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는 마음


 일곱 살부터 열대여섯 살 아이들이 빙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들과 어른들한테 들려주던 ‘말을 살리는 글쓰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는 이오덕 선생님 제자가 아니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들어서 꾸린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글쓰기회) 회원도 아닙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신 다음 당신 글을 갈무리한 사람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오덕 선생님보다 이오덕 선생님 글을 훨씬 많이 꼼꼼히 읽어야 한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오덕 선생님이 손으로 원고지나 공책이나 수첩에 꾹꾹 눌러쓴 글을 하나하나 새겨 읽으며 타자로 옮겨야 한 사람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살았을 때 당신이 손수 적바림한 걸그림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정갈하게 글씨를 쓸 수 있다니 놀라우며 아름답습니다. ‘선생님 손글씨’는 어느 분 언제 글씨라 할지라도 이렇게 흔들리거나 치우치거나 날리지 않아야 한다고 새삼 느낍니다. 차분하면서 따스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선생 노릇을 하겠다고 깨닫습니다.

 나이가 열 살씩 벌어진 아이들을 한 자리에 앉히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터넷게임이나 막놀이나 막밥에 익숙한 아이들한테 삶과 말과 꿈과 일과 땀과 흙과 밥과 책이 살가이 얼크러진 글쓰기를 이야기하기란 참 까마득합니다.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른아침부터 낮까지 집일로 쉴 틈이 없습니다. 쌀을 씻어 불리고, 쌀을 냄비에 담아 불을 넣고, 반찬을 마련하고, 밥상을 차리고,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먹은 밥그릇 치우고, 이불을 걷어 털고,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제자리에 놓고, 아이 쉬를 누이고, 아이하고 복닥이고 하다 보니 빨래할 겨를마저 없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깨어나서 저녁에 아이가 잠들 때까지 집일 하는 사람은 책 한 권 한 줄이나마 훑을 말미를 얻지 못합니다.

 아이들 앞에 서서 말문을 엽니다. 한 시간 동안 말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문득, ‘아줌마들 수다’가 떠오릅니다. 아줌마들치고 할 말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할 말이 없을 수 있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할 말이 잔뜩 있을 아줌마들한테서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말뜻을 살피면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을 ‘수다’라 합니다. 아줌마들이 쓸데없이 말수가 많나 하고 갸우뚱갸우뚱하는데, 아줌마들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하지 않는 아저씨들이 엉뚱하게 이런 말을 짓지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다는 수다입니다. 쓸데없이 늘어놓는 말이란 수다입니다. 그러니까, 아줌마들이 터뜨리는 말물결이란 ‘이야기꽃’이라 이름을 붙여야 옳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줌마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들어 주고 제대로 말해 주는 이야기동무를 사귀고 싶습니다. 어찌해야 밥을 한껏 맛나게 차리고, 어찌해야 집 일손을 조금 줄이며, 어찌해야 말썽쟁이 아이들이 착하고 참다이 크도록 돌보면서 어버이로서 더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아버지란 자리에 선 사람치고 집일에 마음쓰거나 몸쓰는 이는 아주 드뭅니다. 그야말로 아주아주아주아주 드뭅니다. 집에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리는 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온 식구 먹을거리를 홀로 맡으며 날마다 차리는 가운데 도시락을 싸고 주전부리를 마련할 줄 아는 아버지란 몇이나 될는지요.

 밥 하나를 놓고도 아버지가 집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빨래는 어떨까요. 청소는 어떻지요? 아이키우기는 어떠한가요?

 아픈 옆지기가 깊은 밤에 혼자 보던 영국연속극 하나를 함께 봅니다. 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얘기입니다. 아이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경찰차가 들이받아 그만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아이 아버지는 바깥일(사진찍기)에만 마음을 썼을 뿐, 네 아이들이 어떤 동무하고 사귀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떻게 지내는지를 거의 알아채거나 헤아리지 못해 왔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보다 큰 날벼락이 없겠지요. 아이들한테 밥을 먹인다든지 집안을 쓸고닦는다든지 옷을 빨아 입힌다든지 하는 일거리 가운데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란 없어요.

