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선물하는 길 : 내가 번 돈으로 사주어도 선물. 내 주머니가 홀쭉하거나 비었을 적에는, 무엇을 사줄 수 없으니 그대가 무엇을 사랑할 만한가를 알아보고서 스스로 장만하도록 알려주어도 선물.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겪을 삶을 이야기로 들려주어도 선물. 우리는 언제나 한마음으로 사랑이라는 길을 가는 줄 슬기롭고 상냥하게 속삭이는 말 한 마디도 선물. 따스하고 넉넉히 짓는 웃음도 선물. 까르르 춤추고 노래하는 몸짓도 선물. 신나게 일해서 벌어들인 돈을 기꺼이 내주어도 선물. 아름다운 책을 읽고서 아름다운 숨결로 거듭나며 아름답게 사랑하는 하루도 선물. 아이를 포근하게 품을 적에도 선물이면서, 어버이를 가만히 안을 적에도 선물. 즐거이 뛰노는 눈빛으로 맑게 바라보아도 선물. 바람을 타고 흐르는 노랫가락을 글로 옮겨적어서 살며시 건네어도 선물. 가을에 떨어진 가랑잎을 주워서 내밀어도 선물. 멧골에서 철철이 싱그러이 흐르는 샘물도 선물. 구름이 모여 내리는 비랑 눈도 선물. 온누리를 어루만지는 해님도 선물. 밤마다 빛잔치를 벌이는 별도 선물. 어, 그러고 보면 선물 아닌 숨결은 없네? 선물 아닌 몸짓은 없네? 선물 아는 길은 하나도 없네? 1994.12.2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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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즐겁게 굶기 : 우리가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픈 줄 모른다. 아니, 즐겁게 보낼 적에는 ‘즐거운 일이나 놀이나 노래나 춤’을 온몸으로 맞아들이느라, 이 기운으로 몸은 새롭게 힘을 낸다. 그러니 굳이 밥이라고 하는 먹을거리를 몸에 집어넣어서 몸에 힘이 나도록 해야 하지 않는다. 즐거운 기운을 마음에 심으면 심을수록 몸은 가볍게 뛰놀 수 있고, 이렇게 하루하루 즐겁게 살고 보면 어느새 우리 몸은 홀가분히 하늘로 띄워서 훨훨 바람을 타고 구름하고도 노니는 나날이 되겠지. 즐겁기에 굶는다. 아니, 즐겁기에 안 먹는다. 안 즐거우니 먹는다. 안 즐거워 마음에 기운이 없고 말아, 이렇게 시들거나 처진 마음인 터라 몸에도 힘이 빠져서, 자꾸자꾸 몸에 먹이를 주고, 이 먹이를 몸이 삭이자니 몸은 더더욱 무거워 날아오를 힘은커녕 걸어다닐 힘조차 못 내곤 한다. 먹으면 먹을수록 졸려서 드러눕고 싶은 까닭이란, 이 무거운 몸을 벗어냐 날아오를 수 있으니, 몸을 누여 잠들도록 하고, 마음은 가볍게 날아오르고 싶기 때문이라 할 만하다. 2019.12.24.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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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시쓰기

숲노래 노래꽃 ― 58. 시든 풀



  저는 동시라고 하는 글, 노래꽃을 늘 한달음에 씁니다. 밑글을 쓰고서 이모저모 손질하는 일이 없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씁니다. 내처 쓰지요. 어떻게 이처럼 할 수 있을까요? 저도 잘 몰랐어요. 언제나 술술 이야기가 흘렀습니다. 어느 날 곁님이 제 동시를 듣더니 한 마디 하더군요. “그대가 쓰는 동시는 그대 머리로 쓰지 않아서 읽을 만하다”고요.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풀이 들려주는 말을 풀 목소리 그대로 옮기고, 돼지나 모기가 들려주는 말을 돼지나 모기 목소리 고스란히 옮길 뿐”이기에 읽을 만하다는 뜻이더군요. 우리는 누구나 이처럼 동시나 어른시를 쓸 수 있습니다. 머리로 짜맞춘다든지, 그럴듯하게 꾸미려 한다든지, 볼만하게 깎거나 다듬으려 하면 모두 재미없어요. 모든 시는 각운도 운율도 안 맞춥니다. 모든 시는 은유도 직관도 아닙니다. 모든 시는 언제나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사랑하는 오늘 이곳에서 고요한 숨결이 되어 꿈을 짓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나누는 말 한 조각, 씨앗 한 톨이에요. 포항 마을책집 〈민들레글방〉 곁에는 낡고 빈 집이 한 채 있습니다. 〈민들레글방〉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빈집에 들어가서 이 칸 저 칸 들여다보고, 까치가 내려앉고 생쥐가 드나들고 마을고양이가 잠들던 자리를 하나하나 살피고 냄새를 맡고, 마당에서 싹튼 나무싹이며 푸성귀를 둘러보다가, 이곳에서 ‘시든 풀’ 한 포기가 저한테 속삭이는 말을 들었어요. 이 말을 수다판을 펴다가 문득 곧장 옮겨 보았습니다. ㅅㄴㄹ



