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의사 우종영의 바림
우종영 지음 / 자연과생태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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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54


《나무의사 우종영의 바림》

 우종영

 자연과생태

 2018.11.27.



도시 빌딩숲은 광합성을 방해한다.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숲,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 빌딩을 처음 만난 날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21쪽)


나무는 온몸으로 말한다. 특히 나무의사는 나무의 몸짓을 민감하게 관찰해야 한다. 잎, 가지, 줄기 모두가 나무의 상태를 표현한다. (90쪽)


나무가 태어나려면 빈틈이 있어야 한다. 숲에서 빈틈은 나무들이 벌려 놓은 공간이다. 숲의 틈은 수많은 씨앗이 경주를 준비하는 곳이다. (176쪽)


대학에서 학생을 선발하는 기준을 바꾸면 어떨까. 많이 걸은 친구들에게 그에 따른 점수를 더 주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298쪽)


인도의 옛 시 〈하리반사〉에는 “새들이 없는 집은 양념하지 않은 고기와 같다”고 했다. 나무가 커지니 제법 많은 생명을 품기 시작했다. (338쪽)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거쳐 초등학교를 지나면 바야흐로 입시지옥이라는 굴레에 갇혀야 합니다. 한국이라는 삶터가 이렇습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일입니다. 이 굴레는 바뀔 낌새가 아직 없습니다. 이 또한 너도 알고 나도 압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입시지옥이라는 굴레에 갇히기를 바랄까요? 우리 아이들이 싱그러이 뛰노는 터전이 아닌, 쳇바퀴처럼 시멘트교실에 갇혀 형광등 불빛만 쬐고 교과서만 펴고 시험문제 점수에 들뜨도록 내몰아야 할까요?


  대학입시에 들어가는 돈이 어마어마합니다. 나라에서 들이는 돈도 어마어마하고, 집집마다 들이는 돈도 무시무시합니다. 이 엄청난 돈을 사람들이 저마다 제 보금자리를 일구거나 텃밭을 마련하는 길에 쓴다면, 또 마음을 닦도록 마실을 다니거나 책을 사읽거나 이웃돕기에 쓴다면, 우리 터전은 얼마나 아름다이 거듭날까요?


  《바림》(우종영, 자연과생태, 2018)은 나무를 돌보는 길을 걷는 아재가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바림’이란 낱말이 낯설어 사전을 살핍니다. “물감으로 한쪽을 짙게 바르다가 다른 쪽은 차츰 옅게 바르기”를 나타낸다고 해요. 곰곰이 헤아리니 중·고등학교 미술 수업에서 얼핏 들은 적이 있는 듯합니다. 아마 들었을 수 있는데, 들었어도 이 이름대로 그림놀이를 할 겨를은 그때에도 그 뒤로나 드물었어요.


  학교가 나쁠 일은 없고, 사회가 못될 일은 없습니다. 다만, 학교도 사회도 좋은 알맹이로 좋은 길을 가꾸기보다는 쳇바퀴에 가두거나 굴레에 갇히도록 내몰기에 그악스러울 뿐입니다.


  ‘바림’이라는 말처럼, 좋은 알맹이가 흐르는 학교나 사회 한켠을 찬찬히 어루만지면서, 어른도 아이도 학교 바깥에서, 아니 우리 삶터 모든 곳에서 사뿐사뿐 걷고 놀고 뛰고 달리고 눕고 쉬고 자고 먹고 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름드리숲을 한쪽에 몰아놓기보다는 나라 곳곳이 크고작은 숲정이가 되기를 바라요.


  이를테면 찻길을 통째로 없앤 뒤에 아스팔트를 걷어내고서 나무를 심을 수 있어요. 생각해 봐요. 서울로 치자면 광화문부터 동대문에 이르는 찻길을 몽땅 숲정이로 돌릴 만합니다. 자동차는 땅밑으로 다니도록 바꾸고 말예요. 자동차를 달리고 싶으면 땅밑으로 가도록 하고, 사람은 풀밭 우거진 땅바닥을 맨발로 가만히 거닐면서 나무그늘을 누리도록 온나라가 숲터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돈을 쓰려면 이런 데에 이처럼 쓰기를 바라요. 그러면 우리는 누구나 나무를 돌보고 풀을 아끼며 삶을 사랑하는 숨결로 다시 태어날 만하지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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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말/사자성어] 악전고투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 온힘 바친 끝에 겨우 / 온힘 다한 끝에 가까스로

 악전고투를 했으나 → 온힘을 다했으나 / 용을 썼으나 / 악을 썼으나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 잇달아 애썼다 / 잇달아 용썼다 / 잇달아 악썼다

 죽을힘을 다하여 악전고투하였으나 → 죽을힘을 다하였으나 /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나

