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책 새론책



  묵은똥을 누어야 새론밥을 먹습니다. 묵은똥을 내보내지 않으면 속이 더부룩한 나머지 무엇을 먹더라도 아무 맛을 못 느낄 뿐 아니라, 먹는 기쁨도 못 누립니다. 묵은앎을 씻어야 새론앎을 받아들입니다. 묵은앎이 가득한 채로 산다면 아무리 새로운 삶과 살림을 바탕으로 빚은 어마어마한 이야기가 곁에 흐르더라도 어느 하나 못 받아들이는 고리타분한 몸짓이 됩니다. 묵은책을 책시렁에서 치워야 새론책을 맞아들입니다. 책시렁에 묵은책이 가득해서 짓누른다면 어마어마한 깊이와 너비를 드러내어 우리 삶과 살림에 새로 사랑을 북돋우는 책을 만났더라도 선뜻 맞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묵은똥이나 묵은앎이나 묵은책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묵은똥이 돌아갈 흙을 찾아서 묵은똥이 흙에 깃들어 새흙이 되도록 하면 되어요. 묵은앎은 글로 적어 놓고서 우리가 지나온 발자국을 되새기는 배움길로 삼으면 되어요. 묵은책은 우리 책숲집을 마련해서 고이 모셔 놓고서 이 묵은책을 되읽고 싶을 적에 얼마든지 되읽으면 될 뿐 아니라, 우리 뒷사람이 이 묵은책으로 새길을 찾거나 배우고 싶을 적에 물려주거나 헌책집에 내놓으면 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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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게랑 많이랑

  이웃님한테 들려줄 수 있는 책읽기라면 ‘즐겁게 읽기’입니다. 즐겁게 읽을 적에는 적게 읽어도 넉넉합니다. 아니, 즐겁게 읽을 적에는 스스로 몸이며 마음에 알맞게 건사할 수 있고, 나중에는 종이책이 없어도 바람책이나 풀책이나 하늘책이나 물책이나 풀벌레책이나 살림책이나 사랑책처럼 우리 곁에서 마주하는 모든 삶이랑 자리에서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새로읽기’를 누립니다. 이와 달리 즐겁게 읽기보다는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을 적에는 날마다 참으로 많이 읽고 거듭거듭 읽어도 모자라요. 틀림없이 푸짐하게 읽었지만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에 책을 자꾸자꾸 읽느라 다른 일이나 놀이나 살림을 할 틈이 사라집니다. 책으로만 온삶이 흐르고 말아요. 이때에는 많이 있어도 많은 줄 못 느끼는, 많이 읽되 외려 너무 적다고 느끼고 마는 길이 되어요. 읽은 부피나 숫자가 대수롭지 않듯, 알려진 책이냐 많이 팔린 책이냐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마음에 씨앗을 한 톨 심어서 우리 몸에 새롭게 깨어나도록 북돋운 책 하나인지 아닌지를 헤아릴 수 있기를 빕니다. 굳이 ‘즐겁게 많이’ 읽으려 하지 마셔요. ‘많이’를 덜고 ‘즐겁게’ 읽으면 좋겠어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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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책집지기

 

  저는 헌책집이라는 곳을 1992년부터 다니면서 책집지기 이웃님한테서 깊고 넓게 배울 수 있었어요. 이 나라 곳곳에서 저마다 다르게 꾸리는 헌책집을 돌아보노라면, 어떻게 책살림을 꾸려 가는가를 한눈에 알아볼 만한데요, 오래오래 사랑받을 뿐 아니라 책손이 꾸준히 드나드는 책집은 여러 대목에서 달라요. 첫째, 책집지기 혼자 아는 책만 건사하지 않아요. 둘째, 책손이 자주 찾는 책만 건사하지 않아요. 셋째, 책집지기 스스로 새로 배우는 책을 건사해요. 넷째, 책손이 아직 모르지만 어김없이 손에 쥐려고 할 만한 책을 꾸준히 배워서 건사해요. 다시 말해서 책을 꾸준히 찾아서 읽으려는 책손은 꾸준히 배우려고 하는 삶입니다. 책갈래를 넓혀 새롭게 읽으려는 책손은 스스로 낯선 길이라 하더라도 즐겁게 배우려고 하는 살림입니다. 이러한 책손을 맞아들이는 책집지기도 늘 새롭게 배우며 언제나 낯선 책길을 열어젖히면서 날마다 즐거운 살림이에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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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알아보는 눈

 

  이야기꽃을 펴는 자리에서 이웃님이 제 책을 들고 와서 제 이름을 적어 달라 하십니다. 제가 쓴 책을 무척 즐겁게 읽었다면서 “이런 귀한 책을 써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면서 빙그레 웃으셔요. 저도 따라 빙긋빙긋 웃으면서 말씀을 여쭙니다. “제가 쓴 책을 귀하다고 알아보아 주시기에 귀한 눈이라고 느껴요. 귀한 눈이 귀한 책을 알아볼 뿐 아니라, 책 하나에 귀한 숨결을 담아 주지 싶고요. 우리는 모두 귀한 사람, 곧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아직 우리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미처 못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할 뿐이지 싶어요. 누구는 삶을 글로 여미면서 아름답고, 누구는 삶을 글로 여민 책을 알아보아 읽으면서 더 새롭게 하루를 짓는 길을 걸어가기에 아름답구나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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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이라는 씨앗



  한글날을 한 해에 고작 하루로 여길 수 있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이렇게 여기는데, 이뿐 아니라 지난 한 해 동안 말이며 글을 함부로 쓰거나 거의 팽개친 채 살았네 하고 뉘우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한글날이 하루뿐이니 그만 쉽게 잊을 수 있을 텐데, 이때에는 이 실타래를 푸는 길이 있습니다. 먼저, 한 해 삼백예순닷새를 늘 한글날로 여기면 됩니다. 한글날뿐 아니라 한말날이라고, 글하고 말을 함께 기리며 생각하고 사랑하고 아끼고 돌보고 가꾸는 아침저녁을 누리면 되어요. 다음으로, 한글날이 하루뿐이라 하더라도 바로 이 날 기쁜 말이랑 글을 씨앗으로 심는다고 여길 만합니다. 나무 한 그루를 심듯이, 밭에 씨앗 한 톨을 심어 열매를 얻으려 하듯이, 우리는 사랑스럽거나 즐겁거나 곱거나 알차거나 살뜰하거나 뜻깊거나 거룩하거나 훌륭하거나 좋거나 상냥하거나 참하거나 참되거나 멋스럽거나 맵시나거나 아기자기하거나 신바람나거나 새로운 꿈을 ‘말씨앗’ 한 톨에 담아서 심을 만해요. 그리고 한글날을 비롯해서 좋은 사전이나 우리말 이야기책을 한 권씩 장만하거나 틈틈이 장만해서 읽어 볼 만하겠지요. ‘숲노래’ 같은 사전짓는 두레에서 엮거나 쓴 책도 좋고, 어느 책이든 좋습니다. 씨앗 한 톨을 심는 날로 기려 봐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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