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13] 바람읽기
― 어떤 보금자리, 어떤 배움자리, 어떤 꿈자리

 


  바람맛을 느낍니다. 이웃집 할매가 쓰레기를 태울 적에는 쓰레기내음 실린 바람맛을 느낍니다. 봄꽃이 피어나는 따사로운 봄철에는 봄꽃가루 살포시 내려앉은 봄꽃바람맛이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바람내음을 맡습니다. 이웃집 할배가 논이랑 밭에 농약을 뿌릴 적에는 우리 집 마당에까지 농약내음이 바람 따라 흘러듭니다. 가을열매 무르익는 가을철에는 열매와 곡식이 익으며 나누어 주는 고운 내음을 바람결 사이사이 누립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봄에 어떤 바람을 마실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여름에 어떤 바람을 마실까요. 도시에서 살거나 도시로 마실을 가면, 가을에 어떤 바람을 맛볼까요. 시골에서 지내거나 시골로 나들이를 가면, 겨울에 어떤 바람을 맛보려나요.


  보금자리는 배움자리입니다. 배움자리는 삶자리입니다. 삶자리는 꿈자리입니다. 꿈자리는 사랑자리입니다. 스스로 살아가려는 곳, 그러니까 보금자리에서 날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배웁니다. 식구들과 나누는 이야기도 배움이요, 이웃과 나누는 이야기 또한 배움이에요. 즐겁게 배울 수 있기에 보금자리를 틀며 살지요. 보금자리를 틀며 살아가는 곳에서 앞으로 하루하루 누릴 꿈을 키우고, 꿈을 키우노라면, 이 꿈을 이루는 동안 나눌 사랑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낳기 앞서 어른인 나는 어디에 집을 마련해서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아이들을 낳고 나서 어른인 나는 어떤 집을 어떤 곳에 두고는 고향마을로 삼을 때에 기쁠까요.


  사람은 누구나 바람을 마시면서 숨결을 잇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숨결을 잇지만, 밥에 앞서 물을 마시고, 물에 앞서 바람을 마셔요. 곡식을 끊으며 백 날 넘게 숨결 건사할 수 있고, 물을 끊어도 퍽 여러 날 숨결 건사하지만, 바람을 끊으면 1분조차 건사하지 못해요. 사람들 몸은, 또 벌레와 짐승과 풀과 나무 모두 바람이 없으면 1분조차 살아남지 못합니다.


  바람을 더럽히는 짓이란 스스로 죽으려는 짓이며, 이웃과 동무 모두 죽이려는 짓입니다. 바람을 보살피는 손길이란 스스로 살아가려는 몸짓이면서, 이웃과 동무 모두 살리려는 사랑입니다.


  논이나 밭에 농약을 치는 일은, 그저 돈을 버는 농사짓기조차 아니에요. 농약 때문에 풀과 흙도 망가지지만, 무엇보다 바람이 망가져요. 농약내음 잔뜩 밴 바람을 마신 사람은 몸이 아프고, 죽을 수 있어요. 자동차를 달리면 더 빨리 간다지요. 그런데 자동차 달릴 적마다 배기가스 잔뜩 뿜어요. 배기가스를 마셔 보셔요. 숨이 막히고 갑갑해요. 자동차 물결치는 커다란 도시는 사람들 스스로 죽으려는 꼴이면서, 이웃과 동무를 조금도 안 살피는 모양새예요. 자동차를 타야 할 때에는 탈밖에 없지만, 자동차를 줄일 수 있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자동차하고 헤어질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숨을 쉬거든요. 그래야, 숨결을 살리거든요. 그래야, 삶을 사랑하거든요.


