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어른입니까 21] 돈읽기
― 남한테서 무엇 하나 얻을 적에


 

  나는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 돈을 법니다. 내가 쓴 글을 책으로 묶기도 하고, 내가 찍은 사진을 누군가 사들이기도 해서, 이럭저럭 돈을 법니다. 나는 글을 써서 돈을 벌되, 돈을 안 받고 글을 보내기도 합니다. 가난한 살림에 뜻있는 일을 하는 모임이 있으면 자원봉사를 한다는 생각으로 글을 써서 보냅니다. 사진도 이와 같아요. 애써 찍은 사진들을 아무 돈을 안 받고 보내곤 합니다.


  거꾸로 보면, 나도 내 둘레 사람들한테서 돈을 받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곱게 바라보는 분들은 내가 시골마을에서 꾸리는 사진책도서관 튼튼하고 씩씩하게 이을 수 있도록 도움돈을 보내줍니다. 도서관이 좋은 자리 얻도록 밑돈을 보태어 줍니다. 도서관 꾸리는 살림돈을 요모조모 보태어 줍니다. 도서관 새 책꽂이 들이는 돈을 보태어 줍니다. 그러면 나는 도서관 소식지라든지 내가 내놓은 책들을 이웃들한테 보내거나 선물합니다.


  내 글 한 꼭지는 원고지 열 장이 되기도 하고 원고지 백 장이 되기도 합니다. 어느 때에는 원고지 열 장짜리 글을 써서 30만 원 값을 받습니다. 어느 때에는 원고지 백 장짜리 글을 써서 거저로 주기도 합니다. 내 사진 한 장에 50만 원 값을 받기도 하면서, 내 사진 서른 장을 거저로 주기도 합니다. 어떤 일이든 꼭 돈으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꿈과 사랑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돈이 있고 이름도 있으며 힘도 있는 사람이나 모임에서 나한테 ‘공짜 글’을 써 달라 할 때가 있고, ‘공짜 사진’을 보내 달라 할 때가 있습니다. 이때에는 딱 잘라 이야기합니다. 이녁한테 돈도 이름도 힘도 없으면 얼마든지 글과 사진을 자원봉사하는 마음으로 보낼 테지만, 이녁한테 돈도 이름도 힘도 다 있는데, 내가 왜 이녁한테 아무 돈을 안 받고 글이나 사진을 주어야 할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돈도 이름도 힘도 없으면서 뜻있는 일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푸념을 하는 소리를 듣는 자리에서는 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뜻있는 일을 하려는 그 마음을 더 깊이 엮어, 뜻있는 일을 하면서도 돈을 즐겁고 슬기롭게 버는 생각도 함께 해 보셔요, 하고요. 좋은 일을 하면서 좋은 돈을 벌어야 맞거든요. 아름다운 일을 하면서 아름다운 돈을 벌어야 참말 아름답지요.


  남한테서 무엇 하나 얻을 적에는, 나도 남한테 무엇 하나 건넵니다. 내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깨끗한 종이 한 장 얻어 그 자리에서 시를 한 가락 씁니다. 내가 시골에서 살아가며 누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가만히 떠올리면서 그때그때 시를 한 가락 씁니다. 또는 내가 찍은 사진 가운데 내 마음을 아주 넉넉히 살찌우는 작품을 골라서 선물로 보냅니다.


  밥 한 그릇 만나게 얻어먹으면, 설거지를 맡아서 하거나, 걸레를 빨아 구석구석 방바닥을 훔치거나 먼지를 닦습니다. 몸을 써서 날라야 할 짐이 있으면 함께 나르고, 이것저것 종이 한 장 맞드는 마음 되어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 동무들도, 내 이웃들도 서로서로 같은 마음이겠지요. 저마다 즐겁게 얻어서 누리고, 저마다 즐겁게 손을 내밀어 함께 일을 해요. 다 함께 즐겁게 주고받습니다. 서로서로 기쁘게 웃으면서 사랑과 꿈을 돈 한 푼에 실어 나눕니다.


