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 책넋 돌보기

39. 새로 읽는 책, 다시 읽는 책



  누구나 저녁을 맞이하고, 누구나 밤을 보내며, 누구나 새벽을 맞이합니다. 누구나 아침을 열고, 누구나 한낮 햇볕을 쬐며, 누구나 하루 내내 바람을 마십니다. 흐르는 시간을 멈춘 채 잠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흐르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똑같이 흐르는 시간을 타면서 하루하루 지내요.


  똑같은 하루는 없습니다. 해와 달과 날이 늘 다릅니다. 언제나 다르게 흐르는 하루이고, 늘 다르게 찾아오는 아침이자 낮이며 저녁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을 수 없고, 오늘과 모레가 같을 수 없어요. 우리는 노상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면서 삶을 꾸린다고 할 만합니다.


  똑같은 하루는 없지만, 똑같은 하루인 듯이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달력에 적힌 날짜는 다르지만 어제와 오늘 이곳에서 하는 일이 똑같기 때문입니다. 철마다 날씨가 달라도 봄이건 여름이건 똑같은 일을 똑같은 때에 똑같은 곳에서 해야 한다면, 철이 달라도 달라지는 줄 못 느낄 수 있어요. 이를테면,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어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한 해 내내 똑같은 기계를 손에 쥐고 똑같은 물건을 찍어야 합니다. 버스나 기차를 모는 사람도 한 해 내내 똑같은 길을 몰아야 합니다. 비나 눈이 온다면 날씨가 다를 뿐, 해야 하는 일은 똑같아요.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떠할까요? 학교를 오가는 하루는 날마다 똑같을까요? 날마다 똑같은 수업이고 똑같은 공부이며 똑같은 시험일까요? 똑같은 시험문제를 똑같이 외워서 똑같이 ‘안 틀리고 다 맞히도록 몸을 길들이는’ 하루를 보내는가요?


  리 호이나키 님이 에스파냐에서 ‘카미노 걷기’를 한 이야기를 담은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달팽이,2010)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걷기’는 오늘날 온 지구별을 두루 가로지르면서 퍼지는 ‘문화’가 됩니다. 한국에서도 제주 올레길 같은 시골길을 ‘오직 두 다리에 기대어 걸어서 다니는 나들이(여행)’를 아름다운 문화로 여기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아무래도 오늘날에는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이 매우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걷기 여행’이 따로 생겼다고 할 만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예전에는 여행이든 마실이든 누구나 으레 두 다리로 걸으면서 다녔거든요. 멧등성이를 타거나 봉우리를 오를 적에도 스스로 걸어서 다녔고, 옆마을에 가든 먼 곳까지 가든 마땅히 걸어서 다녔어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경제생활이다.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타야 하고, 그럼으로써 대지는 파괴된다. 또 그런 자동차에 실어 나르는 것에 의지하면 할수록 땅은 점점 더 황폐해진다. 이것에 대해서 좀 다르게 생각할 수 없을까? 한정된 자연을 되살리는 방향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152쪽)?” 같은 이야기를 짚어 봅니다. 자동차를 타기 때문에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두루 타는 오늘날 ‘따로 걸어서 다니는 여행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자동차만 타서는 여행이나 운동이 안 되는 줄 알아차리는 사람이 생겼다고 할까요. 자동차는 이곳에서 저곳까지 내 몸을 빠르게 옮겨 주는 구실을 톡톡히 하지만, 이곳과 저곳 사이에 있는 수많은 삶을 찬찬히 바라보지 못하도록 막는 구실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자동차는 ‘교통’으로서 빠르게 다니도록 돕지만, 빠르게 다니는 만큼 삶읽기하고는 동떨어지는 셈입니다. 자동차를 타면 탈수록 이웃하고 멀어집니다. 자동차를 달리면 더 먼 곳까지 오갈 수 있으나, 바로 옆에 있는 이웃하고 만날 틈은 없어요. 자동차를 타면 한식구가 어디이든 수월하게 다닐 수 있으나, 막상 자동차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는 어려워요. 자동차에서는 ‘서로 얼굴을 마주볼’ 수 없으니까요.


  “텔레비전은 사람들이 직접 할 수 있는 것에서 멀어지게 설계되어 있다. 그런 계략 때문에 당신이 직접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고 듣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텔레비전이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아닐까 한다(83쪽).” 같은 이야기를 짚어 봅니다. 텔레비전과 손전화가 있어서 우리는 누구나 ‘내 방에 앉아’ 온갖 일을 할 수 있고, 온갖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굳이 집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텔레비전과 손전화만 있으면 걱정이 없어요. 그러나,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남 이야기’만 들여다보느라 ‘내 이야기’를 손수 짓는 길하고 멀어져요. 손전화를 켜서 목소리만 주고받는 사이, 내 동무와 이웃하고 숨소리를 느끼면서 바람과 햇살과 하늘과 땅을 함께 살피는 길하고 멀어집니다.


