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책밭 가꾸기

33. 책을 선물하는 마음



  나는 동무한테 책을 한 권 선물할 수 있습니다. 동무는 나한테 책을 한 권 선물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나 아버지하고 책을 선물로 나눌 수 있고, 이웃이나 살붙이하고 책을 선물로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책을 선물할 적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잘 팔리는 책’이나 ‘오랫동안 꾸준히 읽힌 책’을 선물할 수 있어요. 그리고, 책을 선물로 받을 사람한테 물어 볼 수 있지요. “어떤 책을 읽고 싶니?” 하고 동무한테 여쭌 다음, 동무가 바라는 책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어떤 일인가 하면, 동무가 책을 선물하겠다고 하는데 한 권만 골라야 하고, 나는 두 가지 책이 마음에 듭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책을 골라야 할는지 선뜻 뽑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두 권 다 선물해 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뭐, 이런 일이 닥치면 한 권은 선물로 받고 한 권은 손수 장만하면 될 테지요. 이 길이 가장 빠르고 즐겁습니다. 그렇지만, 나한테 ‘책을 살 돈’이나 ‘쓸 돈’이 바닥이 났다면? 이때에는 한 권은 도서관에 신청해서 빌려서 읽으면 됩니다. 아니면, 부업이나 심부름을 해서 ‘책을 살 돈’을 벌면 되지요.


  요즈막에 저한테 책을 선물해 주겠다는 이웃님이 있어서 두 권을 추려 보았습니다. 한 권은 《시인의 집》이고, 다른 한 권은 《집에 가자》입니다. 《시인의 집》은 여러 나라 여러 시인을 돌아보는 여행길을 다룬 책이고, 《집에 가자》는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깃든 시집입니다. 한참 두 권을 놓고 저울질을 하다가 한 권을 골랐습니다. 한 권은 선물로 받고, 다른 한 권은 손수 장만하자는 생각을 하다가, 새로운 생각을 하나 더 해 보았어요. 선물로 받자면 두 권을 다 받거나, 아니면 내가 스스로 장만해서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책 하나만 선물로 받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책을 읽을 적에는 눈에 뜨이는 모든 책을 다 읽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책상맡에 언제까지나 올려놓으면서 틈틈이 되읽을 만한 책을 그야말로 자꾸 읽고 거듭 읽으려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책읽기는 저마다 아름답습니다. ‘모든 책을 다 읽으려 하는 책읽기’는 새로 나오는 책마다 샅샅이 눈길을 두려는 몸짓입니다. ‘책상맡에 놓고 꾸준히 되읽으려 하는 책읽기’는 어떤 책을 마음속으로 품든 날마다 스스로 새로운 넋이 되려는 몸짓입니다.


  1938년에 태어나 2010년에 숨을 거둔 사노 요코 님이 있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사람입니다. 푸름이 여러분은 ‘사노 요코’라는 이름이 익숙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또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다닐 무렵, 《백만 번 산 소양이》라든지 《산타클로스는 할머니》라든지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라든지 《아빠가 좋아》라든지 《세상에 태어난 아이》라든지 《두고 보자 커다란 나무》 같은 그림책을 읽은 적이 있다면, ‘아하, 그 그림책을 그린 할머니!’ 하고 떠올릴 수 있어요.


  사노 요코라고 하는 할머니는 ‘할머니’ 이야기를 곧잘 그림책으로 그렸습니다. 그야말로 할머니 눈길로 그리는 그림책입니다. 그런데 그냥 할머니가 아닌 “산타클로스 할머니”이고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입니다. 뭔가 좀 다르지요?


  할머니도 산타클로스가 될 수 있습니다. 할머니도 축구 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할머니도 교장 선생님이 될 수 있고, 할머니도 대통령이라든지 시장이 될 수 있습니다. 할머니는 뜨개질만 하거나 김치 담그기만 해야 하지 않아요. 할머니도 얼마든지 삶을 아름답게 가꾸거나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림책을 그리며 살던 사노 요코 님이 남긴 글을 묶은 《사는 게 뭐라고》(마음산책,2015)라는 책이 있어요. 죽음을 몇 해 앞두고 ‘마지막 삶을 실컷 누리면서 남긴 글’을 담은 책인데, “그렇다. 한국 드라마는 머리 쓸 필요 없이 마음만 움직이면 된다. 이따금 읽은 책이라고는 한국 관련 서적뿐이다. 덕분에 한국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 양반제도라는 구제 불능 제도를 접한 나는 조선인도 아니면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144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습니다.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를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던 ‘그림책 할머니’는 어느 날 ‘한류 연속극’을 하나 보았고, 그만 한류 연속극에 사로잡혔다고 해요. 병원에 누워서 연속극을 보고, 집에서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속극을 보면서 아픔도 시름도 괴로움도 외로움도 달랬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궁금한 마음이 들어 ‘한국 역사나 문화를 다룬 책’도 읽었다는데, 이런 책을 읽다가 ‘양반’ 제도를 처음 알았다고 해요.