  내 주머니에 돈 한 푼 있으니 한 푼을 반으로 갈라 함께 씁니다. 이녁 주머니에 돈 두 푼 있으니 두 푼을 반으로 갈라 함께 써요. 넉넉히 있으니 나눈다고 할 수 있지만, 넉넉하지 않더라도 스스럼없이 나눕니다. 많고 적고는 대수롭지 않아요. 마음이 대수롭습니다. 마음을 즐겁게 추스르면서, 환하게 웃는 어깨동무를 생각합니다.


  돈이란 나눌수록 즐겁습니다. 돈이란 함께할수록 커집니다. 왜냐하면, 돈이란 바로 사람들이 만들어서 쓰거든요. 사람들은 사랑으로 살아가는 숨결이고, 사람들은 꿈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목숨이에요. 곧, 사람들은 돈이라는 물건 하나에 사랑과 꿈을 담습니다. 사랑과 꿈은 돈을 징검돌 삼아 이 사람한테서 저 사람한테 갑니다. 저 사람한테서 이 사람한테 옵니다. 4346.5.1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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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20] 도서관읽기
― 책은 어떻게 건사하면 아름다울까

 


  도서관은 책을 두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는 도서관 건물 한 번 지으면, 더는 새 건물 안 늘리기 일쑤예요. 책을 둘 자리 넉넉하게 늘리지 못해요. 도서관은 책을 두는 곳이지만, 책을 버리는 곳이 됩니다. 새로운 책을 꾸준히 사들이자면, 그동안 사들인 책을 꾸준히 버려야 해요.


  도서관은 책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찾기 퍽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책이 없는 도서관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드문드문 찾는 책이라든지 어쩌다 한 번 찾는 책이 있는 도서관은 퍽 드물어요. 대출실적 적은 책을 꾸준하게 버려야, 사람들이 새로 찾는 책을 장만해서 갖출 수 있거든요.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 참 힘듭니다. 아직도 아주 많은 도서관은 책을 읽기보다는 수험공부 하는 데로 여깁니다. 책을 읽기 좋도록 건물을 짓거나 꾸미거나 고치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도서관을 찾아오는 사람들 스스로 책을 읽으려는 마음이라기보다 수험공부 하려는 데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애써 아름답게 도서관을 지어 책을 읽기 즐거운 터로 꾸몄어도, 사람들 스스로 아름다운 마음 빚지 못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지 못합니다.


  도서관은 책을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런데요, 이 나라에서는 도서관이 책을 사랑하도록 북돋우는지 이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책을 읽는 몸가짐과 책을 다루는 손길을 보여주거나 알려주는 도서관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서관에서는 ‘사람들 손길 타는 책’이 튼튼하도록 껍데기를 두껍게 댄다든지 테이프를 바른다든지 해요. 책마다 딱지를 붙이고 번호와 숫자를 매겨요. 책마다 도장을 찍고 ‘훔치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를 붙여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해 보곤 합니다. 책을 이렇게 망가뜨려도 될까 하고. 책에 이렇게 덕지덕지 지저분한 짓을 해도 될까 하고. 사람들이 책을 사랑하도록 이야기를 들려주고, 책을 어떻게 만지고 넘기며 책을 어떻게 건사해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가르쳐야지 싶습니다. 이런 장치 저런 딱지 붙인대서 책을 안 도둑맞지 않아요. 이렇게 도장을 찍고 저렇게 테이프를 발라야 ‘어느 도서관 책’이라고 널리 보여주지 않아요.


  도서관은 책을 배우는 곳입니다. 그래, 도서관은 책을 배우는 곳이지요. 그래, 도서관은 책이 어떠한 숨결이요 삶이며 마음인가를 배우는 곳이지요. 그러면, 우리 도서관은 사람들한테 책이 무엇인가 하고 가르치나요. 우리 도서관은 사람들한테 책으로 어떤 삶 짓거나 일구거나 가꿀 수 있는지를 어떻게 가르치나요. 우리 도서관은 사람들한테 책 하나에 깃든 꿈과 사랑과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어떻게 가르치나요.


