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읽는 책



  가을은 달력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가을은 날짜로 찾아오지 않는다. 가을은 사람들 옷차림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가을은 바람으로 찾아온다. 가을은 햇볕으로 찾아온다. 가을은 빗물로 찾아온다. 가을은 무르익는 곡식과 열매로 찾아온다. 가을은 시드는 풀과 추위에 돋는 풀로 찾아온다. 가을은 더욱 파랗게 눈부신 하늘로 찾아온다. 가을은 손발이 시리도록 차가운 냇물과 샘물로 찾아온다. 가을은 처마 밑에서 벗어나 마을을 훌쩍 떠나 바다를 가로지른 제비와 함께 찾아온다. 가을은 바알갛게 고운 감알로 찾아온다. 가을은 잎사귀를 떨구어 앙상한 나뭇가지로 찾아온다. 그리고, 가을은 한겨울을 맞이해도 푸른 잎을 가득 달며 솨르르솨르르 춤추는 동백나무에 새롭게 돋으며 단단하게 옹크린 꽃망울로 찾아온다.


  경남 진주에 있는 헌책방 책꽂이 한쪽에 감알이 달린다. 나뭇가지에 맺힌 감알을 톡톡 끊어 먹으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감알이지만, 나뭇가지째 책꽂이에 걸어서 두고두고 여러 사람이 감내음을 맡으면서 책내음을 즐길 수 있다. 4347.11.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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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4-11-13 13:28   좋아요 0 | URL
가지런한 책장이네요

숲노래 2014-11-13 15:09   좋아요 0 | URL
감알도 곱습니다~
 

여기에 있는 책



  오늘 여기에 있는 책을 읽는다. 나는 오늘 여기에서 살며 이 책 하나를 바라본다. 책을 쥐기 앞서 고개를 든다. 나를 둘러싸고 흐르는 바람을 가만히 헤아린다. 어디에서 부는 바람일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바람일까. 지구별에서 부는 바람은 지구를 골고루 흐른다. 브라질에서 비롯한 바람이 한국에 올 수 있고, 한국에서 비롯한 바람이 캐나다에 갈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같은 바람을 쐬면서 같은 바람을 누리는 사람이다.


  오늘 내 앞에 있는 책은 어디에서 처음 태어났을까. 내가 오늘 손에 쥐는 이 책은 앞으로 어디로 갈까. 내가 손에 쥔 책을 처음 지은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고, 내가 읽은 이 책을 나중에 손에 쥘 이웃이나 동무는 어떤 마음이 될까.


  헌책방에서 묵은 만화책을 바라본다. 스무 해를 묵은 만화책은 이제 헌책방에만 있다. 한국에 있는 도서관은 만화책을 안 갖추기도 하지만, 갓 나온 만화책이 아니라면 새책방 책꽂이에서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데, 스무 해를 묵은 만화책은 해적판이다. 일본 만화책을 몰래 훔쳐서 한국에서 펴낸 판이다. 한국에서는 일본 그림책과 만화책과 동화책과 소설책을 엄청나게 훔쳐서 몰래 팔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 텐데, 한국 대중노래는 일본 대중노래를 엄청나게 훔쳐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잘못을 나무라거나 꾸짖는 한국사람인데, 정작 한국사람은 오늘 이곳에서 일본 것을 아주 많이 훔쳤다. 게다가, 새우깡이라든지 빼빼로라든지 초코파이라든지, 3.4우유라든지 온갖 일본 것을 이름을 훔치고 모양까지 흉내내어 파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일본 한켠에서 ‘혐한류’라는 말을 할밖에 없다. 요새는 한국에서 ‘십칠차’라는 마실거리가 있는데, 일본에서 일찌감치 ‘십육차’라는 마실거리를 내놓았다. 참으로 창피한 노릇이지만, 하나도 안 바뀔 뿐 아니라, 버젓이 고개를 들면서 장사를 한다.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을 말할 까닭은 없다. 바람은 이 지구별을 고루 감싸면서 흐른다. 오늘 이곳에서 내 앞에 있는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온갖 생각이 스친다. 아마 이 책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 나한테 왔기 때문이리라. 이제 이 바람은 앞으로 어디로 흘러 어떤 이야기를 더 퍼뜨릴까. 4347.11.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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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읽는 사람



  한 사람이 쓴다. 다른 사람이 읽는다. 한 사람이 그린다. 다른 사람이 본다. 한 사람이 조곤조곤 말을 건다. 다른 사람이 빙긋빙긋 말을 듣는다. 한 사람이 가르친다. 한 사람이 배운다. 한 사람이 통통 도마질 소리를 내며 밥을 짓는다. 다른 사람이 밥상맡에 앉아서 기쁘게 밥 한 그릇 받는다. 한 사람이 노래를 부른다. 다른 사람이 노래를 듣다가 가슴이 뭉클 울려 눈물 한 줄기 흐른다.