  한국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이라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양반’ 이야기를 어느 만큼 압니다. 사람 사이에 계급이나 신분으로 금을 긋고는, 한쪽은 우쭐거리는 권력자가 되고, 다른 한쪽은 짓눌리거나 억눌리면서 시달립니다. 양반 가운데 손수 흙을 일군 사람이 더러 있으나, 양반은 손에 흙 한 톨 안 묻히면서 권력을 휘둘러 밥을 먹기 마련이었어요. 계급이나 신분으로 짓눌리거나 억눌린 ‘시골사람’은 흙을 일구면서도 제값을 받지 못한 채 세금이나 소작료로 엄청나게 떼이면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옛날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사람 사이에 계급이나 신분을 들이밀면서 금을 그으면 몹시 괴로워요. 어른 사회에서는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으로 가르고, 학력에 따라서 일삯이 갈리는 얼거리가 있어요. 어른 사회에서는 대학교 졸업장에 따라 입사원서조차 못 내밀기도 해요. 양반 제도는 사라졌다고 하지만 새로운 계급 사회라고 할 만합니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으로 학생을 줄세우려 한다면, 이때에도 ‘계급 학교’라고 할 테지요.


  《사는 게 뭐라고》를 읽으며 “또다시 옛날 엄마들은 대단하다고 입을 모았다.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궁리해서 만들었던 것이다(52쪽).”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빙그레 웃었습니다. 참말 그렇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난하거나 쪼들리는 살림이어도 예부터 지구별 어느 나라 어머니이든 ‘철마다 맛난 밥’을 마련해서 아이들을 먹였어요. 그런데 요즈음은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제철 밥’을 제때 마련해서 먹일 줄 아는 어버이는 드물어요. 집 밖에서 돈을 주고 사다 먹는 밥만 있을 뿐입니다.


  푸름이 여러분은 무럭무럭 자라서 어른이 될 텐데, 집에서 ‘제철 밥’을 먹고 자란다면, 앞으로 푸름이 여러분이 어른이 되어 새로운 아이를 낳으면, 어버이한테서 배운 ‘제철 밥’을 지어서 먹일 수 있습니다. 집 밖에서 사다 먹는 밥에만 익숙하다면, 푸름이 여러분이 어른이 되어 새로운 아이를 낳을 적에 ‘스스로 겪고 배운 대로’ 집 밖에서 사다 먹이는 밥이 익숙해서 이대로 물려줍니다.


  책 한 권을 빌어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책 한 권을 선물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한집에서 함께 살거나 한마을을 이루며 같이 사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을 선물로 나눕니다. 책을 선물하듯이 사랑을 선물합니다. 책을 선물로 받듯이 사랑을 선물로 받아요. 어떤 책을 선물하거나 선물받을 적에 즐거울까요? 어떤 삶을 선물하거나 선물받을 적에 기쁠까요? 4348.8.7.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푸른 책과 함께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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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2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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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2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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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7 23: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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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8 2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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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4 2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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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5 0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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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 도화중학교 청소년하고 '책 이야기'를 나누려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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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책빛 먹기

24. 문학책을 읽는다



  시는 문학입니다. 수필과 소설도 문학입니다. 희곡도 문학입니다. 시집이나 수필책이나 소설책이나 희곡집은 모두 문학책입니다. 그러면, 시나 수필이나 소설이나 희곡이라고 하는 문학에는 무엇을 담을까요? 문학이라고 한다면, 무엇이 문학이 될까요?


  모든 문학에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야기를 담지 않는다면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없이 틀거리(형식)만 시를 닮거나 수필을 닮거나 소설을 닮거나 희곡을 닮는대서 문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겉모습이나 무늬만 보면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요.