  “새로 지은 최근 건물들은 모든 것이 엄격하게 표준화되어 있다.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하지만 옛 건물들을 인간의 손으로 직접 지은 것이다 … 오늘날 임금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건축 자재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그러나 예술적 재능과 상상력을 겸비한 옛날 장인들은 끊임없이 돌 하나하나를 짜 맞춰 하나의 전체를 만들어 냈다(438∼439쪽).” 같은 이야기를 짚어 봅니다. 학교에서 모든 교실은 똑같이 생깁니다. 다르게 생긴 교실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입히려는 옷은 모두 똑같습니다. 크기만 다를 뿐 모든 학생은 똑같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머리카락 길이마저 똑같이 맞춥니다. 가슴에 붙이는 이름표는 다를 테고, 얼굴 생김새나 살빛은 조금씩 다를 테지만, 멀리서 보면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요새는 너나 할 것 없이 ‘흰 살결’이 되려고 애씁니다.


  우리한테는 똑같은 하루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한 해 삼백예순닷새는 모두 다른 날이고, 한 해가 지나면 새로운 해가 찾아옵니다. 열세 살 나이는 꼭 한 번이고, 열여섯 살 나이도 꼭 한 번입니다. 어른도 서른 살이나 마흔 살이나 쉰 살은 꼭 한 번만 누립니다. 우리 모두 어느 하루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다니는 길은 서울이나 부산이나 거의 똑같이 생깁니다. 학교와 회사와 가게도 어디나 거의 똑같이 생깁니다. 교과서와 텔레비전과 손전화에 나오는 이야기도 어느 고장이든 다 똑같습니다. 아파트도 똑같이 생기고, 자동차도 똑같이 생겨요. 고속도로도 똑같이 생기고, 책방도 똑같이 생기며, 빵집이나 찻집이나 닭집조차 ‘똑같은 이름이 걸린 가게’만 퍼집니다. 빵집지기마다 다 다른 손맛을 살려서 빚는 빵을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날입니다.


  예전에는 시골이나 도시 모두 ‘다 다른 길’이었습니다. 마을사람이 손수 닦은 골목이나 고샅은 마을마다 다 다른 모습이며 얼거리였어요. 시골 논밭도 땅에 따라 다 다른 모습이었고, 살림집과 마당과 꽃밭도 사람마다 다 달리 가꾸었어요. 오늘날에는 시골 논밭을 거의 똑같은 네모난 틀로 짜맞추었고, 집을 손수 짓는 사람이 거의 사라져서, 건설업자가 똑같이 만든 집을 돈만 치러서 장만하거나 빌립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이 스스로 조금씩 깨닫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숨결이고 사람인데, 학교와 사회와 마을 어디에서나 ‘똑같은 틀’로 우리를 가두려 한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여행을 다녀도 자동차나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먼 곳을 훌쩍 다녀오는 틀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천천히 걸으려 합니다. 누군가는 더 빨리 걸을 수 있고 누군가는 더 느리게 걸을 수 있어요. 걷다가 끝까지 못 갈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저 걷고, 걷는 만큼 느긋하게 둘러보면서, 아늑하게 생각을 키우려 하지요.


  똑같은 책은 없습니다. 모든 책은, 이 책을 손에 쥐어 읽는 사람들 마음씨와 눈길과 생각에 따라 ‘다 다르’면서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가 됩니다. 새롭게 읽으면서 새롭게 살고, 다시 읽으면서 내 넋을 다시금 가꿉니다. 4348.4.1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과 함께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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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책사랑 도란도란

52. 책 하나로 삶을 빚다



  바람을 마시면서 삽니다. 어른도 아이도 바람을 마시면서 삽니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바람을 마시면서 삽니다. 튼튼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바람을 마시면서 삽니다. 몸을 고치려고 밥을 끊는 사람이든, 뜻을 이루려고 밥을 굶는 사람이든, 늘 바람을 마십니다. 사막에서 물 한 모금 못 마시면서 걷더라도 늘 바람을 마십니다.


  사람과 짐승과 벌레 모두 바람을 마십니다. 풀과 꽃과 나무도 바람을 마십니다. 물을 며칠쯤 마시지 못해도 말라죽지 않으나, 바람 한 줄기를 못 마시면 곧바로 말라죽습니다.


  지구별에서 사는 모든 목숨한테는 바람이 가장 대수롭습니다. 바람을 하루가 아닌 한 시간이 아닌 한 초조차 누리지 못하면, 모든 목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맙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지구별에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마음을 기울일 대목은 ‘바람’입니다. 내 보금자리는 내가 가장 맑으면서 싱그러운 바람을 마실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바람을 정갈하게 지키면서 푸르게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바람을 망가뜨리면 함께 죽습니다. 바람을 더럽히면 콜록거리다가 숨이 끊어집니다.