  바람을 읽어요. 맑은 바람을 읽어요. 맑게 함께 나눌 바람을 읽어요. 바람을 지키고, 바람을 아끼며, 바람을 돌보는 길을 읽어요. 서로서로 즐겁게 바람을 마셔요. 꽃바람을 마시고, 나무바람을 마셔요. 민들레꽃바람을 마시고, 팽나무바람을 마셔요. 도시에서 살건 시골에서 살건, 어디에서나 고운 바람 불 수 있는 터전으로 일구어요. 이런 일을 하건 저런 놀이를 하건, 나와 네가 함께 마시는 바람을 돌아보면서, 바람맛과 바람내음 살찌우는 길을 걸어요. 4346.3.27.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당신은 어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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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5] 숲읽기
― 밥과 옷과 집

 


  고등학교를 마치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 대목을 배운 적 없습니다. 고등학교에서는 ‘고등학교 교육 얼거리’에 맞추어 교과서 지식을 집어넣으려 했을 뿐, 내 삶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과서 지식을 집어넣으면서 시험을 치르는데, 시험점수가 어떠한가에 따라 몽둥이찜질과 줄세우기를 함부로 했습니다(1991∼1993년).


  중학교를 마치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요. 나는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 이 대목을 배운 적 없습니다. 중학교에서는 고등학교에서처럼 ‘중학교 교육 얼거리’에 맞추어 교과서 지식을 집어넣기만 했습니다. 중학교에서 우리한테 할 수 있던 일이라면 ‘고등학교에 보내기’였어요.


  곰곰이 돌아보면, 고등학교가 하는 일도 ‘대학교 보내기’에 머무는구나 싶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니라면 ‘공장 보내기’나 ‘회사 보내기’가 될 테지요. 그러면, 인문계 고등학교는 왜 대학교에 보내려 하는가요. 대학교에 보내면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또, 대학교를 여러 해 다녀서 마치는 아이들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도시에서 태어나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던 나는 ‘고등학교를 마친 뒤 무엇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대목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오직 입시시험만 가르치는 고등학교를 마친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하나도 몰랐습니다. 다른 대목보다 ‘먹고 입고 자는’ 대목을 생각했습니다.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학교에 붙들린 채 입시교육만 받는데, 밥하기와 바느질부터 빨래나 집일 어느 하나 익히거나 배울 틈이 없습니다. 집에서 어머니가 혼자 김치를 담그셔도 도우러 갈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문제집 한 번 더 들추어야 한다고 말할 뿐, 김치가 어쩌고 자시고 아랑곳하지 않아요. 설이나 한가위를 앞둔대서 수험생이 집일을 거들 틈이 없습니다. 명절 코앞까지 밤늦도록 입시교육을 시키니까요.


  그러니까, 고등학생이 대입시험을 치러 붙지 않으면, 그야말로 할 줄 아는 일이 없습니다. 책상맡에서 문제집 들여다보기 빼놓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짐을 나를 줄 아나, 연장을 고칠 줄 아나, 삽질을 할 줄 아나, 망치질을 할 줄 아나, 도무지 어느 하나 스스로 하도록 가르치거나 이끌지 않는 학교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고추포기를 고추나무로 잘못 알고, 벼 또한 벼나무라도 되는 줄 잘못 안다고 나무라는데, 도시 아이들은 곁을 둘러볼 겨를이 없습니다. 도시 아이들한테 둘레를 살펴볼 틈을 안 줍니다. 도시에는 논도 밭도 없어요. 고추이든 벼이든 구경할 수 없어요. 사내도 가시내도 스스로 밥상 차릴 일이 없습니다. 사내도 가시내도 제 옷을 스스로 빨아서 입을 일이 없습니다. 사내도 가시내도 제 방을 스스로 쓸고 닦을 일이 없습니다. 이 얼거리는 대학생이 되어 여러 해 지난 뒤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된 다음에도 늘 매한가지입니다. 대학생이 된대서 집일을 배우거나 집살림을 배우는 아이는 없어요. 대학교를 마치고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니까 집일하고 집살림을 익히려는 젊은이는 없어요. 한 마디로 간추리면, 오늘날 아이들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어린이집에 한 번 들어가고 나면, 그 뒤로 집일하고 집살림하고는 아예 등을 지고 맙니다.