 날마다 밥을 차리고 치우며 먹이면서 생각합니다. 아니,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옆지기가 몸이 안 아픈 사람이라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 끔찍합니다. 이럭저럭 집일을 거든다고 깝죽거리지 않았나 싶고, 이냥저냥 집일을 거들기는 할 테지만 ‘내 좁은 속알머리’에서 허덕이는 주제에 잘난 척을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니, 깝죽거림이나 잘난 척은 아닐 테지요. 내 깜냥껏 참말 힘을 쓸 텐데, 막상 ‘아이 어머니’들이 얼마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힘들거나 힘겹거나 슬프거나 아픈지를 하나도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받아들이기는커녕 느끼지조차 못하겠지요.

 반찬 한 가지 수월하게 금세 뚝딱뚝딱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을 들여야 하는지 아는 아버지는 아주 드뭅니다. 아이 기저귀를 눈 감고 척척 후다닥 새로 갈아 주기까지 얼마나 숱한 손길이 가야 하는지 아는 아버지는 몹시 드뭅니다. 걸레 한 장으로 몇 평을 말끔히 훔칠 수 있는지 아는 아버지는 매우 드뭅니다. 한두 시간이 아닌 스물네 시간을 한 해 내내 아이랑 복닥이면서 아이랑 어떻게 놀고 아이랑 어떻게 어울리며 아이랑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좋을는지를 아는 아버지는 너무 드뭅니다. 너무 적고 너무 없으며 너무 모자랍니다.

 글쓰는 아버지 가운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는 분은 몇이나 될는지요. 방송사에서 일하거나 신문사에서 일하는 남자들 가운데 여자들 넋을 살피는 이는 몇이나 있을는지요.

 선거권이 있다 해서 남녀평등인가요. 여자도 대학생이 되고 여자도 중장비 운전을 할 수 있으니 여남평등인가요. 아빠랑 엄마 성씨를 나란히 쓰면 여성해방이 되나요.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여성해방이 이루어지나요. 여성할당제란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가요. 《할아버지의 부엌》 같은 책이 아름다우면서 기쁘고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하기란 일본이든 영국이든 미국이든 프랑스이든 한국이든 꿈 같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할머니 부엌” 이야기를 귀기울인다든지 눈여겨본다든지 얼싸안는다든지 하면서 담아낼 일꾼 또한 없습니다. “할머니 부엌”은 그저 마땅할 뿐이니까 아예 책으로 낼 생각조차 안 합니다. 책으로 낸다 한들 읽을 사람이나 있을까 모릅니다. ‘임금님 밥상’이 아닌 ‘우리 아이 밥상’을 차리는 “할머니 부엌” 이야기책을 엮도록 마음을 들이고 사랑을 쏟을 책마을 남자 편집자는 있기나 하나요. 아니, 여자 편집자 가운데에도 있기나 하나요.

 집살림 도맡으며 첫딸을 서른두 달째 보살피는 나날을 보내며 두 손바닥은 거칠다 못해 뭐에 찔려도 아픔을 못 느낄 만큼 딱딱해집니다. 아이는 아빠가 손바닥으로 제 손을 비비거나 얼굴을 쓰다듬으면 ‘아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빠는 아이한테 “벼리를 먹여살리고 키우느라 아빠도 손이 아파.” 하고 말합니다. 이때 아이는 눈알을 빛내며 “아빠 손 아야 해?” 하면서 앙증맞은 손으로 아빠 손을 쥐고는 자그마한 입을 모아 호호 붑니다. 날마다 아이랑 밥을 먹으면서 자꾸 딴짓을 한다고 골을 부리는 아버지입니다만, 날마다 새롭게 기쁜 마음으로 밥을 차립니다. 애 엄마가 아픈 사람이라 애 아빠가 삶을 비로소 배우며 더없이 고맙다고 느낀다고 말할 때에 내 둘레에서 이 얘기를 알아듣는 사람은 아직 세 사람만 보았습니다. 그나마 세 사람은 모두 할머니입니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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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과 글쓰기