  한자말로는 ‘생명’이라 하지만, 한국말로는 ‘목숨’이라 합니다. ‘목에 깃드는 숨’이고 ‘목으로 드나드는 숨’입니다. 목으로 숨을 쉬지 않으면 죽는 몸이 바로 ‘목숨’인 사람입니다. 또, 한자말로 ‘공기’라 하지만, 한국말로는 ‘바람’입니다. 늘 흐르는 바람결이고, 이 바람결을 몸으로 받아들일 적에 숨결이 됩니다. 숨결을 살려서 기운을 새로 얻고, 이 기운으로 몸을 움직여요.


  신지아 님이 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샨티,2014)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처음 태어날 적에 살갗이 바알간 빛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한여름에도 팔을 다 가리는 긴소매옷을 입어야 했고, 반바지나 치마는 엄두조차 못 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으셨구나 싶지만, 남들이 이분을 따돌리기 앞서 이분은 스스로 학교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으면서도 늘 인왕산을 오르내렸고, 홀로 풀밭이나 숲이나 멧자락에 깃들어 하늘바라기를 하면서 홀가분했다고 합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번개가 내리쳐도 무서운 줄 모르고 비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번개를 바라보았다고 해요. 이분 어버이가 어느 날 이분을 정신병원으로 데려갔는데, 정신병원에서 “선생님, 저는 그런 일에 관심 없어요. 설령 제 피부를 정상으로 바꿀 수 있다 해도 난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이 색깔 있는 몸이 아주 신비하고 좋아요(86쪽).”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키가 작으면 키가 작을 뿐입니다. 키가 크면 키가 클 뿐입니다. 얼굴이 예쁘면 얼굴이 예쁠 뿐입니다. 얼굴이 못생겼다고 하면 얼굴이 못생겼을 뿐입니다. 그뿐입니다. 언제나 그뿐이고 다른 것이 없습니다.


  눈을 감아 보셔요. 눈을 감으면, 내 키나 네 키는 하나도 안 대수롭습니다. 눈을 감으면, 내 얼굴이나 네 얼굴은 하나도 안 대수롭습니다. 귀를 닫아 보셔요. 귀를 닫으면, 내 목소리나 네 목소리는 하나도 안 대수롭습니다.


  자, 이제 눈을 뜨고 귀를 열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우리한테는 무엇이 대수로울까요? 겉모습일까요? 주머니에 든 돈일까요? 우리 어버이가 사회에서 어떤 이름값이나 재산이나 권력을 거머쥐었느냐 하는 대목이 대수로울까요?


  우리한테 대수로운 대목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로 ‘마음’입니다. “나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고 내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했다(34쪽).” 같은 말마디처럼, 내가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바라보면서 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 나다운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나는 내 길을 걷지 못합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찾아서 느끼고 알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일과 놀이를 누릴 만한지 내가 살펴서 깨닫고 누려야 합니다. 내가 나를 모르면, 나라고 하는 사람이 ‘바람을 마시는 목숨’인 줄 못 알아챕니다. 내가 나를 알 때에, 나라고 하는 사람이 ‘바람을 마시는 목숨’으로서, 풀과 나무하고 같으며, 벌레와 새하고 같고, 물고기와 꽃송이하고 같은 줄 알아봅니다. 모두 똑같은 목숨이면서 똑같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숨결인지 알아보려면, 내가 나를 제대로 마주하면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지아 님은 “저는 오늘을 살고 있어요. 오늘만 생각해요. 그것도 벅차고 힘든데 어떻게 미래를 생각해요? 미래는 하늘의 뜻이에요. 무엇보다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아요. 우리의 삶은 이상한 저울대 위에 있어요. 무엇을 얻으면 항상 무엇인가를 잃지요. 왜 얻으면 잃어야 하지요? 그래서 얻어도 잃지 않는 것을 찾아야 해요(184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을 곱씹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오늘’을 삽니다. 모레나 어제를 살지 않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누구나 바로 오늘 이곳에서 ‘바람을 마시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못 마시는 사람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죽습니다. 내가 살아서 이곳에 있다면 내가 늘 바람을 마신다는 뜻입니다. 나 스스로 ‘오늘’을 살기에 바람결을 받아들여 숨결로 삭인다는 뜻입니다.


  바람이란 무엇인가 하면, 하늘입니다. 바람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땅속에도 있고 바닷속에도 있습니다. 바람은 모습이 따로 없습니다. 바람은 그저 모든 곳에서 고요하게 흐릅니다. 땅속에도 바람이 흐르니 땅속에서 수많은 목숨이 살아갑니다. 바람은 드높은 하늘에도 있어서 새가 하늘을 날면서 바람을 마십니다.


  책 하나로 삶을 빚습니다. 삶을 짓는 사람이 책을 짓습니다.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라고 하는 책은, 스스로 ‘삶을 짓는 길’을 걸으려고 했고 씩씩하게 걷는 사람이 차분한 마음으로 빚었습니다. 이 책을 빚은 분은 “잃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돼(312쪽).” 하고 스스로 말하면서 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잃는 것’을 따지거나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지거나 생각할 대목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없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내 돈을 모두 잃’든, ‘내 이름값을 모두 잃’든, ‘내 힘을 모두 잃’든 아랑곳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잃은 돈은 새로 벌거나 얻으면 됩니다. 내가 잃은 이름값은 다시 세우거나 드날리면 돼요. 내가 잃은 힘은 새로 길어올리면 됩니다.