  과학 수업에서 별이름을 배웁니다. 원소가 어떠하고 화학조합물이 어떠하고 배웁니다. 옛 임금들 이름과 이런저런 옛 제도와 정책 줄거리를 외웁니다. 때때로 나무이름도 외우지요. 그러나, 학교 언저리에 심은 나무가 소나무인지 향나무인지 알 턱이 없습니다. 알려주는 교사가 없고, 푯말이 붙지도 않습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어떻게 다른지 배울 길 없고, 가르치는 교사가 없습니다. 참나무는 왜 참나무이고, 참나무 열매가 왜 도토리이며, 도토리를 열매로 맺는 참나무 갈래는 어떻게 되는가를 배울 수 없고, 알려줄 만한 교사가 없어요. 대나무조차 못 알아보는 동무가 있습니다. 감이 열린 감나무를 바라보면서 저 불그스름한 알이 무언지 모르는 동무가 있습니다. 포도가 나무에 열리는지, 능금꽃이나 배꽃이 어떠한지 생각하거나 헤아리거나 아는 동무가 거의 없습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도 숲을 마주하거나 누리기 어렵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시골자락은 ‘고속도로와 고속철도가 지나가는 길목’이거나 ‘공장하고 골프장하고 발전소 짓는 터’이거나 ‘관광지’로 꾸미는 데가 됩니다. 도시에서는 아파트와 건물 늘리느라 바빠, 그나마 도시 바깥쪽에 있던 논밭이나 뒷동산조차 사라집니다.


  도시에서는 자가용 몰아 ‘수목원’이라 따로 이름을 붙이는 데로 찾아가야 나무내음 맡을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나비박물관 아니고서야 나비조차 볼 수 없습니다. 참새나 비둘기가 더러 도시에서도 살아간다지만, 멧새나 들새를 볼 수 없는 도시예요. 소쩍새나 참수리가 살 터가 없는 도시요, 들쥐나 멧쥐조차 살 터가 없는 도시예요.


  입시공부에 찌들리던 지난날, 나는 무엇보다 ‘숲을 모른다’는 대목이 부끄럽습니다. 매캐한 자동차 냄새는 그만 맡고 싶습니다. 갑갑하고 어두운 시멘트 교실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인천 어디에나 수두룩하게 많은 공장마다 내뿜는 매연덩어리에서 홀가분하고 싶습니다. 송전탑과 전봇대하고 헤어지고 싶습니다.


  바람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바람에 실리는 꽃내음과 풀내음을 맡고 싶어요. 바람결에 살랑이는 햇살을 쬐고 싶어요.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고 싶어요. 창밖을 바라보아도 잿빛투성이일 뿐이었지만, 창밖으로 숲이 있기를 빌었어요. 나무그늘에서 책을 펼치고, 풀밭에 앉아 도시락을 즐기며, 나무타기를 하며 쉬다가는, 싱그럽고 푸른 맛난 풀 뜯어먹고 싶었어요.


  밥과 옷과 집은 어디에서 얻을까요. 바로 숲에서 얻지요. 숲이 있어야 밥을 얻지요. 숲이 있어야 옷을 얻지요. 숲이 있어야 집을 얻지요. 공장에서 가공식품 찍어낸대서 배부르지 않아요. 공장에서 천을 짜고 옷을 짓는대서 예쁘지 않아요. 공장에서 시멘트와 플라스틱과 쇠붙이 얽어 높다란 아파트 짓는대서 반갑지 않아요. 숲에 푸른 숨결 가득한 나무가 있을 때에 먹을거리가 나와요. 숲에 푸른 숨소리 가득한 나무가 있어 비로소 입을거리를 빚어요. 숲에 푸른 숨빛 해맑은 나무가 있기에 튼튼히 기둥 세우고 서까래 얹으며 집을 지어요.


  학교는 모름지기 숲학교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어린이집도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모두 숲배움터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숲배움터가 되면서, 아이들이 나이와 눈높이에 맞게 ‘밥·옷·집’ 스스로 건사하는 슬기와 넋을 익힐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이든 실업계 고등학교이든 예체능계 고등학교이든, 모두 너른 숲 한복판에 깃들어, 숲내음 맡고 숲살이 익히면서 차근차근 자랄 수 있어야 한다고 느껴요. 운전면허증은 아예 안 따거나 나중에 따도 돼요. 굳이 열아홉 살이나 스무 살에 대학생 되어야 하지 않아요. 대학생 애써 안 되어도 즐겁지요. 삶을 누릴 수 있을 때에 즐겁고, 삶을 사랑할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숲이 곧 살림터요 배움터일 수 있기를 꿈꿉니다. 나는 숲배움터를 조금도 누리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들은 숲배움터를 실컷 누릴 수 있기를 꿈꿉니다. 숲에 깃들 때에 시나브로 사람다움과 참다움과 나다움을 다스릴 수 있구나 싶어요. 4346.3.1.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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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4] 층집읽기
― 아파트에서 놀 수 없는 아이들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 집 아이들은 어디에서나 실컷 뛰고 노래하며 구릅니다. 집안에서건 마당에서건 뒷밭에서건 논둑에서건 들판에서건 숲속에서건, 아이들은 뛰고 싶은 대로 뛰며, 노래하고 싶은 대로 노래하다가는, 구르고 싶은 대로 굴러요.


