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마당에서 읽은 책 2017.9.24.


가을볕이 깊고 짙다. 마당 한켠 초피나무는 열매를 잔뜩 맺는다. 틈틈이 훑어서 평상에 놓아 말린다. 무화과도 날마다 열매를 잔뜩 베푼다. 우리가 먹으면 우리 몸을 살찌우고, 우리가 안 먹으면 벌이랑 새랑 개미랑 딱정벌레랑 이 가을에 기운을 얻으려고 신나게 먹는다. 언제 장만해 놓았는지 잊은 채 책꽂이에 모셔 둔 그림책 《곤충화가 마리아 메리안》을 집는다. 이 멋진 그림책은 그리 알려지지 못한 듯하다. 이 그림책이 다룬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라는 사람도 그리 안 알려졌지. 이녁이 쓰고 그린 《곤충·책》이라는 책이 2004년에 나온 적 있는데 부디 판이 안 끊기면서 꾸준히 사랑받을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이다. ‘마리아 메리안’이 열세 살 적에 무엇을 했는가를 다룬 그림책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열세 살에 스스로 꿈을 키우면서 스스로 이 꿈을 가다듬으면서 북돋운 손길이란 얼마나 다부지면서 멋진지. 열세 살이란 참 놀라운 나이로구나 싶다. 열두 살도 열네 살도 놀라운 나이일 테고.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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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마당에서 읽은 책 2017.9.23.


거의 500쪽에 이르는 문학비평 《비어 있는 중심》을 책상맡에 두고서 생각한다. 나는 왜 이 무시무시한 문학비평을 읽으려 하는가? 이 두툼한 책을 읽어서 무엇을 얻는가? 문학비평이라는 이름이 붙은 책 가운데 내 가슴에 남은 책을 돌아보면 고등학교 2학년에 읽은 《민중시대의 문학》(염무웅)이 처음이고, 대학교를 그만두기 앞서 엉터리 강의를 견딜 수 없어서 교수가 보는 앞에서 강의실 문짝을 꽝 닫고서 골마루에서 가을바람을 쐬며 읽은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이 둘째이다. 큰아이를 낳고서 날마다 기저귀 빨래로 춤추는 동안 틈틈이 읽은 《시와 혁명》(김남주)을 셋째로 꼽을 수 있다. 이만 한 책이 되어야 문학평론이라는 이름이 걸맞으리라 생각한다. 《비어 있는 중심》은 글쓴이가 김정란 님이기에 집어든다. 밥상을 차려 아이들끼리 먹으라 하고서는 평상에 모로 누워서 읽는다. 이튿날 마루 모기그물문을 바느질로 기우고 나서 다시 평상에 앉아서 읽는다. 가을은 낮볕이 매우 뜨겁다. 나락이 여물도록 내리쬐는 이 가을볕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큰아이는 여느 때에 인형 옷을 짓던 바늘놀림으로 일손을 거든다. 작은아이는 그냥 재미 삼아서 성글게 바늘놀이를 한다. 두 아이 손짓이 재미나다. 나는 모기그물문을 저녁에 마주 기우기로 하고서 밥을 지어서 차린다. 이러고 나서 다시 마당에 앉아 《비어 있는 중심》을 마저 읽는다. 두툼한 책인데 생각 밖으로 이틀 만에 끝까지 읽는다. 책에 붙은 이름처럼 두 고갱이, ‘빔 + 복판’을 고요히 돌아본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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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군내버스에서 읽은 책 2017.9.21.