  작은도서관을 떠올려 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서울 한복판에 커다란 건물로 서는 모습 말고, 국립중앙도서관이 서울 곳곳에 조그마한 ‘책집’으로 깃드는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골목도서관을 헤아려 봅니다. 시립도서관이든 군립도서관이든 골목골목 조그마한 살림집에 스며들어 책집이 되면서 잠집(게스트하우스) 구실까지 맡는, 살가운 책터 하나 헤아려 봅니다.


  골목집 한 곳을 정갈하게 꾸며 책 만 권씩 건사한다면, 골목집 백 곳을 마련하면 책 백만 권 너끈히 거느립니다. 골목집 천 곳을 마련하면 책 천만 권 알뜰히 거느리겠지요. 인터넷이 발돋움한 오늘날은 인터넷으로 ‘어느 책이 어느 골목도서관에 있는가’를 쉬 알아볼 수 있으니, 굳이 커다란 건물로 있는 큰 도서관으로만 가지 않아도 됩니다. 책을 알맞게 나누어 백 군데나 천 군데로 나누어 놓으면, 사람들은 즐겁게 골목마실 누리면서 책마실 빛낼 만합니다. 조용하고 사랑스러운 골목도서관에서 느긋하며 한갓지게 책을 누리면서 책삶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골목도서관은 골목도서관 있는 동네에서 지킬 수 있어요. 골목동네 사람들이 골목도서관을 스스로 돌보며 가꿉니다. 꼭 사서자격증 있어야 ‘골목도서관 책지기’를 할 수 있지 않아요. 사서자격증 아닌 ‘골목동네 사랑하는 마음씨’ 있는 슬기롭고 착한 사람을 ‘골목도서관 책지기’로 두면 돼요. 이렇게 하면, 골목도서관 책지기는 일흔 살 할아버지가 맡을 수 있고, 열다섯 살 푸름이가 맡을 수 있습니다. 책을 참답게 아끼고 사랑하는 누구라도 도서관 책지기 될 수 있지요.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책을 건사하고 돌보고 살피고 헤아리고 나누는 몫을 맡습니다. 십진분류법이라든지 무슨무슨 학문을 갈고닦은 사람이 일할 도서관이 아니라, 책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돌보는 꿈을 꾸는 사람이 일할 도서관입니다. 이때에 시나브로 책사랑이 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이때에 바야흐로 책날개 온누리에 팔랑이면서 ‘책으로 나누는 문화’ 곱게 크리라 생각합니다. 4346.5.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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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6] 마음읽기
― 스스로 사랑하려는 마음일 때에 사랑

 


  글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그냥 나오는 글이란 없이, 모두 이녁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쓰는 글은 내 마음이고, 내 이웃이 쓴 글은 내 이웃 마음입니다.


  내 마음과 이웃 마음은 다릅니다. 내 삶과 이웃 삶이 다르니까요. 내 목소리와 이웃 목소리는 다릅니다. 내 생각과 이웃 생각이 다르니까요.


  글을 읽을 때에 ‘줄거리’를 읽으려고 하면 마음을 못 읽습니다. 누가 쓴 글이든 마음을 쓰기에,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고서는 서로 말다툼으로 번지기 쉽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삶에 따라 다 다른 목소리로 쓰는 글이기에, ‘내 삶과 내 생각과 내 목소리’에 맞추어 다른 사람 글을 읽으면 엉뚱하게 풀어내고 맙니다. 글 아닌 말에서도 이와 같아요.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어야지요.


  누군가는 말투가 좀 거칠 수 있어요. 누군가는 말끝마다 욕지꺼리가 섞일 수 있어요. 누군가는 말투가 나긋나긋하겠지요. 누군가는 말끝마다 상냥한 기운 감돌겠지요.


  말투가 거칠면, 이녁 마음도 거칠까요. 말끝마다 욕지꺼리 섞으면 이녁 말은 들을 값어치조차 없을까요. 문학을 떠올려요. 문학에 나오는 말을 떠올려요. 문학에 나오는 줄거리를 떠올려요. 문학을 읽는 우리들은 ‘줄거리’를 읽으려는 뜻이 아니에요. 문학을 읽는 까닭은 마음을 읽고 싶기 때문이에요.


