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열 해 : 어릴 적부터 떠올리면, 어느 집에 열 해 넘게 눌러앉은 적이 없지 싶다. 태어난 인천 도화동 집이며, 옮겼던 주안동 집에서도 얼마 안 있다가 옮기기 바빴다고 등본에 나오고, 그나마 인천 신흥동 집에서는 아마 아홉 해를 살았나 싶은데, 연수동으로 옮겨야 했다.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살 적에도 이문동에서 세 해를 있다가 종로 교남동으로 옮겨 다섯 해 있었고, 다시 인천으로 돌아온 뒤에도 으레 거듭 옮기는 걸음이었다. 이제 고흥으로 옮겨서 열 해째인데, 열 해 동안 미적거리며 쓰지 못한 ‘책숲마실’ 이야기를 여민다. 이 열 해 사이에 ‘미적거리며 못 쓴 여러 책집’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책집지기로 일하시다가 문을 닫으면 아주 연락이 끊기는데, 그분들이 씩씩하게 책집살림 가꿀 적에 마치지 못한 글을 이제 겨우 매듭을 지으며 가늘게 한숨을 쉰다. 2020.2.22.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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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말 : 어린이부터 읽는 그림책을 펴면, 거의 모두라 할 만한 그림책마다 ‘어린이 눈높이에 안 맞는 말씨’가 흐르기 일쑤이다. 게다가 요새는 ‘그녀·필요·이해·행복’ 같은 말씨까지 그림책에 나오고 ‘시작·존재·-하고 있다·-었었-’까지 쉽게 춤추고 ‘위·속·안·아래’를 어느 곳에 어떻게 써야 알맞은가를 가리지 못하는 분이 참으로 많다. “나무 아래”라고 하면 “나무뿌리가 있는 땅속”을 가리킨다. 나무 곁이나 나무가 드리운 그늘을 말하려면 “나무 밑”이나 “나무 곁”이라 해야 한다. 새가 나뭇가지에 앉을 적에는 “가지 위에 앉을” 수 없다. “가지에 앉는다”라 해야 맞다. 어째 하나같이 띄어쓰기나 맞춤길만 살필 뿐, 말이 안 되는 말을 헤아리지 않고, ‘어른 인문책이나 논문에나 쓰는 일본 한자말에 번역 말씨’를 섣불리 그림책이나 동시나 동화에 쓰는 이가 너무 많고, 어린이 인문책은 차마 어린이한테 읽으라고 말하기 껄끄러울 만큼 어수선하다. 그런데 교과서도 똑같더라. 무엇이 말썽일까? “어려운 말”을 썼기에 말썽일까? 아니다. “어려운 말”은 써도 된다. 어렵고 쉽고 하는 대목이 아닌 “어린이 눈높이에 어울리는 말”을 썼느냐를 첫째로 살필 노릇이다. 이다음으로 “함께 즐거이 나눌 말”인가를 살피고, “기쁘게 물려받아 새롭게 가꿀 말”인가를 살필 노릇이지. 생각해 보라. 어린이한테 아무것이나 먹으라고 건네는 어버이나 어른이 어디 있는가? 어린이한테 아무 밥이나 섣불리 먹이지 않듯, 어린이한테 아무 말이나 함부로 쓰지 않아야, 비로소 우리는 ‘어버이·어른’이란 이름을 어린이 곁에서 쓸 만하다. 아무 곳이나 집으로 삼지 않아야 ‘어버이·어른’이다. 아무 밥이나 먹이지 않고, 아무 옷이나 입히지 않고, 아무 살림이나 그냥그냥 꾸리지 않을 뿐더러, 아무 말 잔치를 하지 않을 줄 알아야 ‘어버이·어른’이다. 그렇지만 한국이란 나라에서 글을 쓰거나 책을 엮는 숱한 일꾼은 아직 어린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어깨동무도 못한다. 이제는 어린이를 바라보고 어깨동무를 하면 어떨까? 이제부터 어린이 눈높이를 살피고, 어린이한테 물려줄 말살림을 사랑스레 가꾸어 가면 어떨까? 2020.2.15.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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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교열 : 다른 사람이 쓴 책도 나쁘지 않지만, 스스로 좋아하는 살림길을 글로 담아서 책으로 내고 싶은데, 여러모로 글쓰기나 글손질을 어떻게 가누면 되는가를 몰라서 물어보는 이웃님이 있다. 이때에 늘 여쭙는 말씀을 옮겨 본다. “남한테 읽힐 글을 쓰려고 하지 마시고, 누구보다도 첫째인 읽음이(독자)는 바로 우리 스스로인 줄 알아야 해요. 가장 크고 사랑스러운 읽음이는 바로 나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우리가 쓰는 이야기를 우리 스스로 읽으면서 재미있다고 활짝 웃거나 슬프다고 눈물방울이 똑똑 떨어질 수 있어야 해요. 남이 읽고서 웃어 주거나 울어 줄 글이 아닌, 내가 글을 쓰는 동안 저절로 웃음이 터지고 눈물이 쏟아지는, 그런 글쓰기가 되면 됩니다. 자, 글쓰기란 이와 같은데요, 교정교열이라고도 하는 글손질은 어떠하느냐 하면, 우리 스스로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글을 쓰지 않으면, 이 글을 되읽으면서 손질할 적에 지치고 괴롭답니다. 생각해 보시겠어요? 잘 읽히거나 팔려서 돈이 되기를 바라는 글로 책을 여민다고 할 적에, ‘똑같은 글을 세벌 네벌 다시 읽고서 틀린글씨 하나를 찾아내야 하는’데요, 마음이 끌리지 않거나 가지 않는 글을 되읽기란 끔찍하겠지요. 