 깊고 깜깜한 밤, 잘 자던 아이가 갑자기 일어섰다. 왜지? 애 엄마가 무어라 말하니 아이는 다시 눕는다. 갑자기 일어서기 앞서 아빠 가슴 께로 슬슬 기어오르기도 했는데, 털푸덕 하고 엎어진다. 숨이 좀 가쁘다. 아이가 제법 컸기에 꽤 무겁다. 기저귀가 젖어서 일어났나 싶어, 아이를 살살 들어 옆으로 누인 다음 만진다. 젖었다. 기저귀싸개를 풀어 젖은 기저귀를 뺀다. 이불을 덮고 젖은 기저귀는 치운 다음 새 기저귀를 가져와서 댄다. 바지를 다시 입히고 이불을 잘 덮어 토닥토닥하니까 새근새근 잠이 든다. 여러 해 익숙한 일이라 어두운 방에서 눈을 감고 이 모든 일을 한다.

 바깥이 훤하다. 무슨 빛이 이렇게 들어오나 싶어 궁금하다. 벌써 새벽이 다가오는가 생각하며 마당으로 나와 쉬를 눈다. 달이 아주 밝다. 설이 가깝다고 문득 깨닫는다. 겨우내 이토록 밝은 달은 보지 못했다. 한 해 가운데 달이 가장 밝은 날은 대보름이랑 설날이다. 이맘때 이토록 고운 달빛이란 다른 때에는 구경할 수 없다. 그런데 설을 앞둔 보름달 빛깔도 참으로 밝으며 곱구나. 아무렴, 설을 지나고 대보름을 지났어도 달빛은 한동안 이토록 밝으면서 고왔는걸. 대보름을 앞둔 반달이나 대보름을 지난 반달 또한 이렇게 밝으며 고운걸.

 나한테 설날이란 명절이라는 이름도 있으나, 한껏 달아오르던 겨울이 비로소 잠을 자는 때가 다가온다는 뜻도 있다. 길디길던 겨울이 올해에도 이렇게 저무는구나 하고 깨닫는 설날이다. 참말, 설날이 찾아오면 어느 하루 꽁꽁 얼어붙지 않던 날이 없어 날마다 기름 걱정 물 걱정 집안 걱정을 하던 나날을 마감할 수 있을까. 달력이 아닌 달빛으로 느끼는 설부터는 우리 집살림을 조금이나마 알뜰살뜰 꾸리거나 여미는 슬기로운 애 아빠로 살아갈 수 있을까.

 몸뚱이에 찬바람을 묻혀 방으로 들어와서 셈틀 앞에 무릎 꿇고 앉는다. 나는 글을 쓸 때에 늘 무릎을 꿇는다. (4344.1.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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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2.21. 

서울 종로구 사직동 한켠에 '새마을 문패'가 남은 곳이 있다. 집 생김새나 문패나 무엇으로 보나 문화재이다. 서울시에서 이 집 분들한테 겨울날 따스히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이 집 모양을 고이 건사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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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맙게 글쓰기


 며칠 동안 아이하고 몹시 복닥이며 집일로 지치는 바람에 글을 거의 못 썼다. 글조각은 붙잡지만 정작 쓰려 하던 글이나 막상 써야 할 글은 못 쓰며 지냈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날 보내고 난 오늘 새벽에 글 하나 붙잡으면서 문득 느낀다. 힘든 나날을 보내기에 힘든 나날 힘든 손길이 글로 고스란히 옮겨진다. 나만큼 힘들다거나 나보다 더 힘들다거나 나와 비슷하지는 않을지라도 여러모로 힘들 사람들 삶결에 따라 책이나 사진이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헤아리면서 글을 쓴다.

 몸으로 힘들게 살아내지 않고서 머리만 굴려 글을 쓸 때에는 나부터 썩 좋아할 만한 글을 쓸 수 없다. 나는 내 삶을 글로 꾸밈없이 적바림할 때에 즐겁다. 내 삶이 힘겹든 벅차든 고되든 내가 살아가는 결을 사랑하면서 글을 써야 내 글을 내가 사랑할 만하다.

 입으로 떠드는 글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하는 글이 좋다. 이론으로 재거나 따지는 글이 아니라 살내음 묻어나고 살내음 나누는 글이 좋다. 따지고 보면, 나는 내가 쓴 글이라서 내 글을 좋아할 수 없다. 참다이 쓰거나 착하게 쓰거나 곱게 쓴 글이라면 내가 쓴 글이든 옆지기가 쓴 글이든 다른 어느 누가 쓴 글이든 좋다. 글은 글로 읽을 뿐이요, 책은 책으로 만날 뿐이며, 사람은 사람으로 살필 뿐이다.

