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미는 괜찮다 - 그동안 몰랐던 가슴 찡한 거짓말
이경희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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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할매가 바라는 삶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2] 이경희, 《에미는 괜찮다》

 


- 책이름 : 에미는 괜찮다
- 글 : 이경희·최시남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 (2012.5.8.)
- 책값 : 12000원

 


  나이든 어머니하고 전화로 주고받은 이야기를 갈무리했다는 《에미는 괜찮다》(삶이보이는창,2012)를 읽습니다. 큰아이하고 나란히 앉아 큰아이한테는 여섯 칸 깍두기공책에 한글을 쓰도록 시키고, 나는 옆에서 책을 읽습니다. 식구들 밥을 차려 먹인 다음 기운이 쪼옥 빠져 살짝 방바닥에 모로 드러누워서 책을 읽습니다. 두 아이를 마당에서 물놀이를 하게끔 큰 고무통에 물을 받아 들어가라고 하고는, 그늘진 데에 앉아 책을 읽습니다. 아이가 그림책을 보거나 사진기를 갖고 노는 동안 곁에서 조용히 책을 읽습니다.


.. 아침나절 니 아배두 자구, 딴엔 노는 손이라 거들어 주려구 여기저기 걸레질 좀 힜드니, 니 올케 맘에 안 드는지 다시 청소허더라. 설거지두 못허게 허구 빨래 하나 개지 뭇허게 허니 심심히서 살 수가 있어야지. 병들어 말 뭇허는 니 아배만 쳐다보구 가만히 놀구먹으라니, 눈치 뵈서 살 수 있겄냐. 애당초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그냥 니 아배허구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둘이 산다니께 니 오래비 지랄허구 부득불 데려다 놓더니, 사람을 아주 시절을 만드는구나 … 손톱이 닳게 엎드려 일허느라구 하늘이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지,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두 모르구 살었다. 내가 씨감자로 살아야 니들이 잘산다는 생각밖엔 읎었다. 그것이 잘못 산 것은 아니겄지만, 오늘 이 좋은 디 와서 보니께 사람 한평생 사는 것이 뭐 그리 대단헌 일두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  (26, 70∼71쪽)


  살림을 도맡고 집일을 도맡으며 돈벌이까지 하는 몸으로 책을 읽을 겨를은 아주 적습니다. 옆지기랑 두 아이하고 살아가며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내가 책을 읽고 책을 쓰며 책을 말하는 삶을 누리려 했다면, 혼인부터 안 할 노릇이요 아이들은 안 낳을 일이였구나 싶어요. 그러나, 혼인을 하면서 책을 새롭게 마주하고 새삼스럽게 씁니다. 아이들을 낳아 돌보면서 책을 새롭게 바라볼 뿐 아니라 새삼스럽게 엮습니다.


  조각조각 나누기는 했으되, 이틀에 걸쳐 다섯 시간 즈음 가까스로 틈을 내어 원고지 1600장에 이르는 글을 살피기도 합니다. 곧 새로 내놓을 내 책 원고 1600장인데, 내가 쓴 글이라 더 수월히 살핀다 할 테지만, 집일을 하고 아이들하고 복닥이는 틈바구니에서도 ‘스스로 해야겠다’ 생각하거나 ‘스스로 하고 싶다’ 여기는 일은 틀림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홀가분하게 책을 읽지는 못해요. 더 많은 책을 읽지는 못해요. 더 골고루 책을 살피거나 읽지는 못해요.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아요. 살피거나 다룰 수 있는 책은 퍽 적다 할 만해요. 다만, 혼자 살며 혼자 책을 읽던 때에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느끼며 혼자 말합니다. 여럿이 살며 여럿이 얼크러지며 책을 읽는 오늘은 내 생각을 옆지기랑 아이하고 버무립니다. 그림책을 보고 만화책을 보면서, 사진책을 보고 시집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어디에서 어디로 흐르는가를 찬찬히 짚습니다. 내 꿈과 내 사랑이 어떻게 샘솟아 어떻게 피어나는가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 농촌 인심이라는 게 산이구 들이구 널려 있어 음식 냄새 풍기구는 혼자 먹지 뭇허는 법이란다 … 니 아배 살아 있을 적이는 밭에서 일허다가두 그 양반(우체부) 오면 막걸리 한잔 허면서 시상 사는 얘기허구 돌아갔는디, 그 양반이라구 나이를 안 먹었겄냐. 어느 날부턴가 오지 않길래 물었더니 워디가 아프다구 허더니 결국 갔구나 … 그 양반 우리 집 편지 아니면 이 동네 출입헐 일도 읎었을 것이다 ..  (35, 49쪽)


  《에미는 괜찮다》라는 이야기책은 소설을 쓰는 딸아이 이경희 님이 글을 엮습니다. 이녁 어머님과 주고받은 전화 이야기를 책으로 갈무리했다는데, 목소리를 담아서 글로 옮겼는지, 그때그때 빈책에 옮겨적고는 갈무리했는지, 아니면 들은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며 갈무리했는지 궁금해요. 이 대목은 안 밝히거든요. 어쩌면 여러 날 주고받은 전화 이야기를 한 가지 ‘이름(주제)’을 붙여 새롭게 엮었을는지 모르지요.


  아무튼 나는 시골마을 할머니 목소리를 책으로 읽습니다. 우리 집 네 식구 살아가는 전라남도 고흥군 시골마을 할머니들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책을 읽습니다. 시골마을 할머니는 충청도이든 전라도이든 경상도이든 강원도이든 경기도이든 서로 매한가지로구나 하고 느끼며 책을 읽습니다.


  참말 그래요. 할머니(에미)들은 한결같이 말해요. “에미는 괜찮다” 하고. 그런데,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인 나도 이렇게 말해요. “응, 아버지는 괜찮아.”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괜찮다고 말해요. 졸려도 괜찮다고 말해요. 배고파도 괜찮다고 말해요. 후끈후끈 덥거나 오들오들 추워도 괜찮다고 말해요.


.. 즌화 끊자마자 그 길로 니 동생네로 달려갔다. 까짓 품앗이구 뭐구 눈에 뵈는 게 읎더라. 모 안 심는다구 박힌 논이 워디로 도망갈 것두 아니구, 베 아니면 보리 심어 먹으면 그만이지 싶은 것이 아무 생각두 안 나더라. 손주새끼 살 냄새 맡을 생각을 허니께 가슴이 벌렁벌렁히서 그냥 있을 수가 읎어. 부랴부랴 옷 주서 입구 회관 앞으로 가 뽀스를 지달리는디 망할놈의 뽀스가 와야지. 뽀스 오기 지달리다가는 우리 손주 오줌 가리겄다 싶어서 냅다 택시 잡아탔다 … 내가 아무리 귀가 먹었어두, 내 새끼들 음성을 뭇 알아듣겄냐. 따르릉 소리만 듣구두 누군지 다 안다. 밭에서 일허다가두 즌화 소리 들리면 누가 즌화허는지 알 수 있단다 ..  (58, 77쪽)


  말 한 마디에 사랑을 담고 싶어요. 아이들과 마주하든 옆지기하고 마주하든 언제나 사랑 담은 말을 하고 싶어요.


  몸짓 하나에 사랑을 싣고 싶어요. 아이들을 쓰다듬든 옆지기하고 어깨동무하든 늘 사랑 싣는 몸짓으로 살고 싶어요.


  아무래도 나 스스로 오늘 하루 사랑스레 말하지 못한 나머지 이렇게 꿈꾸는구나 싶기도 해요. 아이들 앞에서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몸짓을 보여주지 못한 탓에 이렇게 바라는구나 싶기도 해요.


  아끼고 사랑한다면, 좋아하고 보살핀다면, 함께 살아가며 서로 꿈을 꾼다면, 내 하루와 아이들 하루는 어떻게 열릴까요. 나는 어떤 하루로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을 때에 즐거울까요. 아이들은 어떤 햇살을 맞으며 아침을 열고 어떤 달빛을 받으며 저녁을 닫을 때에 기쁠까요.


  어버이로서 생각하기도 하고,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기도 하며, 나 또한 내 어버이한테는 아이인 만큼 나부터 아이 눈길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잠든 아이들 이불을 여미며 생각합니다. 개구지게 노는 아이들 옷을 벗겨 씻기면서 빨래를 새로 하며 생각합니다. 이 자그마한 몸뚱이에도 내 커다란 몸뚱이하고 똑같은 넋이 깃들어요. 이 조그마한 몸짓에도 내 커다란 몸짓하고 똑같은 얼이 흘러나와요.


.. 세 사위 모두 책상머리에 앉아 펜대만 굴리는 인사들인디, 멋모르구 밭고랑을 뛰어다녔으니 지금쯤은 아마 허리깨나 아플 것이다 … 도시에서만 살아 먹어 보기만 힜지, 언제 고구마를 캐 봤겄냐. 아마 일두 아니라구 생각힜겄지. 소풍 나온 거보다 더 재밌게 생각힜을 것이다. 지 식구들이 캔 고구마는 몽땅 가져가라구 힜으니 신이 날 만두 허지 … 일 안 허구 놀이 나오니 좋긴 좋더구나. 언제 그렇게 꽃이 피었는지 밭고랑에 엎드려 있느라구 봄이 가는 줄두 물렀다 ..  (73, 92, 151쪽)


  아침에 식구들 모두 이웃마을로 천천히 걸어갔다가 천천히 돌아왔습니다. 이웃마을 어느 빈터 돌울타리에 부추풀이 자라는 모습을 보았어요. 옆지기와 아이들도 이 모습을 보았나 궁금한데, 아이들이 앞서 빨리 걷느라 미처 붙잡지 못하고 사진만 찍고 지나갔어요. ‘풀’이니까 흙에 뿌리를 내릴 노릇이요, 시골은 어디에나 흙인데, 이 부추풀은 돌울타리에 얹은 기왓장에서 자라더군요. 똑똑히 말하자면, 돌울타리에 얹은 기왓장에 이끼가 꼈고, 이끼가 오래되면서 흙처럼 되었으며, 이 자리에 부추풀이 씨앗을 드리우며 씩씩하게 자랐어요. 하얀 몽우리가 쌀알만 한 꽃잎을 한창 터뜨리더군요.


  논둑에 우람하게 자란 쑥풀을 감싸던 어느 덩굴은 샛노라면서 무척 고운 냄새를 짙게 풍겨요. 마을 할머님한테 무슨 풀인지 아시느냐고 여쭈었더니 “지심이여, 지심.” 하고 말씀합니다. ‘김’이란 소리요, ‘잡풀’이란 얘기예요.