  내 어릴 적을 돌이켜보면, 나는 골목동네에서 실컷 뛰고 노래하며 굴렀습니다. 몸이나 옷이 흙투성이가 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집으로 들어가기 앞서 ‘아차, 오늘도 옷이 지저분하네.’ 하고 생각하면서 흙을 터느라 바빴어요. 어머니는 당신 아들내미가 또 옷을 다 더럽히고 들어온 줄 뻔히 알아챕니다. 땀에 절고 흙에 절어, 겉보기로 흙기운 털었다 하더라도 땀내음과 흙내음이 물씬 풍기니까요.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옷차림을 보면 아주 말끔합니다. 옷에 흙을 묻히고 다니는 아이는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예전처럼 흙길이 있는 도시는 없고, 시골에서도 흙길을 시멘트로 덮으니까, 아이들 옷에 흙 묻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 할 텐데, 아이들은 시멘트길에서든 흙길에서든 놀 겨를이 없곤 해요. 학원에 다니거나 방과후학교에서 지내느라 바쁜 오늘날 아이들이에요. 신나게 뒹굴거나 구르거나 뛰놀면서 옷과 몸이 흙투성이 되는 일을 찾아볼 수 없는 아이들이에요.


  방방 뛰고 싶은데 뛸 자리가 없으면, 아이들은 집에서라도 뛰고 싶습니다. 뜀박질과 달음박질로 땀을 흘리고 싶은데, 학교나 학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얌전히 앉아 텔레비전만 바라보아야 한다든지 이런 영어교육이나 저런 학습지도에 따라야 한다면, 아이들은 온몸에 좀이 쑤셔서 견디지 못합니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비로소 뛰거나 구르려 합니다. 도시에서는 저녁이건 밤이건 바깥이 전깃불로 환하니 아이들이 일찌감치 잠들지 않아요. 게다가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저녁에 일찍 불을 다 끄고 잠자리에 누우려 하지 않아요. 도시 어른들은 저녁 예닐곱 시면 ‘아직 낮’으로 여겨요. 도시 어른들은 저녁 열 시가 넘어도 ‘아직 저녁이 아니라’고 여겨요.


  도시 아파트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저녁 아홉 시나 열 시나 열한 시까지도 콩콩 뛸밖에 없습니다. 도시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웃집이나 아랫집 아이들이 참말 늦은 밤에까지 콩콩 쿵쿵 쾅쿵 우르르 소리를 내며 뛰거나 내지르는 소리에 들볶일밖에 없습니다. 더 생각해 보면, 도시에는 아이들이 마음 놓고 뛸 터가 없어요. 조금이나마 빈 터가 있으면 자동차를 대는 도시예요. 아주 작은 빈 터조차 무슨 물건을 놓거나 가게를 차리거나 하는 도시예요. 흙이 몽땅 사라지는 도시이면서, 비어서 한갓진 터조차 없는 도시예요. 또한, 조금 빈 으슥한 데는 중·고등학교 푸름이들이 어른 몰래 담배 태우는 자리가 돼요. 아이들은 이래저래 놀 자리, 뛸 자리, 쉴 자리, 뒹굴 자리 없어요. 흔히 말하는 ‘층간소음’은 도시 얼거리 스스로 빚는 끔찍한 괴로움이에요. 도시에서 아이들이 놀 자리 쉴 자리 뛸 자리 있으면, 집에서 안 뛰어도 돼요. 집에서 뛰고 싶으면 바깥에서 한참 뛰다 들어오면 되거든요. 저녁 아홉 시나 열 시라 하더라도, 집 바깥 놀이터나 마당이나 빈 터에서 공차기를 하든 줄넘기를 하든 배드민턴을 하든 무얼 하든, 한참 땀을 쏟고 나서 집으로 들어오면 돼요. 그러나, 생각해 봐요. 오늘날 어느 도시 어느 아파트나 골목동네 한켠에 ‘한갓지게 비었으면서 늦은 저녁에 아이들이 걱정없이 뛰놀 자리’가 있는가요. 아이들은 다세대주택에서건 아파트에서건 ‘층을 이룬 집’에서 콩콩콩콩 뜁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쿵쿵쿵쿵 소리를 낼 적마다 뿔이 납니다. 아이들은 우당탕탕 꺅꺅 소리를 지르며 ‘갑갑한 속을 풀고’ 싶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리 뒹굴거나 저리 뛸 적마다 골이 아픕니다.