  어떤 사람은 글을 읽든 책을 읽든 문학을 읽든 ‘줄거리’만 좇을 수 있어요. 누구한테나 자유이니, 줄거리가 좋으면 줄거리로 갈 뿐이에요. 다만, 줄거리를 붙잡을 때에는 마음을 잡지 못해요. 줄거리에 얽매이면 마음읽기하고 멀어져요.


  글 한 줄에서 마음을 읽는다 할 때에는, 글을 쓴 이녁 마음이 어떠한가를 살펴, 서로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뜻이에요. 살을 섞거나 쓰다듬어야 사랑이 아니라, 마음을 읽고 나누려 할 때에 사랑이에요. 살을 섞는 일은 살섞기예요. 살을 쓰다듬는 일은 쓰다듬기예요. 마음을 읽을 때에는 마음읽기이고, ‘마음’이란 바로 삶을 사랑하는 바탕이니, 저절로 사랑읽기로 흘러요.


  마음을 따사롭게 추스르는 사람은 삶을 따사롭게 추스릅니다. 마음을 너그럽게 북돋우는 사람은 삶을 너그럽게 북돋우지요.


  우리 어른들은 마음을 슬기롭게 읽으며 삶을 슬기롭게 지을 수 있기를 빌어요. 우리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한테 슬기로운 삶·넋·사랑을 찬찬히 물려줄 수 있기를 빌어요. 스스로 사랑하려는 마음일 때에 사랑이에요.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랑은 없어요. 스스로 일구는 사랑이고, 스스로 짓는 사랑이에요. 마음을 읽으면서 사랑을 나누고,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랑을 빛내요. 4346.5.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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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9] 시멘트읽기
― 숲과 논밭과 찻길과 도시

 


  시골자락 논두렁이 아주 빠르게 사라집니다. 경운기와 오토바이 다니기 좋도록, 또 들풀 자라지 못하도록, 논두렁을 시멘트로 덮습니다. 시골자락 논도랑이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큰물 질 적에 물골에 빗물 잘 빠지도록 한다면서, 흙도랑을 시멘트도랑으로 바꿉니다.


  고샅이라 할 시골길은 어느새 거의 다 시멘트길로 바뀌었습니다. 도시 골목길도 흙길은 한 군데도 안 남았다 할 만하며, 아스팔트를 깔거나 시멘트를 깝니다. 자동차를 대기 좋도록, 또 자동차가 다니기 좋도록, 도시는 어디에나 아스팔트하고 시멘트로 바닥을 마감합니다.


  시골에서도 논이나 밭으로 경운기나 트랙터 드나들기 좋도록 시멘트길 따로 한 군데쯤 마련합니다. 멧자락에 올라 시골마을 멀리 내다보면, 논밭 한쪽에 하얗게 시멘트길 난 모습 볼 수 있습니다. 머잖아 이 나라 시골마을 어디에나 논두렁까지 하얗게 덮이리라 느낍니다.


  아무래도 자동차는 흙길을 다니기 나쁘지요. 아무래도 짐차이든 경운기이든 흙길에서는 바퀴 빠질 수 있지요.


  그런데, 시멘트바닥에는 아무 씨앗을 못 심어요. 시멘트바닥에서는 나무도 풀도 돋지 못해요. 사람이 살아갈 집에서도 방바닥을 시멘트로 하면 숨이 막히지요. 방바닥과 벽을 흙으로 하는 까닭이 있어요. 먼 옛날부터 사람들 살림집 바닥이나 벽이 모두 흙인 까닭이 있어요. 서양 문명이 퍼지기 앞서까지 지구별 모든 겨레는 흙바닥에서 잠을 잤어요. 서양사람조차 흙바닥에서 잠을 잤지요. 다만, 서양사람은 흙바닥에 나무로 짠 침대를 놓고 잠을 잤습니다. 서양에서 도시라는 데가 생기고 돌과 시멘트로 지은 층집 생기면서 비로소 ‘시멘트집’이 지구별 곳곳에 퍼졌어요.


