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집 언저리 2021.11.10.

책집이라는 곳



  책집은 대단한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새책집도 헌책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숲(도서관)도 매한가지예요. 책이 있는 곳이라서 대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는 저마다 새롭게 빛나는 숨결인 터라 모든 사람이 아름답고, 저마다 새롭게 빛나는 숨결로 꾸리는 책집은 저마다 아름다우니, 어느 곳이 대단하다고 하거나 어느 것은 덜 대단하거나 안 대단하다고 가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쉰 해 넘게 ‘만화책집’을 꾸린 할머니가 계십니다. 이 할머니는 “책집지기 예순 해”를 앞두고 책집을 닫았습니다. ‘인문사회과학책집’도 아닌 ‘만화책집’은 그만 꾸리기를 바라는 딸아들 목소리가 컸고, 지팡이로 절뚝거리면서 ‘손님도 거의 안 찾는 작은 만화책집’에 날마다 도시락을 싸들고 가서 혼자 드시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집에서 푹 쉬기를 바랐다지요. 거의 예순 해에 이른 ‘만화책집지기 할머니’가 일을 그만둔 때는 2004년 언저리였지 싶은데, 그 뒤로 열 몇 해가 흐른 오늘날, 우리는 ‘인문사회과학책집지기’나 ‘그림책집지기’가 아닌 ‘만화책집지기’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해요. 책을 다루는 곳은 모두 책집이지 않을까요? 만화책이나 어린이책은 아이들만 보는 ‘유치한 책’일까요? 책집은 대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책집은 아름다우면 넉넉하다고 생각해요. 번쩍번쩍한 겉모습이 아닌, 책 한 자락으로 마음을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는 즐거운 쉼터이자 이야기터라면, 모든 마을책집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책집이 아닌 살림집도 이와 같아요. 조촐히 이야기터이자 쉼터이자 삶터이자 숲터로 오늘 하루를 돌보면 모든 살림집은 아름집으로 나아가는 아름길일 테지요. 우리는 모두 ‘지기’입니다. 집지기이면서 마을지기요 숲지기에다가 아이지기(어른으로서는)에 어른지기(아이로서는)입니다. 스스로 즐거이 하루를 노래하는 지기이기에 책집지기라는 이름을 새록새록 보듬으면서 이웃하고 이야기꽃을 지피는 어깨동무를 하는구나 싶습니다.


ㅅㄴㄹ


* 사진 : 서울 신촌헌책방 2005.

이제는 닫은 곳.


책집지기님이 날마다 적던 '팔림적이'.

누구한테도 안 보여준다고 하셨는데

딱 하루 이날 한 자락 찍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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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집 언저리 2021.11.8.

헌책집을 찍습니다



  처음에는 “책숲(도서관)에서 안 다루는 책이 가득한 바다”라고 느꼈습니다. 이윽고 “때(시간)하고 곳(장소)을 잊으면서 스스로 짓고 싶은 새로운 때하고 곳으로 날아가는 징검다리인 책으로 상냥한 쉼터”라고 느꼈습니다. 주머니가 늘 가난했기에 “가난한 이한테도 가멸찬(부자) 이한테도 고르게 책사랑을 들려주는 이야기밭”이로구나 싶었습니다. 푸른배움터(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책마실을 다니는 동안에 “다 다른 눈빛으로 지은 다 다른 삶빛을 어제하고 오늘하고 모레로 이으면서 속삭이는 배움터”이네 하고 깨닫습니다. 저는 낱말책(사전)을 짓는 일을 하기에 어제책·오늘책을 나란히 살피면서 모레책을 엮습니다. 이러한 글살림·책살림은 새책집·헌책집을 늘 나란히 품으면서 사람길·살림길·숲길을 헤아리는 글길이라고 할 만합니다. 앳된 열일곱 살에는 둘레에서 말하는 대로 ‘헌책집’이라고만 받아들였으나, 스무 살을 넘고 서른 살로 접어들 즈음에는 ‘손길책집’으로 느끼고, 마흔 살에 이를 무렵에는 ‘손빛책집’으로 느낍니다. “글쓴이·엮은이·펴낸이에다가 새책집지기·책숲지기(도서관 사서)뿐 아니라 책동무(독자) 손길까지 어우러진 책을 차곡차곡 여투는 곳”이 헌책집입니다. “모든 책이 새로 태어나서 읽히는 곳”이요, “모든 책에 새숨을 불어넣으면서 새빛을 그리는 곳”이 헌책집입니다. 저는 이 헌책집을 다니면서 1998년부터 찰칵찰칵 담았습니다. 오래된 책을 다루는 곳이 아닌, 낡거나 허름한 책을 다루는 곳이 아닌, 값싸거나 잊혀지거나 한물간 책을 다루는 곳이 아닌, “어제책을 오늘책으로 삼아 모레책을 짓는 슬기로운 눈빛을 북돋우는 곳”인 헌책집을 스스로 느끼는 대로 한 자락 두 자락 담는 나날이었습니다. 헌책집에서 책을 장만하여 읽은 첫날은 1992년 8월 28일입니다만, 헌책집을 찰칵찰칵 담은 첫날은 1998년 8월 어느 하루입니다. 헌책집을 늘 찾아다녔으나 헌책집을 스스로 찍자는 생각을 제대로 하기는 1999년 1월 1일부터입니다. 날마다 헌책집에서 책바다를 누렸으나 이 책빛을 손수 담기까지 일곱 해가 더 걸린 셈인데, 이동안 조용히 사라진 곳이 참 많고, 오늘까지 즐겁고 씩씩하게 책살림을 짓는 곳이 제법 많습니다. 헌책집은 언제나 마을 한켠에 깃듭니다. 번쩍거리는 한복판이 아닌, 우리가 보금자리를 이루어 조촐히 살림을 짓는 마을에서 태어나는 헌책집입니다. 손길을 돌고돌며 새삼스레 빛날 책을 마을에서 가만히 나누는 책터이자 쉼터이자 이음터이자 만남터인 헌책집입니다. 마을책집(동네책방)은 바로 헌책집이 첫걸음이었다고 할 테지요. 오롯이 마을사람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상냥하게 책숨을 펴온 헌책집을 문득 들여다보는 이웃님이 늘어나기를 바라요. 높지도 낮지도 않게 책노래를 조용히 퍼뜨리는 이 헌책집에서는 어린이도 할머니도 똑같이 반갑고 즐거운 책손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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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아저씨