  논둑길이나 밭둑길을 걸어가면 마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뜯어서 내놓은 ‘지심’을 많이 봅니다. 이 지심들 가운데에는 바랭이풀도 많고 이런저런 풀도 많은데, 질경이도 미나리도 지칭개도 모시도 있어요. 나물로 먹을 생각이 아니면 돗나물도 지심꾸러미에 들어가는 풀이 돼요. 자운영도 광대나물도 온통 지심으로만 여기셔요.


.. 읍내만 히두 우리 동네허구 공기가 달라서 쪼끔만 서 있어도 가슴이 답답허구 머리가 무거워 … 봄이면 꽃 피구 겨울이면 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아니겄냐 … 이 방송 틀어두 먹을 거, 저 방송 틀어두 먹을 거만 나오니, 노인네들조차 배가 북통만 히서 다니지. 그리들 먹어 놓구는 또 살을 뺀다구 굶거나 약을 먹으니 뭔 조홧속인지 모르겄다 ..  (125, 140, 193∼194쪽)


  큰아이가 오줌그릇에 눈 오줌을 비웁니다. 나도 오줌을 눕니다. 낮에는 파랗게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밤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뭇별을 올려다봅니다. 날마다 입으로 마음으로 ‘좋다’ 하고 읊습니다. 하늘이 좋아 좋다고 읊습니다. 구름도 별도 달도 해도 좋아서 좋다고 읊어요. 그러다 문득, 옆지기랑 아이들한테 다들 참 좋네, 하는 말을 얼마나 즐겁게 읊었는가 하고 곱씹습니다.


  애써 밥을 차려서 밥 먹으라 불러도 밥상 앞에 앉을 생각을 안 한다고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골을 부리는 내 모습입니다. 밥상 앞에서 깨작거리는 젓가락질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는 내 모습입니다. 참 딱한 노릇인데, 이맛살을 찌푸리거나 한숨을 쉬는 내가 그야말로 딱합니다. 즐겁게 맞이하는 밥상이 되도록 하고, 즐겁게 누리는 밥 한 그릇이 되도록 하면 되거든요. 밥을 차리는 일은 무슨 ‘공양’도 ‘인덕’도 아니에요. 그저 ‘밥 한 그릇 차리기’예요. 빨래도 다른 집일도 그래요. ‘해 주는’ 일이 아니라 ‘즐기는’ 일이고 ‘누리는’ 일이에요. 내 목숨을 살찌우는 일이고, 내 사랑을 북돋우는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 땅 모든 ‘에미’들이 한 마디로 말하겠지요. “에미는 괜찮다” 하고.


.. 우리 오매두 워쩌면 나처럼 시집살이가 고되서 굴뚝 뒤에 숨어서 울기두 힜을 것이다. 혼자 실컷 울구 나서는 다시 방긋거리는 새끼들을 쳐다보며 살어야지 생각힜을 것이다 … 아래채는 새로 지은 건물이라 위채만은 뭇허다. 위채는 나무와 흙으로 지은 집이라 낡긴 힜지만 콘크리트 같지 않구 구수한 냄새가 난단다 … 나는 아파트라닌 디 영 마땅찮더라. 토끼장 같이 지어 놓구는 왜 또 그리 비싸다니 ..  (175, 211, 240쪽)


  그나저나, 참말 에미들 누구나 괜찮은지는 알쏭달쏭해요. 굴뚝 뒤나 처마 밑에서 그렇게 눈물짓던 에미들 누구나 오늘 하루 시골집에서 홀로 밭일을 하고 집일을 하면서 혼자 밥상을 차려서 먹는 삶이 얼마나 괜찮은지 아리송해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왜 하나같이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아파트에 스스로 갇혀 살아야 하나요. 아이들한테 자연을 아끼도록 이끌고 아이들이 자연을 사랑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하면서, 왜 정작 도시에 숲을 일구지 않을 뿐 아니라, 도시를 떠나 숲 어여쁜 시골에서 아이들하고 살아갈 생각은 안 하나요.


  흙으로 지은 집에서는 흙내음이 나요. 시멘트로 지은 집에서는 시멘트내음이 나요. 나무 기둥을 세운 집이니 나무내음이 나겠지요. 쇠붙이와 플라스틱을 쓴 아파트에는 아주 마땅히 쇠붙이랑 플라스틱이 풍기는 내음이 가득해요.


  들판에서 일하는 시골 할매와 할배는 흙을 맡고 햇살을 맡으며 바람이랑 나무랑 냇물을 맡아요. 자동차를 몰고 전철을 타며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도시 젊은이는 자동차와 전철과 컴퓨터 내음을 맡겠지요.


  좋게 누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즐겁게 누리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즐겁게 누리는 사랑은 어떤 그림으로 나타날까요. 《에미는 괜찮다》를 읽는 내내 내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피어오릅니다. 시골 할머니는 다 괜찮다고 말씀하지만, 당신이 낳은 아이들이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즐거우며 가장 아름다울 보금자리에서 다 함께 얼크러지며 웃음꽃을 피울 수 있는 삶을 가장 바라며 기다린다고 느껴요. 돈 없어도 최시금 할머니는 충청도 시골집에서 잘 살아가시잖아요. 왜냐하면, 돈이 없다 하더라도 집이 있고 옷이 있으며 밥이 있어요. 사랑이 있고 꿈이 있으며 믿음이 있어요. 학력이나 종교나 재산은 없으시겠지요. 그렇지만, 흙을 누리고 햇살을 누리며 숲을 누려요. 참말, 시골 할매 최시금 님은 이녁 아이들이 부디 ‘저희 나고 자란’ 멧골집으로 돌아와서 오순도순 예쁘게 살아갈 나날을 기다리시는구나 싶어요. (4345.8.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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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처럼 생각하라 - 지구와 공존하는 방법
아르네 네스.존 시드 외 지음, 이한중 옮김, 데일런 퓨 삽화 / 소동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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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살고 싶은 생각인가
 [환경책 읽기 39] 아르네 네스와 네 사람, 《산처럼 생각하라》

 


- 책이름 : 산처럼 생각하라
- 글 : 아르네 네스·존 시드·조애나 메이시·팻 플레밍·데일런 퓨
- 옮긴이 : 이한중
- 펴낸곳 : 소동 (2012.1.26.)
- 책값 : 13000원

 


  내가 나를 구름이라 여기면 나는 구름이 되어 구름처럼 하늘을 누비면서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하늘이라 여기면 나는 하늘이 되어 하늘처럼 파란 빛깔로 눈부시게 빛나면서 생각을 빛내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람이라 여기면 나는 사람다운 몸과 마음으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들꽃 한 송이로 여길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들풀 한 포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나를 들나무 한 그루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생태를 보존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비폭력 행위라는 것을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모든 생명을 끌어안도록 요구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자비에 따라 보살피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  (30, 32∼33쪽)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웃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돈이나 이름이나 힘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즐겁게 어깨동무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고, 기쁘게 두레를 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어떤 모습이 되든 나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생각인가를 찬찬히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때에, 나는 내가 바라는 모습처럼 살아갑니다.


  꿈을 그리는 사람은 꿈을 이룹니다. 꿈은 천천히 이루기도 하고 더디 이루기도 합니다. 꿈은 싱그럽게 이루기도 하며 힘겨이 이루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온갖 가시밭길을 거치며 꿈을 이룹니다. 누군가는 상긋 웃으며 홀가분하게 꿈을 이룹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꿈을 생각하지 않아 꿈을 이루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꿈하고 동떨어진 길을 걸어가면서 꿈을 일그러뜨립니다.


  사랑을 하고 싶다면 오늘부터 사랑을 하면 되지만, 정작 사랑을 하고 싶다 말하면서 마음속으로 고운 꿈이 되도록 그리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사랑은 바로 내 마음속에 있으니 가만히 사랑을 그리면서 예쁘게 사랑을 부르면 이룰 수 있어요. 나한테 없는 사랑을 꾀하거나 나하고는 어긋난 사랑을 밥그릇 챙기듯 거머쥐려 하기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해요.


  삶은 언제나 좋은 빛이자 그늘입니다. 삶은 언제나 좋은 빛그림이요 그늘그림입니다. 빛이 밝아 따사로운 하루를 누립니다. 그늘이 지며 땀을 훔치며 느긋하게 쉽니다. 빛과 그늘은 동떨어지지 않아요. 빛과 그늘은 한몸뚱이입니다. 빛이 드리우면서 그늘이 지고, 그늘이 지면서 빛이 드리웁니다. 눈을 뜨며 흙땅에 발을 디디고, 눈을 감으며 하늘나라에 생각을 띄웁니다.


.. 자기실현을 협소한 자아의 만족과 같은 뜻으로 본다는 것은 스스로를 심각하게 과소평가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사람들에게 더 큰 나라는 관념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 우리에겐 이 땅의 어느 것 하나 신성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빛나는 솔잎 하나, 모래톱 하나, 어두운 숲의 안개 하나, 숲속의 빈터 하나, 붕붕거리는 벌레 하나도 우리의 기억과 체험 속에 신성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 어떻게 해서 흙과 더 떨어져 살게 되었는가요? 이제 우리는 붐비는 거리를 서둘러 헤치고 지나다닙니다. 모두가 우리한테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  (34, 46, 110쪽)


  스스로 지리산처럼 생각하면 지리산처럼 됩니다. 스스로 백두산처럼 생각하면 백두산처럼 됩니다. 스스로 자동차처럼 생각하면 자동차처럼 됩니다. 스스로 핵발전소처럼 생각하면 핵발전소처럼 됩니다. 좋아하든 미워하든, 반갑게 여기든 달갑잖게 여기든, 스스로 생각하는 결에 따라 내 모습이 이루어집니다.


  활짝 웃는 예쁜 이웃을 바란다면 나 스스로 활짝 웃는 예쁜 삶을 생각합니다. 빙그레 웃는 고운 동무를 바란다면 나 스스로 빙그레 웃는 고운 삶을 생각합니다. 예쁜 삶을 생각하며 예쁜 마음이 되고, 예쁜 말이 태어나며, 예쁜 꿈이 이루어집니다. 고운 삶을 생각하며 고운 마음이 되고, 고운 말이 태어나며, 고운 꿈이 이루어집니다.


  제아무리 지친 몸이라 하더라도 ‘더 달려야겠어’ 하고 생각하면, 지친 몸이 새로 기운을 내며 더 달립니다. 제아무리 졸린 몸이라 하더라도 ‘이제 깨어야겠어’ 하고 생각하면, 졸린 몸이 새로 기운을 얻으며 씩씩하게 일어납니다. 마음은 몸을 이끕니다. 마음은 몸을 깨웁니다. 마음은 몸을 살찌웁니다. 마음은 몸을 움직입니다.