 척박한 땅과 악전고투하면서 → 메마른 땅과 싸우면서

 한 시간을 악전고투해도 → 한 시간을 용써도 / 한 시간을 땀빼도


악전고투(惡戰苦鬪) : 매우 어려운 조건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고생스럽게 싸움 ≒ 고전악투



  어려워도 힘을 다하여 싸우기에 “온힘 다해 싸운다”고 합니다. “있는 힘껏 싸운다”거나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고도 해요. 때로는 ‘힘쓰다·애쓰다’라고만 할 수 있고, ‘악쓰다·용쓰다’를 쓸 만합니다. ㅅㄴㄹ



파리에서는 몇 천 명이나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 악전고투하는 예술가, 학생

→ 파리에서는 몇 천 사람이나 이렇게 산다. 힘들지만 애쓰는 예술가, 학생

→ 파리에서는 몇 천 사람이나 이렇게 살아간다. 온힘 다하는 예술가, 학생

→ 파리에서는 몇 천이나 이렇게 산다. 있는 힘껏 싸우는 예술가, 학생

→ 파리에서는 몇 천이나 이렇게 지낸다. 용을 쓰고 악을 쓰는 예술가, 학생

《하얀구름 외길》(조지 오웰/권자인 옮김, 행림각, 1990) 25쪽


여자들이 남자들의 환상을 받아들여 악전고투하는 꼴은 어째 좀 이상하다

→ 여자가 남자들 꿈을 받아들여 용쓰는 꼴은 어째 좀 아리송하다

→ 여자가 남자들 바람을 받아들여 애쓰는 꼴은 어째 좀 얄궂다

《훔치다 도망치다 타다》(유미리/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0) 71쪽


혼자 악전고투하는 엄마라도 안 때릴 사람은 안 때려요

→ 혼자 애쓰는 엄마라도 안 때릴 사람은 안 때려요

→ 혼자 악쓰는 엄마라도 안 때릴 사람은 안 때려요

→ 혼자 용쓰는 엄마라도 안 때릴 사람은 안 때려요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8》(토베 케이코/주정은 옮김, 자음과모음, 2005) 182쪽


수마睡魔와 악전고투하는 모양이다

→ 잠깨비랑 힘겹게 싸우는 듯하다

→ 잠이랑 힘들게 싸우는가 보다

→ 잠을 겨우겨우 떨치는구나 싶다

→ 쏟아지는 잠을 힘겨이 쫓는다

《원전집시》(호리에 구니오/고도 다이스케 옮김, 무명인, 2017) 38쪽


툇마루에 앉아 실실 웃으며 악전고투하는 나를 구경했다

→ 툇마루에 앉아 실실 웃으며 용쓰는 나를 구경했다

→ 툇마루에 앉아 실실 웃으며 악쓰는 나를 구경했다

→ 툇마루에 앉아 실실 웃으며 애쓰는 나를 구경했다

《날 때부터 서툴렀다 2》(아베 야로/장지연 옮김, 미우, 2018) 85쪽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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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은 서럽다
김수업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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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43


《우리말은 서럽다》

 김수업

 나라말

 2009.8.3.



흥정은, 파는 쪽에서 받겠다는 값을 내놓아야 손님 쪽에서 사겠다는 값을 내놓아야 시작할 수 있는데, 파는 쪽에서든 사는 쪽에서든 흥정을 해 볼 수 있도록 내놓는 값을 ‘금’이라 한다. (37쪽)


센 힘으로 잡아당겨도 끊어지지 앟도록 굵고 튼튼하게 만든 줄은 ‘바’다. 흔히 ‘밧줄’이라고 ‘줄’과 겹쳐 쓰지만, 씨름꾼의 샅에 매는 ‘샅바’는 그냥 ‘바’로 쓰는 보기의 하나다. (56쪽)


‘삶꽃’은 이른바 ‘예술’이라는 낱말을 버리고 바꾸어 쓸 만한 토박이말로 새로 만들어 본 것이다. ‘문학’을 버리고 ‘말꽃’으로 바꾸어 쓰니까 ‘예술’이 저절로 목에서 걸렸다. (95쪽)


‘우리 아버지’ 또는 ‘우리 마누라’ 하면 나와 아버지 또는 나와 마누라가 둘이면서 떨어질 수 없이 서로 깊이 사랑하여 하나를 이루어 살아가는 ‘아버지’ 또는 ‘마누라’가 되지만, ‘내 아버지’ 또는 ‘내 마누라’ 하면 그것은 곧장 아버지 또는 마누라를 내가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며 내 손 안에 쥐고 살아가는 소유물로 만들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171쪽)


국어사전이 ‘겨레’를 ‘민족’이라 하니까 사람들이 우리말 ‘겨레’는 버리고 남의 말 ‘민족’만 쓰면서, 남녘 한국에서는 ‘한민족’이라 하고 북녘 조선에서는 ‘조선민족’이라 한다. (265∼266쪽)