  이야기를 담을 적에는 틀거리가 엉성하더라도 아름다운 문학이라고 말합니다. 이야기를 담지 못할 적에는 틀거리가 빈틈없더라도 문학이라는 이름조차 안 붙입니다. 커다란 음식점을 보면 길가에 유리 진열장을 마련해서 ‘모조품 요리’를 놓기도 합니다. 참말로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놓은 ‘모조품 요리’입니다만, 이 모조품을 가리켜서 ‘요리’나 ‘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조품’이거나 ‘인형’이거나 ‘거짓’이거나 ‘가짜’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을 훔치거나 가로채서 뽐내려 할 적에도 ‘거짓’이라고 해요. 이때에는 ‘훔친 것’이라는 이름까지 붙습니다. 이른바 문학에서 ‘표절’이라고 하는 작품은, 겉보기로는 매우 뛰어나 보이기도 할 수 있으나, 표절 작품은 ‘거짓 작품’이거나 ‘훔친 작품’이지요. 다른 사람 작품을 훔치면서 제 이름값을 높이거나 돈을 벌려고 하는 몸짓으로 쓴 글은 ‘문학’이 아닙니다. 한때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더라도, 참모습이 드러난 날부터 이러한 글은 믿음을 모조리 잃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지은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975년부터 2015년까지 전남 보성에서 집배원으로 일한 류상진 님이 있습니다. 이분은 마흔 해에 걸쳐 시골마을 집배원으로 일한 발자취를 손수 찬찬히 적바림해서 《밥은 묵고 가야제!》(봄날의책,2015)라는 책을 선보였습니다.


  시골 집배원이 쓴 책을 놓고 ‘문학’이라고 말하는 평론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골 집배원은 이녁 이야기를 이녁 누리사랑방(블로그)에 올렸을 뿐, 문학잡지에 이녁 글을 올린 적이 없습니다. 시골 집배원으로서 쓴 글을 신춘문예 같은 자리에 보낸 적이 없고, 문학상을 탄 적이 없습니다. 그저 시골 집배원입니다. 시인이나 수필가나 소설가 같은 이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집배원’이라는 이름만 있습니다.


  시골 집배원 류상진 님이 쓴 책을 보면, “금메 영남떡이 아니고 율리떡이랑께 그라네!”(27쪽)라든지 “그랄지 알았으문 내가 회령 장터에 있는 택배로 갖고 가서 부치껏인디!”(82쪽)라든지 “금메 그란당께! 딴 집에 더 크고 널룹고 이삔 편지통도 많은디 해필 우리 집 째깐한 통에다 새끼를 까놨당께. 안 쫍은가 몰것네!”(153쪽)라든지 “와따아! 이 사람아, 그란다고 술 한 잔 묵을 시간도 읍서?”(217쪽)라든지 “안 그래도 애기들은 온다 그란디 방은 차디차고, 그라다 우리 손지들 감기라도 걸리문 또 ‘할메가 지름 애낄라고 방에 불도 안 때놨다!’ 그라문 으짜껏이여?”(284쪽)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모두 시골마을 할매랑 할배가 집배원 일꾼한테 들려준 말입니다. 시골 집배원으로 일하는 분은 이녁이 늘 마주하는 시골 할매랑 할배가 들려주는 말을 고스란히 ‘마음에 담은’ 뒤 글로 차근차근 옮겼습니다. 《밥은 묵고 가야제!》라는 책에 나오는 온갖 이야기는 ‘전남 보성 고장말’입니다.


  시골사람이 쓰는 시골말은 표준말이 아닙니다. 서울처럼 커다란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쓰는 서울말은 시골말이 아닙니다. 서울말은 표준말이 되고, 표준말은 서울말이 됩니다. 모든 신문과 방송과 책은 서울말이자 표준말로 나옵니다. 내가 쓰는 이 글도 시골말이 아닌 서울말이거나 표준말입니다. 내 입에서는 시골말이 흐르더라도 내 글은 서울말이거나 표준말이 되어야 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를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밥은 묵고 가야제!》라는 책에 나오는 시골 할매랑 할배 이야기를 ‘전남 보성 시골말’이 아닌 ‘서울 표준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이때에는 어떤 이야기가 될까요? 시골에서 흙을 부치면서 사는 할매랑 할배가 날마다 빚는 이야기를 ‘서울 표준말’은 어느 만큼 담아낼 만할까요?


  시골 말씨를 써야 꼭 시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지 않습니다. 시골 말씨가 아니어도 시골 이야기는 얼마든지 잘 들려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겉모습이 아닌 알맹이로 나누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껍데기가 아닌 속마음으로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서로 아끼는 마음이 따스하기에 이야기를 나눕니다. 서로 보살피는 사랑이 곱기에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시나 수필이나 소설이나 희곡이라는 이름이 붙는 문학은, 바로 이 대목을 살필 때에 태어납니다.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따사로이 나누는 이야기가 될 때에 문학이 됩니다.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여러 틀거리로 알맞게 짜서 주고받을 수 있는 이야기로 가꿀 수 있으면 언제나 문학이 됩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문예창작학과를 다녀야 문학을 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 흐르는 이야기가 있어서 이 이야기를 찬찬히 헤아리면서 즐겁게 글로 옮기면 모두 문학이 됩니다. 문학상을 받거나 문학잡지에 글을 실어야 문학을 하지 않습니다. 글 한 줄을 쓴 적이 없더라도 ‘입으로 구성지거나 구수하거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삶을 짓는다면, 이때에도 아름다운 문학을 하는 셈입니다. 입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삶은, 전문용어를 빌자면 ‘구비문학’입니다.