.. 백인의 도시에는 조용한 것이라곤 없습니다. 봄이면 잎사귀 펴지는 소리를, 벌레들 날개 스치는 소리를 들을 곳이 없습니다 … 짐승 없는 사람은 뭐가 될가요? 짐승이 다 사라지고 나면 사람은 영혼이 너무 외로워 죽어버릴 겁니다. 짐승에게 일어난 일이 곧 사람에게도 일어날 테니까요 … 나무들 사이를 다닐 때는 주고받는 관계를 의식하도록 하십시오. 나뭇잎에다 이산화탄소 가득한 숨을 내어 쉬면서, 나뭇잎이 당신에게 맑은 산소를 내어 쉬는 것을 느껴 봅시다 ..  (50, 52, 94쪽)


  아르네 네스·존 시드·조애나 메이시·팻 플레밍·데일런 퓨, 이렇게 네 사람이 슬기를 모아 엮은 책 《산처럼 생각하라》(소동,2012)를 읽습니다. 이들 네 사람은 누구보다 이녁 스스로 ‘산처럼 되’고 ‘산처럼 살’고 싶기에 ‘산처럼 생각합’니다. 스스로 산처럼 생각하며 산처럼 살아가고 산처럼 되는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기에, 이들 네 사람은 우리들한테 좋은 기쁨과 맑은 즐거움을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나는 이들 네 사람처럼 ‘산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들 네 사람하고 한뜻이 되어 ‘바다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감자꽃처럼 생각할’ 수 있을 테고, 때로는 ‘마늘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석류나무처럼 생각할’ 수 있을 테며, 때로는 ‘대나무처럼 생각할’ 수 있어요.


  냇물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볏포기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무지개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풀벌레 노랫소리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마다 가장 바라고 가장 좋아하며 가장 예쁘다 여기는 대로 생각할 수 있어요.


.. 우리가 행동하는 것은 생명이 우리의 유일한 과제이기 때문인데, 덜 집착하는 담담한 태도에서 비롯되는 행동이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흔히 활동가들은 명상할 시간을 별로 내지 못한다. 우리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담담한 공간이나 여지는 명상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 자연을 파괴하려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을 지키려고 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와 같은 변화를 겪어 보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그들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라고, 경찰이나 정치인이나 개발업자나 소비자 같은 제한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더 큰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라고 호소한다 ..  (73, 166쪽)


  사람들 누구나 좋은 길을 걸어가며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가장 예쁜 삶을 생각하며 예쁜 꿈을 그릴 수 있기를 빕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동무를 사귀고, 예쁜 생각으로 예쁜 마을을 일굴 수 있기를 빕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아기도 할머니도, 젊은이도 늙은이도, 시골사람도 도시사람도 서로서로 가장 좋은 마음과 삶과 사랑으로 하루를 빛낸다면 참으로 즐거우리라 느껴요. 교사도 학생도, 군인도 정치꾼도, 회사원도 공무원도, 노동자도 기업 총수도, 모두모두 가장 예쁜 생각과 꿈과 이야기로 하루를 누린다면 더없이 기쁘리라 느껴요. (4345.8.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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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 아나스타시아 5
블라지미르 메그레 지음, 한병석 옮김 / 한글샘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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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어떤 사랑을 일구는 사람인가
 [환경책 읽기 37] 블라지미르 메그레, 《아나스타시아 (5) 우리는 누구?》

 


- 책이름 : 아나스타시아 (5) 우리는 누구?
- 글 : 블라지미르 메그레
- 옮긴이 : 한병석
- 펴낸곳 : 한글샘 (2010.4.20.)
- 책값 : 12000원

 


 (1) 흙에 깃든 목숨


  사람이 돌보지 않는 흙땅에서는 사람이 심지 않은 풀이 뿌리를 내려 자랍니다. 사람이 돌아보지 않는 흙땅에서는 사람이 뿌리지 않은 나무씨가 뿌리를 내려 자랍니다.

  풀은 마구 자라지 않습니다. 풀은 아주 조그마한 땅뙈기에 뿌리를 내립니다. 풀포기 하나는 혼자만 자라지 않습니다. 같은 자리에 나란히 뿌리를 내리기도 해서, 여러 풀이 뿌리가 엉긴 채 자라기도 합니다. 뿌리가 엉긴 여러 풀이 쑥쑥 자라서 흙땅을 뒤덮곤 해요.


  한 가지 풀만 자라는 흙땅은 없습니다.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들여다보면 온갖 들풀이 저마다 가장 빛나는 새싹을 틔우고 새 줄기를 올립니다. 온갖 들풀은 저마다 가장 튼튼한 줄기를 올리며, 저마다 가장 고운 꽃을 피웁니다.


  사람은 이 풀을 바라보며 망초라고도 하고, 저 풀을 바라보며 조릿대라고도 하며, 그 풀을 바라보며 괭이밥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 풀과 저 풀과 그 풀은 모두 저마다 누리는 삶에 따라 태어나서 자라고 시들다가 씨앗을 남기고는 흙으로 돌아가서 고요히 잠듭니다. 이듬해 봄에 잠에서 깨어나 다시 태어나고, 이듬해 겨울에 다시 잠들며, 다음해 봄에 거듭 잠에서 깨어나기를 되풀이합니다.


.. 땅에 자라는 모든 것은 물화한 하느님의 생각이며, 하느님이 원래 짓기를, 사람은 음식을 얻는 문제로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조물주의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와 함께 짓기만 하면 된다 … 우리 아들도 무슨 열매 하나 풀 하나를 살짝 먹어 볼 수 있어. 해롭고 쓰다면 그리고 그 애한테 안 맞으면 그냥 뱉어 버릴 거야. 조금 먹어서 위장에 탈이 생기면 토할 거야. 대신 그걸 기억해서 앞으로는 먹지 않겠지. 결국, 온 세상을 누군가의 얘기가 아니라 맛으로 알게 될 거야. 우리 아들이 온 삼라만상을 맛보라지 … 아이들을 가르치기에 앞서 스스로 잘 사는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되면, 학교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서로서로를 보충하며 아이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  (9, 18, 169쪽)


  흙땅 수풀 곁에서 아기가 태어나든, 늙은 어버이가 죽든,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흙땅 수풀 곁에서 사람들이 아파트를 짓든, 시멘트를 냇물에 퍼붓든,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흙땅 수풀 곁에서 사람들이 비행기를 날리든 자가용을 굴리든,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기름값이 오르건 말건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대학입시 굴레가 더 깊어지든, 사람들이 영어 자격증 시험이나 은행계좌 숫자 늘리는 데에 마음을 쓰든, 수풀은 한결같습니다.


  흙땅 풀을 낫으로 벱니다. 흙땅 풀을 손으로 뽑습니다. 한 시간쯤 땀을 흘리면 갖은 풀로 뒤덮이던 작은 수풀은 맨흙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맨흙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키 높이 자란 수풀만 베이거나 뽑힐 뿐, 이 밑에서 새로 싹을 틔우는 또다른 다른 풀이 천천히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인데, 사람들은 스스로 먹을 푸성귀를 생각하며 흙땅을 일구고는 씨앗을 심거나 뿌립니다. 어느 씨앗은 골을 내고 고랑을 만든 다음 구멍을 작게 내어 심습니다. 어느 씨앗은 고랑에 길게 줄을 낸 다음 씨앗을 솔솔 뿌립니다.


  꽃집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푸성귀 씨앗’은 ‘푸성귀 씨앗 만드는 공장’에서 거두어들여 봉지에 담아서 팔까요. 깨알보다 작고, 모래알보다 작은 푸성귀 씨앗을 ‘푸성귀 씨앗 만드는 공장’ 일꾼은 어떻게 갈무리하고 어떻게 건사했을까요.


  배추와 무와 상추만 사람들이 먹을 푸성귀이지는 않을 테지요. 이 풀만 먹고 저 풀은 안 먹어도 되지는 않을 테지요. 토끼풀은 토끼가 잘 먹기에 붙은 이름일까요. 괭이밥은 고양이가 잘 먹는대서 붙은 이름일까요. 사람은 토끼풀잎을 따서 먹으면 어떠할까요. 사람들이 괭이밥잎을 따서 냠냠하면 어떤 맛을 느낄까요.


.. 수백만의 사람 손이 사랑으로 땅을 만진 것이지. 기계가 아닌 바로 사람의 손으로 자기 토지의 흙을 다정하게 만져 주었지. 땅은 느꼈어. 지구는 모든 사람 손길을 하나하나 다 느꼈어 … 우리가 같이 있을 땐 좋은 시간이야. 우리가 함께 있을 땐 분·시간·날이 아주 좋아. 그러면 주위의 모든 것이 기뻐해 … 아빠는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아무하고도 얘기도 하지 않고, 재미있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해. 그런데 지금은 아빠가 항상 곁에 있지. 아빠는 아주 좋은 사람이 됐어. 이제 난 폭발을 할 수 없어 … “왜 아빠는 차갑기만 하고, 아무 에너지도 주지 않는 컴퓨터 주변에서 걱정스레 서성일까? 나무가 꽃을 피우고 새가 지저귀고 온갖 풀과 나뭇가지가 뭔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온몸을 다정하게 감싸주는 동산으로 나가지 않을까?” ..  (27, 70∼71, 81∼82쪽)


  뒤꼍 빈땅 한쪽 귀퉁이를 갈아엎어 당근을 조금 심으면서, 곁에 자라는 까마중풀은 그대로 둡니다. 까마중 하얀 꽃이 지면서 푸른 알맹이가 까만 열매로 익을 테니까, 까맣게 잘 익기를 기다려 아이들하고 먹을 생각을 합니다. 나는 까마중 씨앗을 뿌린 적이 없고, 까마중이 이곳에 나리라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까마중은 뒤꼍 빈땅에서 마음껏 자랍니다. 내가 들여다보든 안 들여다보든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우면서 작고 맑은 꽃잎을 내놓습니다. 예쁜 열매를 맺고 씩씩하게 자랍니다.


  어쩌면, 내 마음이 까마중풀을 이곳으로 불렀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내 생각이 까마중풀더러 이곳에도 함께 자라 주기를 빌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느끼지 못할 수 있으나, 먼먼 옛날부터 내 오늘 삶을 찬찬히 그렸는지 모릅니다. 망초를 비롯한 다른 풀은 썩썩 뽑아서 한쪽에 쌓고, 까마중풀은 그대로 두며, 노랗게 꽃을 피운 자그마한 괭이밥은 밭둑에 살짝 옮겨심자고 마음속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몰라요.