  태어난 아이가 말을 익히려면 둘레에서 말을 슬기롭고 올바르게 잘 써야 합니다. 둘레에서 엉성하거나 엉망으로 말을 한다면, 아이는 엉성하거나 엉망인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제 마음이나 뜻을 펴기 마련입니다. 학교라는 곳에서 엉성한 교과서를 쓰거나 엉망인 교사가 있다면 어찌 될까요? 아무리 엉성한 교과서에 엉망인 교사가 있더라도 배우는 이 스스로 슬기롭게 배울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엉성한 교과서에 엉망인 교사를 바꾸지 않으면, 엉성한 줄 모르거나 엉망인지 모르면서 그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냥 배워서 쓰는 말이란 없습니다. 그냥 배울 수 있는 길은 없어요. 아이가 수저질을 솜씨있게 하는 데에도 꽤 긴 나날이 걸려요. 아이가 안 넘어지고 걷기까지도 퍽 오래 걸립니다. 아이가 손수 밥을 짓기까지는 얼마쯤 걸릴까요? 손수 바느질을 하고, 손수 씨앗을 심어 논밭을 가꾸기까지 또 얼마쯤 걸릴까요?


  《우리말은 서럽다》(김수업, 나라말, 2009)를 읽다 보면, 글쓴이가 이런 이름으로 책을 쓴 마음을 헤아릴 만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삶은 참으로 오래도록 힘을 쏟아서 익힐 노릇인데, 정작 모든 삶에서 바탕이 되는 말을 제대로 익히려는 흐름이 매우 얕거든요. 더욱이 학교나 마을이나 나라에서도 말을 말답게 가꾸는 길에는 마음도 힘도 돈도 품도 안 쓰기 일쑤입니다.


  문학을 하려 해도 말을 익혀야 하고, 만화를 그리든 영화를 찍든 노래를 부르든 말을 익혀야 합니다. 수학이나 과학을 하려 해도, 정치나 행정을 하려 해도, 말이 없이는 못해요. 무엇보다도 배우고 가르치는 길은 늘 말로 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한국말은 어디에 있을까요? 한국말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울 만할까요? 사전다운 사전이 제대로 나온 적 있을까요? 중국 한문 말씨, 일본 말씨, 번역 말씨, 어려운 말씨, 자랑하는 말씨를 넘어, 삶을 가꾸며 짓는 바탕이 되는 슬기롭고 사랑스러우며 즐거운 말씨로 가야겠지요. 이제부터라도.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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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귀촌을 했습니다 - 하루하루 새로운 나의 리틀 포레스트
이사 토모미 지음, 류순미 옮김 / 열매하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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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61


《여자, 귀촌을 했습니다》

 이사 토모미

 류순미 옮김

 열매하나

 2018.6.21.



가쓰이코 씨는 “오늘은 서쪽에서 바람이 부네요.”라든가, 산길을 걷다가도 “이 이끼를 손으로 만져 봐요. 참 부드럽죠.”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나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19쪽)


도노의 자연을 사랑한 남편은 이 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지금처럼 농약을 사용하는 농법이 아닌 땅과 강, 공기를 아름답게 지킬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어요. (22쪽)


사람이 적다는 건 다시 말해 개인 공간이 많다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오히려 저는 이곳에서 무척 편안한 느낌을 받았어요. 제일 가까운 역도 차로 20여 분 걸릴 만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주위에서 들리는 것은 새들의 지저귐과 강물이 흐르는 소리, 마을 사람들이 몰고 다니는 작은 트럭에서 탁 하고 문을 닫는 소리였죠. (61쪽)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수확한 걸 가져오거나 음식을 만들어 오실 정도지요. 저희의 존재 자체가 마을 어르신들께 활력을 불어넣고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실감하고서는 감사히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163쪽)



  서울에서 살며 “오늘은 바람이 맛있다”라든지 “어제는 별빛이 포근하더라” 하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마을 어느 골목에 어떤 겨울꽃이 피었다든지, 어느 집 어느 나무에 무슨 새가 찾아와서 어떤 노래를 부르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을 만나기도 어려워요.


  나라 곳곳이 서울처럼 바뀌는 흐름입니다. 커다란 고장은 더 큰 고장이 되려 하고, 시골 읍내는 마치 서울처럼 자동차가 북적이거나 가게가 잇달아 서려 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들어가서 배우는 교과서에는 서울을 바탕으로 흐르는 정치나 사회나 문화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이어도 서울바라기가 아닌 시골살림을 꿈꾸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요. 《여자, 귀촌을 했습니다》(이사 토모미/류순미 옮김, 열매하나, 2018) 같은 책이 태어납니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귀촌’이란 한자말을 씁니다만, 이 말은 그리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한테나 ‘시골로 돌아가다(귀촌)’라는 말을 쓸 뿐입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시골로 갈 적에는 ‘귀촌’이 아니지요. 그저 “시골로 갈” 뿐입니다.