  다만,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떠도는 정보나 소식을 입으로 읊는 일은 문학이 아닙니다. 내가 스스로 겪은 일을 내 나름대로 마음으로 삭여서 이웃하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려고 할 적에 비로소 문학입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고 헤아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면, 이러한 이야기도 문학입니다.


  문학책은 종이로 묶은 책으로도 읽고, 이웃이나 동무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삶으로도 읽습니다. 우리 어버이가 나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로도 문학을 즐기고, 마을 할매랑 할배가 입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로도 문학을 맛봅니다. 4348.7.8.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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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책빛 먹기

25. 교과서는 책인가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가르칩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바탕으로 시험을 치릅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교과서를 씁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어야 시험 문제로 다룰 만하고, 시험 문제를 잘 외워서 맞출 수 있어야 ‘공부를 잘 한다’고 여깁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는 과목에 따라 한 권씩 있습니다. 한 학기에 교과서 한 권을 떼기도 하고, 한 해에 교과서 한 권을 떼기도 합니다. 열 과목이나 스무 과목을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면, 짐짓 많아 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학기나 한 해에 열 권이나 스무 권에 이르는 교과서를 배운다고 한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서는 대단히 적습니다. 한 해에 교과서 열 권을 뗀다면 한 달에 한 권도 못 떼는 셈이요, 한 해에 교과서 스무 권을 뗀다면 한 달에 한 권 반쯤 겨우 떼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학교 바깥쪽을 헤아리면,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이 무척 많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을 모두 다 읽지 못합니다. 그런데 책은 날마다 꾸준하게 새로 나와요. 학교 안쪽을 들여다보면, 교과서 아닌 책을 볼 틈을 내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학교 안쪽에서는 시험 문제 때문에 교과서를 단단히 붙잡아야 하고, 학교 바깥쪽에서는 학원에서 교과서를 더 깊이 붙잡도록 이끕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님이 쓴 《아시아의 민중봉기》(오월의봄,2015)라는 책이 있습니다. 800쪽 가까이 되는 책으로, 필리핀·버마·티베트·중국·타이완·방글라데시·네팔·인도네시아에서 어떤 ‘민중봉기’가 있었는가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800쪽짜리 책이라고만 여기면 두툼할는지 모르나, 아시아 여러 나라 이야기를 갈무리한 책이라고 여기면 ‘얇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 이야기만으로도 얼마든지 더 두툼할 테고, 한 나라에서 일어난 어느 한 가지 이야기만으로도 얼마든지 두툼한 책 몇 권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민중봉기》를 읽으면 “19세기 말 스페인 제국이 몰락하면서 미국이 필리핀에 대해 권리를 주장했다. 미국인들의 ‘명백한 운명’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이 분쇄되기 전까지 미국은 약 20만 명의 원주민을 학살했다(80쪽).” 같은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흐릅니다. ‘20만 명 원주민 학살’이 필리핀에서 있었다는데,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교과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쓰는 역사(세계사) 교과서에서는 필리핀 이야기를 어느 만큼 다룰까요?


  “경제적 기능이 마비 상태인 버마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국내에서 철거민 수십만 명이 빈궁한 생활을 한다. 최고 군사 지도자들은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는 반면, 90퍼센트의 버마인들은 하루 1달러 이하로 살아간다(166쪽).” 같은 이야기도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한국에서 어린이와 푸름이가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는 버마 이야기가 어느 만큼 나올까요? 버마가 군사독재 때문에 모진 아픔을 겪어야 했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군홧발에 짓눌린 채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인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교과서로 배우거나 듣거나 엿볼 수 있을까요? 버마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이야기도 매한가지입니다. 아시아 이야기뿐 아니라 한국 이야기도 매한가지예요.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교과서에서는 ‘한국에서 가난하고 힘겹게 살면서 굶주리는 이웃’ 이야기를 얼마나 다룰까요? 교과서에서는 우리 역사나 사회나 문화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까요?


