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연기를 하고 싶은가



  고흥에서 순천으로 가는 시외버스에 텔레비전이 켜졌습니다. 손님이 제법 있으니 이 아침연속극을 보시는 듯합니다. 아침연속극에는 싸움, 때리기, 죽이기, 악쓰기, 속이기, 시샘하기, 성내기, 빼앗기, 괴롭히기, 울기, 소리치기 들이 쉬지 않고 흐릅니다. 이런 연속극을 아침에 들여다보면서 우리 머리나 마음은 어떻게 될까요?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방송사는 왜 아침마다 이런 줄거리로 연속극을 내보낼까요? 저녁에도 매한가지이지요. 왜 연속극이며 운동경기이며 영화이며 죄다 죽이고 죽고 싸우고 다투고 때리고 맞고 악쓰고 울고부는 그런 줄거리를 다루어야 할까요? 우리를 이런 틀에 길들여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길은 아닐까요? 그런데 무엇보다 연기자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연기자는 이런 연기를 참말 하고 싶을까요? 누구를 미워하고 싫어하다가 죽이려고 하는 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연기를 참으로 하고 싶을까요? 이런 연기를 훌륭히 해내야 이름을 떨치고 돈도 벌며 보람이 있을까요?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라 삶으로 뒤바뀌지 않을까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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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TV방송은 틀림없이



  좋은 TV방송을 보면 좋은 마음이 된다는 이웃님 말을 듣다가 불쑥 한마디를 하고야 맙니다. “그런데 선배는 늘 좋은 TV방송을 보기만 할 뿐, 몸으로는 안 움직이지 않나요? 좋은 TV방송은 이제 그만 봐도 되지 않나요?” 이 말을 하고서 깊이 뉘우칩니다. 이 말은 고스란히 나한테 돌아올밖에 없습니다. ‘좋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럽다고 하는 책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되지 않나?’ 하고 물을 만하니까요. 좋은 책도, 훌륭한 책도, 사랑스러운 책도 참말 꾸준히 새로 나옵니다. 좋거나 훌륭하거나 사랑스러운 책을 그때그때 장만해서 보기만 해도 한삶을 다 보낼 만합니다. 이제 책은 그만 읽어도 될 만합니다. 이러다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자질구레한 일을 줄여서 아름다운 책을 읽으며 날마다 마음을 정갈히 돌보는 길을 걸어도 될 노릇 아닌가 하고요. 아침저녁으로 푸르게 하늘숨을 마시고 아이들하고 기쁨을 노래하다가 아름다운 책을 몇 줄씩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스리면 될 노릇 아닌가 하고요. 좋은 TV방송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이러한 TV방송도 얼마든지 즐길 만합니다. 그런데 TV방송하고 책은 큰 얼거리에서 달라요. TV방송은 화면을 켜고 전기를 써야 합니다. 책은 숲에서 왔고, 해가 뜬 날 가만히 펴서 언제라도 누릴 수 있습니다. 책이 더 좋다거나 아름답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전자책을 굳이 읽을 뜻이 없습니다. 전기를 안 먹고도 삶을 새롭고 아름답게 밝히는 길동무가 책이라 한다면, 이 책 몇 가지를 살뜰히 건사하면 좋겠다고 여길 뿐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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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를 보는 책인가



