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책과 어린이와 나무 : 나는 예전에 큰고장(도시)에서 살 적에 “책을 안 챙기고 다니는 사람하고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말했지만, 아이를 낳아 돌보고부터는 “어린이 마음으로 눈길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하고는 할 얘기가 없다”고 생각·말·삶을 바꾸었고, 시골에 보금자리를 옮기고부터는 “나무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하고는 말을 섞을 생각이 없다”고 생각·삶·말을 바꾸면서 산다. 큰고장에 살면서 버스나 전철을 탈 적에 손전화만 들여다보거나 종이새뜸만 들춘다면 마음이 얼마나 메마를까. 아이를 낳아 돌보는데 홀가분히 웃고 떠들며 쉽고 상냥한 말씨로 노래하지 않는다면 마음이 얼마나 가난할까. 시골에 살든 서울에 살든 나무 곁에 서서 줄기를 부드러이 쓰다듬고는 뺨을 가볍게 대며 “사랑해” 하고 속삭일 줄 모른다면 넋이 얼마나 캄캄할까. 책은 삶을 갈무리한 열매요, 어린이는 사랑을 노래하는 씨앗이요, 숲(풀과 나무)은 살림을 짓는 집인걸. 2021.6.7.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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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껴쓰다 : 저녁에 갑작스레 전화를 받는다. 지난 2019년에 나온 어느 ‘어린이 동시꾸러미’에 실린 어느 어린이 글이 어느 출판사에서 낸 책에 실린 글(어른이 쓴 동시)을 고스란히 베낀 줄 뒤늦게 알려져 말썽이 되었기에 ‘그 아이가 썼다는 글’을 지워야 한단다. “그렇군요. 그런데 아이는 그렇게 베껴쓸 수도 있는데, 부디 그 아이하고 그 아이를 맡았던 샘물님(교사)하고 새롭게 배우는 길이 되면 좋겠네요.” 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베껴쓰기(필사)’를 안 좋아할 뿐 아니라 아예 안 한다. 베껴쓰기로는 하나도 못 배우니까. 하려면 ‘배워쓰기’를 해야 할 뿐이다. 배우려고 쓸 뿐, 베끼려고 쓰면 스스로 바보가 된다. 아이야, 알렴. 네가 쓸 수 있는 글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고작 다른 사람 글을 베껴서 네 이름을 붙이니? 다른 사람이 쓴 글이 아름답구나 싶으면, 그 아름다운 숨결을 배워서 네 나름대로 새롭게 쓰기를 바라. “맞춤길이나 띄어쓰기는 다 틀려도 좋아. 그저 네 숨결을 노래하면 돼. 우리는 잘나려고 글을 쓰지 않아. 우리는 핑계를 대거나 투덜거리려고 글을 쓰지 않아. 우리는 돈을 벌려고 글을 쓰지 않아. 우리는 이름을 팔려고 글을 쓰지 않아. 우리는 오직 스스로 사랑하면서 이 사랑이 즐겁게 흘러넘쳐서 온누리가 푸르게 우거지는 숲으로 나아가는 길에 한손을 거들려고 글을 써. 우리는 스스로 숲이 되고, 하늘이 되고, 바다가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빗물이 되고, 풀꽃나무가 되고, 새가 되고, 별빛이 되고, 눈송이가 되다가, 어느새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오를 꽃씨가 되려고 글을 쓰지.” 이런 이야기를 어느 어린이, 이제는 푸름이가 되었을 그 아이한테 들려주고 싶다. 2021.5.31.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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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어(따돌림말) : 곰곰이 돌아보면 ‘따돌림말(차별어)’을 다루는 책이 나오면 나올수록 외려 따돌림말이 더 퍼진다고 느낀다. 따돌림(차별)을 다루는 글(동화·소설)이나 그림책이 나오면 나올수록 오히려 따돌림길(차별문화)이 더 퍼지는구나 싶다. 글이고 그림이고 따돌림짓을 없애자고 외치지만, 이런 외침말이 나올수록 더더욱 따돌림짓이 깊어지거나 드세다고 느낀다.


어째서 거꾸로 갈까? 더 곰곰이 생각하니, 우리 스스로 따돌림(차별)만 생각하기에 삶터(사회)에서도 책과 살림길(문화)에서도 이 따돌림(차별) 하나로 쳇바퀴를 도는구나 싶다. 마음에 사랑이 아닌 따돌림이라는 생각씨앗을 담으니 늘 새삼스레 따돌림을 우리 스스로 짓는 셈이랄까. 이 대목을 느낀 뒤부터 따짐글(비판)을 되도록 안 쓰기로 하지만, 따지는 글이 아니라 사랑으로 녹이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지만, 막상 따돌림말(차별어)이 아닌 ‘사랑말’을 혀에 얹고 헤아리고 주고받고 생각하고 글이며 그림으로 펴는 길을 가는 이웃은 드물지 싶다.