  풀이 돋는 흙바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풀과 나무를 보듬는 흙으로 집을 지어 흙내음 마시고 흙숨 먹으며 살아온 사람들이에요. 흙을 치우고 시멘트로 높다라니 층집 지으니, 어른이든 아이이든 숨이 막히고 코가 막힐밖에 없어요. 숨과 코가 막히다 보니, 마음까지 막히고 생각마저 막혀요.


  사람도 짐승도 흙에 기대어 살아가고, 흙바닥에 누워 자요. 흙을 싫어하거나 흙을 아끼지 않거나 흙을 멀리하거나 흙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따스한 마음결을 잃어요. 동네나 마을이 살기 좋다면, 동네사람이나 마을사람이 흙을 아낀다는 뜻이에요. 도시에서는 조그맣게 텃밭을 일구거나 꽃밭을 가꾸는 동네일 때에 포근한 숨결 감돌아요. 시골에서는 논밭이 제아무리 넓다 하더라도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로 돈농사 짓는다면 너그러운 숨결 감돌지 못해요.


  큰비 몰아치면 아스팔트 찻길도 무너지고 시멘트바닥도 갈라져요. 큰비 몰아치면 때때로 멧자락 무너지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숲을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멧자락 무너질 일 없어요. 사람들이 찻길을 낸다며 멧자락 한쪽을 깎거나 밀었기 때문에 큰비 때문에 멧자락 무너져요. 찻길 없고 숲나무 함부로 베지 않은 멧자락은 큰비에 아랑곳하지 않아요.


  나무가 있고 풀이 있어, 멧자락은 비가 오거나 말거나 늘 괜찮아요. 나무가 있고 풀이 있는 멧자락은 보송보송하지요. 손가락으로 땅바닥 누르면 손가락 쏘옥 들어갈 만큼 보드랍지요. 그런데 이 보드라운 숲흙은 큰비에든 작은비에든 튼튼하고 씩씩합니다. 풀뿌리와 나무뿌리가 흙을 지키니까요. 풀과 나무가 흙을 살리니까요. 흙은 풀과 나무를 북돋우고, 풀과 나무는 흙을 지켜요.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은 무엇을 지킬까요. 그래요,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은 자동차를 지키지요. 아파트를 지키고 높다란 건물 지키지요. 시멘트는 도시를 지켜 물질문명 사회 세워요. 아스팔트는 도시를 북돋아 물질문명 사회 키워요. 도시에서 자동차 없는 나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으리라 느껴요. 시골에서도 자동차 없이 농사를 짓거나 살림을 꾸릴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사라졌다고 느껴요. 흙이 없으면 밥도 물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지만, 흙을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나머지 학교 운동장에서조차 흙을 몰아내요. 도시는 공원에서도 흙을 밟지 못해요. 도시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흙을 만지며 놀 수조차 없어요. 도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가운데에는 흙 한 줌 없는 시설 제법 많아요.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자동차 다니는 찻길에서는 아무런 잔치도 놀이도 얘기마당도 어울림판도 이루어지지 못해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해야, 자동차가 서지 않아야, 자동차가 모두 사라지고 없어야, 비로소 동네사람이든 마을사람이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잔치마당 펼쳐요. 서울 광화문을 생각하면 쉬 알 수 있을까요. 자동차를 몰아낸 광화문 너른터 되기에 비로소 그곳에서 무언가 잔치라든지 행사를 꾀하지요. 자동차 싱싱 달리면 사람들은 아무것 못할 뿐 아니라, 뿔뿔이 찢어지거나 흩어져요. ‘재래시장’이라고 하는 오래된 저잣거리에 왜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따스한 기운 감도는가를 떠올려요. 오래된 저잣거리에는 자동차 드나들지 못해요. 오직 사람들이 두 다리로 걸어서 오갈 뿐이에요.


  자동차 대는 자리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백화점이나 커다란 할인매장을 떠올려요. 이런 데에서 따스한 기운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백화점 일꾼조차 힘겹거나 고단한 일에 지쳐요. 곧, 자동차 있는 곳에는 민주주의 없어요. 자동차 있는 곳에는 평화 없어요. 자동차 달리는 찻길에서는 평등도 복지도 통일도 자유도 권리도 꿈도 사랑도 믿음도 배움도 없어요. 자동차 달리는 찻길에는 오직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와 매판권력과 노예교육만 있어요.


