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



  읽은 책을 책꽂이로 옮깁니다. 읽을 책을 책상맡에 놓습니다. 읽으려는 책을 찾아서 책집마실을 나섭니다. 읽은 책을 마음에 담으니 책시렁에 가만히 얹습니다. 읽을 책을 어깨짐에 살폿 담아서 마실길에 오릅니다. 읽으려는 책을 꿈꾸면서 이쁜 책집에 어떤 새로운 이야기책이 들어와서 안겼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읽은 책은 이야기로 가꾸어서 아이들한테 들려줍니다. 읽을 책은 마음에 씨앗처럼 깃들려는 새로운 이야기꽃이 됩니다. 읽으려는 책은 우리 보금자리에 즐거운 세간이나 살림으로 찾아오겠지요. ‘은·을·으려는’은 어제요 오늘이며 모레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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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 ‘한여’? 아니, 그냥 ‘사람’

― 싸움 붙이는 책장사가 가는 길이란? 예스24 막말



  누가 ‘한남’이라 말하면, 저는 서울 한남동을 떠올립니다. 그곳 한남동을 디딘 일이 거의 없지만 으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남’은 “한국 남자”를 줄인 낱말로, 이름 그대로 한국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사내를 가리키기보다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내를 비아냥거리거나 깔보려는 뜻으로 쓰는 이름”이라고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준말이든 준말이 아니든, ‘한남·한국 남자’나 ‘한녀·한국 여자’를 비아냥거리거나 깔보려는 자리에 쓰면, 말이 무너지거든요.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쓸 말에 얄궂은 마음을 담는다면, 우리는 서로 아무런 이야기를 못 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한국 사내가 바보스럽거나 어리석거나 엉터리이거나 엉성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모든 한국 가시내가 바보스럽거나 어리석거나 엉터리이거나 엉성할 수 없어요. 대구·경북에서 나고 자란 분 가운데 바보스러운 이도 있고, 광주·전라에서 나고 자란 분 가운데 바보스러운 이도 있습니다. 고장 탓이나 성별 탓을 할 수 없습니다. 탓을 한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모습이나 몸짓이 되기까지 거친 길이나 삶에서 하나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길을 탓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내·가시내’라는 낱말을 쓰면 어떤 이는 ‘가시내’가 “성차별 용어”라고 여기면서 ‘여자’로 고쳐야 한다고 따집니다. 한자말로는 ‘남자·여자’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까마득히 오랜 낱말인 ‘사내·가시내’입니다. ‘가시내’는 ‘가시버시·각시·아가씨’ 같은 낱말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남북이 갈리면서 수수한 낱말 ‘동무’가 마치 “빨갱이 용어”라도 되듯이 몰아붙인 독재정권마냥, ‘가시내’는 먼먼 옛날부터 그저 이 말씨로 가만히 있었을 뿐이지만 요즈막에 들어와서 날벼락을 맞은 셈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가시내’라는 수수한 말씨가 제자리를 잃거나 빼앗겼다면, 왜 이 수수한 낱말이 제자리를 잃거나 빼앗겼는가를 살펴서 이를 가다듬거나 고치거나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가시내’라는 낱말을 “성차별 용어”로 쓰는지 낱낱이 따지고 살펴서 그들이 수수한 말에 엉뚱한 마음을 담지 못하도록 나무라고 타이르고 가르쳐야겠지요. 왜 그럴까요? 왜 ‘가시내’라는 말을 지키고 살려야 할까요? 이 수수한 말을 지키거나 살리지 못할 적에는 바로 요즈음처럼 ‘한국 남자’ 같은 수수한 말이 엉뚱하게 흔들리거나 무너지거든요.


  생각할 노릇입니다. ‘한남·한국 남자’란 말이 또다른 “성차별 용어”라 한다면, 이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누가 왜 이런 수수한 말을 함부로 “성차별 용어”로 마구 휘두를까요? 그들은 무엇을 노리면서 수수한 말을 마구 짓밟거나 짓뭉개려 할까요?