  글을 쓰는 사람은 어제와 오늘과 모레가 모두 다른 날인 줄 아는 사람이다. 글을 읽는 사람은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모두 다르면서 기쁘게 맞이하려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사람이다. 글을 읽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게 거듭나는 사람이다.


  삶을 가꾸는 넋을 슬기롭게 다스릴 수 있기에, 글 한 줄을 사랑스레 쓰고, 말 한 마디를 사랑스레 읊으며, 노래 한 가락을 사랑스레 부르고, 밥 한 그릇을 사랑스레 지으며, 이야기 한 꾸러미 사랑스레 풀어낸다. 삶을 일구는 마음을 슬기롭게 북돋우기에, 글 한 줄을 사랑스레 읽고, 말 한 마디를 사랑스레 들으며, 노래 한 가락을 사랑스레 맞이하고, 밥 한 그릇을 사랑스레 먹으며, 이야기 한 꾸러미 사랑스레 나누어 받는다.


  너와 다는 다른 사람이면서 같은 사람이다. 너와 나는 다른 사랑이면서 같은 사랑이다. 너와 나는 다른 숨결이면서 같은 숨결이다. 이리하여 우리 사이에 예쁜 빛이 흐르고, 고운 바람이 불다가, 맑은 해님이 따사롭게 비춘다. 4347.11.10.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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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4-11-10 14:00   좋아요 0 | URL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 팔랑팔랑 종이 넘어가는 소리, 노랫가락 제 귀에도 들리는듯해 저도 읽는 동안 잠시 행복해집니다.

숲노래 2014-11-10 15:36   좋아요 0 | URL
연필 사각소리란 참으로 예쁘면서
아름다운 소리로구나 싶어요.
마치 피아노가 또르르 구르는 소리라고 할까요~
 

책놀이



  우리 집 아이들이 책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생각한다. 나도 어릴 적에 이 아이들처럼 책놀이를 즐긴 적 있던가? 없구나. 없어. 없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책놀이를 즐긴 적 없다. 그저 온몸을 굴리면서 논 적은 많다. 굳이 책까지 써서 논 적이 없고, 책이 퍽 드물던 때이기도 해서 책을 함부로 갖고 놀지 않았다. 우리 집에도 책은 그리 안 많았고, 이웃 동무 집에도 책은 얼마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책 있는 집’ 동무를 거의 못 사귀었다.


  글을 써서 책을 지은 이들은 어떤 마음일까 헤아린다. 삶을 즐겁게 노래하는 마음일까. 어떤 지식을 이웃한테 두루 알리고 싶은 마음일까. 이녁이 오랜 나날 파헤쳐서 깨달은 슬기를 아낌없이 나누고 싶은 마음일까.


  즐겁게 노래하면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이 놀이로 거듭난다. 즐겁지 못하고 노래를 부르지 못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삶이 고단한 굴레에 갇힌다. 우리가 손에 쥐는 책은 어떤 책인가. 우리가 아이들한테 건네는 책은 어떤 책인가. 어른들부터 책을 즐거운 삶넋으로 맞아들이는가. 아이들한테 학습이나 교양이나 교육이나 보조교재 따위 이름을 떠올리면서 억지로 안기지는 않는가.


  놀이가 될 때에 책이 책다우리라 느낀다. 놀면서 읽고,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읽을 때에 책이 꽃처럼 피어나리라 느낀다. 온누리 모든 아이들이 책놀이도 하고 온갖 다른 놀이도 실컷 누릴 수 있기를 빈다. 4347.11.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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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체급식과 추천도서



  교육과 복지라는 이름으로 단체급식을 한다. 더욱이 단체급식이 ‘무상급식’이 되도록 돈을 대단히 많이 쓴다. 교육과 복지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교육과 복지가 될 만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찜찜하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아이마다 ‘몸에 맞는 밥’과 ‘몸에 안 맞는 밥’이 다르다. 학교에 학급이 하나씩 있고, 학급 한 곳마다 아이가 스물이 안 된다면, 이럭저럭 ‘다 다른 아이’를 조금은 살필는지 모르나, 한 학교에 백 사람이 넘어가기만 해도 ‘다 다른 아이한테 다 똑같은 밥’을 줄 수밖에 없다. 너무 바쁘고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다닐 무렵, 학교에서는 ‘거의 강제 우유급식’을 했다. 우유가 몸에 안 받는 아이가 틀림없이 있는데, 학교에서는 ‘강제 우유급식’을 해서 돈을 걷었다. 우유가 몸에 안 받는 아이는 담임교사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억지로 우유를 집어넣어야 했다. ‘마시기’가 아니라 ‘집어넣기’이다. 집어넣고 또 집어넣으면 ‘체질이 바뀐’대나 뭐라나.


  단체급식도 이런 ‘논리’가 되리라 느낀다. 어느 아이는 밀가루를 먹으면 안 될 수 있고, 어느 아이는 달걀을 먹으면 안 될 수 있으며, 어느 아이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몸에서 안 받기 때문이다.


