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에 받친 길



  두 아이하고 순천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악에 받친 사람을 매우 많이 스칩니다. 삶이 너무 고달픈 탓일까요. 먹고살기 힘든 탓일까요. 어떤 슬프거나 아픈 일 때문일까요. 벌교 시외버스역에서는 시외버스가 오가는 어귀 한복판에 자가용을 대놓고 비킬 줄 모르는 분을 스칩니다. 이 시외버스를 모는 분은 스스로 듣지도 않으면서 사건·사고 이야기만 끝없이 흐르는 라디오를 틀어 놓습니다. 순천에서 시내버스를 타는데, 젊은이도 늙은이도 멀쩡히 한쪽에 선 사람을 치고 지나가지만 아무도 미안하다는 말이 없는데, 치고 지나갈 만한 자리에 있지 않아도 그냥 치고 지나갑니다. 순천 아랫장에서는 짐 많은 아지매나 할매한테 ‘왜 화물차 안 타고 버스를 타느냐’고 타박하는 버스 기사랑 ‘세상에 이렇게 인심이 없느냐’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손님이 삿대질을 합니다.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사람들이 겉으로는 상냥한 말씨를 쓰는 듯해도 속으로는 지치거나 고단한 몸짓으로 소리를 높입니다. 때로는 지치거나 고단한 낯빛 그대로 멱살잡이를 할 듯한 모습이기까지 합니다. 아이들이 바깥마실을 멀리 다니고 싶지 않다고 으레 말하는데, 참말로 아이들 말이 맞습니다. 상냥한 이웃이나 어른이나 동무가 아닌, 악에 받친 사람들이 사회에 이렇게 가득하다면 굳이 사회살림을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2018.2.7.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고흥은 참 겨울에도 고흥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부엌 창문을 열고서 저녁을 짓습니다. 춥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저녁을 다 지을 즈음 방바닥에 불을 넣어야 아이들이 따뜻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으나 불넣기를 잊습니다. 곧 저녁 열 시가 되겠구나 싶어서, 아이들이 발을 씻고 자도록 이끌려고 하다 보니, 아차 아까 방바닥에 불을 안 넣었다고 떠오릅니다. 보일러를 살피니 방 온도가 22도. 어라, 불을 안 넣었는데 이 겨울에 방이 22도라고? 어쩐지, 반소매에 반바지를 입고 하루 내내 집 안팎에서 일하고 돌아다녀도 춥다는 생각이 아예 없더니, 고흥은 참 겨울에도 고흥입니다. 어쩌면 산타 할배 또는 산타 할매가 이 고장 고흥에 겨울에 매우 포근한 날씨를 선물로 베풀어 주었을 수 있습니다. 2017.12.23.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으뜸버스



  ‘고속버스’라는 이름으로 걸상이 퍽 크고 폭신한 버스가 처음 나온 때를 떠올립니다. 지난날 시외버스는 걸상이 꽤 작고 딱딱했어요. 이러다가 ‘고속버스’가 나오면서 찻삯이 올랐고, 오랜 시외버스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이윽고 ‘우등버스’가 나옵니다. 걸상은 더 크고 자리가 널찍합니다. 우등버스가 나오면서 고속버스는 줄고 찻삯이 오릅니다. 얼마 앞서 ‘으뜸버스(프리미엄버스)’가 나옵니다. 저는 오늘 처음으로 이 으뜸버스를 탑니다. 서울서 순천으로 이야기꽃을 펴려 가는데 기차나 다른 시외버스가 잘 안 맞아 으뜸버스를 탈밖에 없습니다. 우등버스보다 1만 원을 더 치르는 으뜸버스인데, 한번 타 보자고 생각합니다. 으뜸버스는 우등버스보다 자리가 한결 넉넉합니다. 발을 매우 느긋하게 뻗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인터넷은 쓸 수 없군요. 인터넷을 못 쓴다면 새마을 기차를 탈 때가 한결 낫구나 싶습니다. 이러면서 한 가지를 생각했어요. 고흥 같은 시골에서 서울을 오가는 시외버스에는 손님이 매우 적어요. 몇 사람 안 탄 채 달리기 일쑤입니다. 고흥 같은 시골에서 서울을 오가는 길에는 으레 할머니 할아버지가 타기 마련인데, 값은 우등 그대로 하면서 자리를 널찍하게 두는 ‘시골으뜸버스’로 바꾸어 본다면 좋겠구나 싶어요. 시골 할매하고 할배가 한결 느긋하게 쉬면서 서울마실을 하실 수 있도록 말이지요. 2017.12.22.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역삼우체국



  시외버스를 내립니다. 고속버스역에서 가까운 누리책방을 헤아립니다. 처음 간 곳에는 뜻밖에 차를 시키는 곳이 없습니다. 무릎셈틀을 꺼내어 쓸 수도 없습니다. 속으로 ‘이럴 수가!’ 하고 외면서 걸음을 돌려 역삼우체국에 갑니다. ‘3층이네!’ 하고 마음으로 외칩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가방을 뒤지는데 큰아이 통장을 안 챙겼네요. 아차! 다른 가방에 넣고서 잊었습니다. 히유. 큰아이 통장을 갈아야 하는데 말이지요. 오늘 드디어 스토리닷 출판사에서 큰아이 몫으로 그림삯을 넣어 주었다고 했는데, 통장에 그 숫자를 못 찍네요. 터덜터덜 돌아나와서 전철역으로 갑니다. 9호선을 타고 노량진역에서 내립니다. 찻집에 들어 다리를 쉬고 등허리를 쉽니다. 얇은 웃옷 두 벌을 입었으나 땀이 후줄근하게 흐릅니다. 2017.12.2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주서 김치를 얻다



  전주마실을 하는 길에 서학동사진관에 들렀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두 분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낮밥을 함께 먹다가 차를 마시며 다시 이야기를 하다가 고흥으로 돌아올 즈음 “올 김장철에 김장 하셨어요?” 하는 물음을 들었어요. “올 김치철에 온 식구가 몸살에 걸려 꼼짝없이 드러눕느라 올해에는 김치를 못 담갔어요.” 하고 얘기했더니 “그러면 이 김치 가져가셔야겠네. 가져가서 드셔요.” 하는 얘기를 들었어요. 참말로 올해 김치철에 무김치도 배추김치도 신나게 담그려 했으나 열흘 가까이 밥을 거의 한 술도 못 뜨면서 골골 앓느라 김치를 못 담갔는데, 뜻밖에 전주에서 김치를 한 통 얻습니다. 고흥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세 식구는 전주에서 들고 온 김치를 맛보더니 김치가 맛있다면서 두 접시를 먹습니다. 김치를 맛나게 담그는 손길이란, 이 맛난 김치를 베푸는 손길이란, 그리고 이 맛난 김치를 반가이 먹는 손길이란,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2017.12.14.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노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