  곰곰이 보면, 성차별은 어른 사회에서 일으키는 못난 짓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성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자꾸 성차별을 하니 아이들은 어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고스란히 따라합니다. 요즈음도 꽤 많은 아이들은 길에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요, “왜 여자가 머리 짧아?”라든지 “왜 남자가 머리 길어?”라든지 “왜 여자가 바지 입어?” 같은 말을 읊더군요. 아이들은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바로 어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 (예스24에서 책광고를 하면서 쓴 말)


  누리책집 ‘예스24’는 지난 2018년 12월 2일에 광고글월을 띄웠습니다. 저한테도 이 광고글월이 왔습니다만, 광고글월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쓰레기통에 들어갔더군요. 누리글월 쓰레기통을 뒤져서 이 광고글월을 찾아냈고, 이런 광고글월을 보낸 뜻이나 줄거리나 누리책집 사과글을 하나하나 챙겨 읽었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누리책집 예스24에서 책소개를 하는 일꾼들, 또 ‘채널예스’를 꾸리는 일꾼은 거의 다 가시내인 줄 압니다. 제 책상맡에 ‘종이잡지’인 《채널예스》 2018년 12월호가 있어서 살피니, 편집후기에 이름을 적은 네 사람은 다 가시내입니다.


  가시내 일꾼이 있기에, 또는 오직 가시내 일꾼만 있기에, 이분들이 ‘남혐’을 아무렇게나 한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 여혐이나 남혐을 한다면, 게다가 여혐이나 남혐이 말썽이 되는 줄 모르고서 일을 저지른다면, 이는 어쩌다가 툭 튀어나오는 잘못이기 어렵습니다. 여느 자리하고 여느 때에 늘 그러한 말을 쓰면서 살거나 일하기에, 그러한 말이 매우 쉽고 부드럽게, 또 아무렇지 않게 불거질 뿐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국)녀(자)스럽니? (예스24 책광고를 살짝 바꿔 본 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녀’가 자랑스럽다면 “어쩌면 그렇게 한(국)녀(자)스럽니?”가 자랑스레 들릴 테고, 자랑스럽지 않다면 안 자랑스러이 들리겠지요. 그런데 자랑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남자·여자 또는 여자·남자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말을 함부로 책장사에 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싸움을 붙여서 돈을 벌기만 해도 된다는 생각을, 싸움이 한바탕 일어나면 누리책집은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번다는 생각을, 설마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부디 이런 생각은 안 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렇게 장사꾼스럽니? (예스24 막말 일꾼한테 물어볼 말 1)

 어쩌면 그렇게 바보스럽니? (예스24 막말 일꾼한테 물어볼 말 2)


  자, 이런 말을 누리책집 일꾼이나 ‘채널예스’ 일꾼한테 누가 들려준다면, 예스24 일꾼은 듣기 좋습니까? 뜻있는 책을 알리려 한다면, 뜻있는 말씨를 곱게 골라서 알뜰살뜰 가다듬기를 바랍니다. 널리 읽히고 싶은 책을 널리 퍼뜨리고 싶다면, 그래서 책장사도 신나게 하고 싶다면, 남녀나 여남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막짓은 부디 그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대로 고개를 숙이시고, 고개를 숙이실 뿐 아니라, 한동안 붓을 꺾으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우리 삶터가 “한쪽 성별에 치우치지 않도록 성평등 기틀을 마련하”듯이, 누리책집에서도 한쪽 성별에 치우치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하기를 바랍니다. 누리책집에서 책소개 글을 쓰거나 “웹진 채널예스”나 “종이잡지 채널예스”를 엮는 일꾼 가운데 50%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만큼은 ‘성별 균형’을 맞추기를 바랍니다. 공공기관뿐 아니라 책마을과 누리책집에서도 제대로 ‘성별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와 비슷하게 서로 싸움질이나 금긋기질을 부추기는 말썽이 또 불거지리라 봅니다.