  아파트에서는 아이들이 놀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놀 수 없는 아파트는 어른들 또한 놀 수 없는 자리입니다. 어른들이 술잔치를 벌인다 하더라도 아하하하 까르르르 웃음보 터뜨리면서 노래 몇 가락 뽑을 수 없어요. 어른들이 밤 열두 시나 새벽 두어 시에 노래를 부르면 아파트나 다세대주택에서 어찌 될까요.


  층으로 쌓는 집 아닌 마당을 두는 집을 마련해야 어른도 아이도 숨통을 트리라 생각합니다. 층으로 쌓는 집 아닌 마당을 두는 집을 마련하면서, 마당 한켠에 나무를 심어 돌보고, 마당 또한 시멘트로 바닥을 대지 말고 흙으로 바닥을 살려 빗소리와 눈소리를 새록새록 누릴 수 있어야, 도시사람이건 시골사람이건 숨결을 살리리라 생각합니다.


  한겨레는 예부터 층집을 세우지 않았어요. 한겨레는 예부터 누구나 흙땅 딛고 살았어요. 한겨레는 예부터 누구나 흙을 만지며 숨을 쉬고, 흙에 몸을 눕혀 살았어요. 한겨레는 예부터 어른도 아이도 흙하고 한몸이 되어 넋과 얼을 살찌웠어요. 층집이 늘면 늘수록 한겨레 삶자락은 더 메마르거나 차갑거나 갑갑하거나 쓸쓸하게 뒤틀리겠다고 느낍니다. 4346.2.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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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1] 폭력읽기
― 학교폭력이 생기는 까닭

 


  바다를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은 바다를 껴안습니다. 멧골을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은 멧골을 어루만집니다. 숲을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은 숲을 보살핍니다. 들을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은 들을 보듬습니다. 풀과 나무를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은 풀과 나무를 얼싸안습니다.


  손바닥에 올려놓는 전화기를 누리는 아이들은 손바닥에 올려놓는 전화기를 아주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다룹니다. 컴퓨터나 텔레비전을 쉽게 누릴 수 있는 아이들은 언제나 컴퓨터와 텔레비전하고 사귑니다. 어린이집이건 학교이건 영어바람과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아야 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시험굴레에 사로잡힙니다.


  바다를 누리거나 멧골을 누리는 아이는 주먹다짐을 하지 않습니다. 바다도 멧골도 아무한테 주먹다짐을 안 하기에, 바다아이와 멧골아이는 주먹다짐을 아예 모릅니다. 숲을 누리거나 들을 누리는 아이는 발길질을 하지 않습니다. 숲도 들도 아무한테 발길질을 안 하니, 숲아이와 들아이는 발길질을 처음부터 몰라요.


  주먹다짐은 학교에서 태어납니다. 아이들을 줄세우고, 아이들을 시험굴레에 가두고, 아이들을 똑같은 모양새와 차림새로 닦달하는 학교에서 주먹다짐이 태어납니다. 아이들을 감옥 같은 시멘트집에 집어넣은 채, 아이들 스스로 생각날개 펴지 못하도록 꺾는 학교에서 주먹다짐이 생깁니다.