  숲은 시멘트로 안 덮어도 빗물에 쓸리지 않아요. 또 숲은 빗물에 조금씩 쓸려 냇물이나 바닷물로 흘러들어도 돼요. 풀과 나무가 가을 지나 겨울 되고 다시 봄이 되는 동안 새 흙 태어나도록 가랑잎 떨구고 풀잎 지거든요. 잘 생각해 보셔요. 백두산이든 지리산이든 한라산이든 높이가 낮아지지 않아요. 비를 그렇게 맞으며 수천 수만 수십만 수백만 해를 살았어도 멧자락은 높이가 낮아지지 않아요. 흙이기 때문이고, 흙땅에 풀과 나무가 살아가기 때문이에요.


  시골이 시골답게 빛나는 길을 헤아려요. 도시가 도시답게 즐거운 길을 살펴요. 독재정권 새마을운동이 저지른 ‘슬레트 지붕’이 나쁜 줄 이제서야 깨닫고는, 요즈음 들어 나라에서 큰돈 들여 시골마을 슬레트집을 하나씩 허물어요. 그러나, 슬레트 지붕 쓰레기를 어떻게 하려는지 딱히 대책이나 정책은 없어요. 그저 허물어 어느 쓰레기매립지에 파묻을 뿐이에요. 핵발전소 핵쓰레기만 걱정할 일 아니에요. 온 나라 뒤덮은 시멘트바닥과 아스팔트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해요. 상수도 공사이니 무슨 공사이니 하면서 아스팔트길이나 시멘트바닥 자주 뜯지요? 그러면, 이렇게 뜯은 아스팔트쓰레기와 시멘트쓰레기는 어떻게 하나요? 어마어마한 시멘트쓰레기 어찌해야 할까요. 아파트 재개발 할 때마다 쏟아질 시멘트쓰레기는 또 어떡해야 할까요. 흙집은 허물어도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흙집 지으면 되지만, 도시를 이루는 엄청난 시멘트집에서 나올 시멘트쓰레기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버리려나요. 제발, 도시 시멘트쓰레기 시골에 몰래 갖다 버리지 마셔요. 부디, 시골 흙땅에 함부로 시멘트 덮지 마셔요. 4346.5.5.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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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른입니까 17] 나무읽기
― 마을 이루는 바탕이란

 


  도시에서 나고 자라면서 늘 한 가지 아쉽다고 여겼습니다. 내 어버이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될 무렵 여러모로 돈을 그러모아 아파트를 마련해서 ‘우리 집’이라고 삼으셨지만, 나는 이 아파트가 참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왜 아파트가 ‘우리 집’이어야 할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 집’이라 한다면, 마당이 있고 꽃밭이 있으며 나무 자랄 흙땅 있어야 한다고 여겼어요. 누가 가르치거나 알려주지 않았지만, ‘우리 집’이라 하면 우리 식구 사랑하면서 아낄 나무와 풀과 꽃이 자랄 흙땅 있어야 비로소 ‘우리 집’이 된다고 느꼈어요.


  국민학교 다니며 동무네 집 놀러갈 적에 언제나 새삼스레 깨달았어요. 아파트 사는 동무네 놀러갈 적에는 따로 느끼지 못했지만, 아파트 아닌 단독주택이라 하는 여느 골목집에서 살아가는 동무네 놀러가고 보면, 아무리 손바닥만큼 작은 마당이라 하더라도, 이 집에서 살아가는 동무는 ‘내 나무’가 있어요.


  그래, 내 나무 한 그루 있구나, 참 좋네, 하고 생각하며 으레 나무줄기 쓰다듬고 우듬지 올려다보곤 했어요. 작은 골목집 작은 골목나무 한 그루인데, 이 나무 한 그루 있기에 이 조그마한 살림집이 환하게 빛나면서 푸르게 따스하구나 하고 느껴요.


