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73 책나이



  아이는 책을 손에 쥘 적에 오직 책을 바라봅니다. 아이는 어버이하고 눈을 마주할 적에 오로지 어버이 눈을 바라봅니다. 아이는 하늘하고 별을 볼 적에 그저 하늘하고 별을 바라봅니다. 아이는 이야기를 들을 적에 오롯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이는 혼자 놀거나 동무하고 놀거나 한결같이 놀이 하나에만 신나게 마음을 쏟습니다. 아이는 길을 걸을 적에 두 다리를 놀리고 온몸을 움직이는 바로 이곳을 듬뿍 누립니다. 아이는 책을 “누가 언제 썼고, 어느 곳에서 펴냈으며, 책값이 얼마이고, 책이 새것인지 헌것인지”를 하나도 안 봅니다. 그냥 책을 봅니다. 아이 눈빛은 왜 오롯이 사랑일까요? 아이 손길은 왜 언제나 노래요 웃음이자 춤짓일까요? 아이는 높고 낮음이나 옳고 그름을 안 가립니다. 바로 마음으로 파고들거나 스며들어서 동무하는 눈빛이 되지요. 우리 어른은 마음읽기를 잊거나 잃었지 싶습니다.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느끼고 마음을 헤아려 스스로 새롭게 피어나는 사랑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이 책이 “어느 해에 나왔는가”도 “누가 썼는지”도 “어느 곳에서 펴냈는지”도 굳이 볼 일이 없어요. 겉모습이나 겉이름을 치워야 속빛하고 속사랑을 만납니다. 책을 책으로 마주하자면 아이다운 눈빛이요 손길일 노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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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72 알기 앞서



  알았기 때문에 “알기 앞서”를 생각합니다. 알지 않았으면 “알기 앞서”가 없습니다. 모르던 때에는 늘 “모르는 오늘하고 어제”만 있을 뿐 “모르기 앞서”조차 없어요. 다만 “모르기 앞서”라 한다면, 모르는 줄조차 모르던 때라면, 아직 이곳에 태어나지 않고서 푸른별을 떠도는 조그마한 빛씨앗이라고 하겠지요. 알았기 때문에 “알기 앞서”가 있고, “알기 앞서·알고 나서”가 나란히 있는 터라, 어느덧 한 뼘이 자란 마음을 마주할 만합니다. 무언가 알아낸 우리는 “알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안 하기”도 하지만 “알았기 때문에 예전처럼 새롭게 하기”도 합니다. “알았기 때문에 알기 앞서처럼 군다면 어떻게 새길이 나는가를 미리 어림”하기도 하는데, 알기 앞서처럼 굴더라도 오늘과 똑같은 길을 가지는 않더군요. 몰랐어도 알았어도 우리가 나아가는 삶이라는 길은 늘 달라요. “알기 앞서로 돌아가지 못하는 줄 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알기 앞서로 얼마든지 돌아갈 수 있는 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늘 마음에 따라 다르고, 마음에 심는 생각에 따라 다르니까요. 아이가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면서도 씩씩하게 자라는 하루를 늘 지켜보노라니, “알다·알기 앞서·모르다”는 모두 우리 스스로 친 그물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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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책하루, 책과 사귀다 71 눈길



  우리는 늘 ‘눈길(관점)’을 읽는구나 싶습니다. ‘우리 눈’으로 ‘이웃 눈’을 읽고, ‘이 눈’으로 ‘하늘과 바람과 땅과 비와 흙과 풀꽃나무와 숲과 바다가 흐르는 눈’을 읽는구나 싶어요. 우리 눈으로 이웃 눈을 읽기 마련이라, 글이든 책이든 ‘글쓴이·책쓴이 눈길·눈썰미·눈빛’이 흐르지 않는다면 어쩐지 밍밍하거나 밋밋하다고 느끼지 싶어요. 또는 눈속임이나 눈가림을 한다고 느낄 테고, 뭔가 거짓말을 하거나 겉치레로 고물을 챙기려는 셈속이 있다고 느끼기도 하고요. 글 한 줄을 쓰더라도 우리가 스스로 우리 눈빛을 밝히거나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부터 뭔가 스스로 감추거나 숨기려는 뜻이라고 느껴요. 반가우니 반갑다고 말하고, 아름다우니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속낯까지 못 들여다본 눈길이더라도, 우리가 때때로 겉낯에 휩쓸려 엉성하거나 엉터리로 바라보았더라도, 오늘 이곳에서 우리 눈망울을 스스럼없이 밝히고 나누기에 참을 깨닫고 거짓을 알아채면서 우리 속마음을 즐겁고 슬기로이 가꿀 만하지 싶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릴 글이나 책이 아닌, 눈빛을 나누고 눈길을 헤아리면서 눈결을 가꾸려는 마음으로 마주하는 글 한 줄이요 책 한 자락이지 싶습니다. 이웃 눈길을 읽는 사이 우리 눈길이 자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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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빛 2021.11.19.