  학교를 들여다보면,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번호를 붙여서 불러요. 학교를 살펴보면, 어른들은 아이들을 숫자로 따져요. 성적, 행동발달사항, 어버이 재산, 지능지수, …… 온갖 점수와 숫자를 아이들한테 붙여요. 점수와 숫자가 붙는 아이들은 이녁 동무를 ‘맑은 숨결’이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마주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했듯이 동무들을 똑같이 점수와 숫자로 바라봅니다. 서로서로 점수와 숫자로 바라보거나 따지니, 저절로 계급이나 신분이 생기고, 차츰차츰 돌림뱅이 할 만한 여린 아이를 찾아냅니다. 누군가 돌림뱅이가 되고 나면, 시나브로 주먹다짐이 태어나고, 서로서로 아끼고 돌보는 사랑이 아닌 서로서로 괴롭히고 들볶는 주먹다짐이 자라납니다.


  학교에서 어른들이 사랑을 가르치는 적 없으니,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여린 동무를 주먹다짐으로 괴롭힙니다. 이른바 학교폭력입니다. 아이들이 대학입시 때문에 고등학교와 중학교와 초등학교, 게다가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조차 시들시들 앓으니, 서로서로 주먹다짐으로 괴롭히면서 ‘나라도 한몸 살아남자’고 발버둥입니다.


  어른들 사회를 헤아려 봐요. 어른들도 물질만능 경쟁주의 도시에서 살아남으려고 거짓말을 하고 돈을 빼돌리며 검은돈을 먹이는 짓을 서슴지 않아요. 어른들부터 사회에서 돈을 빼돌리려 하고, 신분과 계급을 높이려 발버둥쳐요. 어른들부터 사회에서 이웃과 동무를 살가이 아끼는 길을 안 걸어요. 새까맣고 커다란 자가용을 몰면 무언가 으슥거릴 만하다 여기는 어른이에요. 새까만 양복을 걸치고 비서를 두어야 어쩐지 우쭐거릴 만하다 여기는 어른이에요. 사랑을 찾거나 사랑을 나누거나 사랑을 빚으려는 어른은 어디에 몇 사람쯤 있을까요. 사랑을 꿈꾸거나 사랑을 심거나 사랑을 이루려는 어른은 더이에서 무슨 일을 할까요.


  이런 대책을 세우거나 저런 정책을 내놓는대서 학교폭력이 사라지지 않아요. 감옥을 짓고 새 법을 짓는대서 어른 범죄가 사회에서 사라지지 않아요. 경찰이 늘거나 군대가 있는대서 평화가 찾아오지 않아요. 생각해 봐요. 경찰이 얼마나 많은데 범죄 또한 얼마나 많은가요. 감사원이라는 공공기관 있어도 공공기관 일꾼들이 얼마나 거짓을 많이 일삼고 나쁜 짓은 또 얼마나 자주 저지르는가요.


  군대로 지키는 평화가 아니라, 군대 없이 지키는 평화예요. 감사원으로 지키는 올바름이 아니라, 감사원 없이 지키는 올바름이에요. 경찰로 범죄를 막지 않고, 경찰 없이 범죄를 막을 뿐이에요. 곧, 학교폭력이 사라지자면, ‘입시지옥 학교’가 사라져야 해요. 입시지옥 학교 아닌 ‘사랑 어린 학교’일 때에, 차츰차츰 학교폭력이 사라질 수 있어요.


  아이들이 삶을 배울 수 있어야 해요.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대학입시 그만 시키고, ‘삶 배우기’를 나누어 줄 수 있어야 해요. 어른부터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길을 걸어야 해요. 어른부터 스스로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놀며 즐겁게 어깨동무해야지요. 돈벌이에 얽매인 생체기계 아닌 한 사람이 되어야지요. 삶을 짓는 고운 숨결로 우리 어른들 모두 새로 태어날 수 있어야지요.


  아이들은, 놀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아름다운 숲과 바다와 멧자락에 얽힌 이야기를 사랑스레 들으며 자라야 합니다. 아이들은, 꿈을 꾸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뛰놀면서 푸른 꿈을 빛내야 합니다.