.. 행복한 여인이 선한 손으로 손수 짠 의복이 컨베이어 기계에서 제작된 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값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제품들을 기꺼이 산다고, 아나스타시아가 설명을 곁들였다 … 화폭 대신에 1헥타르의 땅에 그림과 똑같이 혹은 그보다 더 빼어나게 아름다운 풍경을 지은 사람을 당신은 왜 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지? … “당신이 사람들 앞에서 진실하고 진리를 품는다면,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있을 거야.” ..  (104∼105, 106, 131쪽)


  하루 내내 내린 빗물이 들판 모든 잎사귀에 대롱대롱 붙습니다. 논자락에 갓 심은 벼포기에도 빗물이 달리고, 논둑 뭇풀 잎사귀에도 빗물이 달립니다. 돌로 쌓은 울타리 담쟁이 잎사귀에도 빗물이 달리며, 유월 끝무렵에 한창 꽃내음 날리는 밤꽃송이에도 빗물이 달립니다.


  빗속을 가르는 제비 날개에도 빗물이 달릴까요. 제비나 까마귀나 직박구리나 노랑할미새나 종달새가 빗속에서도 먹이를 찾아 날아다닐 적에, 두 눈망울에 빗물이 톡 하고 떨어지기도 할까요. 하늘을 날며 비를 맞는 들새와 멧새는 어떤 마음일까요. 사람과 달리 긴옷도 비옷도 이불도 없이 살아가는 새들은, 벌레들은, 짐승들은, 풀과 나무는, 비가 듣는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누릴까요.


  흙에 깃든 목숨은 흙이 보금자리입니다. 개미는 흙땅을 뚫고 들어가서 집을 짓습니다. 크고작은 뭇벌레 또한 흙땅을 파고 들어가서 집을 짓습니다. 사람 눈에는 자그맣겠지만, 사람 눈으로는 작게 보이는 벌레한테는 몸뚱이보다 훨씬 큰 들풀 잎사귀가 보금자리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높은 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가서는 나뭇잎 하나를 골라 뒤쪽에 착 달라붙으며 밤을 나는 벌레가 있습니다. 내 종아리가 나무줄기라도 되는 양 여기며 볼볼 기어오르는 나비 애벌레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한테 흙은 어떤 품이 될까요.


  고속도로를 낸다며, 아파트를 짓는다며, 새 철길을 낸다며, 새 굴을 판다며, 냇물 흐름을 곧게 펴며 시멘트를 붓는다 하면서, 크고작은 수풀을 하루아침에 갈아엎는 커다란 기계를 모는 일꾼은 수풀 사이에 깃든 뭇목숨을 얼마나 느낄 수 있는가요. 이라크로 쳐들어간 미국 폭격기 모는 사람이 높디높은 하늘에서 단추 하나 눌러 폭탄을 떨구면, 낮디낮은 땅에서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꽥 소리 없이 사라지듯 죽습니다. 삽차나 밀차는 흙땅에 뿌리내리던 온갖 풀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온갖 풀에 깃들던 온갖 벌레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 “걱정 마, 블라지미르, 여기가 좋아. 공기는 신선하고 별들이 보여. 봐, 와, 오늘 별이 참 밝다. 다정하고 따뜻한 바람이 부는데, 춥지 않아.” (269쪽)


  낫과 호미를 쥔 손으로 딱정벌레가 타고 오릅니다. 딱정벌레는 갑작스레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나는 조그마한 밭을 얻고, 딱정벌레는 보금자리를 잃습니다. 나는 푸성귀 심을 흙땅을 얻고, 내가 푸성귀로 삼지 않는 풀은 목숨을 잃습니다. 그런데, 이 풀들은 내가 베거나 뽑는다 하더라도 제 넋을 일찌감치 숱한 씨앗에 남겼어요. 어느 한곳에서 모조리 베이거나 뽑히더라도, 사람 손길을 타지 않는 흙땅에는 어느덧 이 풀들이 새로 돋아요. 아니, 사람 손길을 타는 흙땅이라 하더라도 꿋꿋하고 씩씩하게 고개를 내밀어요.


  지구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벗이에요. 지구별에서 숨을 나누어 쉬는 동무예요. 지구별에서 서로를 보듬는 이웃이에요.


  딱정벌레는 나를 탓할 수 있으나, 애써 나를 안 탓할 수 있습니다. 그예 없어진 보금자리를 그리지 않고, 새 보금자리를 찾을 테니까요. 누구를 탓하느라 애먼 하루를 흘리지는 않을 딱정벌레이리라 느껴요. 개미들도 그래요. 내가 밭을 일군다며 개미집을 몽땅 허물더라도, 이 개미들은 금세 다른 빈 흙땅을 찾아들어 새 집을 짓습니다. 애써 지은 집을 모조리 날린다지만, 새삼스럽게 씩씩한 기운을 차려 개미 스스로한테 좋은 보금자리를 일굽니다.

 


 (2) 바람에 실린 목숨


  새벽 두 시를 지나 세 시로 접어들면, 다시 네 시 무렵이 되면, 시골마을 들판은 무척 고요합니다. 모든 소리가 잠을 자는 듯합니다. 저녁부터 노래하던 개구리도 조용합니다. 밤에 노래하는 새도 조용합니다.


  나는 모든 목숨들이 고요히 잠든 새벽 두어 시에 일어나기를 좋아합니다. 딱히 좋아한다고 할 수 없을는지 모르나, 이무렵에 아이들 쉬를 누이거나 기저귀를 갈아야 하기도 하고, 잠자리에서 내내 내 몸을 고이 쉬게 해 주던 소리들이 한꺼번에 뚝 끊기는 이무렵 눈이 번쩍 뜨이곤 합니다.


.. 비석은 죽음의 기념비이다. 장례는 검은 힘의 고안이며, 그 목적은 잠시나마 사람의 영혼을 가두어 두기 위함이다. 우리 아버지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어떤 고난도 심지어는 슬픔도 생산하지 않았다 … 조화로운 전체의 하나이며 영원하다 … 정보의 홍수, 아니 홍수처럼 보이는 정보 속에서 우리가 혼동하는 건 아닐까? 사실은 우리가 고립되었고 진정한 정보의 원천에서 단절되었다 … “당신은 그 선진국이라는 곳에서 왜 점점 더 새로운 종류의 질병이 생겨나는지 생각 안 해 봤어?” … “사람이 돌연변이 열매를 먹기 시작하면, 그 자신도 점차 변종이 되고 말아.” … “사람은 사람 고유의 능력을 잃고, 조종하기 쉬운 바이오 로봇이 되고 있고, 자유와 독립을 상실하고 있어.” ..  (10, 21, 107, 108쪽)


  내가 옆지기와 아이들하고 시골로 삶터를 옮긴 햇수를 세면 얼마 안 됩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생각을 못 합니다. 내 삶터는 이곳 시골인 터라, 도시살이 도시물결은 도무지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때때로 생각나기도 하는데, 왜 생각나느냐 하면, 날마다 좋은 소리 바람결에 실린 채 나한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겨울날 매서운 바람이든, 봄날 산들거리는 바람이든, 여름날 상큼한 바람이든, 가을날 시원스러운 바람이든, 갖가지 냄새와 이야기와 소리를 실어 나한테 찾아옵니다. 나는 바람이 들려주는 노래를 듣습니다. 바람이 속삭이는 꿈을 듣습니다. 이때에 가끔 문득 생각납니다. 내가 도시에서 첫째 아이를 낳고 살던 지난날, 밤이면 밤마다, 또 낮에도 으레 전철 소리와 자동차 소리에 귀가 쟁쟁거렸습니다. 나는 전철 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자동차 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가게마다 트는 시끄러운 대중노래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길거리를 지나가며 쩡쩡 울리듯 손전화로 얘기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내 생각은 내 몸을 살가이 건사하면서 내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는 삶터를 바랐습니다. 내 몸이 힘들어 할 적마다, 내 마음이 지칠 때마다, 내 생각은 바람 한 점 나한테 찾아들어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랐습니다.


.. 왜 우리의 의식 속에는, 인명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무기 생산이 우리 인류에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는 사고가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일까요 …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오물들을 우리가 모두 함께 청소해야 합니다 … “지금 당신이 사는 곳에, 아파트에, 흙이 담긴 조그마한 화분에 씨앗을 심으면, 거기서 가문의 나무가 솟아날 것이고, 미래의 가원에서 높게 솟아오를 거야.” … 사람은 몇 층에 살던 흙에서 자라는 모든 것을 매일 음식으로 취합니다. 흙에서 자라는 것들을 공급하려면 도로·자동차·창고·가게가 필요하고, 이것들 모두가 땅을 차지합니다 ..  (93, 100, 130, 151쪽)


  모든 동무 개구리가 잠든 새벽 네 시 이십사 분에 홀로 우는 개구리가 꼭 있습니다. 왜 이 개구리는 너른 들판에서 홀로 잠들지 못하며 울까요. 왜 이 개구리는 다른 동무 개구리는 색색 잠들었는데 홀로 안 잠들면서 노래하고 싶을까요.


  이제 삼십 분이 더 지나 새벽 네 시 오십 분이 되면, 우리 집 처마 밑에 깃들어 함께 사는 제비 식구들이 하루를 엽니다. 어미 제비 두 마리와 새끼 제비 네 마리는 모두들 싱그럽고 밝은 날갯짓을 뽐내며 하루를 엽니다. 마당을 두루 날아다니며 어디로 마실을 갈는지 서로 얘기하는 듯합니다. 삼십 분 또는 한 시간쯤 서로 짹짹빽빽 얘기하다가 어느 때부터 조용합니다. 모두들 어딘가 날아갑니다. 이때부터 휑뎅그렁 조용한 집이 됩니다.


  아이들은 일찍 일어납니다. 먼동이 천천히 틀 무렵 몸을 옴쭉달싹합니다. 어제 하루 고단하게 놀았으면 조금 더 자지만, 어제 하루 개구지게 놀았어도 일찍 일어납니다.


  시골마을 이웃 어른들은 봄철부터 새벽 네 시에 하루를 엽니다. 아니, 겨울철에도 새벽 네 시에 하루를 엽니다. 한창 바쁜 일철이든, 한갓진 겨울철이든, 새벽밥을 짓고 새벽녘을 맞이하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그리고, 일찍 하루를 닫아요.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에 하루를 닫아요. 지친 몸을 쉬고, 흙 묻은 몸을 씻으며, 서로서로 도란도란 이야기꽃으로 하루를 접습니다.


.. 국가는 대규모 혹은 중소기업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정은 국가의 근본을 이루는 한 부분입니다 … 도시의 아파트에 사는 근로자 가족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 가족은 급여를 주는 고용자, 혹은 난방·상수·전기를 공급하는 공공서비스 기관에 의지해야 하며, 식품 및 서비스의 공급 또한 그 가격에 의존해야 합니다. 가족은 이 모든 것들의 노예이며, 이런 가정에서 어린아이는 노예 근성을 갖고 태어납니다 … 과학기술 세상이 아무리 노력해도 첨단기기를 갖춘 현대식 공장에서는 우리 할머니들이 만드는 토마토·오이·양배추 절임의 맛을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지 못합니다 ..  (146, 161쪽)


  시골마을마다 다 다를 텐데, 우리 네 식구 살아가는 이곳 시골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온 지도, 집집마다 물꼭지를 달아서 쓴 지도, 제법 너르다 싶은(그래 봤자 두찻길이지만) 아스팔트길이 놓인 지도, 그리 오랜 옛일이 아닙니다. 어느 집에나 텔레비전은 없었고, 어느 집에나 등불을 밝혔습니다. 어느 집이나 나무를 땠고, 어느 집이나 솥을 걸었어요.


