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점이 망가진 영화란? (갓 오브 이집트)



  영화 〈갓 오브 이집트〉를 보았습니다. 평점이 기막히도록 낮기 때문에 살짝 망설였으나, 이 영화가 ‘이집트 신 이야기’를 다루었고, 영화를 찍은 분이 〈크로우〉라든지 〈다크 시티〉라든지 〈아이, 로봇〉 같은 영화를 찍었기 때문에 ‘망가진 평점’은 집어치우고서 이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이 여러 가지 영화를 찍은 알렉스 프로야스 같은 감독이 선보이는 영화는 ‘말(대사) 한 마디’를 그냥 보아넘길 수 없습니다. 소리를 좀 높여서 영어로 흐르는 말결을 더 귀여겨들으면서 글씨(자막)가 얼마나 잘 옮긴 말인가를 헤아리면서 두 번 봅니다.


  사람마다 영화를 보는 잣대나 눈이 모두 다릅니다. 사람마다 사람을 마주하는 잣대나 눈도 모두 다른걸요. 어떤 사람은 옷차림으로 사람을 보지요. 어떤 사람은 말투나 얼굴 생김새로 사람을 보지요. 어떤 사람은 은행계좌나 이름값으로 사람을 보지요. 어떤 사람은 가방끈이나 주먹힘으로 사람을 봐요. 자, 그러면 우리는 영화를 어떤 잣대나 눈으로 볼 때에 ‘나 스스로 즐거우’면서 ‘새로운 살림을 배우는 넋’이 될 만할까요?


  ‘거인(또는 거신)’ 해골이 나오기도 하고, 이러한 뼈다귀를 박물관에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를 안 믿거나 못 믿을 사람이 있으리라 느낍니다. 하늘을 마음껏 나는 님(신)을 보면서 터무니없다고 여길 사람이 있으리라 느낍니다. 영화에 나오는 배우가 예쁘냐 잘생겼느냐를 따질 사람이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내가 이 영화에서 바라보는 대목은 삶, 문명, 사람, 님, 하늘, 바람, 넋, 사랑, 꿈, 생각, 피와 금, 종, 군대와 싸움, 온누리, 해누리 들이며, 여기에 죽음과 고요가 있습니다. 하늘빛처럼 파랗게 눈부신 눈(호루스 눈)을 떠올리고, 해님처럼 빨갛게 열매를 맺는 씨앗과 같은 염통(심장)을 떠올립니다. 오래된 지식을 담은 머리도 파랗게 빛나네 하고 새삼스레 생각해 봅니다.


  해누리를 다스리는 ‘라’는 이녁 아들이나 손자한테 ‘길(여정, journey)’를 말해요. 힘은 ‘라’가 너희한테 줄 수 있지 않다는 대목을 뚜렷하게 밝히고, 잘과 잘못이 따로 없다는 대목도 뚜렷하게 밝혀요. 땅에서는 삶과 죽음이 갈리지만, 하늘에서는 죽음이 없는 삶만 있다는 대목도 뚜렷하게 밝히고요. 무엇보다도 ‘사막에서 태어나서 살’든 ‘나일강 곁에서 나라를 다스리며 살’든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스스로 ‘제 길’에 서린 뜻을 스스로 찾고 읽어내어서 이를 새롭게 지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영화에 내내 흐릅니다.


  배우려 할 때에 배웁니다. 읽으려 할 때에 읽습니다. 누가 책을 선물해 주기에 읽지 않아요. 내가 스스로 어느 책을 바랄 적에 비로소 내 땀을 들여서 마련한 돈으로 책을 기쁘게 장만해서 읽습니다. 배우려 하지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권력’을 바랄 적에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요. 남이 나를 가르쳐 주지 못해요. 2016.8.3.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다시 사고서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처음부터 꾸준하게 모으지 않고 뒤늦게 모은 탓에 짝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습니다. 미처 장만하지 못한 권수를 천천히 장만하는데, 지난주에 장만한 25권은 첫 쪽을 펼치면서 ‘아아, 예전에 읽은 이야기로구나!’ 하고 바로 알아차렸습니다. 어찌해야 할까 하고 한동안 망설입니다. 만화를 좋아하는 이웃님한테 선물로 띄울까요? 곰곰이 생각하다가 ‘예전에 읽었’고 ‘서재도서관에 한 권 있지’만, 다시 이 ‘새책으로 읽기’로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천천히 되읽어 봅니다.