  곰곰이 돌아보면, 교과서에서 민중봉기 이야기를 다루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민중봉기 이야기를 시험 문제로 내기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군사독재나 쿠테타나 학살 이야기를 교과서나 시험 문제로 똑똑히 다루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몇 가지를 간추려서 담습니다. 교과서 한 권에는 모든 이야기를 담지 못합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찬찬히 익힌다면, 어떤 지식을 놓고 큰그림을 그린다든지 테두리를 잡는다든지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과서로는 속살을 샅샅이 파고들지는 못합니다. 어느 때에는 교과서로 겉훑기조차 제대로 못할 수 있습니다.


  문학 교과서에서는 시를 몇 꼭지나 실어서 읽힐까요? 문학 교과서는 소설을 한 권이라도 차근차근 다룰 수 있을까요? 과학 교과서는 우주 물리학이나 양자 물리학을 얼마나 짚을까요? 국어 교과서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얼마나 잘 쓰거나 헤아리도록 북돋울까요?


  《아시아의 민중봉기》라는 책은 “민중이 들고일어날 때, 그들의 용감한 행동은 춤·시·산문·연극으로 신화화했다. 그러나 오만한 권력 앞에서 침묵한다면, 승리한 폭군의 내실 외에 어디에서도 그들을 찬양하지 않는다(332쪽).”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민중’은 ‘오만한 권력’ 앞에서 고개를 꺾거나 돌리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중은 언제나 씩씩하고 기운차게 일어나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길을 걸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중은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민중입니다. 민중은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모두 민중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라면 옳고 바르면서 착하고 참답게 살아야 사람입니다. ‘사람’일 때에는 슬기롭게 생각하고 사랑스레 꿈을 꾸어야 사람입니다. ‘사람’이기에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이웃을 아낍니다. ‘사람’인 만큼 아름답게 노래하고 곱게 웃으면서 기쁘게 삶을 짓습니다.


  교과서는 교과서입니다. 학교에서 학생한테 기초 지식을 알려주려고 쓰려고 엮는 교과서입니다. 그러니, 학교를 다니면서 교과서로 배우는 동안, ‘교과서 아닌 책’을 늘 곁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눈길을 틔워야 하고, 스스로 생각을 가꾸어야 합니다. 스스로 눈높이를 북돋아야 하고, 스스로 마음을 일구어야 합니다.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 책은 아닙니다. 교과서는 어린이와 푸름이가 ‘책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길잡이 구실을 합니다. 문학 교과서가 시나 소설을 드문드문 몇 가지만 살짝 추려서 보여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문학 교과서는 바로 ‘문학책으로 가는 길’을 가만히 보여주면서 우리가 스스로 기쁘게 나아가도록 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과서도 온갖 지식을 맛보기로만 가볍게 보여줍니다. 학문을 하든 살림을 돌보든 사랑을 하든,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수많은 책을 품에 안으면서 너른 바다를 헤엄칠 줄 아는 숨결로 거듭나야 합니다. 삶에서 이야기를 짓고, 삶에서 보람을 찾으며, 삶에서 뜻을 이룹니다. 학교에서 시험성적이 덜 나오더라도 교과서에 덜 매이면서 ‘책’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시험성적만 잘 나오는 몸짓으로 학교를 마치면, 사회에서도 삶에서도 ‘눈뜬 장님’이 되기 일쑤입니다. 4348.6.2.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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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책밭 가꾸기

30. 책을 읽어 마음을 가꾼다



  책은 마음을 살찌우려고 읽습니다. 그래서 책은 ‘마음밥’이라고도 합니다. 몸을 살찌우려면 즐겁게 밥을 지어서 맛나게 먹으면 됩니다.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또는 고기밥이든 풀밥이든, 언제나 즐겁게 노래하면서 먹을 때에 몸을 살찌우는 밥, 이를테면 ‘몸밥’이 됩니다.


  그런데, 몸밥을 한 번 생각해 봐요. 잔칫밥을 차릴 적에 맛있는 몸밥일까요? 잔칫밥도 멋진 몸밥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만, 꼭 잔칫밥이어야 몸을 살찌우지는 않는다고 느껴요. 왜 그러한가 하면, 거북하거나 힘든 자리에 앉아서 잔칫밥을 받는다면 아무래도 제대로 먹기 어렵습니다. 바늘방석에 앉으면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수 있어요.


  라면 한 그릇을 김치 한 조각하고 먹는다고 해서 몸을 못 살찌운다고 하지 않습니다. 고작 라면 한 그릇이어도 고마움을 온마음으로 느끼면서 먹으면 아주 기쁘게 기운을 낼 수 있어요.