  흔들리는 버스나 전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열일곱 살부터 이런 책읽기를 했습니다. 열일곱 살이던 해에 어버이가 집을 옮기는 바람에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두 다리 아닌 버스로 다녀야 했고, 버스로 한 시간 즈음 다녀야 하는 길에 언제나 한 손에 책을 쥐고서 제 마음을 책을 거쳐서 읽으려 했습니다. 흔들리는 곳에서 책을 어떻게 읽을까요? 흔들림에 맞추어 제 몸을 똑같이 흔들기에 얼마든지 읽습니다. 흔들리는 곳에서 제 몸이 안 흔들리도록 하려면 책이며 눈이 다 흔들려서 글씨가 눈에 안 들어옵니다. 그러나 버스나 전철이 흔들리는 결하고 제 몸을 똑같이 맞추어 움직이면(흔들면), 제 눈은 책을 또렷이 바라보고 아무 흔들림 없이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을 적에는 오직 책만 바라봅니다. 다른 것을 바라볼 까닭이 없습니다. 창밖을 본다거나 버스·전철을 탄 다른 손님을 볼 까닭이 없습니다. 사내라는 몸을 입고 태어난 터라, 제 또래는 버스를 타면 으레 ‘가시내라는 몸을 입고 태어난 여학생’을 흘깃거리는데, 저는 그런 흘깃질에 마음이 없었어요. 거꾸로 제 또래는 책읽기에 마음이 없었습니다. 책읽기를 오래 하다 보니, 이제는 1000쪽에 이르는 책도 몇 분이나 몇 초 만에 읽어낼 수도 있습니다. 1000쪽이건 2000쪽이건 이러한 책에 깃든 참거짓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요. 무슨 심령술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숲에 깃들어 숲을 늘 마주하면서 숲을 읽으려 한다면, 숲을 척 보아도 숲이 아픈지 튼튼한지 바로 알아챕니다. 저는 책으로 제 마음읽기를 어릴 적부터 했기에, 어느 책을 보든 이 책을 쓴 분이 ‘무엇을 바라보고 바라며 책을 냈는가’를 마음으로 읽습니다. 이를테면, 돈을 바라보았는지, 이름값을 바라보았는지, 교수 자리를 바라보았는지, 티없는 넋으로 이웃한테 앎을 나누려 했는지, 즐겁게 배움길을 걸으며 깨달은 슬기를 벗한테 알려주고 싶은지, 어설피 짚은 헛다리가 헛다리인 줄 모르고 자랑을 늘어놓으려 하는지 …… 들이 책 겉종이만 보아도 한눈에 들어와요. 그런데 퍽 오랫동안 놓친 대목이 있습니다. 책을 보며 책을 읽어낼 줄 아는 눈이라면, 사람을 보며 사람을 읽어낼 줄 아는 눈으로도 옮아 가야 아름답겠지요. 이 눈으로 살림과 삶과 사랑을 읽고 알아내며 즐겁게 꽃피우는 눈으로도 옮겨 가야 기쁘겠지요. 그러니까, 저는 책으로 마음을 읽는 눈을 키우기는 했어도, 그 다음 길을 어떻게 간다든지 새로 지필 만하다는 대목을 못 느끼거나 생각을 않은 채 살았습니다. 열일곱부터 걸어온 이 길이 어느 고비를 맞이한 요즈음 아주 짤막한 말 한 마디가 벼락처럼 가슴으로 스몄습니다. “더 할 수 있습니다”라는 한 마디입니다. 이 말을 들려준 분은 저더러 책을 앞으로 어떻게 읽으라거나, 여러 마음닦기나 몸닦기를 어떻게 다스리라고 이끌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른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이 한 마디 “더 할 수 있습니다”를 들려주었을 뿐입니다. 저는 이 한 마디를 듣고 먼저 물속에서 제 몸을 새롭게 맞추어 보았습니다. 눈을 뜨고 골짝물에 잠겨 숨을 일곱걸음 내뱉아 보았지요. 세걸음 내뱉기까지는 어렵잖이 되는데, 네걸음을 내뱉으려니 문득 숨이 막혀요. 이때에 “더 할 수 있습니다”를 떠올리며 몸에 그렸고, 그 뒤 거침없이 물속에서 숨을 내뱉을 수 있었고, 냇바닥에 착 가라앉아서 달라붙은 제 몸 둘레로 온갖 물고기가 맴돌면서 ‘반가워, 잘 왔어. 우리 같이 놀자.’ 하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우리 몸에는 끝이 없지만, 우리 몸은 이 몸뚱이에 끝이 있는지 없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끝이 있다는 생각을 씨앗 한 톨로 심으면 몸은 이대로 따라갑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끝이 없다는 생각을 다시 씨앗 한 톨로 심으면 몸은 또 이대로 따라갑니다. 무엇을 먹어야 튼튼해지지 않겠지요. 무엇을 안 먹어야 튼튼해지지 않을 테고요. 먹든 말든, 마음이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살필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하든 안 하든, 하다가 그치든 끝까지 해보려 하든, 제대로 바라보아야지 싶습니다. 우리는 어디를 보는 책읽기를 할까요?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마음읽기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나아가려는 꿈읽기를 할까요? 길은 늘 우리 마음에 있고, 길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스스로 머리를 어떻게 틔워서 가슴을 어떻게 여는가에 달린 노릇이지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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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대가?



  고흥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가 거침없이 달립니다. 으레 황전쉼터에서 쉬거나 임실군 오수쉼터에서 쉬는데, 오늘 따라 이 시외버스는 황전에서도 오수에서도 안 쉽니다. 저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서 쉼터에 안 들러도 됩니다만, 거의 세 시간쯤 달리는 시외버스가 내체 달리기만 하니 손님 한 분이 오줌을 참기 어려운지 버스 일꾼한테 말을 여쭙니다. 버스 일꾼은 쉼터 아닌 어느 길가에 버스를 댑니다. 손님 한 분은 길가에서 풀밭에 깃들어 오줌을 눕니다. 볼일을 마친 손님 한 분은 버스에 오르면서 사람들한테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입니다. 깜짝 놀랍니다. 아니, 손님이 고개를 숙일 일일까요? 마땅히 섰어야 하는 쉼터에 안 쉬었고, 쉼터에서 안 쉰다고 알림말 한 마디 없었으니, 다른 손님한테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 말할 사람은 버스 일꾼이요, 이렇게 시외버스를 거침없이 몰고 쉼터를 들르지 않은 일꾼을 거느린 버스회사 우두머리입니다. 왜 그대가 고개를 숙이나요? 왜 이렇게 우리는 길든 몸짓이 되나요? 따져야 할 모습이 보이면 따질 노릇이고, 파헤쳐야 할 곳을 제대로 파헤쳐야 할 노릇이기에, 책 하나를 손에 쥐어 읽을 적에, 이모저모 샅샅이 훑으면서 배울 대목하고 아쉬운 대목을 짚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곰곰이 돌아보면서 제 몸짓이나 말짓에서 군더더기를 제때에 제대로 깨달으려고 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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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그릇



  플라스틱 물병이나 통이나 그릇을 안 쓸 수 있을까요? 플라스틱으로 만든 것을 버릴 수 있을까요? 안 쓴다면 언제부터 안 쓸 수 있을까요? 버린다면 어떤 몸짓으로 버릴 수 있을까요? 아마 다섯 갈래 길이 있으리라 봅니다. 또는 다른 길이 더 있을 수 있을 테고요. 플라스틱을 안 쓰거나 버리는 길을 하나씩 짚어 봅니다.


 ㉠ 누구한테서 이야기를 듣기 앞서 느낌으로 알기에, 플라스틱을 안 쓰거나 버린다 ㉡ 누구한테서 이야기를 듣고 곧장 플라스틱을 안 쓰거나 버린다 ㉢ 책·신문에서 읽고 바로 안 쓰거나 버린다 ㉣ 책·신문에서 읽고 스스로 더, 깊이, 낱낱이 알아본 뒤에 안 쓰거나 버린다 ㉤ 내 삶자리뿐 아니라 이웃 삶자리에서도 플라스틱이 사라지도록 한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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