  밝은 삶을 보아야 합니다. 밝은 삶이 있는 줄 느껴야 합니다. 밝은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즐거운가를 몸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아이들 마음밭에 웃음씨앗 한 톨 자랄 수 있기를 빕니다. 어른들 마음밭에도 나란히 웃음씨앗 두 톨 뿌리내릴 수 있기를 빕니다. 4346.2.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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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띄운 '나는 대학교를 왜 때려치웠는가' 다음으로 이 글을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대학생인 분, 또 대학교 마친 분, 또 대학교를 바라는 푸름이들, 모두한테 즐거운 글선물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당신은 어른입니까 12] 대학교읽기
― 내가 꿈꾸는 사랑스러운 벗님

 


  대학교를 나왔대서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학교를 안 나왔대서 대단하지 않아요. 그런데,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살아가려면,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하지요. 의사가 되고 싶든 판사가 되고 싶든 기자가 되고 싶든 작가가 되고 싶든, 으레 대학교 졸업장을 바랍니다. 출판사 편집자나 영업자로 일하고 싶어도 대학교 졸업장을 바랍니다. 다만, 도시에서도 막일 하는 공사판에서는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지 않아요. 편의점 알바생 뽑을 적에도 대학교 졸업장은 바라지 않아요. 공장에서는 외려 대학교 졸업장을 꺼릴 테지요. 머리만 굴리려 하는 사람들은 몸을 제대로 못 쓰니까요.


  인천에서 아직 우리 식구들 살아갈 적, 골목동네를 거닐며 골목이웃을 가만히 헤아려 보곤 했습니다. 가난하다 하는 달동네 골목이웃은 으레 ‘대학교 안 다닌’ 사람이요, ‘학교 문턱조차 못 밟은’ 사람이 많아요. 이런 골목동네 찾아와 사진찍기 즐기는 이들은 으레 ‘대학교 다닌’ 사람이거나 ‘대학교 한창 다니는’ 사람이기 일쑤이고요. ‘대학교 다녔거나 다니는’ 사람들은 ‘대학교 안 다닌’ 사람들이 일군 달동네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생각할까 궁금합니다. 요즈음, ‘골목길 해설사’라든지 ‘골목길 투어’라든지 쏠쏠히 생긴다 하는데, ‘골목해설’은 누가 하고, ‘골목투어’는 누가 꾀할까 궁금합니다.


  먼먼 옛날부터 물려받아 흙을 일구는 분들은 대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시골마을 할머니 할아버지네 아이들은 대학교를 다니며 몽땅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가지만, 오늘날에도 시골을 지키는 어르신들은 거의 모두 대학교하고는 먼 삶자락을 꾸립니다. 할머니는 모두 다 대학교는커녕 고등학교조차 안 다녔다고 할 만해요. 따지고 보면, ‘대학교 다니는’ 사람들은 ‘대학교 안 다닌’ 사람들이 시골에서 일군 곡식과 열매를 먹고, ‘대학교 안 다닌’ 사람들이 도시 변두리 공장에서 만든 물건을 사다가 씁니다. ‘대학교 다니는’ 사람들은 ‘대학교 안 다닌’ 사람 앞에서 무슨 일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며, 무슨 사랑을 베풀려나요.


  대학교를 나왔거나 한창 다니는 사람들 말씨가 참 어렵습니다. 대학교를 다니고 싶어 입시공부에 푹 파묻힌 아이들 말투까 참 어렵습니다. 대학바라기를 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말, 딱딱한 말, 게다가 일본 말투가 끼어든 슬픈 말, 영어범벅, 어설픈 번역투, 이러저러해서 한국말답지 않은 한국말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들 대학바라기 사람들은 이녁 스스로 어떤 한국말을 쓰는지 모릅니다.


  대학교를 안 나왔거나 학교 문턱 안 밟은 사람들 말씨가 참 쉬워요. 수수하지요. 투박하고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말씨가 참 쉽습니다. 수수합니다. 투박합니다. 그러나, 같은 시골 하늘을 등지고 살더라도, 면사무소나 농협이나 이런저런 공무원과 회사원들 말씨는 도시사람하고 똑같이 어렵더군요.


  시골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왜 대학바라기를 하면서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야 할까요. 대학교는 왜 시골에는 한 군데도 없이 도시에만 있을까요. 더러, 시골 외진 한켠에 선 대학교도 있지만, 시골자락 한 귀퉁이 차지한 대학교 가운데 ‘대학교 마친 아이들이 시골에서 살도록 북돋우거나 이끄는 곳’은 아직 한 군데조차 없어요. 그러니까, ‘시골 대학교’란 없다. 모두 ‘도시 대학교’일 뿐입니다.