  우리는 ‘한국 남자’나 ‘한국 여자’라는 겉모습에 앞서 ‘사람(한 사람)’입니다. 서로 슬기롭게 어우러져서 곱고 즐겁게 사랑을 지피어 참답고 눈부신 살림을 같이 지을 ‘사람(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서로 이웃이 될 사람)’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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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책이네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어디에서나 가르치고 배웁니다. 아이한테는 졸업장을 주는 큰 건물만 학교일 수 없습니다. 집도 마을도 배우는 터전입니다. 어른도 졸업장을 주는 그 큰 건물만 학교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집뿐 아니라 마을이 오롯이 배우는 자리라고 느끼면서 보아야지 싶습니다. 모든 곳은 학교요, 배움터요, 삶자리이며, 사랑이 흐르는 숲이라고 느낍니다. 종이꾸러미도 책일 테지만, 아이 눈빛하고 어버이 눈망울도 책입니다. 인문책도 책일 테지만, 만화책하고 그림책하고 사진책도 책일 뿐 아니라, 말 한 마디하고 노래 한 자락도 책입니다. 모두가 배움터이듯, 모두가 책입니다. 모두가 배움터이듯, 모두가 사랑이요 꿈이면서 빛이자 고요입니다. 몸을 잊은 채 고이 내려놓아야 깊이 잠들면서 새롭게 기운을 얻습니다. 우리 머리에 그동안 담은 지식을 잊은 채 모조리 내려놓아야 깊이 읽으면서 새롭게 이야기를 얻습니다. 밤꿈이나 낮꿈을 꾸듯이 책을 곁에 두어 읽습니다. 종이에 깃든 살림을 읽고, 손끝에 묻은 삶을 읽습니다. 숲에 흐르는 바람을 읽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바람을 읽습니다. 그리고 써요. 맑은 하루가 되어 달라는 마음을 하늘에 씁니다. 비 한 줄기 뿌리면 좋겠다는 마음을 하늘에 씁니다. 별잔치를 이루면 좋겠다는 마음을 하늘에 쓰고, 구름꽃처럼 들꽃이 눈부시기를 바란다는 마음을 이 땅에 씁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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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너머



  우리가 읽는 책은 여럿입니다. 종이꾸러미인 종이책이 있고, 바람이라고 하는 책, 숲이라고 하는 책, 바다라고 하는 책, 풀이나 나무라고 하는 책, 풀벌레나 벌나비라고 하는 책, 흙이나 돌이라고 하는 책, 냇물이나 샘물이라고 하는 책, 살림이라고 하는 책, 사랑이라고 하는 책, 마음이라고 하는 책, 사람이라고 하는 책이 있어요. 흔히들 종이책을 얼마나 읽느냐를 놓고서 책읽기를 가르지만, 이제는 종이책분 아니라 삶책이나 사람책이나 사랑책이나 숲책이나 바람책이나 별책이나 풀책을 놓고도 이야기를 할 때이지 싶습니다. 삶을 짓는 슬기로운 사랑은 종이책에만 담지 않습니다. 즐겁게 어우러지는 놀이판에도, 상냥하게 주고받는 말에도, 눈빛으로 맑게 흐르는 마음에도 온갖 책이 싱그러이 있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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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집마실을 하는 즐거움



  누리책집에서 또각또각 글판을 두들기지 않고, 두 다리로 책집마실을 하는 즐거움이란 무엇일까요? 누리책집에서 책을 산 분은 아마 다들 알 테지만, 누리책집에서 책을 고르고 살펴서 값을 치르기까지도 품이나 겨를을 꽤 들여야 합니다. 딸깍딸깍 조금 한대서 쉬 끝나지 않습니다. 몸을 움직여 책집까지 스스로 다녀오는 일보다 품이 적게 든다고만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누리책집에서 새책은 그때그때 새로 올라온다지만, 그동안 태어난 오랜 숱한 책은 다 올라오지 않거나 못합니다. 우리가 다리품을 팔면서 마을책집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헌책집을 다니지 않는다면, 온누리에 가득한 어마어마한 책을 두루 만나지 못합니다. 아주 조금만, 아름다운 책을 늘 마주하더라도 아주 살짝 맛볼 뿐입니다. 다리품을 팔면서 마을책집으로 마실을 다니면, 첫째, 우리 마음눈을 넓힐 수 있습니다. 둘째, 도시에 있는 숲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리책집으로도 마음눈을 넓힐 책을 손에 넣겠지요. 그러나 자동차 소리가 뚝 끊긴 채 고요한 숲바람이 일렁이는 숨결은 누리지 못해요. 조그마하든 널따랗든, 마을책집은 ‘책이 되어 준 나무가 자라던 숲’을 누리는 쉼터이자 놀이터이자 만남터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을 적에는, 줄거리(지식)만 받아먹지 않습니다. 줄거리를 이루기까지 어떤 숲이 어떤 사랑으로 살았는가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요. 살아숨쉬는 이야기가 깃든, 숲에서 자란 나무가 흙에 뿌리를 내리며 바람을 마시고 햇볕을 사랑한 노래가 깃든 종이에 얹은 삶을 누려 봐요.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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