  일본 진보초 책집골목에서 책을 사고 난 뒤에 언제나 책집지기한테 여쭈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본말로 여쭈었지요. 다들 못 알아들어서 수첩에 적은 일본글을 보여주었지요. 그러니 제가 알아듣기 어려운 일본말로 몇 마디를 하셔서 느낌으로 알아챈 뒤에 “아, 이이에?” 하고 되물었어요. 하나같이 ‘책집에서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래도 저는 ‘이 많은 책집 가운데 사진찍기를 받아들이는 곳이 있으’리라 여기면서, 책을 산 뒤에 늘 씩씩하게 물어보았지요. 네 곳쯤 손사래치는 말을 들으며 문득 생각했어요. ‘엉성히 하는 일본말 아닌 영어로 물으면 어떨까?’ 하고요. 그리고 ‘영어로 물어본 첫 곳’에서 살짝 망설이는 눈치를 느껴, “아임 어 코리안 포토그래퍼. 음, 웨잇어 미닛.” 하고는 2004년에 《모든 책은 헌책이다》를 내면서 마련한 사진전시 엽서를 내밀었습니다. “디스 이즈 어 코리아스 올드북스토어 포토. 아이 픽처드 댓. 벗 아임 낫 픽쳐 유. 아이 원트 픽쳐 디스 디스 디스.” 하면서 책꽂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그러니 비로소 책집지기가 “예스. 예스.” 하고 받아들여 주었지요. “땡큐 베리 머치. 아리가또오 고쟈이마스으.” 태어나서 마흔네 해를 살며 영어라는 말이 이토록 고마운 줄 처음으로 온몸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어를 새롭게 즐거이 처음부터 다시 배우려고 생각합니다. 고마워요 아저씨. 일본 도쿄 진보초 책집지기 아저씨도, 진보초 책집 한켠에 살며시 놓고 온 사진엽서에 깃든, 이제는 문을 닫은 서울 홍제동 대양서점 아저씨도. 2018.4.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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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침 일찍 길을 나선 뒤 해가 질 무렵까지 일터에 있다가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책집 곁을 스칠 수 있다면, 때로는 큼큼하지만 때로는 봄바람 같은 책내음에 발길을 멎기도 합니다. 고단하거나 지치거나 배고픈 몸에는 포근한 보금자리에서 누리는 밥 한 그릇이 더없이 힘이 되는데, 문득 고개를 들어 책 하나를 손에 쥐면서 마음을 푸르게 달랠 수 있습니다. 푸르게 달랜 마음에 포근하게 어루만지는 몸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2018.3.31.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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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새로 태어나는 책



  서울 신촌에서 헌책방 한 곳이 자리를 옮깁니다. 살림집이 자리를 옮길 적에도 여러 날이나 달이 지나야 갈무리가 끝날 텐데, 책방이 자리를 옮길 적에도 꽤 긴 나날이 흘러야 갈무리를 마무리지을 수 있습니다. 책이 되살아나도록 손길이 갑니다. 책시렁에 책이 깃들도록 손끝마다 땀이 흐릅니다. 책방이 마을에 뿌리를 내려 책손한테 이야기꽃을 건네도록 손품을 들입니다. 책방 한켠에서 실장갑 한 켤레가 살짝 쉽니다. 2017.1.20.쇠.ㅅㄴㄹ


- 글벗서점 2016.12.8.


(숲노래/최종규 . 헌책방 언저리/책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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