시든 풀


죽었기에 시든 풀일까

잠자려고 시든 풀일까

더 살고픈 시든 풀일까

꿈꾸려는 시든 풀일까


겨울꿈 짓는 풀벌레랑

겨울나기 새근 나비랑

이곳을 덮는 해님이랑

여기를 달래는 별빛이랑


헌몸 내려놓고 나면

새몸 받아들일 나

옛몸 흙이 되면

새빛 눈부실 나


까치 찾아와 속삭여

오늘 돌아본 이곳저곳

생쥐 기어와 노래해

지난 한 해 즐거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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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물맛 : 인천에서 나고 자란 나는 여러 물맛 가운데 가장 오래 길든 물맛이 수돗물맛이다. 냄새도 결도 빛깔도 모두 내키지 않고 못마땅한 수못물이지만, 어린 나로서는 그곳에서 살 수밖에 없으니 그 끔찍한 수돗물맛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되, 되도록 가장 맛나고 좋은 맛으로 여기려 했다. 억지로 먹는 수돗물이 아니라, 내가 잔에 받아서 마실 적에는 몸을 살리는 숨빛으로 여기려 했다. 드물게 어머니 옛집에 놀러가는 때에는 시골마을 우물맛이나 냇물맛을 누리는데 온몸이 짜르르하도록 기쁜 맛이었다. 어머니 옛 시골집 우물맛은 이 우물만 먹어도 배가 부를 만큼 좋았다. 그 뒤로 여러 고장을 거치는 삶을 지내면서, 또 강원도 양구에서 군대살이를 하면서, 또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 일을 하며 변산공동체란 데를 드나들면서, 이오덕 어른 글을 갈무리하느라 충주 무너미마을에서 살며, 강의나 바깥일로 여러 고장을 돌며 그곳 냇물이나 수돗물을 맛보면서, 그리고 전남 고흥으로 옮겨 시골집에서 지내며 갖은 물맛을 견주어 보는데, 어릴 적 어머니 옛 시골집 물맛하고 오늘 고흥 시골집 물맛이 가장 뛰어나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하고 돌아보니, 요즘 충남 당진·예산은 옛날하고 다르지만, 내가 어릴 적에 당진 밤하늘에서 본 별은 오롯이 별내(미리내)였다. 별이 와장창 쏟아진다고 느낄 만큼 눈부셨다. 오늘 살아가는 고흥에서 보는 밤하늘만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아직 이 나라 다른 고장에서 못 봤다. 다시 말해서, 숲만 우거져서는 물맛이 싱그럽지 않구나 싶다. 별빛이 흐르는 밤이 깊어야 물맛이 싱그럽달까. 전깃불이 되도록 덜 닿거나 안 닿아야 비로소 냇물이며 우물물이며 바닷물이 맑고 정갈하달까? 생각해 보니, 관광지가 아직 아니던 인천 장봉섬이라든지 영종섬 우물맛도 무척 달았다. 그렇네. 밤이 새까만 숲이어야 물맛이 눈부시네. 2019.12.23.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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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살림말


나무다운 : 나무다운 나무를 보지도 심지도 사랑하지도, 또 나무한테 말을 섞지도 걸지도 않았다면, 나무가 무엇인지 뭘 알까? 지식·자료·정보·논문·인문책으로 나무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식·자료·정보·논문·인문책으로 사람이나 사랑이나 삶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길이 아닌 아스팔트 자동차가 넘치는 곳에서 태어나, 시멘트로 높이 올려세운 아파트에서 지내고, 아스팔트하고 아파트가 둘러싼 학교랑 학원만 다니는 몸인 채, 나무다운 나무를 사귀지 못하고 자란 어린이라면, 어떤 어른으로 자랄까? 흙이 있어야 나무가 자랄 텐데, 흙이 없는 곳에서 나무다운 나무를 모르는 채 살아가는 길에서는 사람이 어떤 숨결이 될까? 나무다운 나무를 모른다면, 책다운 책이며 글다운 글이며 눈빛다운 눈빛을 하나도 모르는 오늘이 되지 않을까? 1996.7.18.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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