책하루, 책과 사귀다 70 일본책



책을 이웃하고 나누고 싶어 느낌글을 처음 쓰기로 마음먹은 때는 1991년이고, 푸른배움터(고등학교) 첫걸음(1학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2002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책’은 되도록 적게 얘기하려고 애썼다면, 그무렵부터 “책이라면 그저 아름다운 책을 이야기할 뿐, 이 나라 책도 옆나라 책도 먼먼 나라 책도 가릴 까닭이 없지 않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고자란 분이 쓴 책이 갈수록 따분하거나 틀에 박히거나 돈·이름·힘을 거머쥐는 윗자리에 올라서려는 낌새가 짙어, 못마땅한 책이 많기도 했습니다. 제가 쓴 책도 아니지만, 2006년에 《천천히 읽기를 권함》이란 책을 널리 알리려고 애쓰니, “뭔 일본놈 책이 좋다고 그렇게 알려?” 하면서 핀잔하는 이웃이 많았습니다. 2021년에 《곁책》을 써냈는데, “이 책에 일본책을 많이 다루셨는데, 왜지요?” 하고 묻는 이웃이 많습니다. “누가 쓰고 그렸는가를 살피거나 따지지 말고, 줄거리·이야기에 사랑이 흐르는가를 헤아려 보셔요. 우리는 겉모습·이름으로 아름길이나 아름책을 읽지 않아요. 오직 사랑이란 눈으로 사랑을 찾아나설 뿐입니다.” 이웃나라 아름책을 읽고 알리면서 이 말을 보탭니다. “앞으로는 저 스스로 아름책을 쓰려고요. 이웃님도 아름책을 함께 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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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노래

책하루, 책과 사귀다 69 술배



  저를 처음 보는 어린이가 “왜 남자가 머리가 길어?”, “남자야? 여자야?”, “선생님은 주량 어떻게 돼요? 우리 엄마는 맥주 되게 좋아하는데.”, “와, 알통맨이다! 알통맨이야! 선생님 알통 어떻게 키웠어요?” 하고 묻더군요. 집에서 어버이가 늘 보이거나 말하는 결에 따라 어린이 생각이 고스란히 자랍니다. 어린이는 왜 머리카락에 따라 순이돌이(남녀)를 가를까요? 집에서 어버이가 그렇게 사람을 가르거든요. 설거지나 빨래를 하는 사내를 처음 보는 어린이도 “왜 남자가 설거지를 해?”, “왜 남자가 빨래를 해?” 하고 묻습니다. 스무 살이 되도록 부엌칼을 쥔 적이 없거나 밥을 차린 적이 없는 젊은이를 만나고, 짝이 있고 아이를 낳았으되 서른 살이 넘도록 걸레를 빨아서 바닥을 훔친 적이 없는 분도 만나는데, 이러한 삶길에 서면 어린이는 어버이한테서 무엇을 배울까요? 걸어다닌 적이 없고, 골목놀이를 한 적이 없고, 아름다운 그림꽃책(만화책)을 쥔 적이 없고, 풀꽃하고 말을 섞은 적이 없고, 맨발로 풀밭을 거닌 적이 없고, 빗물을 혀로 받아서 먹은 적이 없는 어린이는 무엇을 물어보고 생각할 만할까요? 술배(주량)를 묻는 아이한테 빙그레 웃으며 “즐기고 싶은 만큼만 마셔.” 하고 얘기했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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