  시골이 더 좋다고 여겨 시골로 갈 수 있습니다. 서울이 더 좋다고 여겨 서울로 갈 수도 있고요. 오늘날 시골살이나 시골살림을 바라는 이웃님이라면, 스스로 짓고 손수 가꾸며 제힘으로 기쁘게 웃는 하루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지 싶습니다.


  스스로 짓기에 바람맛을 느끼고 바람결을 살핍니다. 손수 가꾸기에 별빛을 읽고 별자리를 엮습니다. 제힘으로 기쁘게 웃기에 나무랑 꽃이랑 풀을 사랑합니다.


  시골에서나 서울에서나 이 대목을 헤아려야지 싶습니다. 어느 곳이든 젊은이가 어깨를 펴고 꿈을 지어야 살아납니다. 어느 고장이든 어린이가 환하게 웃고 뛰놀 수 있어야 아름답습니다. 시골이라서 다 좋거나 훌륭할 수 없습니다. 농약바람이 춤추거나 비닐집이 가득하다면 시골이 시골답기 어려워요. 시골에서 삶을 짓기로 즐거이 꿈을 품은 뭇가시내 목소리는 《여자, 귀촌을 했습니다》에 한결같습니다. 즐겁고 싶어서, 노래하고 싶어서, 아이한테 물려줄 보금자리를 오늘 넉넉히 누리고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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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생각한다 -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에두아르도 콘 지음, 차은정 옮김 / 사월의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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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52


《숲은 생각한다》

 에두아르도 콘

 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2018.5.20.



비인간적 세계의 사고가 우리의 사고를 해방시키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숲은 생각하기에 좋다. 왜냐하면 숲은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숲은 생각한다. (46쪽)


“너 아직 살아 있니?”라는 것을 당신이 배운다 해도 당신은 이 말이 주는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케추아어를 쓰는 원어민은 분명 ‘카우상기추’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느낀다. (56쪽)


기호는 배타적으로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기호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다수의 기호적 생명들에 친숙하다. (81쪽)


먹잇감이 혼을 잃으면 사냥 또한 수월해진다. 꿈속에서 동물의 혼을 죽인 남자는 그 다음 날 동물을 간단하게 포획할 수 있는데, 그것은 포획물이 이미 혼이 없는 상태로서 혼맹이 되었기 때문이다. (205쪽)



  생각하지 않는 숲은 없다고 느낍니다. 생각하지 않는 바다도, 생각하지 않는 바람도, 생각하지 않는 물도 없다고 느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어리둥절해 하거나 허튼소리를 한다고 여길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틀림없이 느낍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하고 벌레도 생각을 하고, 숲도 바다도 바람도 물도 생각한다고 느껴요. 다만, 사람은 사람대로 생각하고, 짐승하고 벌레는 짐승하고 벌레대로 생각할 뿐이에요. 숲은 숲대로 생각하니, 사람하고 사뭇 다른 결로 생각할 뿐 아니라, 사람하고는 아주 다른 길을 생각하지요.


  《숲은 생각한다》(에두아르도 콘/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2018)를 읽는데, 옮김말이 한국말이 아니라서 매우 갑갑합니다. 이 책은 한글로는 옮겼으되 한국말로는 옮기지 않았습니다. 한글로 적는다고 해서 모두 한국말은 아니에요. 서양 학문을 번역 말씨에다가 일본 말씨에다가 일본 한자말을 써서 옮겼으니, 무늬는 한글이로되, 줄거리는 좀처럼 종잡기 어렵습니다. 한참을 생각해서 ‘한국말로 새로 풀어서 헤아려야’ 합니다.


  이를테면 69쪽 “신중하게 구획된 부재와 가능성의 공간들 내부에 담긴 혼합물로부터 창발하는 세계가 아니라면, 그의 정신과 미래의 자기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같은 글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숲을 알려면 숲말로 서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숲하고 이야기를 하려고 숲말을 익히기 앞서, 사람 사이에서도 사람말로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흐름이로구나 싶습니다. 지난날에는 지식인이나 권력자가 중국 한문을 끌어들여서 말이 막히도록 했다면, 오늘날 지식인은 중국 한문에다가 일본 한자말을 덧씌우고, 여기에 영어하고 번역 말씨까지 입힙니다.


  어쩌면 우리는 말이지요,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 말이 끊어지면서, 사람하고 숲 사이에 흐르던 고요한 말까지 함께 잃었을 수 있어요. 우리 스스로 사람말을 비틀거나 뒤틀면서, 그만 숲말도 잊고 바람말도 잊으며 벌레말이나 꽃말을 모조리 잊거나 잃으면서,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등지거나 담을 쌓는 모습이 되었지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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