하나같이 따돌림짓이 어떠한가를 낱낱이 그리면서 스스로 생채기랑 멍울을 더 후벼파고 더 퍼뜨리는 노릇이 된다고 느낀다. 오늘날 서울바라기(도시문명)을 따지거나 나무라는 일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펠레의 새 옷》이나 《엄마의 생일 선물》 같은 엘사 베스코브 님 그림책을 생각해 보자. 《미스 럼피우스》나 《엠마》 같은 바바라 쿠니 님 그림책을 생각해 보자. 《가을 아이》나 《봄 아이》나 《여름 아이》나 《겨울 아이》 같은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책을 생각해 보자. 《밀리의 특별한 모자》 같은 그림책을 생각해 보고, 《닭들이 이상해》나 《날아라 꼬마 지빠귀야》 같은 그림책을 돌아보자.


우리가 마음에 오롯이 사랑말을 담아서 살아내지 않고서야 따돌림말(차별어)이 사라질 일이 없다. ‘안 써야 할 차별어’를 모아서 들려주는 책이나 배움판(수업)이나 이야기꽃(강의)이 아닌, ‘즐겁게 쓸 사랑말과 아름말’을 갈무리해서 즐거이 웃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나누는 길을 갈 노릇이지 싶다. 여태까지 이 사랑길과 아름길을 안 갔다면, 오늘부터 이제라도 좀 가야지 싶다. 2021.5.21.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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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까 : 때로는 아침부터 ‘비추천도서’ 이야기를 쓴다. 둘레에서 쓰는 말로는 ‘비추천’이지만, 나는 나름대로 ‘얄궂책·거짓책·말썽책·나쁜책·몹쓸책·손사래책’처럼 다르게 이름을 붙여 본다. 어느 책은 얄궂고, 거짓스럽고, 말썽을 일으키고, 그저 나쁘고, 몹쓸 이야기이며, 손사래를 칠 만하더라.


그러나 내 눈과 삶과 자리와 숲으로 볼 적에만 얄궂책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책을 좋아할 수 있어도 좋겠는데, 나로서는 싸움연모(전쟁무기)를 안 좋아해도 싸움연모를 좋아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다룬 책을 찾기도 한다. 아무리 말썽을 일으키고 응큼짓을 저질렀어도 이런 치를 믿거나 따르는 사람도 수두룩하다.


거짓을 담은 책이지만 정작 불티나게 팔리기도 하고, 나쁜짓을 일삼고도 그저 이름값으로 장사를 하는 책이 있다. ‘아름책’이 아닌 ‘얄궂책’이 판친다고 해서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으나, 이런 삶터가 되는 탓에 글 한 줄을 놓고 ‘글치레·글멋·글꾸미기·글만들기’가 판친다. ‘등단’이란 이름으로 수수한 글지기를 억누르기도 한다. 겉멋질은 겉멋질일 뿐, 글이나 책이 아니다. 겉치레 글쓰기로는 그럴듯하게 꾸밈질이 될 뿐, 눈부시거나 피어나거나 아름다울 글하고는 동떨어진다.

 

적잖은 평론가·시인·작가·기자가 겉멋질 글쓰기를 내세우는데, 이 바람에 휩쓸리는 사람도 적잖다. 이런 글에서는 사랑이 묻어나지 않고, 삶이 흐르지 않으며, 살림하고 동떨어진다. 궂이 얄궂책 이야기를 쓰는 뜻은 이 하나라 할 만하다. 겉치레 이름값이 아닌 우리 사랑을 바라보면 좋겠다. 겉멋이 아닌 우리 살림을 읽으면 좋겠다. 겉껍데기를 글에 담지 말고, 잘나든 못나든 우리 삶을 고스란히 글로 옮기면 좋겠다.


누구나 글을 즐겁게 쓰면 된다. ‘이름올리기(등단)’를 해야 하지 않고, 등단작가 아니면 작가나 예술가로 안 치는 썩어문드러진 이 나라 글판을 갈아엎을 노릇이라고 여긴다.


글쓰는 아줌마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글님(작가)’이다. 누구나 글님이다. 언제나 글님이다. 아이도 글님, 할매도 글님이다. 이웃 글님 누구나도, 흉내나 따라하기가 아닌 이웃님 삶을 즐겁게 사랑하면서 고스란히 글빛으로 여미면 좋겠다. 2021.3.2.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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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눈 : 아이들은 매같은 눈이라기보다 사랑스런 눈으로 다 알아채지 싶다. 아이들이 보기에 스스로 즐겁거나 아름답다면 그 이야기를 질리지 않고 늘 재미있게 다시 듣고 싶다. 책이라면 그 책을 100벌도 200벌도 아닌 1000벌을 거뜬히 다시 읽으면서 늘 새롭고 좋다고 말한다. 어른 눈은 어떠한가? 어른은 ‘서평단’이나 ‘주례사 비평’에 얽매여 그만 ‘사랑눈’을 잊거나 잃어 가는구나 싶다. 어른 스스로도 100벌이나 200벌조차 아닌 1000벌을 되읽을 만한 책일 적에 즐거이 아름책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면 좋겠다. ‘베스트셀러·스테디셀러’가 아닌 ‘아름책’을. 2021.4.7.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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