  영양소를 고루 살펴서 밥을 먹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 몸은 영양소만으로 크지 않습니다. 영양소를 ‘다루거나 어루만지거나 보듬는 손길’이 ‘따사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스며들어야 비로소 몸을 튼튼하게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희인 님이 쓴 《어디에도 없던 곳 인도양으로》(호미,2013)는 여행책이자 사진책입니다. 인도양을 둘러싼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아본 이야기를 담으면서,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사진으로 곱게 보여줍니다.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앞서를 헤아리자면, 그무렵에는 인도양으로 나들이를 가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마흔 나 쉰 해쯤 앞서를 헤아리자면, 그무렵에는 바다 건너 일본으로 나들이를 가는 사람조차 몹시 드물었어요.


  인도양 둘레에 있는 아시아 여러 나라는 퍽 가난합니다. 나라 살림살이는 여러모로 홀쭉하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이웃사람은 웃을 일이 없을까요? 이 대목을 곰곰이 짚어 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사람한테는 기쁨이나 보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가난하지 않은 나라에서 사는 사람한테는 기쁨이나 보람이 더 클까요, 아니면 외려 작을까요?


  여행을 자주 다닐 수 있기에 더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저 여행을 자주 다닐 뿐입니다. 여행을 못 다닌다고 해서 더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여행을 못 다닐 뿐입니다.


  마음이 넉넉할 때에 언제나 넉넉하게 아침을 열고 하루를 누립니다. 마음이 넉넉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메마르거나 쓸쓸하거나 힘들게 하루를 보내고야 맙니다. 마음이 따스할 때에 언제나 따스하게 이웃을 사귀고 동무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마음이 따스하지 못할 때에는 언제나 날카롭거나 짜증스럽게 하루를 보내고야 말아요.


  “여행의 참맛은 꼭 이름난 유적이나 휴양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연히 맞닥뜨린 소소한 풍경 속에 있는 게 아니랴 싶습니다(114쪽).” 같은 이야기처럼, 이름난 곳에 가 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여행을 꼭 가 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을 더 헤아린다면, 우리는 꼭 대학교에 가거나 유학을 다녀와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꼭 학교를 마치거나 학원에 다녀 보아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대학교를 안 가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대학교에 가든 말든, 이에 앞서 ‘나는 이 삶에서 무엇을 하려는가?’를 먼저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우쳐야 합니다. 오늘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야 즐거울까 하는 대목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대학교에 가든 안 가든 내 삶은 어수선하거나 어지럽습니다. 오늘 내 보금자리에서 어떻게 살림을 꾸리거나 공부를 해야 기쁠까 하는 대목을 스스로 찾지 못한다면, 학원을 여러 곳 다니든 학원을 아예 안 다니든 내 생각을 튼튼하게 세우지 못합니다.


  마음을 살찌우려면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마음을 가꾸려면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밥을 지을 적에 어떤 마음이 되어 밥을 짓는지 가만히 살펴보셔요. 빙글빙글 웃고 노래하면서 밥을 지으실 적에 밥맛이 어떠한지 살펴보셔요. 부엌에서 춤까지 추면서 밥을 지으실 적에 밥맛이 어떠한지 살펴보셔요. 그리고, 잔뜩 찡그린 채 투덜거리면서 밥을 지으실 적에 밥맛이 어떠한지 살펴보셔요.


  우리는 어느 때에 밥을 맛있게 먹을까요? 우리는 어느 때에 밥 한 그릇이 참으로 고맙구나 하고 느낄까요?


  “버스를 타고 아누라다푸라를 떠나는데 숲 사이를 흐르는 냇물에서 사람들이 목욕을 즐기는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61쪽).” 같은 이야기를 조용히 돌아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목욕탕에 가야 몸을 씻을 수 있다고 여기지만, 한국에서도 얼마 앞서까지 골짜기나 냇가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한겨레 옛집에는 ‘씻는 방(욕실)’이 따로 없어요. 마을마다 냇가가 있으니 냇가에 가서 씻어요. 또는 골짜기에 가서 조용히 씻어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거나 냇가에서 빨래를 하지요. 밥을 짓는 물도 냇가에 가서 긷거나 우물에서 풉니다. 이제는 집에서 물꼭지를 돌리면 물이 콸콸 흐르지만, 이렇게 살림을 꾸린 지 그야말로 얼마 안 된 우리 겨레 삶이에요.


  예부터 물 한 방울을 고이 아끼며 살았습니다. 집안에 물꼭지가 없기에, 누구나 으레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다녔어요. 참말 물 한 방울을 허투루 쓸 수 없던 지난날입니다. 예부터 밥풀 한 톨을 함부로 흘리지 않고 밥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손수 논밭을 일구어 쌀을 얻어서 밥을 지었으니, 게다가 나무를 해서 아궁이에 불을 때어 솥에 밥을 지었으니, 밥풀 한 톨을 허투루 흘릴 수 없습니다.