 엉터리로 살아가며 엉터리로 글을 쓰는 사람이 아주 많다. 이들 엉터리 가운데에는 헌책방을 깎아내리는 글을 쏟아낸다든지 헌책방 맛과 멋을 하나도 모르는 채 어설피 글솜씨를 부리는 이들이 꽤 많다. 이들은 스스로 제살을 깎는 줄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헌책방이라는 책쉼터에서 얻거나 누리거나 나눌 아름다움은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스스로 슬프게 살며 슬픈 글로 슬픈 몸짓을 하는 셈이다. 이들은 엉터리로 살며 엉터리로 글을 쓰기에 엉터리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몹시 소름이 돋는다. 이 소름은 이들 엉터리 때문에 돋지만은 않는다. 나 또한 언제라도 이들과 같은 엉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지 않거나 내 가슴을 착하게 쓰다듬지 않거나 내 사랑을 따스히 보살피지 않는다면, 나부터 바로 오늘부터 엉터리 떠벌쟁이나 어설픈 글쟁이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고맙다. 모든 글은 고맙다. 모든 책은 고맙다. 모든 하루는 고맙다. 그렇지만 힘들기는 참 힘들다. 엉터리 사람들이 힘들게 몰아세우고, 엉터리 글로 눈알이 어지러우며, 엉터리 책 때문에 살가운 책들이 묻히니 안쓰럽다. 그래도 오늘 아침 또한 새삼스레 맞이하며, 쌀을 불려 밥냄비에 안치고 아이랑 새롭게 복닥이며 밥을 먹일 테며,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살짝 마실을 다녀와야지. 힘드니까 힘들게 산다. 가난하니까 가난하게 산다. 책을 좋아하니까 책을 좋아하며 산다. 아이와 옆지기를 사랑하니까 아이와 옆지기를 사랑하며 산다. 엊저녁에는 몹시 힘들고 지친 나머지 형광등 불빛이 너무 따가워 큰방에서 혼자 뻗고 말았다. 살짝 눈을 붙였다가 식구들이 잠들면 작은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그만 새벽 네 시 오십 분까지 죽은 듯이 곯아떨어졌다. 그래도 고맙게 보낸 하루요, 고맙게 새로 여는 하루이다. (4344.1.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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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멧새와 글쓰기


 새벽나절 살짝 흩뿌리다 그친 눈이 아침이 되며 솔솔 내린다. 뒷간으로 똥을 누러 다녀온다. 똥을 누며 생각한다. 서울에서 살다 시골로 옮겨 살다가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서 살던 때에는 눈을 바라보면서 ‘헌책방과 눈이 만나는 이 날씨를 사진으로 담아야지.’ 하고 생각했고, 인천에서 지내다가 시골로 거듭 옮겨 온 오늘은 ‘골목길과 눈이 마주하는 이 날씨를 이제는 사진으로 못 담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으로 어느 날엔가 꼼짝없이 드러누우면서 지내야 한다면 ‘멧골집과 눈이 어우러지는 이 날씨를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겠다고 느낀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내 살가운 사람들하고 복닥이는 나날과 날씨와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야 한다.

 콧물을 줄줄 흘리는 아이한테 이불을 뒤집어씌운다. 사진기를 목에 건다. 아이를 한팔로 안는다. 마당으로 나와 함께 눈을 맞는다. 조금 걷는다. 눈이 소리없이 내린다고 아이한테 말을 하다가는, 이내 말을 고친다. “음, 눈은 눈이 오는 소리를 내면서 오겠구나.”

 눈발이 날리는데 멧새는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지런히 난다. 멧새는 먹이를 얼마나 찾을 수 있을까. 멧새는 깃털로 따스하다지만 자그마한 몸둥이를 덥히자면 가만 있을 수 없겠지. 날이 더 차고 얼음겨울이 풀리지 않는다면 작은 멧새는 모조리 얼어죽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4344.1.1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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