  도시 떠나 옆지기랑 아이들하고 살아갈 새 터 헤아리면서 나는 다른 무엇보다 ‘나무 심어 돌보기’를 생각했어요. 세 식구 깃든 충청북도 멧골집에서는 살구나무 두 그루 심어 앞으로 이 살구나무 무럭무럭 자라 우리 집이 ‘살구나무 집’ 되기를 꿈꾸었어요. 네 식구 되고 나서 전라남도 고흥 시골마을로 옮겨 지내는 오늘날은 우리 집 둘레에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이렇게 세 가지를 두 그루씩 심으며 꿈을 꿉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 스무 살 즈음 될 무렵에는 제법 우람하게 자랄 이 나무들을 바탕으로 우리 조그마한 이 집이 ‘나무 집’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해마다 이 나무 저 나무 몇 그루씩 심어 온갖 나무 골고루 어여쁘게 어우러지는 ‘집숲’ 되기를 꿈꿉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마을이라 한다면, 사람들 모여서 살아가기에 마을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집집마다 ‘집나무’를 심어서 돌보고, 마을 테두리에서는 마을사람 모두 보듬을 만한 넓은 멧자락과 숲이 있고 냇물이 흐르며 들판 있을 때에 비로소 마을이라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모두 똑같아요. 멧자락도 숲도 냇물도 들판도 없이, 시멘트 층집, 그러니까 아파트만 우줄우줄 때려박는 곳을 ‘마을’이나 ‘동네’나 ‘고을’이라고는 가리킬 수 없다고 생각해요. 수천 수만 사람 바글바글거리도록 때려짓는 아파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도록 가두는 감옥 아닌가 하고 생각해요. 게다가, 이런 시멘트감옥 같은 데를 몇 억 원이니 하는 비싼값에 사고팔도록 하니, 더더욱 사람들을 바보로 짓누르는 셈 아닌가 하고 느껴요.


  나무 한 그루 심을 마당 한 뼘 누리지 못하는데 집값이 몇 억이라니요. 들나물 한 포기 뜯어서 먹을 기쁨 즐기지 못하는데 집값이 몇 억이라니요. 봄꽃 여름꽃 가을꽃 겨울꽃 철따라 다 다른 빛깔 맞이하지 못하는데 집값이 몇 억이라니요.


  나무가 자라 집을 지어요. 나무가 자라 바람내음 싱그러워요. 나무가 자라 새가 찾아들고 어여쁜 벌레가 깃들어요. 나무가 자라 열매를 베풀고 꽃을 나누어 줘요. 나무가 자라 그늘이 드리우고 햇살조각 눈부셔요. 나무가 자라 흙이 살아나고, 나무가 자라 아이들이 방긋방긋 웃으며 튼튼하게 함께 자라요.


  우리 집 나무를 떠올리다가 문득 하나 생각합니다. 역사를 밝히는 분들은 한겨레 발자취를 으레 단군 때부터 짚어 반 만 해를 말하는데요, 반 만 해 앞서 이 나라 삶터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천오백 해 앞서는, 오천 해 앞서는, 오천오백 해 앞서는, 또 육천 해나 칠천 해 앞서는, 구천 해나 일만 해 앞서는, 이 나라 삶터에 어떤 이야기와 숨결과 빛줄기 있었을까요. 단군이라는 님이 있기 앞서, 이 나라 시골마을 사람들은 어떤 삶 누렸을까요. 팔천 해 앞서 이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어떤 집을 지으며 어떤 옷을 나누며 살았을까요.


  씨족 우두머리나 제사 지내는 우두머리 아닌 사람들은 삶에서 무엇을 바라보거나 돌보면서 하루를 누렸을까요. 전쟁무기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서로 어떤 하루 맞이하면서 어떤 삶 지었을까요. 갖은 문명과 문화를 누린다는 오늘날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하루 맞아들이며 어떤 삶 짓는가요. 공무원이나 회사원으로서 다달이 어느 만큼 돈을 벌기는 하되, 정작 스스로 하루하루 새 삶을 짓는 길하고는 그만 동떨어지지 않나요. 어른인 한 사람으로서 누리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아이들이 누리도록 하는 삶은 얼마나 빛나는가요. 4346.4.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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