  책 한 권을 손에 쥐고 지식을 쌓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만 쌓으려고 책을 더 읽거나 자꾸 읽거나 많이 읽는다면, 내 마음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책은 빨리 읽어야 하지 않고 느리게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고전명작을 꼭 읽어야 하지 않고, 베스트셀러나 추천도서를 반드시 읽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읽을 책은 그야말로 ‘마음밥’이 될 수 있는 ‘사랑스러운 한 권’이어야지 싶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마음으로 짓는 밥일 때에 몸을 살찌우듯이, 기쁘게 춤추며 꿈꾸는 몸짓으로 읽는 책일 때에 그야말로 마음을 살찌웁니다. 어느 책을 우리 손에 쥐든 늘 밝게 웃으면서 활짝활짝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5.3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청소년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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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책숲 느끼기
18. 내 이웃 삶을 읽는다


  왜 책을 읽는가 하고 누군가 묻는다면, 저는 늘 ‘내 마음을 읽고 싶어서’라고 말하다가, 한 마디를 덧붙여 ‘내 이웃 삶을 읽으면서 내 이웃이 어떤 마음으로 사랑을 가꾸려 하는가를 읽고 싶어서’라고 말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걷는 길이 어떠한 삶인지 더 또렷하게 헤아릴 수 있으면서, 내 이웃이 오늘 어떤 삶을 가꾸는지 환하게 살필 수 있습니다.

  마음에 아름다운 생각을 가득 일으키는 책을 꾸준히 되읽습니다. 마음에 사랑스러운 꿈을 넉넉히 북돋우는 책을 새롭게 되읽습니다. 아름답다고 여겨 ‘같은 책’을 기쁘게 되읽습니다. 사랑스럽다고 느껴 ‘같은 책’을 언제 어디에서나 새롭게 되읽습니다.

  가네코 미스즈 님이 빚은 동시집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소화,2006)가 있습니다. 1903년에 조그마한 바닷마을에서 태어난 뒤, 1930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승길로 간 분이 쓴 동시집입니다. 시골 바닷마을에서 작은 책방을 꾸리면서 틈틈이 동시를 썼다고 하는데, 헤어진 남편한테 딸을 빼앗길까 봐 걱정하면서 스스로 죽었다고 합니다. 이분이 쓴 동시는 이분 남동생이 오래도록 건사했다 하며, 1984년에 이르러 비로소 책으로 태어나며 널리 알려졌다고 해요. 이웃 일본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잠자다가 깨어난 동시집이고, 한국에도 느즈막하게 알려진 책입니다.

  작은 동시집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를 읽는 동안 조용한 바닷마을 바람이 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마을의 끝은 / 저녁놀 붉은 놀 / 봄이 가까운 걸 / 알 수 있는 날(내일).” 같은 노래라든지, “어머니, / 뒤꼍 나무 그늘에, / 매미의 옷이 / 있었어요(매미의 옷).” 같은 노래를 읽으면서 바닷바람을 가만히 느낍니다. 이렇게 저녁놀과 매미를 살며시 느끼면서 동시를 쓴 분은 왜 서른 살조차 안 된 나이에 스스로 숨을 끊어야 했을까요. 어린 딸아이를 지키려는 어버이는 어떤 길을 걸어야 했을까요.

  가시내가 사내를 두들겨패는 일이 아주 드물게 있다고 하지만, 이런 일은 참말 드뭅니다. 주먹질은 으레 사내가 일으킵니다. 사내는 으레 가시내를 두들겨패려 합니다. 더욱이, 사내는 으레 총칼을 손에 쥐려 하며, 사내는 으레 군인이 되어 이웃을 죽이거나 괴롭히는 싸움터로 뛰쳐나갑니다.

  “참새의 / 어머니 / 그걸 보고 있었다. // 지붕에서 / 울음소리 참으며 / 그걸 보고 있었다(참새의 어머니).” 같은 노래를 곰곰이 읽습니다. ‘사람 아이’가 ‘참새 아기’를 붙잡는 모습을 보면서 쓴 동시입니다. ‘사람 아이’는 ‘참새 아기’를 붙잡고는 하하 웃습니다. ‘사람 아이’를 낳은 어머니도 제 아이가 참새 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보며 웃는다고 합니다. 동시를 쓴 아주머니는 이 모습을 슬프게 바라봅니다.