  숨을 한 번만 쉬기에 살지 않습니다. 숨은 꾸준하면서 고르게 쉬어야 삽니다. 숨은 시골자락 숨만 마셔야 몸에 좋지 않습니다. 스스로 너그럽고 사랑스러우며 따뜻한 마음일 적에 언제 어디에서나 기쁜 숨을 마십니다. 마음이 갑갑하면 시골에 있어도 푸른 숨을 마시지 못합니다. 마음에 기쁨이 넘치면 자동차 배기가스로 자욱한 곳에서도 활짝 웃으면서 푸른 숨을 마십니다.


  책 하나로 삶을 어떻게 빚을까요? 바람 한 줄기로 내 목숨을 지키면서 가꾸듯이, 어떤 책이든 스스로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서 읽으면, 이 책을 바탕으로 삶을 아름답게 빚습니다. 내 모습과 마음과 숨결을 먼저 바라봅니다. 차분히 바라보면서 고요한 숨결로 다스립니다. ‘고요마음’이 될 수 있으면 나뭇잎 하나를 손바닥에 얹고 바라볼 적에도 온누리를 읽습니다. 숨을 느끼고 하늘을 바라보아요. 4348.4.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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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책사랑 도란도란
54. 책을 안 읽으면 안 되나


  우리는 누구나 ‘읽을 책’을 읽습니다. ‘읽을 책’을 읽기에, 안 읽을 만한 책이 따로 있지 않고, 더 읽을 만한 책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더 좋은 책이나 더 나쁜 책은 따로 없습니다. 어느 책을 손에 쥐든, 이 모든 책은 우리한테 ‘읽을 책’이 됩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교과서는 ‘내 읽을 책’이 됩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읽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학교를 마치면 교과서는 이제 ‘내 읽을 책’에서 벗어납니다. 학교를 마친 뒤에도 교과서를 읽는 사람은 없어요. 대학생이 되어 중·고등학생한테 과외를 하는 부업을 하지 않는다면,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읽어야 하던 교과서를 다시 펼치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면, 대학 교재가 ‘내가 읽을 책’이 됩니다. 영어 시험을 치러야 한다면 영어 교재가 ‘내가 신나게 읽을 책’이 됩니다. 제법 나이가 들어 시집이나 장가를 가서 아이를 낳으려 한다면, 아마 이즈음부터 ‘새롭게 읽을 책’이 눈에 뜨이리라 생각해요. 아기를 어떻게 맞이하고, 어떻게 돌보며, 어떻게 키우는가 하는 이야기가 깃든 책을 눈을 밝히면서 찾아 읽겠지요.


 오래된 꿈과 비밀을 간직한 부드러운 사람이고 싶어
 부드러움은
 망가진 것을 소생시킬 마지막 에너지라 믿어
 밥, 사랑, 아이 …… 부드러운 언어만으로도 눈부시다
 삶이라는 물병이 단단해 보여도
 금세 자루같이 늘어지고 얼마나 쉽게 뭉개지는지
 그래서 위험해 그래서 흥미진진하지
 〈해질녘에 아픈 사람-세월아, 너도 아프냐 나도 아프다 나를 더 아프게 해라〉


  신현림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시를 쓰고 사진을 찍으면서 딸아이와 삶을 누리는 ‘아주머니’입니다. 이 아주머니는 《해질녘에 아픈 사람》(민음사,2004)이라는 시집을 낸 적 있습니다. 짝님을 만나서 아이를 낳지만, 막상 짝님하고 헤어져야 하면서 아이를 혼자 돌보는 길로 나아가야 하는 삶자락에서 써서 내놓은 시집입니다.

  아주머니 시인이자 아주머니 사진가라 할 텐데, 이 아주머니는 어떤 마음이 되어 시를 썼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아주머니가 아기를 뱃속에 품으면서 쓴 시는 누구보다 아주머니 스스로한테 어떤 이야기가 되어 흐를는지 생각해 봅니다. 시인 아주머니가 시집을 선보인 지 제법 되었기에, 시인 아주머니가 낳은 딸아이는 제법 자랐습니다. 이 딸아이는 혼자서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제 어머니가 저를 막 낳으려던 즈음 어떤 삶을 보내야 했는지를 이 시집을 읽으면서 살필 수 있습니다.


 토마투 주스를 마시고 저는 토마토가 되었습니다
 거친 시계 소리 들으며 제 머리는 시계가 되었고요
 바람 부는 마당에
 당신은 하얀 빨래가 되어 흩날립니다
 〈당신도 꿈에서 살지 않나요?〉


  책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됩니다. 내 마음은 네가 읽어 주어도 되고, 안 읽어 주어도 됩니다. 나 또한, 네 마음을 읽어 보아도 되고, 안 읽어 보아도 됩니다. 시인 아주머니가 짝님과 헤어지고 홀로 씩씩하게 아기를 낳으며 삶을 새롭게 지으려고 하던 이야기를, 이 아주머니가 낳은 딸아이는 일부러 찾아서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돼요.