도화중학교를 다녀온다. 도화중학교 1학년 푸름이하고 ‘장래취업탐방’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도화중학교에는 1학년이 모두 열다섯 있다고 한다. 참 작지. 세 학년을 통틀어도 쉰 아이가 되기 힘들겠네. 요즈음 시골 중학교를 헤아리면 읍내 아닌 면소재지로서는 그럭저럭 푸름이가 있는 곳이라 할 만하다. 이곳 열다섯 아이 가운데 ‘사전 쓰는 이(사전 집필자)’라는 일을 궁금하게 여기는 아이가 있다. 나는 이 아이하고 둘이서 사십 분을 아주 짧으면서 굵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가 거짓말을 할 까닭이 없이 알고 겪고 살고 일하는 대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우리 친구가 사전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더라도, 나중에 이 일로 일자리를 잡을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사전을 쓰는 사람이 들어갈 곳은 한 곳도 없거든요. 몇 해에 한 사람을 뽑을까 말까 하니, 아예 처음부터 일터를 찾을 생각을 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이런 길을 걸어온 사람이 코앞에 있으니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어요. 남이 짓는 사전을 돕는 곁일꾼이 아닌, 스스로 사전을 짓는 일꾼이 될 수 있어요. 다만 이렇게 하자면 적어도 열 해는 모든 낡은 버릇을 버리면서 새로 배우는 날로 삼아야 해요. 스스로 열 해를 새롭게 배우려 하면 얼마든지 스스로 새 사전을 쓸 수 있어요.” 읍내 우체국에 가서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거의 마지막 교정종이’를 서울로 부쳐야 한다. 시월 둘째 주에 책이 나오려면 이주에는 서울로 부쳐야 하기에 서두르려 한다. 도화중학교에서 진로상담 시간을 기다리며 교정종이를 백쉰 쪽쯤 보았고, 이곳에서 읍내 우체국까지 포두파출소 소장님 차를 얻어타고 가는 길에도 스무 쪽쯤 보았다. 이렇게 해서 우체국에 닿기 앞서 끝! 우체국 바로 앞에 아주 깨끗하고 큰 상자 하나가 버려졌기에 고맙게 주워서 커다란 교정종이를 담는다. 무게를 달아 보니 5킬로그램이 넘는다. 엄청난 사전을 곧 새로 내는구나 하고 스스로 돌아본다. 구워서 먹을 고기를 한 근 장만해서 군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웃 봉서마을에서 내려 걷는다. 시골에서는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를 타기 어렵지만, 이웃마을로 지나가는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번 있어서, 이 버스를 타면 삼십 분을 걸어야 하더라도 집에 돌아갈 수 있다. 들길을 걸으면서 느긋하게 책을 읽는다. 한 손에는 저자마실을 한 꾸러미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책을 쥔다. 《맛의 달인》을 찬찬히 읽는다. 111권까지 나온 이 만화책을 1권부터 읽어 보기로 한다. 이 오래된 긴 작품에 깃든 맛이란 멋이란 삶이란 사랑이란, 그리고 이 모두를 잇는 사람이란 무엇인가 하고 돌아보면서 읽는다. 집에 닿아서 고기부터 굽는다. 고기를 구워 밥상을 차린 뒤에 비로소 씻는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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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밥하면서 읽는 책 2017.9.22.


밥을 짓는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는다. 하루 두 끼니 짓기에 밥 한 끼니를 짓고 나서 쉴 겨를이 있다. 하루에 세 끼니 밥을 짓는다면 쉴 겨를이 있을까? 아마 조금도 없으리라. 밥을 지어 밥상을 차리면 밥상맡에 앉기 힘들다. 되도록 빨리 그릇을 비운 뒤에 자리에 눕고 싶다. 밥을 다 짓고서 아이들하고 밥상맡에 둘러앉아서 도란도란 차분하게 수저를 들며 말꽃을 피울 줄 아는 어버이란 얼마나 대단한가 하고 돌아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직 너무 많은 사내가 밥살림을 모른다. 만화책 《엄마 냄새 참 좋다》에도 이런 이야기가 여러모로 흐른다. 곁에 있는 살가운 한집 사람 권리나 인권이나 평등이나 평화를 헤아리지 못하는 사내 모습이 언뜻선뜻 비친다. 허울뿐인 아버지뿐 아니라 철거용역 깡패 노릇을 하는 사내도, 미혼모한테 아기를 떠넘기고 사라진 미혼부도, 가시내를 깔보는 숱한 사내도, 손수 밥을 지어서 먹는 살림을 꾸린다면 무언가 좀 달라질 수 있을까. 어쩌면 사내들은 밥상맡에 앉아서 수저질은 할 줄 알아도, 정작 부엌에서 밥살림을 지을 줄 모르기에, 아직 이 땅에 참다운 평등이나 평화나 인권은 너무나 먼 나라 이야기일 수 있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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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시선집
박남준 지음 / 펄북스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떡국 한 그릇을 나누고 싶은 사이. 송편 한 점을 나누려는 사이. 잡채나 국수 한 접시를 주고받는 사이. 쌈짓돈을 빌려주고 빌리는 사이. 아이들이 제 집처럼 드나드는 사이. 처마 밑에 제비집을 두는 사이. 상냥히 웃음을 건네는 사이. 따사로이 오가는 말에서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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