우리를 바보처럼 다루는 사람이 있어야 할까요?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푸름이 나이에는 볼 수 없습니다. 스무 살 나이가 되면 볼 수 있어요. 영화에 나오는 몇 대목 때문에 푸름이한테는 이 영화를 보여주지 못할 만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몇 대목보다 훨씬 무시무시하거나 끔찍하다’고 할 만한 일이 아주 쉽게 일어납니다. 푸름이뿐 아니라 어린이도 ‘아홉 시 뉴스’뿐 아니라 ‘여느 연속극’만 보더라도 도무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하다 싶은 일이 버젓이 일어나는 모습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영화 〈델마와 루이스〉에 나오는 두 사람 ‘델마’와 ‘루이스’는 어떻게 살 적에 즐거웁다고 할 만할까요? 두 사람 곁에는 누가 어떻게 있을까요? 델마를 ‘아내’라는 자리에 둔 사내는 델마를 ‘곁님’처럼 여길까요? 아니면, 델마를 집안에 고이 모셔 두는 인형이나 노리개처럼 여길까요? 델마와 루이스를 둘러싼 숱한 사내는 이 두 사람을 ‘어떤 숨결’로 바라볼까요?


  기쁨으로 하루를 짓는 삶을 누리고 싶은 두 사람 델마하고 루이스는 이틀 동안 홀가분하게 나들이를 가려고 합니다. 이 나들이는 퍽 오랫동안 생각하고 살피고 챙겼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한테 다가서는 사내들은 추근거리기만 합니다. 사내들은 ‘재미’를 볼 생각이라고 말하기 일쑤입니다. 그렇다면 ‘재미’란 무엇일까요? 사내들만 재미를 보면 될 노릇일까요? 사내들은 이녁 어머니나 누이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를 한 번도 배운 일이 없을까요? 누가 사내들한테 ‘삶·사랑·살림·사람’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내들 스스로 삶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이며 살림이 무엇이고 사람이 무엇인가를 배우려 해야 하지 않을까요? 왜 수많은 사내들은 스스로 ‘삶·사랑·살림·사람’을 배우려 하지 않으면서 ‘재미’부터 찾을까요? 사내만 혼자 재미를 보면 되는 줄 아는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몸짓은 언제부터 뿌리를 내렸을까요?


  집안에 꽁꽁 갇혀서 지내야 하던 델마는 스스로 집안을 뛰쳐나온 뒤 차츰 ‘들바람’을 쐬면서 씩씩해집니다. 늘 똑같은 일만 해야 하던 루이스는 델마를 다독이거나 나무라다가 어느덧 스스로 ‘포근한 숨결’을 마음속으로 그리는 몸짓으로 거듭납니다. 두 사람은 차츰 ‘스스로 서는 사람’으로 달라집니다. 누가 누구를 챙겨 주거나 돌봐 주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 아끼고 어루만질 수 있는 삶으로 피어나려 합니다.


  다만, 수많은 사내는 이 두 사람 앞에서 ‘총을 들고’ 나타나지요. 사내들은 좀처럼 총을 내려놓을 줄 몰라요. ‘말로 하자’고 하면서도 손쉽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내입니다. ‘말로 하자’면서 으르렁거리듯이 달려들기만 하는 사내입니다. ‘말로 하자’면서 두 가시내를 잔뜩 둘러싸서 총으로 겨누기만 하는 사내입니다.


  델마하고 루이스는 꿈을 꾸고 싶습니다. 델마하고 루이스는 ‘목숨만 달랑달랑 붙은 채 끌려다니는 종살이’가 아니라, ‘스스로 삶을 지으면서 살림을 가꾸는 하루’를 누리고 싶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아름다운 밤’과 ‘아름다운 별’과 ‘아름다운 숲(그랜드 캐넌)’을 마주한 두 사람은 가슴 벅차게 오르는 눈물하고 웃음을 지으면서 두 손을 꼬옥 잡고 자동차를 힘껏 달려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총을 들지 않은 사내’ 한 사람만 델마하고 루이스가 어떤 마음인지를 읽지만, 사내 한 사람 힘으로는 델마하고 루이스를 붙잡지 못합니다. 사내들은 가시내가 없는 지구별(사회)이 어떤 모습이 될는지를 도무지 모릅니다. 2016.2.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영화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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