  아름다운 책이 한 권 있을 적에, 우리는 이 책을 얼마든지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됩니다.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한 꾸러미 있을 적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얼마든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됩니다. 나는 내 동무가 털어놓는 이야기를 귀여겨들어도 될 뿐 아니라, 그냥 귀를 막거나 한귀로 흘려도 됩니다.


 세상의 남자들, 당신들은 잘 모를 거야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모든 어머니의 유적지인 부엌을
 바람 부는 밥상 일구는 노동과 피로를
 〈부엌〉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할 때에 삶이 즐거울까요? 내가 너와 동무라면, 나는 네 마음을 안 읽을 때에 즐거울까요, 네 마음을 읽을 때에 즐거울까요? 네가 나와 이웃이라면, 너는 내 마음을 안 읽을 때에 즐거울까요, 내 마음을 읽을 때에 즐거울까요? 어머니와 아이 사이에서, 또 아버지와 아이 사이에서, 그리고 아이와 어버이 사이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마음을 안 읽을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으며, 서로서로 그야말로 마음을 굳게 닫아걸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고 싶은가요? 어떻게 할 때에 사랑스러운 하루가 될까요?

  책읽기는 남이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없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노래를 들을 적에도 남이 억지로 시켜서 할 수 없습니다. 학교나 학원을 다니는 일도 남이 시켜서 할 수 없습니다. 언제나 내가 스스로 마음을 움직여서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내가 씩씩하게 마음을 기울여서 합니다.

  책을 안 읽는다고 해서 삶이나 사랑이나 마음을 못 읽지 않습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삶이나 사랑이나 마음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러니, 곰곰이 생각을 기울여요. 즐거움이 무엇이고 기쁨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생각해 보아요. 내가 당차게 걸어갈 길을 생각하면서, ‘내가 읽을 삶’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요. 내 곁에 누가 있는지 생각하고, 나는 어떤 동무와 이웃이 되어 이곳에 있는지 생각해요. 4348.4.3.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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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책밭 가꾸기

35. 책을 읽는 고운 매무새



  나는 어릴 적에 놀면서 자랐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학교에서 공부한 일’은 거의 안 떠오르지만, 동네에서 동무들과 실컷 뛰논 일은 거의 낱낱이 떠올릴 수 있습니다. 연을 날리려고 창호종이와 대나무살과 풀을 마련해서 집에서 한두 시간쯤 낑낑대면서 손수 만들었고, 연을 다 만든 뒤 실로 이어서 신나게 이리저리 달리면서 하늘로 띄우려고 했습니다. 제대로 만들었으면 높이 날면서 5층짜리 아파트 너머로 올라가고, 제대로 못 만들었으면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에 폭 처박힙니다. 골목에 자동차가 거의 없으면서 노는 아이들만 가득하니 연날리기를 하면서 거리낄 일이란 없습니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온통 연을 날리려고 달리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연날리기를 하며 힘을 쪽 뺐으면 딱지를 들고 나와서 해 넘어가는 줄 모르고 쩌렁저렁 길바닥을 울리면서 칩니다. 해가 넘어가면 ‘밤에 하는 숨바꼭질’이 재미있어서 슬금슬금 밖에 모입니다. 으슥한 곳에 숨으면 으레 박쥐가 푸드득 날아올랐는데, 깜짝 놀라면서도 숨소리를 죽이고 술래 눈길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집과 동네에서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언제나 놀이에 폭 빠집니다. 수업을 할 적에는 교과서를 책상에 펴고 얼굴은 칠판을 바라보되, 마음은 꿈나라로 갑니다. 담임 교사가 신나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귀에 하나도 안 들어옵니다. 나는 내 꿈나라에 온마음을 쏟습니다. 하늘을 난다든지 괴물과 싸운다든지 씨름을 한다든지 달리기를 한다든지, 다음에 공놀이를 할 적에 이리저리 몸을 잘 놀려서 제대로 공을 차 넣어야겠다든지, 온갖 놀이만 생각합니다. 손가락을 꼬물꼬물 놀리면서 놀고, 연필로 공책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면서 놉니다. 이렇게 놀다가 들키면 골마루로 쫓겨나가 꾸지람을 받지만, 골마루에 나가서 두 손을 들고 꾸지람을 받아도 마음속으로는 놀이를 그립니다.