  우리 식구 깃든 좋은 보금자리에서 예전에 살던 식구들은 1980년대에 접어들고 나서야 집에서 전기를 썼다고 합니다. 아마 이웃집도 어슷비슷하겠지요. 마을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마을 샘터에서 물을 길었겠지요. 아이들은 물을 동이에 담고 나르느라 부산했겠지요. 아이들은 샘가 또는 빨래터에서 씻고 논다며 부산을 떨었겠지요.


  1980년대에 인천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던 일을 되새깁니다. 그무렵 나는 도시에서 전기를 걱정없이 누렸습니다. 전기가 픽 나간 다음 몇 시간이나 며칠이고 안 들어오는 때도 잦았지만, 전기를 참 쉽게 쓸 수 있었습니다. 전기 안 들어오는 집을 생각해 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무렵에도 한국땅 다른 시골에는 틀림없이 전기 없이 살아가던 집이 꽤 있었으리라 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갈 때에 전기가 꼭 있어야 하지는 않거든요. 한 사람이 살아갈 때에는, 늘 누릴 만한 흙이랑 물이랑 햇볕이랑 바람이랑 풀이랑 나무가 있으면 되거든요.


  다만, 어린 나한테 ‘한 사람이 살아갈 때에 갖출 여러 가지’를 옳게 들려줄 어른은 없었습니다. 내 둘레 어른들 누구나 도시살이에 젖어들었기에, 아주 마땅히 전기를 쓸 뿐이요, 아주 마땅히 돈을 벌 뿐이고, 아주 마땅히 도시에서 집 사들여 아이들 낳고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삶을 짓는 사랑, 삶을 빚는 꿈, 삶을 이루는 생각을 들려주는 어른을 마주하지 못했어요. 삶을 빛내는 넋, 삶을 나누는 얼, 삶을 어깨동무하는 가슴을 알려주는 어른을 찾아보지 못했어요.


.. “하느님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동등해. 서로서로를 숭배하면 안 돼. 난 그냥 여자야. 난 사람이야!” … “숭배가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아. 숭배는 오직 사람한테만 있는 생각의 힘을 앗아갈 뿐이야.” ..  (277, 278쪽)


  날마다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루 날씨가 어떻게 될까 하는 이야기를 바람한테서 듣고, 멧자락 새들과 짐승들 하루는 어떠한가 하는 이야기를 바람한테서 듣습니다. 바람은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흔들면서 노래와 소리와 꿈이 무엇인가 하고 살짝 들려줍니다. 바람은 풀잎과 머리카락과 빨래를 살며시 힌들면서 빛깔과 내음과 사랑이 무엇인가 하고 살짝 알려줍니다.


  해님은 지구별에 따숩게 볕을 나누어 주고, 바람은 볕이 골고루 퍼지도록 실어 나릅니다. 흙은 볕을 고이 담습니다. 풀과 나무는 흙이 담은 볕을 받아먹으면서 푸른 잎사귀를 틔웁니다. 푸른 잎사귀는 꽃을 피우고, 꽃은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씨앗을 품으며, 씨앗은 내 목숨을 보살핍니다.

 


 (3) 아나스타시아 다섯째 권, 《우리는 누구?》


  블라지미르 메그레 님이 옮겨적은 아나스타시아 이야기 다섯째 권인 《우리는 누구?》(한글샘,2010)를 읽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목숨이요 어떤 겨레인가 하고 찬찬히 생각합니다.


  나는 꿈을 아끼는 사람인지 생각합니다. 나는 사랑을 보살피는 사람인지 생각합니다. 나는 이야기를 빚는 사람인지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를 둘러싼 동무와 이웃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 이 숲이, 지금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걷고 있는 이 숲이 생산하는 산소로 숨을 쉰다 … 누가 우리로 하여금 나를 닮은 남에게 피해를 주며 자신의 복을 얻도록 강요하는 것이오? … “모스크바처럼 큰 도시에서 강물을 어떻게 깨끗하게 만들었을까?” “더럽히지 않고, 유해 폐기물을 방치하지 않고, 강변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면 돼.” … “넓은 들, 그리고 동일한 종류의 작물들 속에서 자라는 풀은 사람한테 이로운 모든 것을 땅과 하늘에서 취하지 못해.” … “선생님의 아드님 혹은 따님이 어디에 살길 원하시는지요? 돌무덤 같은 아파트입니까? 아니면 훌륭한 동산에 에워싸인 집입니까? 딸, 아들, 자손들에게 무얼 먹이고 싶습니까? 통조림 식품입니까? 아니면, 신선하고 청정한 식품입니까? ..  (14, 42, 48, 58, 164쪽)


  우리 두 아이뿐 아니라 나와 옆지기 두 어버이가 살아갈 나날을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맑은 넋을 곱게 빛내는 한삶을 누릴 때에 아름답습니다. 한삶을 마음껏 누리면서 하늘나라 품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때에 어여쁩니다. 몇 살에 무엇을 배우고, 몇 살에 어느 학교를 마치며, 몇 살에 어떤 돈벌이를 거머쥐어, 몇 살에 시집장가를 간다 하는 굴레에 두 아이가 매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두 아이 모두 가장 싱그러이 빛나는 넋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두 아이와 나와 옆지기 모두 싱그러이 빛나는 넋으로 하루를 누릴 때에 가장 좋은 삶이 된다고 느껴요.


  책은 종이책도 책이지만, 사람책도 책이요, 꽃책도 책입니다. 흙을 만질 때에는 흙책을 읽어요. 땀을 흘릴 때에는 땀책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책을 읽고, 길을 걸어갈 때에는 다리책과 길책을 읽어요. 버스를 얻어 타고 마실을 다니면 버스책을 읽습니다. 어쩌다가 도시로 나들이를 간다면 도시책을 읽겠지요.


  온누리 모든 목숨이 책입니다. 온누리 모든 님이 책입니다. 그러니까, 온누리 모든 목숨이 이웃이면서 넋이고 사랑입니다. 온누리 모든 님이 동무이면서 꿈이고 이야기예요.


.. 낡은 쓰레기는 자식들에게 필요없다 … “석유·가스·그리고 무기 수출보다 더 큰 이익을 가져다준 게 도대체 뭔데?” “많아, 블라지미르. 예를 들면, 공기·물·좋은 냄새·창조의 에너지를 체험하기·좋은 것 바라보기 … 온실에서 재배한 토마토나 오이보다 밭에서 햇빛을 직접 받고 자란 열매가 훨씬 맛있다는 거 당신은 알지. 해로운 화학물질을 투입하지 않은 흙에서 자란 야채나 과일은 더 맛있고 몸에 좋아. 그 주위에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자란다면 더 몸에 이롭지. 열매를 재배하는 사람의 감정, 그리고 태도도 중요해. 열매에 들어 있는 향은 사람에게 매우 이로워 ..  (44, 56, 57쪽)


  오늘날은 ‘햇볕 없이 물만 먹이며 푸성귀를 기른다’는 ‘수경 재배’도 있습니다. 햇볕은 없어도 비닐집에서 비료와 풀약을 먹이며 푸성귀를 기르기도 합니다. 아직 이월이나 삼월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딸기가 나오잖아요. 고작 사월이나 오월에도 수박이 나와요.


  말이 안 되는 일인데, 말이 안 되는 줄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아요. 느끼지 못하니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니 다시금 느끼지 못해요. 곧, 몸으로 겪지 않을 뿐더러 마음으로 살피지 않기 때문에 삶을 모릅니다. 몸으로 겪으면서 마음으로 살필 때에 사랑을 받아들이지만, 몸도 마음도 꽁꽁 닫아건 채 껍데기와 이름값과 돈에 시달리니까, 오늘날 어디에서도 사랑을 찾지 못해요. 참사랑을 만나지 못해요.


  쌀밥 한 그릇도 사랑이어야 해요. 콩나물국 한 그릇이랑 두부 한 접시도 사랑이어야 해요. 시금치나물이든 오이 하나이든 사랑일 때에 내 몸이 즐겁게 받아들여요.


  내 몸은 화학첨가물을 좋아하지 않아요. 화학첨가물 꾸러미가 내 몸속으로 들어오면, 내 몸속은 아주 괴롭다고 소리쳐요. 똥을 눌 때마다 똥구멍이 아파요. 똥을 누고 난 다음 냄새가 고약해요.


  자연을 먹을 때에는 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여요. 자연을 먹고 똥을 누면 내 똥내음은 자연내음이에요. 아주 마땅하겠지요? 비료를 먹은 능금나무는 굵직하고 바알간 알맹이에 비료를 품어요. 항생제를 먹고 풀약을 먹은 배나무는 굵직하고 누우런 알맹이에 항생제와 풀약을 품어요.


  햇살을 먹은 포도나무는 햇살을 포도알에 담아요. 빗물을 먹은 매화나무는 매실 한 알에 빗물을 담아요. 바람을 마신 배추 한 포기는 바람 한 닢을 잎사귀에 담아요.


.. “사람은 자기의 꿈과 생각으로 자기의 미래를 스스로 짓는 거야.” ..  (290쪽)


  나는 어떤 사랑을 일구는 사람일까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어떤 사랑을 짓는 사람일까요. 나는 어떤 사랑을 먹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어떤 넋이나 손길이 깃든 밥을 먹으면서 사랑을 말하거나 꿈을 들려주려 하나요.


.. 아나스타시아는 좋은 것만 믿고 짓기 때문에 항상 미소를 짓는다 ..  (292쪽)


  몸이 아프기 때문에 이맛살을 찡그리지 않아요. 내 몸속에 나쁜 밥이 들어왔으니 이맛살을 찡그려요. 내 마음속에 짓궂은 지식조각이랑 정보덩이가 스며들었으니 이맛살을 찡그려요.