  만화책 《천재 유교수의 생활》 스물다섯째 권을 다시 사는 바람에 새롭게 읽으면서 새삼스레 한 가지를 느낍니다. 집에 있는 줄 모르고 똑같은 책을 다시 산다면, 이때에 이 책을 즐겁거나 새롭게 되읽을 만한가 아닌가에 따라, 내가 두고두고 건사할 만한 책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할 수 있구나 싶어요. 되읽을 만할 뿐 아니라 되살 만할 때에 비로소 집에 두면서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책이네 하고 하나를 더 배웁니다. 2016.7.20.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rosty The Snowman



  아이들한테 ‘영어 노래’를 들려주다가 문득 〈Frosty The Snowman〉하고 얽힌 노래를 하나 듣는다. 어, 이 노래, 이 만화영화, 하면서 눈길이 간다. 내가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다고 느끼는 만화영화이다. 유투브에서 몇 대목을 조각조각 찾아보다가 오롯이 영화로 있는가 살폈더니 올 2015년에 45돌을 기리는 새 디브이디가 얼마 앞서 나온 줄 알아차린다. 한글 자막은 없지만 괜찮다. 이렇게라도 다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고마운가. 1969년에 처음 나온 만화영화라 하니 마흔다섯 돌을 기리는 디브이디는 지난해에 진작 나왔겠지. ‘눈사람’을 놓고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다른 ‘스노우맨’ 이야기가 있지만, 나는 1980년대에 나온 그 ‘스노우맨’보다는 1969년에 나온 이 〈Frosty The Snowman〉이 훨씬 가슴에 남는다. 파이프 피우는 눈사람 아재가 아이를 따뜻한 곳에 데려다주면서 그만 몸이 녹아서 사라져야 했고, 아이는 녹아버린 눈사람 앞에서 엉엉 우는데, 산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눈사람 아재를 다시 살린다. 그러나 이제 눈사람은 아이 곁을 떠나야 한다. 곧 겨울이 지나가니까. 언젠가 다시 찾아오겠다고 떠나는 눈사람 아재는 언제쯤 다시 찾아올까? 영어를 스물 몇 해 만에 새롭게 배우려고 하면서 아이들하고 영어 노래를 새삼스레 들으며 새삼스레 여러 가지를 느끼고 돌아본다. 4348.12.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빌리 엘리어트〉를 아이하고 새롭게 보기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몹시 사랑스럽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처음 안 지는 꽤 되었으나, 막상 이 영화를 처음 본 때는 큰아이를 낳은 뒤이다. 곁님을 만나서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아마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를 한참 뒤에서야 보았을 수 있다. 곁님하고 아이가 나한테 오기 앞서까지 나한테는 ‘책’만 있었지, ‘영화’는 아예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하고 함께 볼 만한 영화’라는 대목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빌리 엘리어트〉는 영화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를 나한테 처음으로 일깨웠다고 할 만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사랑스러운 영화’를 비로소 생각할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책’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노래’가 있고, 사랑스러운 ‘춤’이 있으며, 사랑스러운 웃음과 이야기와 눈물과 삶이 있다고 하는 대목을 참말로 느즈막하게 알아차렸다.


  우리 집 두 아이, 아직 여덟 살하고 다섯 살인 두 아이는 〈빌리 엘리어트〉를 보는 내내 ‘서서 함께 춤을 춘’다. 그렇다. 아이들은 춤을 추고 싶다. 아이들은 춤을 추면서 웃고 싶다. 아이들은 춤을 추면서 노래하고 싶다. 춤추면서 웃고 노래하는 아이들이 바로 이 땅을 새롭게 바꾸고, 이 나라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며, 새로운 꿈이 자라도록 북돋운다. 4348.11.2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책과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을 쓴 이윤옥 님이 오마이뉴스 기사로

내 글에 반박글을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본질 대목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이윤옥 님이 오마이뉴스 반박글에 올렸듯이

이윤옥 님 스스로도 <조선식물향명집>에 나온 이야기는

일제강점기 식물학자가 총독부 사전과 일본 학자 책을 '참고'로 했을 뿐임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윤옥 님은 <조선식물향명집>에

오직 두 가지 책, 총독부 사전과 일본 학자 책을 '토대'로 삼았다는 주장을 할 뿐이다.


왜 그럴까?


'토대'와 '참고'는 달라도 아주 다른 항목이 아닌가?

게다가 이윤옥 님은 '참고'했다고 하는 두 가지 책을 놓고

<조선식물향명집>을 쓴 여러 식물학자가 일본 사전과 도감을 '참고'하지 않고

'토대'로 했다고 주장하는데,

막상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라는 책에서는

한국 식물학자가 '토대'로 삼아서 했다고 볼 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다.


한국 식물학자는 틀림없이 '조선 방언(시골말)을 토대'로 했다고

머리말에 또렷하게 밝히는데

왜 자꾸 이 머리말을 뒤집으려고 할까?

안타까워도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조선식물향명집>이 궁금한 분들은

'디지털 한글박물관'에 들어가 보시면 된다.

그곳에 원문이 '제대로 또렷하게' 있으니까.



(http://www.hangeulmuseum.org/sub/information/bookData/total_List.jsp?d_code=00524&g_class=07)



책에 잘못 쓴 대목을 바로잡으면서 사과글을 쓰셔야 할 텐데

사실을 왜곡한 대목을 그냥 그대로 주장만 한다면

무슨 뜻이 있을까.

참으로 씁쓸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