  오카다 준 님이 글을 쓰고 이세 히데코 님이 그림을 넣은 《비를 피할 때는 미끄럼틀 아래서》(보림,2006)라는 책을 읽다가 “전에 살던 데는 보기에는 복닥복닥해도 다들 한 가족 같아서 마음이 편했어. 학교 끝나고 와도 외톨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랬는데 그 골목이 난데없이 사라진다는 거야. 이유는 나도 몰라. 아무튼 다 허물어 버린다고 해서 골목길 사람들은 죄다 뿔뿔이 흩어져 이사를 갔어(23쪽).” 같은 대목을 봅니다. 나도 이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내가 코흘리개 적부터 함께 뒹굴며 뛰놀던 동무들과 서로 헤어져야 했습니다. 동네가 ‘재개발’이 된다고 해서 한 집 두 집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재개발을 마치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 집도 있으나, 우리 집은 예전 동네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어린이나 푸름이 뜻하고 어른 뜻은 달랐을 테니까요. 나는 놀이동무를 다시 만나서 어울리고 싶지만, 어른들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러고 보면, 나라에서 ‘주택 재개발’을 한다거나 어떤 건물이나 공장이나 발전소 같은 곳을 큼지막하게 짓는다고 할 적에 어린이나 푸름이한테 묻는 일이란 없습니다. 나랏일을 하는 어른은 으레 어른끼리만 이야기합니다. 게다가, 재개발이 되는 동네에서 사는 어른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아요. 정책을 펴거나 개발을 밀어붙이는 어른은 책상맡에 땅그림을 펼치고 죽죽 금을 그어서 여기는 개발하고 저기는 남기고, 이런 투로 이야기할 뿐입니다.


  재개발을 하는 어른 가운데 ‘재개발 예정 지구’가 된 오래된 골목동네에서 사는 어른은 있을까요? 아마 없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는 동네를 내가 스스로 망가뜨리거나 허물 일은 없을 테니까요. 내가 안 살고 내 이웃이 안 살며 내 동무가 안 사는 동네이기 때문에 너무 쉽게 재개발 계획을 세워서 이러한 정책을 밀어붙인다고 느낍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지구별이 서로 사이좋게 어울리는 이웃이요 동무라 하면, 옆나라를 괴롭히려고 쳐들어가는 짓, 그러니까 전쟁이 터질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나라와 이웃이 사는 저 나라가 있으면, 두 나라는 그야말로 ‘이웃’일 테니 서로 아끼고 돌보면서 사랑하는 길을 갑니다. 이웃이니까요. 이웃이라면 한쪽이 가난할 적에 기꺼이 돕습니다. 이웃이라면 맞은편을 도우면서 돈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받을 적에도 저쪽에서 돈이나 대가를 안 바라고, 내가 저쪽을 도울 적에도 돈이나 대가를 받을 마음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전쟁무기를 자꾸 만들면서 ‘전쟁무기와 군대가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다’ 하고 말하는 까닭은, 옆나라를 이웃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옆나라를 이웃으로 안 여기기도 하고, 우리와 이웃한 옆나라도 우리를 이웃으로 안 여기는 셈이에요. 그래서 남녘과 북녘은 서로 전쟁무기와 군대를 엄청나게 키우지요.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와 미국도 전쟁무기와 군대를 어마어마하게 키워요. 나라를 이끄는 어른들 마음속에는 ‘이웃’을 살피는 사랑이 없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늘 신나게 뛰놀면서 개구진 놀이도 자주 했습니다. 온몸이 그예 땀으로 흥건히 젖으면 땀을 식히느라 나무 그늘에 드러눕기도 하고, 때로는 좀 드문 일이지만 교실이나 집으로 들어가서 낯과 손을 씻은 뒤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놀이를 쉬고 책을 읽을 적에 때때로 배가 살살 고프다고 느낍니다. 한창 뛰놀고 나서 책을 손에 쥐었으니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책을 손에 쥐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주전부리를 쥐고 싶습니다. 이때에 이런 모습을 둘레에서 다른 어른이 보면 늘 따끔하게 한마디를 합니다. 책을 읽을 적에는 다른 일을 하지 말라고 했어요. 이를테면,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지 말라거나, 손에 먹을거리를 쥔 채 책을 읽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손에 다른 것을 들면서 책을 쥐면 책이 지저분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다가 책에 무언가를 쏟아서 책을 망가뜨릴 수도 있습니다.


  배가 고프면 밥이나 주전부리를 다 먹고 나서 책을 읽으라 했어요. 둘 모두 하고 싶어서 서운하지만, 이 말을 안 따를 수 없습니다. ‘안 흘릴 수 있는데!’ 하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어머니나 다른 어른이 없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책을 가지고 와서 한손에 주전부리를 쥐고 책을 읽습니다. 이러다가 으레 먹을거리를 책에 톡 떨어뜨립니다. 과자 부스러기를 흘립니다. ‘안 흘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안 흘리고 책을 함께 읽’은 적은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어른이 된 오늘 곰곰이 돌아봅니다. 어른이 된 오늘 나는 한손에 책을 곱게 쥐고 다른 한손에 주전부리를 쥘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된 만큼 손이 크고 아귀힘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어른이 된 오늘은 ‘한손으로 책을 쥘 적에 책이 안 다치도록 쥐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익혔습니다. 아직 어릴 적에는 손이 작고 아귀힘도 작습니다. 작은 손인데 책을 한손으로 쥐자면 으레 책이 다칩니다.