  모두 도시로 가고 시골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맡기면, 누가 흙을 일구지? 유기농이든 무농약이든 저농약이든 친환경이든, 누가 흙을 일구지? 필리핀이나 베트남이나 칠레에서 사다 먹으면 되나? 그러면, 필리핀이나 베트남이나 칠레 젊은이들은 대학교 안 가고 시골에서만 살아야 하나?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랐대서 도시에서만 살아야 할까? 도시에서 살아가는 어버이한테서 태어난 목숨이기에, 그저 도시살이만 생각하고 도시내기로 지내서 도시붙박이가 되어야 할까?


  시골 어린이집조차 숲마실을 안 합니다. 시골 초등학교조차 시골마을 들판이나 바다로 나들이를 다니지 않습니다. 시골 중학교조차 시골 어버이 봄일·여름일·가을일 거들도록 ‘일하는 방학’을 마련하지 않아요. 시골 고등학교조차 시골에서 스스로 삶을 짓고 꿈을 짓는 길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모두 도시바라기로 흐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사람대로 도시바라기요, 시골사람은 시골사람대로 도시바라기가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로 대학교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를 나와야 도시에서 돈 잘 버는 일자리 거머쥘 수 있고, 대학교 졸업장을 따야 손에 흙이나 물 안 묻히면서 먹고 놀고 자고 입고 싸고 뒹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전태일 님은 ‘대학생 동무 하나 있으면’ 하고 바라며 숨을 거두었어요. 그런데, 나는 고등학생 때에 전태일 님 이야기를 책으로 읽으며 ‘이건 아닌데’ 하고 느꼈어요. 아니, 어쩌면 전태일 님 이 서글픈 바람이 내 마음속에서 잠자던 생각 하나 깨웠는지 모릅니다. 무언가 하면, ‘대학생 아닌, 곧 고등학교만 마친, 또는 학교 문턱 밟은 적 없는 동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하는 대목을 일깨웠구나 싶어요. 전태일 님은 곁에 아주 사랑스럽고 애틋한 동무들이 많았는데, 미처 이 동무들 너른 사랑을 못 껴안았다고 할까요. ‘무식쟁이(대학교 나온 사람들이 대학교 안 나온 사람을 깎아내리며 부르는 이름이지만)’끼리 어깨동무를 할 적에 얼마나 크고 너르며 깊은 힘이 솟는 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고 할까요.


  나는 대학교를 그만두어 고졸 ‘신분’이기에 즐겁습니다. 내 옆지기는 고등학교를 그만두어 중졸 ‘신분’이기에 사랑스럽습니다. 꼭 학력 때문에 더 좋거나 싫거나 하지는 않습니다만, 제도권 입시교육이 사람을 얼마나 갉아먹고 사랑을 얼마나 깎아내리며 꿈을 얼마나 망가뜨리는가를 몸으로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니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우리 아이들한테 제도권 입시교육을 함부로 들이밀지 않을 수 있는 어버이로 살아가는 하루가 고맙습니다.


  나는 꿈꿉니다. ‘대학교 졸업장 없는 시골 흙동무’를 꿈꿉니다. ‘대학교 졸업장 없는 도시 달동네 예쁜 동무’를 꿈꿉니다. 모두들 어딘가에서 아름다운 하루를 누리면서 아름다운 생각을 흩뿌리겠지요. 저마다 어딘가에서 고운 사랑을 나누면서 고운 이야기꽃을 피우겠지요. 4346.1.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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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1-1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 받으세요!

숲노래 2013-01-19 12:31   좋아요 0 | URL
아, 고맙습니다~
유다다 님은 세 번 네 번 고운 복과 사랑 듬뿍 누리셔요~~~ ^^

비로그인 2013-01-19 2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함께살기님~
하루종일 이 글 생각만 했어요.
바로보기! 라니요.ㅎㅎ
바로보는 학생은 못되더라도 바로보는 부모는 꼭! 될게요.
그렇습니다ㅎㅎ

숲노래 2013-01-21 03:43   좋아요 0 | URL
우리들 모두 삶을 예쁘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으면
참 아름다우리라 느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