  나는 김치가 몸에 안 받는다. 어쩌다가 한 점 집어먹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어쩌다가 먹어도 뱃속이 더부룩하다. 나는 찬국수(냉면)도 못 먹는다. 찬국수를 한 점 잘못 집어먹다가 여러 날 배앓이를 하기 일쑤이다. 고작 한 점 집어먹고 말이다. 찬국수뿐 아니라 비빔국수도 똑같다.


  그러면, 이렇게 사람마다 다 다른 몸을 ‘단체급식’은 얼마나 어떻게 헤아리겠는가? 나물을 좋아하는 아이한테 나물 반찬을 넉넉히 줄 수 있을까? 누런쌀로 짓는 누런밥을 좋아하는 아이한테 따로 누런밥을 줄 수 있을까? 보리밥을 좋아하는 아이가 보리밥을 먹을 수 있을까?


  아이들은 도시락을 손수 싸서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여덟 살이나 아홉 살은 아직 이르다 할 텐데, 열 살 나이가 되면 이때부터 도시락을 손수 싸서 먹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교육’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손수 밥을 짓는 삶을 배워야 한다. 어른들은 손수 밥을 짓는 삶을 가르쳐야 한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이한테 ‘밥짓기’와 ‘도시락 싸기’를 차근차근 가르칠 수 있어야 하고, 아이는 집에서 ‘밥짓기’와 ‘도시락 싸기’를 즐겁게 배워서, 동무들과 학교에서 기쁘게 밥 한 끼니 누리는 사랑을 받아먹을 수 있어야겠지. 왜냐하면, 교육이기 때문이다.


  복지로 헤아린다면, 집집마다 아침에 아이 도시락을 느긋하게 싸서 내줄 수 있을 만한 겨를을 누려야 한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일터(회사)에서 ‘아이 도시락을 싸서 챙긴 뒤 일터로 오는 겨를’을 한 시간쯤 챙겨 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복지’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돌보는 어른은 일터에서 아침 한 시간을 ‘늦게 출근하도록’ 법이나 제도를 마련해야 올바르다. 한 시간 늦게 학교에 가도록 제도를 바꾸는 일도, 학교 울타리에서만 끝낼 노릇이 아니라, 회사에서 어른들도 똑같이 이에 맞추어야 올바르다. 왜냐하면, ‘복지’이기 때문이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삶과 몸에 맞추어, ‘제 몸에 맞는 밥을 스스로 챙길’ 수 있어야 즐겁고 아름답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쯤 다니면, 아주 마땅히 제 도시락은 손수 싸야 맞다. 열서너 살이나 열예닐곱 살이나 되고서도 밥짓기도 못한다면, 이 아이는 ‘반쪽짜리 삶’조차 아니다. 제 밥을 제가 차려서 못 먹는다면, 이 아이는 그동안 무엇을 배운 셈일까. 삶과 사랑과 살림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가,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저녁에 식구들이 모두 모여 도란도란 밥을 먹는 즐거움을 아이들도 학교에서 누려야 즐겁고 아름답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급식실에서 ‘스텐 밥판’을 쨍그랑 소리 나게 들면서 허둥지둥 입에 집어넣어야 하지 않다. 단체급식은 군대질서와 똑같다. 단체급식을 교육과 복지라는 이름으로 자꾸 늘리는 짓은 군대질서를 학교와 사회로 자꾸 퍼뜨리는 짓과 같다. 단체급식을 하는 데에 들일 돈은, 집집마다 ‘도시락 쌀 돈’으로 돌려주어야 맞다. 무상급식을 하느라 돈을 쓰지 말고, 이 돈을 집집마다 주어야 옳다. 집집마다 ‘도시락 쌀 돈’과 ‘도시락 쌀 겨를’을 주어서, 집집마다 ‘참다운 교육과 복지’가 즐겁게 피어나도록 이끌어야 올바르다.


  내가 나한테 ‘내 밥을 짓는 겨를’을 내지 못할 만큼 사회 얼거리에 얽매인 채 일을 해야 한다면, 이러한 일이 나를 얼마나 가꾸거나 살찌울 수 있는가 하고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도시락 하나 쌀 겨를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메마른가? 아이들이 손수 도시락을 못 싼다면, 이런 교육은 무슨 보람이 있는가?


  아이들은 밥을 사랑으로 먹어야 한다. 그저 ‘배만 부르게 채우는 밥’이나 ‘사랑을 받아 즐겁게 먹는 밥’을 느끼고 배우고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추천도서가 아닌 ‘책’을 읽어야 한다. 똑같은 틀에 맞추어 똑같이 건네는 책이 아니라, 다 다른 아이들이 스스로 제 삶에 맞는 이야기를 찾아, 즐겁고 아름답게 ‘책’을 ‘사랑’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단체급식도 추천도서도 모두 사라질 수 있기를 빈다. 4347.11.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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