  한 번 다친 책은 옛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김칫국물이 묻거나 과자 부스러기가 박힌 책은 예전처럼 깨끗해지지 못합니다. 책을 책대로 아끼려면 책을 읽을 적에는 다른 것을 하지 않을 노릇입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아 배가 고프구나’ 하고 느낀다면, 내가 손에 쥔 책에 제대로 빨려들거나 마음을 쏟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해요. 놀이를 할 적에 놀이에 모든 마음을 쏟아서 신나게 누리듯이, 책을 읽을 적에는 책에 모든 마음을 쏟아서 알뜰살뜰 누릴 노릇입니다.


  동무와 놀면서 자꾸 딴짓을 하면 동무는 서운하고 재미없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꾸 한손을 딴 데에 보내면 책도 우리한테 서운해 하거나 재미없어 하리라 느낍니다. 책은 ‘죽은 물건’이 아닙니다. 책은 ‘숲에서 자란 나무’입니다. 숲에서 자란 나무가 모습을 바꾸어 ‘책’이 되어 우리한테 동무가 되어 줍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면서 곱게 살찌우도록 돕는 기쁜 마음동무가 책입니다. 마음동무와 만날 적에는 오롯이 마음동무한테 사랑을 기울이면서 고운 매무새가 되어야 빙그레 웃으면서 책을 읽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4347.12.2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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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 책넋 돌보기

38. 빨리 읽는 책, 오래 읽는 책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인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책’이 많이 고팠습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문을 연 지 얼마 안 된 곳이었고, 학교도서관은 1992년에 비로소 조그맣게 문을 열었습니다. 열린 도서관은 아니고 닫힌 도서관이라서 쪽글에 ‘빌리고 싶은 책’을 적어서 내밀어야 비로소 며칠 동안 빌릴 수 있었습니다. 이때 이 학교에서는 빈 교실 한 칸을 도서관으로 바꾸었습니다. 책꽂이는 작고 책조차 몇 가지 없었습니다. 이무렵 인천에 있는 다른 고등학교도 도서관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거나 모양만 있기 일쑤였습니다. 시립도서관에도 새로운 책보다 낡은 책이 훨씬 많았고, 이때에는 아직 구립도서관이 없었습니다. 학교마다 학교 앞에 조그마한 책방이 있기는 하지만, 온갖 책을 두루 갖추는 곳이 아니라 수험서와 교재가 훨씬 넓게 자리를 차지하는 곳이면서 문방구 노릇을 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책이 읽고 싶을’ 적에는 제법 큰 새책방에 갔습니다. 제법 큰 새책방에는 새로 나오는 책도 있지만, 나온 지 꽤 지난 책을 쏠쏠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제법 큰 새책방은 ‘많이 팔리지 않더라도 오래도록 읽힐 만한 알찬 책’을 갖추었습니다. 도서관이 제대로 없고, 도서관이 있어도 책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던 지난날에는, 동네에 있는 제법 큰 새책방, 그렇지만 아주 크지는 않은 이곳이 몹시 고마운 책쉼터 구실을 했습니다.


  새책방에 찾아가서 가만히 서서 책을 읽자면 눈치를 봅니다. 새책이란 ‘팔 물건’입니다. 손때를 타면 다른 사람이 사들이기에 나쁩니다. 새책방에 갈 적에는 옷차림부터 깨끗이 하고 손도 깨끗이 씻습니다. 책방에 닿을 때까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걸어갑니다. 책방에 닿고서 책을 살필 적에는 눈으로만 살핀 뒤, ‘아, 읽고 싶어라’ 하는 마음이 드는 책이 있을 적에 비로소 손바닥을 비벼서 한 번 더 깨끗이 한 뒤 집습니다. 손때가 탈세라 살며시 쥐고 살며시 넘깁니다. 그리고 아주 빠르게 읽습니다. 책 하나를 든 채 너무 오래 가만히 서면 ‘책은 안 사고 그냥 읽고 가는’ 줄 알아챌 테니까요. 책방은 도서관이 아니라 ‘책을 팔아서 장사를 해야 하는 곳’이니 ‘책읽기’만 즐길 수 없습니다. 어느 만큼 책읽기를 즐겨도 되지만, 다른 사람이 사서 볼 책을 너무 오래 만지면 안 되지요.


  그래서, 새책방으로 ‘책을 읽으러 갈’ 적에는 ‘돈을 치러서 장만할 책’을 먼저 고릅니다. ‘돈을 치러 장만할 책’은 어깻죽지에 꽂습니다. ‘나, 이 책 살 생각이에요’ 하고 알리는 모습이라고 할까요. 한두 권을 사면서 적어도 서너 권은 읽으려는 마음이니 책을 아주 빨리 눈치껏 읽을밖에 없습니다. ‘빨리읽기(속독)’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나, 눈치를 보면서 읽다 보니 줄거리를 잽싸게 헤아려서 알아내려고 여러모로 용을 씁니다.