  몸이 아프건 안 아프건, 내 몸속에 사랑스러운 목숨이 깃들 때에는 환하게 웃어요. 몸이 튼튼하건 몸이 여리건, 내 마음속에 사랑스러운 꿈과 이야기가 감돌 때에는 해맑게 웃어요. 삶이니까요. 사람이니까요. 사랑이니까요. (4345.6.25.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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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비밀 봄나무 과학교실 19
찰스 시버트 지음, 몰리 베이커 그림, 이수영 옮김 / 봄나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고래를 사랑해 보셔요
 [환경책 읽기 38] 찰스 시버트·몰리 베이커, 《고래의 비밀》

 


- 책이름 : 고래의 비밀
- 글 : 찰스 시버트
- 그림 : 몰리 베이커
- 옮긴이 : 이수영
- 펴낸곳 : 봄나무 (2011.11.30.)
- 책값 : 1만 원

 


  작은 배로 고기를 낚는 바닷마을이 온 나라에 두루 있습니다. 예부터 고기낚이 하던 이들은 작은 마을 작은 뱃사람이었습니다.


  작은 연장으로 흙을 일구던 들마을이 온 나라에 골고루 있습니다. 예부터 흙일 하던 이들은 작은 마을 작은 흙사람이었습니다.


.. 눈을 감고 여러분이 먼 옛날에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 고래는 인류가 지구에 나타나기 전부터 끝도 없는 세월에 걸쳐 진화해 왔어요. 그러니 고래의 노래는 사람의 노래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죠 … 여태껏 변함없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게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고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또 고래가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거의 알 수 없어요 ..  (12, 52∼53, 105쪽)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로 갑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구비구비 멧길과 들길을 거쳐 바닷가로 갑니다. 시골집에서 또다른 깊은 시골로 마실을 갑니다. 우리 식구는 시골사람이면서 이웃 시골로 마실을 갑니다. 버스삯만 치르면 이웃 시골 마실을 언제라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군내버스를 탄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읍내나 면내로 마실을 나온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요, 우리 식구는 집에서 이웃 시골로 마실을 다니는 길입니다.


  고흥 읍내부터 군내버스를 타고 도화면 지죽리로 가는 길은 오십 분쯤 걸립니다. 이 길을 자가용으로 달린다면 이십오 분쯤 걸리리라 생각합니다. 고흥군 지죽리 바닷마을에서 읍내까지 버스를 타고 나오는 데에도 오십 분이고, 고흥읍에서 순천시까지 한 시간이라 한다면, 예전에는 시외로 나오는 길이란 까마득했겠지요. 시골사람이 바깥으로 나들이 다니는 일이란 생각조차 못했겠지요.


.. 고래 고기는 가톨릭을 믿는 유럽에서 금요일마다, 그리고 붉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되는 사순절 동안 식탁에 오르는 음식이 되었어요. 고래 혓바닥은 주로 부자들이 먹는 귀한 음식으로 여겨졌고, 서민들은 베이컨처럼 소금에 절인 고래 고기를 먹었어요. 고래 지방을 끓여서 얻은 기름으로는 컴컴한 저택과 마을의 광장, 농부들의 오두막에 불을 밝혔어요. 고래기름은 여러 도구와 초기 기계류, 무기류의 윤활유나 비누를 만드는 데도 쓰였어요. 고래뼈, 고래수염, 그리고 고래가죽은 울타리 기둥이나 채찍, 낚싯대, 구두를 만드는 데 쓰였고요 ..  (33∼34쪽)

 


  버스에서 바라보는 이웃 시골 모습은 무척 살갑습니다. 온통 푸른 빛깔이고, 그예 누런 빛깔이며, 한가득 파란 빛깔입니다. 푸나무와 흙과 하늘이 세 갈래 빛깔로 곱에 얼크러집니다. 온누리로 드리우는 햇살은 해맑은 기운을 베풉니다.


  들바람이 붑니다. 흙바람이 붑니다. 한참 달리던 버스는 바닷바람 부는 곳에서 멈춥니다. 구멍가게 하나 따로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닷마을에 섭니다. 군내버스는 퍽 높다라니 놓인 다리를 건넜습니다. 이 다리는 언제쯤 놓였을까 생각해 봅니다. 열 해는 지났을까, 스무 해는 지났을까. 그리 멀지 않던 예전에는 뭍 아닌 섬이었을 텐데, 그무렵 이곳 바닷마을 사람들은 무얼 누리고 무얼 생각하며 살았을까요. 온 나라에 흔한 밥집도 닭집도 술집도 없는 고즈넉한 바닷마을에서 물고기 낚으며 살림을 꾸리고, 논밭 작게 일구며 밥을 먹던 사람들은 무얼 얻고 무얼 나누며 살았을까요.


  자동차 없고 경운기도 없던 때에는 바닷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마실을 다녔을까요. 다리가 놓이지 않던 때에는 섬과 뭍은 어떤 사이였을까요. 바닷마을 사람들이 낚은 물고기는 바닷마을 사람보다 뭍마을 사람들이 훨씬 많이 사다 먹을 텐데, 뭍마을 사람들은 바닷마을 사람들은 어떤 이웃으로 헤아릴까요.


.. 고래잡이배들은 바다 위를 떠다니는 작은 공장이 되었어요. 증기기관을 달아 포경선은 훨씬 빨라졌고, 폭약을 쓴 작살도 새롭게 설치되었어요 … 종류와 나이에 상관없이, 다 큰 고래부터 새끼 고래까지 모든 고래가 포획되었어요. 그즈음엔 고래를 썰어서 부위에 따라 나누는 일이 갑판에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뭍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고래가 죽임을 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죠 … 사람이 벌이는 산업에는 소음이 끝이 없어요. 소음 공해가 심각한 오늘날엔 과학자들이 물속에 청음기를 넣어도 고래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대요. 사람이 만들어 낸 소음만 가득 차 있다는군요 ..  (39, 43, 98쪽)

 

 


  바다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바다는 너른 어버이 품이라고 느낍니다. 흙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흙은 너른 어버이 품이라고 느낍니다. 바닷마을 사람들이 바다에 쓰레기를 버릴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흙마을 사람들이 흙에 쓰레기를 버릴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조용하고 고즈넉한 바닷마을 한쪽에 건설회사 일꾼과 지자체 일꾼은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화력발전소를 짓고 싶어 합니다. 7조 원을 들여 화력발전소를 짓고는, 3500억 원에 이르는 돈을 지역발전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발전소를 지으면 열폐수를 바다에 얼마나 버려 갯벌과 바다를 얼마나 죽일는지는 안 밝힙니다. 발전소 굴뚝에서 내뿜는 매연으로 바람이 얼마나 더럽혀질는지는 안 밝힙니다. 발전소와 엄청난 송전탑에서 전자파가 얼마나 나와 논밭과 들판이 어떻게 어지러워질는지는 안 밝힙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사람들 많이 살아가는 아파트가 있는 크고작은 도시 한복판이나 언저리에 발전소를 짓는 일이 없습니다. 가장 곱고 가장 깨끗하며 가장 푸른 빛깔 뽐내는 시골마을에 발전소를 짓습니다. 화력발전소이든 원자력발전소이든, 어떤 발전소라 하더라도 시골마을에 짓습니다. 물이 맑고 바람이 맑으며 풀이 맑은 시골에 발전소를 지으려 합니다.


  발전소를 짓는 까닭은 전기가 모자라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나, 시골마을 사람들이 전기를 많이 쓰기에 전기가 모자라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뿐더러, 시골사람은 전기 없어도 살림을 잘 꾸립니다. 전기가 모자란 까닭은 도시사람 때문입니다. 도시에 수없이 선 아파트는 전기 없으면 끔찍한 죽음터가 됩니다. 도시 한복판에 전기가 없으면 금세 무시무시한 죽음터가 됩니다. 오직 도시사람 때문에 전기를 더 만들어야 한다지만, 막상 도시사람 스스로 도시에 발전소를 짓지 않습니다. 이러면서 도시사람은 외칩니다. ‘시골사람이 시골에 발전소 같은 기간시설을 안 들이겠다고 말하는 일은 지역이기주의(님비)’라고.


  시골사람으로 살아가고, 이웃 시골마을로 마실을 다니며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쓸 전기를 도시에 발전소 지어 얻지 않는 일이야말로 지역이기주의일 뿐 아니라 시골따돌림이요 폭력이구나 싶습니다.


.. 고래 수가 얼마나 많으며 종마다 얼마나 많이 사냥할 수 있는지 알아내 고래 사냥을 도우려고요. 하지만 이때도 고래에 관해서 더 자세히 알고자, 순수한 마음으로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방법만큼은 고래 사냥 못지않게 무지막지했다고 해요 … “고래가 사람을 용서하고 있는 것 같아요.” 프로호프 박사는 말해요. “용서란 말이 꼭 맞는 말은 아닐지 몰라도, 어쨌든 몹시 강렬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고래들이 사람이랑 적극적으로 대화하고자 하는 거죠. 말이 안 된다고요? 잘 모르는 생각이에요. 고래가 사람과 사귀고 싶어 할 만큼 영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고래와 시간을 보낸 적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  (49, 63쪽)

 

 


  도시사람은 시골사람이 거둔 곡식과 푸성귀와 열매를 먹습니다. 도시사람은 시골사람이 낚은 물고기를 먹습니다. 도시사람은 시골사람이 돌보는 나무를 얻어 종이를 빚고 집을 짓거나 가구를 만듭니다. 도시사람은 시골마을 땅뙈기에 구멍을 파서 물을 뽑아올려 돈을 치르고는 사다 마십니다. 도시사람은 시골 논밭이나 멧자락을 가로지르는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놓으며, 큰도시와 큰도시 사이를 재빠르게 오갑니다. 도시사람은 시골마을 몇 군데를 통째로 없애 공항을 지으며 나라밖 마실을 다닙니다. 도시사람은 시골자락에서 캐낸 광물로 물건을 만들고 문명을 빚습니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도시에서 어린 나날과 푸른 나날을 보냈습니다. 내가 나고 자란 도시에서 ‘도시란 어떤 곳’이라고 가르치거나 알려주거나 보여준 어른은 없었다고 느낍니다. 내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닌 도시에서 ‘도시와 시골은 어떤 사이’라고 옳게 들려주거나 밝힌 어른은 없었다고 느낍니다.


  내 어버이가 나를 도시에서 낳았으니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랄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숱한 어버이가 도시에서 일거리를 얻어 도시에서 돈벌이를 하기에, 오늘날 숱한 아이들은 도시에서 나고 자랄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아이들은 무엇을 볼까요. 무엇을 들을까요. 무엇을 배울까요. 무엇을 생각할까요. 무엇을 느낄까요. 무엇을 사랑할까요.


  도시 아이들이 믿으며 아끼는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도시 아이들이 좋아하며 즐기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 대왕고래는 지구의 모든 동물 가운데 가장 큰 소리를 내지만 사람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해요 … 고래는 소리의 변화를 감지해서 바다의 깊이를 알아내요. 뭍이 가까워지면 바닷물의 깊이가 얕아지는데, 이때 소리는 높고 빨라져요. 뭍에서 멀어질수록 물은 깊어지고 소리 또한 낮고 느려지고요 … 고래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소리뿐 아니라, 거기 영향을 미치는 다른 세상의 소리도 무엇이든 기억해요 ..  (54, 86쪽)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합니다. 경제를 하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합니다. 문화와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도시에서 합니다. 과학을 하는 사람이든, 스포츠를 하는 사람이든, 모조리 도시에서 합니다.