  사람이 ‘참새가 읊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섣불리 ‘참새 아기(새끼 참새)’를 붙잡아서 히히덕거리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풀이 읊는 말’을 알아듣는다면, 함부로 농약을 치거나 땅바닥을 삽차로 파헤치는 일도 없으리라 봅니다. 더 헤아려 본다면, 우리는 ‘이웃인 사람’이 품는 마음도 잘 모르기 일쑤예요. ‘이웃인 작은 짐승과 벌레와 푸나무’가 읊는 말도 알아들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웃인 사람’이 아프다 하거나 슬프다 하는 말을 알아들으려 하지 않아요.

  책 한 권을 손에 쥐어서 지식을 더 얻을 수 있습니다. 책 백 권을 신나게 읽어서 지식을 많이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잘 생각할 노릇입니다. 지식을 왜 더 얻으려 하는가요? 지식을 왜 많이 쌓으려 하는가요? 더 얻은 지식으로는 어떤 일을 할 생각인가요? 많이 쌓은 지식으로는 무슨 일을 하는가요?

  책으로 얻은 지식은 없으나 착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책이나 학교로 얻은 지식이 없지만 참답고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본 일조차 없는데 이웃과 사랑을 따스하게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책으로 얻은 지식이 많지만 참답지 않고 착하지 않으며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온갖 지식을 많이 쌓았는데 짓궂거나 얄궂거나 쓸쓸한 짓을 일삼는 사람이 있어요.

  책을 더 읽어야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책에 앞서 마음을 아름답게 가꿀 때에 비로소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어’야 똑똑한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돌볼 줄 아는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따스하고 넉넉한 사랑으로 삶을 지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똑똑한 사람이 됩니다.

  “아무도 모르는 들녘 끝에서 / 파란 작은 새가 죽었습니다. / 춥디추운 해 저물녘에 // 그 주검 묻어 주려고 / 하늘은 흰 눈을 뿌렸습니다. / 깊이깊이 소리도 없이(눈).” 같은 노래를 조용히 읽습니다. 내 이웃은 누구인지 생각하면서 삶노래를 가만히 읽습니다. 시는 삶노래라고 느낍니다. 삶을 노래하는 글이 바로 시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나한테 아름다운 이웃을 그리는 노래가 바로 시이고, 내가 이웃한테 아름다운 벗님으로 다가서면서 부르는 노래가 바로 시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더 많은 책을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책을 한 권만 읽었어도 마음자리에 사랑스러운 지식을 담으면 됩니다. 더 많은 이웃을 사귀어야 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한 사람만 사귀어도 마음자리에 아름다운 숨결을 심으면 됩니다.

  볼볼볼 기어가는 개미 한 마리를 밟지 않으면서 걷습니다. 재빠르게 기어가는 땅강아지를 보고는 걸음을 멈춥니다. 땅강아지가 건너편으로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립니다. 자전거를 몰다가 길섶에 나비가 앉아서 날개를 쉬는 모습을 보았으면 살며시 손잡이를 틀어 나비가 안 밟히도록 에돌아 갑니다. 아스팔트 바닥에 떨어진 꽃잎이나 나뭇잎을 주워서 흙땅으로 옮깁니다. 길을 걷다가 떠돌이 개를 만나면, 내 손이나 주머니에 있는 먹을거리를 땅바닥에 조용히 내려놓습니다.

  모두 사랑스러운 이웃입니다. 이 지구별에서 싱그러운 바람을 함께 마시면서 살아가는 이웃입니다. 나라마다 쇠가시그물을 잔뜩 박아서 ‘국경’을 세우기도 하지만, 지구별 테두리에서 보면 쇠가시그물이나 국경은 덧없습니다. 구름이나 바람한테는 아무런 국경이나 국적이 없습니다. 사람한테는 적이나 적군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모두 이웃입니다. 이웃을 아끼려고 한다면 총칼을 비롯한 모든 전쟁무기와 군대를 녹여서 없앨 노릇입니다. 이웃이니까요. 이웃하고는 어깨동무를 해야지요. 쇠가시그물을 잔뜩 박으면서 총부리를 겨누느라 애먼 하루를 보낼 노릇이 아니라, 서로 빙그레 웃으면서 숲과 들을 아름답게 일굴 때에 비로소 사랑이 피어난다고 느낍니다.

  나는 네 이웃입니다. 너는 내 이웃입니다. 책 한 권을 읽으면서 먼먼 나라 이웃을 살갑게 느낍니다. ‘이웃이 나한테 베푼 아름다운 선물’인 책 한 권을 만난 기쁨을 곰삭이면서 글 한 줄을 즐겁게 씁니다. 4348.4.1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청소년과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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