  그런데, 이렇게 ‘새책방에 서서 눈치 보며 읽기’를 하다 보면, 마음이 더 무겁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어느 책 하나를 빨리 훑어서 줄거리를 헤아리더라도 ‘다 읽은 책을 장만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책도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고등학생 적에 새책방에서 ‘몰래 빨래 읽기’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돈을 넉넉히 벌어서 ‘내 마음을 아름답게 움직인 모든 책을 기쁘게 장만하자’고 생각했습니다.


  루이제 린저 님이 쓴 《분수의 비밀》(한빛문화사 펴냄,1979)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누리는 삶과 어른들이 아이를 다루거나 마주하는 삶이 어떠한가를 찬찬히 밝히는 사랑스러운 어린이문학입니다. 1979년에 처음 나온 책이지만 오랫동안 판이 끊어졌기에 헌책방에서만 만날 수 있었는데, 2010년에 새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습니다. 1979년에 나온 낡은 책으로 읽으면, 27쪽에 “나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고, ‘수지, 너는 잘 못 보았어.’ 하긴 그때 사람들이 흘깃 보았을 때 볼 수 있는 것 이상은 보지 못했거든요.”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 대목은 어떤 이야기일까요.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이란 무엇일까요. 잘 보는 눈과 잘 못 보는 눈이란 무엇일까요. 남이 흘깃 보는 만큼 보는 눈과 내가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나한테 하는 말은 내가 오늘 어떻게 사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잘 보는 눈이란 꾸미지 않고 고스란히 보는 눈입니다. 잘 못 보는 눈이란 참모습 앞에서는 눈을 감거나 가린 채 내 길을 제대로 못 걷는 모습입니다. 남이 흘깃 보는 만큼 보는 눈이란 사랑이 없이 지나치는 눈입니다. 내가 깊이 들여다보는 눈이란 내 손길에 사랑을 담아서 삶을 가꾸려는 몸짓입니다.


  책은 빨리 읽어도 됩니다. 책은 천천히 읽어도 됩니다. 책은 많이 읽어도 됩니다. 책은 적게 읽어도 됩니다. 책은 백만 권을 읽어도 됩니다. 책은 하나도 안 읽어도 됩니다. 삶을 살찌울 수 있으면, 책을 빨리 읽든 천천히 읽든 대수롭지 않고 모두 똑같습니다. 내 오늘을 스스로 사랑할 수 있으면, 책을 많이 읽어도 즐겁고 적게 읽어도 즐겁습니다. 이웃과 어깨동무를 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책을 몇 권 읽더라도 생각을 슬기롭게 빛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한 아이와 전교 꼴등을 한 아이가 있다면, 전교 1등을 한 아이가 마음까지 착할까요? 전교 꼴등을 한 아이가 마음까지 나쁠까요? 아니지요. 전교 1등은 그저 전교 1등일 뿐입니다. 전교 꼴등은 그예 전교 꼴등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전교 1등이 되거나 전교 꼴등이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을 빨리 읽거나 많이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책을 느리게 읽거나 안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내 삶을 가꿀 수 있는 결이 무엇인지 스스로 똑바로 살펴서 기쁘게 책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착한 아이는 그저 착합니다. 착한 아이는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몇 등이건 따지지 않으면서 착합니다. 착한 아이는 그 아이네 어버이가 부자이건 가난뱅이이건 따지지 않으면서 착합니다. 착한 아이는 얼굴이 이쁘건 못생기건 언제나 착합니다.


  어느 책을 읽든, 내가 손에 쥔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를 찬찬히 살필 수 있으면 됩니다. 빨리 읽더라도 이야기를 못 살핀다면 읽으나 마나입니다. 천천히 읽더라도 이야기를 못 깨닫는다면 읽으나 마나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42킬로미터를 두 시간 만에 달리는 사람과 열 시간이 걸려도 못 달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결이 다른 두 사람더러 똑같은 길을 똑같이 달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42킬로미터를 두 시간 만에 달리면서 이녁대로 이녁 삶을 일구면서 새롭게 누립니다. 한 사람은 42킬로미터를 달릴 엄두를 안 내면서 이녁대로 다른 삶을 스스로 재미나게 일구면서 새롭게 누립니다.


  책 한 권을 ‘빨리’ 읽는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읽는 빠르기가 다릅니다. 사람마다 몸이 달라, 누구는 밥을 많이 먹으면서 살이 안 찌고 누구는 밥을 적게 먹어도 살이 찝니다.


  다만, 한 가지를 덧붙일 수 있어요. 책을 빨리 읽는 사람은 그만큼 책읽기에 온마음을 쏟습니다. 다른 것은 안 쳐다보고 오로지 책만 쳐다보기에 책을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세포 하나까지, 머리카락 하나까지, 핏줄 하나까지, 그야말로 온몸과 온마음을 쏟아서 책으로 빠져들면 누구나 책을 무척 빨리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오롯이 기울이면서 쏟을 적에는 어떤 일이든 아주 빠르게 할 수 있습니다. 4347.1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청소년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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