  시골에도 공무원은 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 공무원이 왜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골 읍사무소와 면사무소는 꼭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골에 있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칠까 궁금합니다. 시골 아이들이 더 큰 도시로 나아가 학교를 다니다가는 더 큰 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까닭이 궁금합니다.


  왜 시골 어른들은 시골 아이들한테 바닷일과 흙일을 보여주거나 가르치거나 물려주지 않을까요. 왜 시골사람은 시골사람으로 태어나 자라는 삶을 학교에서나 교과서에서나 인터넷에서나 방송에서나 책에서나 듣거나 보거나 배울 수 없을까요.


  시골마을에 화력발전소나 원자력발전소나 핵폐기물처리장이나 쓰레기처리장이나 이것저것 들어서야 한다면, 시골마을은 아주 더러워지거나 무너지거나 어지러워집니다. 이렇게 시골마을이 더러워지면, 시골에서 먹을거리 마실거리 입을거리 쓸거리를 얻는 도시는 ‘더러워진 쌀과 나물과 고기와 열매와 물’을 얻어야 합니다. 도시에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도시까지 길게 뻗으면, 막상 바보가 될 사람은 도시사람입니다. 시골 논밭을 가로질러 고속도로를 낸다든지, 시골 멧자락에 구멍을 뚫거나 멧등성이를 밀어 고속철도를 낼 때에는, 시골이 더러워지고 무너지기 때문에 ‘도시사람이 마실 맑은 바람’에다가 맑은 푸성귀와 맑은 물이 몽땅 더러워지고 무너집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끝없이 달리는 자동차가 내는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자라는 쌀이 맛있을 수 없습니다. 새벽이든 밤이든 멈추지 않는 기차와 비행기가 내는 소리를 듣고 자라는 배와 포도와 딸기와 복숭아가 맛있을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배기가스와 매연이 시골을 더럽히고, 시골에 세운 발전소와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매연이 시골을 다시금 더럽힙니다.


  게다가, ‘시골을 지키’는 군대가 아니요,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아니라, ‘도시를 지키’고 ‘도시 정치꾼과 경제꾼을 지키’는 군대가 시골을 그지없이 더럽힙니다.


.. 오늘날 고래들은 어디를 가도 사람이 내는 소음에 시달려요. 어마어마하게 큰 유조선의 엔진 소리, 여가용 보트의 모터 소음, 군 음파탐지기의 새된 메아리 들이 고래의 세상을 시끄럽게 채우고 있어요. 넓은 세상이지만 마치 안방에 모여 앉은 것처럼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던 고래들을 우리가 방해하는 거예요. 얼마 안 가서 우리 때문에 고래들이 모두 미칠지도 몰라요 … 카나리아제도에서 고래를 구하려 했던 이들이 밝혀낸 건 그날 가까운 바다에서 군사 훈련이 있었다는 거예요. 수많은 함선이 첨단 수중 음파탐지기를 사용했다는 것도요. 1885년 이래, 카나리아제도를 이루는 섬의 해안에서 부리고래가 발견된 일이 네 번 더 있었어요. 모두 죽어 가는 모습이었고, 한결같이 군사 훈련과 관계가 있었어요 ..  (91, 94쪽)

 


  찰스 시버트 님 글과 몰리 베이커 님 그림이 어우러진 이야기책 《고래의 비밀》(봄나무,2011)을 읽습니다. 고래에 얽힌 속이야기를 몇 가지 밝히는 《고래의 비밀》을 읽습니다. 고래는 바다에서 즐겁고 아름답게 어깨동무를 하며 살았습니다만, 바로 사람 때문에 즐거움을 빼앗기고 아름다움을 잃습니다. 도시 물질문명 때문에 고래들이 죽어나고, 도시를 지킨다는 군대 때문에 고래들이 삶터를 빼앗깁니다.


  도시 때문에 제비가 살 집이 없습니다. 도시 때문에 박쥐가 살 터가 없습니다. 도시 때문에 개구리도 뱀도 사마귀도 메뚜기도 삶터를 빼앗깁니다. 도시 때문에 쑥부쟁이도 달개비도 감나무도 느릅나무도 삶자리를 잃습니다.


  고래를 살리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고래를 생각하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고래를 사랑하거나 고래와 어깨동무하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이와 달리, 고래를 죽이는 길도 아주 쉽습니다. 고래를 모른 척하는 길도 아주 쉽습니다. 고래를 괴롭히거나 고래를 윽박지리는 길 또한 아주 쉽습니다.


  도시에서 돈벌이를 하며 살림을 꾸리는 이들이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한결같이 보내면 고래는 금세 죽고 아주 고단하며 곧 사라집니다. 도시에서 학력과 자격증을 늘리며 아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세울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고래는 차츰 죽고 몹시 슬프며 머잖아 사라집니다.


  내 삶을 사랑해 보셔요. 고래를 사랑해 보셔요.


  내 삶을 곱게 보살펴 보셔요. 고래를 곱게 보살펴 보셔요. (4345.5.1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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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문명 - 한 지구 시민의 생태 평화 순례기
마사키 다카시 지음, 김경옥 옮김 / 책세상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작은 숲과 작은 사람을 사랑하며
 [환경책 읽기 35] 마사키 다카시, 《나비 문명》

 


- 책이름 : 나비 문명
- 글 : 마사키 다카시
- 옮긴이 : 김경옥
- 펴낸곳 : 책세상 (2010.10.12.)
- 책값 : 9500원

 


  봄을 맞이한 들판은 금세 푸른 물결이 됩니다. 봄바람 가볍게 살랑일 때에는 푸르게 푸르게 물결칩니다. 마늘밭도 유채밭도 여느 풀밭도 눈부시게 반짝이며 물결칩니다. 아마 예전에는 보리밭 푸른 잎사귀가 함께 물결쳤겠지요.


  문득 돌이키면 지난날에는 ‘보리고개’라 했어요. 보리고개 넘기 벅찼다고 했어요. 그무렵에는 어떠한 삶이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떻게 끼니를 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내 어릴 적 학교에서 교사들한테서 ‘보리고개’ 소리를 듣고 이것저것 배울 때에 늘 궁금했습니다. 왜 굶고 왜 힘겨우며 왜 고된 나날을 보내야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느냐고.


  나로서는 알기 어려운 이야기라 할 만한 1950∼60년대 이야기를 〈민족일보〉라는 신문 줄인판을 헌책방에서 장만하여 읽으며 되새긴 적 있습니다. 1950∼60년대 어두운 그늘 이야기가 〈민족일보〉라는 신문에 날마다 실렸는데, 이무렵 〈민족일보〉 첫머리를 채우는 기사 가운데 참 자주 나오는 이야기는 ‘오늘은 몇 사람이 길에서 굶어죽었느냐’하고 ‘오늘은 몇 아이가 어버이 잃은 채 길바닥에서 우는가’예요.


  서울이나 부산처럼 커다란 도시에서는 굶어죽는 사람이 길바닥에 몇몇씩 널브러졌다고 했어요. 갓난쟁이들이 포대기에 감기거나 바구니에 담긴 채 ‘제법 먹고살 만하게 보이는 집’ 문간에 놓이는 일이 흔하다고 했어요. 예전 신문을 찬찬히 읽다 보면, 시골에서는 들판이나 멧자락에서 풀이라도 뜯으며 목숨을 잇지만, 도시에서는 뜯을 풀조차 없으니 굶어죽는다 했어요.


.. 눈앞에 있는 이렇게 가까운 나라인데 보이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것은 외면하고 있었던 탓입니다. 그렇다면 왜 외면했던 것일까요? … 자연이 심하게 병들어 있어, 그 아픔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나무를 심었던 겁니다. 그랬는데 나무를 심는 일이 이토록 기쁘고 즐거운 일일 줄이야. 아프고 어두운 기운 같은 건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리고, 기쁨만이 산을 가득 채우게 되다니, 왜일까? … 그 나라들을 일부러 화나게 해서 반일 감정을 갖게 하고, 그 반발하는 감정으로 일본을 위협하게 해서,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군대를 가질 필요를 감정적으로 느끼게 하려는 연출입니다. 북한이 저질렀다는 일본인 납치 문제도 ‘헌법 개정 캠페인’과 연계해서 이용하고 ..  (12, 31, 118쪽)


  봄을 맞이한 들판을 바라보거나 쓰다듬으면서 생각합니다. 예전 사람들은 풀죽을 먹었다고도 하는데, 조금 억센 풀은 데쳐서 먹고, 여린 풀은 날것으로 먹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갓 돋은 잎은 여리니 그냥 먹을 만하지만, 날이 흐르고 흘러 차츰 억세지면 데치거나 삶아서 먹겠지요. 곡식가루 조금 쓸 수 있다거나 얻을 수 있으면 풀떡을 해서 먹겠지요.


  옆지기가 가루 반죽을 합니다. 풀물(녹즙)을 짜고 난 찌끼를 잔뜩 넣어 빵처럼 굽습니다. 마당가에서 뜯은 쑥으로도 빵을 굽습니다. 퍽 적은 곡식가루로 한두 끼니 넉넉히 먹을 만큼 됩니다. 아마 옛날 옛적에는 곡식가루보다 풀을 훨씬 많이 넣으며 떡을 하거나 빵처럼 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붕에 기와를 얹는 제법 살림이 있다 하는 집이라면 쌀밥을 먹었겠지만, 지붕에 풀짚을 얹는 여느 흙일꾼 집이라면 으레 풀을 많이 먹었으리라 생각해요.


  들을 다니고 멧줄기를 드나들면 여러 가지 먹을거리를 얻어요. 다만, 1950∼60년대는 한국전쟁 뒤끝이라 민둥산이 많고 숱한 나무들이 타죽거나 말라죽었을 테니, 들나물이나 멧열매 얻기는 퍽 어려웠으리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땔감에 쓸 나무를 찾아야 해요.