저는 사전을 쓰는 사람이라서, 제가 쓰는 사전은 적어도 열다섯벌을 되읽으면서 손질해요. 2016년에 선보인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은 서른벌을 되읽고 손질하느라, 저도 힘을 쫙 빼야 했습니다만, 출판사에서도 몹시 애써 주셨지요. 사전이야 워낙 꼼꼼하게 보아야 하니 열다섯벌도 서른벌도 잘 참아내며 되읽는데요, 여느 책이라면 적어도 다섯벌은 되읽고서 손질할 노릇입니다. 틀린글씨 하나를 살피려고 다섯벌을 되읽는 글이라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으신가요? 좀 아실까요? 스스로 며칠 만에 다섯벌을 되읽으면서도 기뻐서 웃음이 나고 슬퍼서 눈물이 날 만한 이야기를 쓰신다면 책을 펴낼 만해요. 날마다 한벌씩 되읽기를 서른 날을 잇달아 하는, 그러니까 서른 날에 걸쳐 서른벌을 되읽으면서도 언제나 웃음눈물이 갈마드는 이야기를 글로 쓰셨다면, 그 책은 둘레에서 널리 읽어 주거나 아껴 주지 않아도, 이러한 글을 책으로 엮은 이웃님한테 가장 빛나는 사랑으로 남을 테고, 이 빛나는 사랑은 아이들한테 넉넉히 물려줄 만하리라 생각해요.” 2020.2.14.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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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낌없이 : 아낌없이 주기에 아낌없이 받는다고 여길는지 모르고, 아낌없이 길어올리니 아낌없이 퍼져서 너하고 나라는 울타리나 담벼락이 없이, 모두 나란히 누리는 살림길을 열는지 모른다. 주기에 받는다기보다 스스로 짓고 새로 열며 함께 기쁜 살림빛이지 싶다. 2020.1.23. ㅅㄴㄹ


惜しげもなく : 惜しげもなくくれるのに, 惜しみなく貰うって, 考えられる。 惜しげもなく汲み上げるから, 惜しげもなく廣がって, 君と僕とは垣根も壁もなく, みんな竝んで暮らす生活を開ける。 くれるからもらうっていうか, 自分で建てて新しく開きながら, 共にうれしい生活だと思う。 (作 : 森の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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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상 : ‘이상문학상’이 ‘노예계약’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었다. ‘저작권 3년 양도 조항’이 있다니, 참 대단한 이들이로구나 싶다만, 문학사상사란 출판사만 이렇게 하지 않는다. 다른 문학상은 이처럼 ‘저작권 3년 양도 조항’은 없으나 ‘상금’이 막상 ‘상금 아닌 상금’이기 일쑤이다. 왜 그런가 하면, 출판사에서 준다고 하는 여러 문학상을 가만히 뜯어보면 ‘상금(또는 고료)’을 한몫에 1000만 원이나 2000만 원을 준다고 밝히지만, 막상 이 상금은 ‘글삯(인세)’을 미리 주는 셈이기 일쑤이다. 다시 말하자면, 출판사에서 주는 상을 받아서 그 출판사에서 책을 낼 적에 ‘책이 나온 뒤에 상금을 넘는 돈을 글삯으로 벌어들여 주지’ 않으면 글삯이 한 푼도 없다. ‘상금’은 모두 겉발림·이름팔이일 뿐, 선인세를 줄 뿐이다. 생각해 보라. 이게 무슨 상금인가? 상을 주려면 상금은 상금이고 글삯은 글삯대로 따로 챙겨 주어야 맞다. 상금 많이 주는 척하지만, 참말로 상금을 주는 출판사는 없는 셈이랄까? 상금을 주겠다면 몇 천만 원을 준다며 내세우지 말고, 다문 100만 원이든 300만 원이든, 글삯하고 따로 셈해서 그냥 주어야 옳으리라. 저작권을 엉터리로 알거나 마구잡이로 굴리는 이는 문학사상사뿐이 아니다. 창비나 문학동네나 비룡소나 이곳저곳에서 여태 내놓은 ‘문학상 공모 요강’을 들여다보라. ‘상금하고 인세는 별도’로 여기는 곳이 있을까? 그들은 여태껏 겉발림에 이름팔이로 사람들을 속여 왔다. 다들 눈가림을 했지. 그리고 여태 숱한 글꾼은 출판사가 이러한 짓을 눈가림으로 일삼았어도 슬그머니 넘어갔다. 상을 받았으니 그 상을 그들 글꾼도 똑같이 내세우면서 어깨동무를 한 꼬락서니이다. 2020년에 이르도록 이런 겉발림·이름팔이 문학상일 뿐이라는 대목을 따지거나 그런 출판사에서 책을 안 내거나 그런 잡지사에 글을 안 실은 글꾼이 몇이나 될까? 아니, 있기나 할까? 그나마 2020년 이상문학상을 놓고는 이제서야 겨우 말 몇 마디를 하는 글꾼이 보이기는 하네. 문학상이 왜 그 나물에 그 밥인가를 사람들이 너무 모른다. 게다가 문학상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선배작가(원로작가)하고 후배작가(신진작가)가 더없이 끼리끼리 노는 모습을 여태 쉬쉬해 왔다. 제발 이제부터라도 바보짓을 멈추자. 글다운 글을 쓰고, 삶다운 삶을 짓고, 사랑다운 사랑으로 오늘 하루를 가꾸기를 빌 뿐이다. 2020.2.4.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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