..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대도시 빌딩 뒤는 쓰레기 산, 공장 굴뚝에서는 뭉게뭉게 가스가 피어오르고, 수많은 자동차가 달리고 있고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별에서 서로 부를 차지하느라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니 … 세계의 많은 도시와 시민 생활은 거의 모든 것이 환경에서 뺏어 온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 산업이나 경제가 발달했다는 오늘날 자연이 받는 타격은 어마어마할 겁니다. 숲을 파괴해 마을을 만들고 사막을 낳고 … “침략하겠습니다” 하고 전쟁을 시작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들 “자위를 위해”라는 명분으로 전쟁을 시작합니다 ..  (17, 64, 99쪽)


  예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나 흙을 일구었습니다. 임금이나 신하나 사대부나 권력자나 이런저런 몇몇 사람은 흙을 안 일구며 살았을 텐데, 100으로 치면 98에 이르는 여느 사람들은 아주 마땅히 흙을 일구며 밥과 옷과 집을 얻었으리라 생각해요. 땅을 넓게 차지하는 땅임자라면 쌀밥을 배불리 먹었을는지 모릅니다. 여느 흙일꾼이라면 쌀밥 먹기는 벅차고, 으레 나물죽이나 나물밥, 아니면 풀을 뜯어다 먹는 삶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부터 내려오는 ‘밥풀(먹는 풀)’과 ‘약풀’ 이야기란 여느 흙일꾼이 여느 삶에서 늘 찾아서 먹던 풀 이야기라고 느껴요.


  못 먹거나 안 먹는 풀은 없었겠지요. 다섯 가지 넘는 풀을 골고루 섞어 먹으면 아주 드센 풀도 잘 먹을 수 있다 하는데, 이런 앎이나 슬기란 옛 흙일꾼이 스스로 풀을 뜯어먹으며 몸으로 깨달은 이야기라고 느껴요. 백 가지나 이백 가지 풀을 알던 옛사람이 아니라, 천 가지 만 가지 풀을 알던 옛사람이리라 생각해요. 나무 또한 열 가지 스무 가지 아닌 천 가지 만 가지 나무를 알았겠지요. 따로 나무도감 풀도감 꽃도감은 없지만, 스스로 ‘나무·풀·꽃 도감’이 되어 들판이랑 멧줄기를 누비는 흙사람이었으리라 봅니다.


  흙은 참말만 합니다.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흙은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흙은 제 속살을 훤히 보여줍니다. 겨울을 난 봄들과 봄메에 푸른 옷을 입히는 흙입니다. 봄들과 봄메는 사람뿐 아니라 수많은 목숨이 살아갈 수 있게끔 푸른 밥을 내놓는 흙입니다.

  쉰 살 일흔 살 백 살을 살아야 기쁜 삶은 아닙니다. 스무 살 마흔 살 예순 살을 살더라도 하루하루 아름답다고 느끼며 웃음을 누릴 때에 기쁜 삶입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목숨이 늘어났다는 삶이 정작 즐겁거나 좋게 누리는 삶인지 알쏭달쏭합니다. 밥과 옷과 집을 즐겁게 얻는지 아리송합니다. 밥과 옷과 집을 아름답게 누리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밥과 옷과 집을 서로서로 예쁘게 여미는지 모르겠습니다.


.. 물고기가 바다에 안겨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연의 품에 안겨 살아갑니다. 물고기의 생활이 바닷물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의 생활은 자연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 산에 나무를 심으면 산 어머니뿐 아니라 바다 어머니도 크게 기뻐해, 사랑을 샤워처럼 쏟아냅니다 … 쿠니의 평화란 도대체 무엇에 의해 지켜지는 것일까요? 군대일까요? 꽃이나 새일까요? 군대가 만들어낸 평화가 진짜 평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 오키나와가 전쟁터가 되기 전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상이 있고, 인생이 있고, 노래도 꽃도 과거도 미래도 있었을 겁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을까요 ..  (35, 37, 121, 124쪽)


  한삶 즐겁게 누리던 누군가는 나무로 다시 태어납니다. 한삶 곱게 누리던 누군가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도 합니다. 한삶 예쁘게 누리던 누군가는 굳이 어떤 모습을 껍데기로 쓰지 않고 아지랑이나 무지개나 물방울이나 햇살이 되어 온누리를 살랑살랑 누비기도 합니다.


  풀 한 포기가 너른 목숨입니다. 빗망울 또한 너른 목숨입니다. 산들바람이나 한들바람도 너른 목숨이요, 뭉게구름이나 소낙비도 너른 목숨이에요. 목숨이 목숨을 북돋웁니다. 목숨이 목숨을 살찌웁니다.


  지구별은 송두리째 너른 목숨입니다. 다 다른 목숨이면서 다 같은 목숨입니다. 서로 돌고 도는 목숨입니다. 내 몸에 여우 넋이 깃듭니다. 비둘기 몸에 들쥐 넋이 깃듭니다. 제비꽃 몸에 지렁이 넋이 깃듭니다. 서로 사랑하며 어우러지는 목숨입니다. 서로 아끼며 한덩어리를 이루는 지구별입니다.


  다툼이나 싸움이 벌어지면 사람만 죽지 않습니다. 전쟁무기는 사람부터 죽이지만, 사람을 비롯해 참새와 박새와 할미꽃과 진달래와 느릅나무와 뽕나무를 나란히 죽입니다. 정치다툼은 사람만 줄세우기를 시켜 들볶을 뿐 아니라, 땅과 냇물과 멧등성이마저 금을 죽죽 갈라 들볶습니다. 자격증이나 졸업증으로 내세우는 학력 또한 우리 삶을 통째로 흔들며 뒤죽박죽이 되게 합니다.


  오직 사랑이 아니라면 흔들리는 삶입니다. 오로지 사랑이 아니라면 무너지는 지구별 삶입니다. 그예 사랑이 아니라면 자꾸자꾸 미움과 시샘과 따돌림과 악다구니가 판치고 마는 지구별 살림살이입니다.


..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거부하고 있는 오바마 시에는 보상금이 내려오지 않아서 이런저런 공사가 거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곳의 자연이 파괴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 원자력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고 할 때, 그것은 아무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뭇 생명들 위로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 생태는 말뿐이고, 현대 문명의 속셈은 역시 돈을 좇고 있습니다 … 대도시의 고층빌딩도 대지가 받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숲에서 나온 물로 살아갑니다. 카펫보다 대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카펫의 번영을 위해 대지가 더럽혀지고 파괴되어서는 안 됩니다 ..  (51, 53, 87, 168쪽)


  마사키 다카시 님이 빚은 《나비 문명》(책세상,2010)을 읽습니다. 나비 한 마리가 큰물결 일으킨다는 얘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한 오늘날입니다만, 막상 스스로 나비 물결 일으키는 줄 깨닫는 사람마저 없을 듯한 오늘날이 아니랴 싶습니다.


  아름다운 사랑도 나비 물결입니다. 슬픈 전쟁무기도 나비 물결입니다. 고운 속삭임과 눈맞춤도 나비 물결입니다. 차갑거나 메마른 돈벌이도 나비 물결이에요.


  좋은 생각은 나비 물결로 퍼집니다. 궂거나 슬프거나 미운 생각 또한 나비 물결로 퍼집니다. 나 스스로 오늘 하루 따사롭게 살아갈 때에, 나 스스로 따사로운 사랑 기운을 내 둘레에 퍼뜨립니다. 나 스스로 얄궂게 오늘 하루 내동댕이칠 때에, 나 스스로 모질거나 미운 기운을 내 둘레에 퍼뜨려요.


.. 어느 날 긴 여행에서 농장으로 돌아와 아, 집으로 돌아왔구나 싶었던 게 책상 앞에 앉아 창밖에 선 삼나무에게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할 때였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밖으로 나가 한 번 더 “다녀왔습니다, 이제야 왔어요.” 하고는 나무를 부둥켜안았습니다. 그랬더니 나무도 기쁜 듯 “오오.” 하고 답해 줬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20년이나 서로 마주보고 살았는데 지금까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니, 원래 삼나무 숲이었던 곳에 집을 지었는데 똑 부러지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니 … “나도 병들어 있어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한 그루 벚나무였습니다. 깜짝 놀라 가까이 다가가 봤습니다. 굵은 가지 몇 개가 잘려 있고, 나무껍질은 바짝 말라 바삭거리고 있었습니다. 껍질이 벗겨진 뿌리 근처에는 회색약이 두껍게 칠해져 있었습니다. 나무 둥치에 손을 갖다 대니 나무의 아픔이 그대로 전해 왔습니다 ..  (14∼15, 28쪽)


  나무한테 말을 걸면 나무가 대꾸를 합니다. 쑥풀한테 말을 걸면 쑥풀이 대꾸를 합니다. 종달새한테 말을 걸면 종달새가 대꾸를 합니다. 개구리한테 말을 걸면 개구리가 대꾸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한테 말을 거나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지내는 사람들은 누구한테 말을 거나요.


  어떤 말을 거는 삶인가요. 어떤 꿈을 마음속으로 일구면서 말을 거는 삶인가요. 어떤 사랑을 이루고픈 꿈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보듬으면서 말을 거는 삶인가요.


.. 우리 몸은 온전히 우리가 먹은 것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먹은 건 무엇일까요 ..  (70쪽)


  하루하루 새 아침이 밝습니다. 날마다 새 새벽이 찾아듭니다. 나날이 새 햇살과 새 어스름과 새 달과 새 바람을 맞이합니다. 어제를 즐거이 누리면서 오늘을 즐거이 맞아들입니다. 오늘을 즐거이 누리고 나서 이듬날을 새롭게 꿈꿉니다.


  어떤 보배를 얼마나 내 손아귀에 쥐느냐는 하나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떤 꿈을 어떤 사랑으로 키우면서 어떤 삶을 어떤 하루로 누리느냐가 가장 대수롭습니다.


  살아가는 나날 언제나 배웁니다. 학교에 들어가야 배우지 않습니다.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땄기에 다 배우거나 많이 배웠다 할 수 없습니다. 배움이란 삶이거든요. 살아가는 나날이 모두 배움이거든요.


  햇볕을 먹습니다. 햇볕 담은 풀을 먹습니다. 햇볕 담은 풀에 맺힌 사랑을 먹습니다. 내가 먹고 옆지기가 먹으며 아이들이 먹습니다. 사람은 돈이나 학력이나 아파트나 은행계좌를 먹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햇볕을 먹습니다. 사람은 물을 먹고, 바람을 먹습니다. 사람은 흙을 먹지, 아스팔트나 자동차를 먹지 못합니다. 사람은 햇살이 실린 무지개를 먹지, 원자력발전소나 전기를 먹지 못해요.


  내가 먹는 밥이 내 몸을 돌고 돌아 똥오줌 되어 흙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먹은 밥 그대로 우리 지구별 모습이 달라집니다. 내가 누리는 밥삶이 지구별이 앞으로 나아갈 모습입니다. 머리에 지식으로 가두는 이야기로는 지구별이 아름답게 이어갈 수 없습니다. 몸으로 즐겁게 누리는 이야기가 되어야 비로소 지구별이 한껏 푸른 빛깔로 온누리에 맑게 빛납니다. (4345.4.15.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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