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의 선택 - 생명공학의 위험과 비윤리성
박병상 지음 / 녹색평론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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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숲책 / 환경책 읽기 2023.8.10.

숲책 읽기 198


《파우스트의 선택》

 박병상

 녹색평론사

 2000.10.23.



  《파우스트의 선택》(박병상, 녹색평론사, 2000)을 오랜만에 되읽습니다. 박병상 님은 마흔을 조금 넘은 무렵 이 책을 써냈고, 어느덧 예순을 훅 넘어가는 하루를 보냅니다. 서울 곁 인천에서 나고자라면서 ‘푸른숲이 짓밟힌 큰고장’이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지켜보기도 했고, ‘푸른숲이 짓밟힌 큰고장에서 나고자라는 어린이’가 어떻게 푸른넋이 없이 설치는가를 보기도 했을 테지만, ‘푸른숲이 짓밟힌 큰고장에서 나고자랐기에 오히려 푸른빛을 찾아내고픈 어린이’를 보기도 했을 테지요.


  스무 해 남짓 가로지르는 푸른책(환경책)을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푸른눈’을 되찾기도 해야 하고, 푸른물결(환경운동)에 몸바치는 사람도 ‘푸른몸’을 되찾을 노릇입니다. 요사이는 ‘푸른척(그린워싱)’을 나무라는 목소리를 이따금 들을 수 있습니다만, 적잖은 푸른물결(환경운동)도 안타깝게 ‘푸른척’이었습니다.


  잘 봐야 합니다. 비닐을 안 쓰고 수저를 챙기던 사람은 2023년뿐 아니라 2000년에도 1990년에도 챙기고 살림을 했습니다. 쇳덩이(자동차)를 안 끌면서 걷거나 두바퀴(자전거)를 달리는 사람은 2023년뿐 아니라 2000년에도 1990년에도, 또한 앞으로 2040년에도 두 다리에 두바퀴로 살아갑니다.


  큰고장이나 서울에서 태어났더라도 푼푼이 살림돈을 모아서 큰고장이나 서울을 즐겁게 떠나 시골이나 멧골이나 숲에 깃드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다면, 푸른물결로 일하거나 푸른목소리를 내는 분 가운데 ‘몇 사람’이나 큰고장하고 서울을 떠났나요? ‘몇 사람’이나 쇳덩이를 거느리지 않나요? ‘몇 사람’이나 잿집(아파트)을 떠났나요?


  반드시 시골이나 멧골이나 숲에서 살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삶터하고 일터가 시골·멧골·숲이 아닐 적에는, ‘푸른척’이 얼마나 드세게 끼리질(카르텔)을 이루면서 눈가림에 눈속임을 하는지 못 보거나 등돌린다는 소리입니다. 왜 다들 서울이나 큰고장에서만 푸른물결을 할까요? 왜 시골 한켠이나 멧골에서 조용히 푸른목소리를 내지는 않을까요? 돈 때문인가요? 이름 때문인가요? 목소리를 낼 길(언론) 때문인가요?


  ‘글(이론)’은 이제 됐습니다. 살림(실천·생활)을 어떻게 꾸리는지를 밝힐 때입니다. 목소리는 그만 내기 바랍니다. 전남 고흥에서 ‘펑펑’ 쏘아대는 것이 ‘우주발사체’일까요, ‘미사일(대륙간탄도탄)’일까요? 전남 ‘고흥항공센터·드론센터’에서 여태 ‘어떤 드론시험’을 했을까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가지 않았으면 ‘드론’은 거의 ‘군사드론’인 줄 몰랐을 사람투성이입니다. 목소리만 내서는 푸른물결이 아닌 푸른척에서 그치고, 푸른길 아닌 푸른시늉에서 쳇바퀴를 돌고 맙니다. ‘그들’만 푸른흉내를 내지 않아요. 푸른물결을 하는 분들 스스로 푸른굴레에 갇혀서 허덕이는 오늘날 모습입니다.


ㅅㄴㄹ


특정 농약에 저항성을 갖는 유전자조작 농산물은 농약을 덜 뿌려도 되므로 환경에 이로울 것이라는 궤변도 들린다. 그런데 우리의 서글픈 환경은 농약을 덜 뿌리기만 해도 회복될 정도로 건강하지 못하다 … 농약소모가 많아야 돈을 벌 농약회사들이 적량 생산판매를 고수할 리 만무하다. (15쪽)


생명공학은 대안일 수 없다. 대안은 생태사회에 있다. (20쪽)


경찰청은 전 국민의 지문 전산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플라스틱 주민등록증에 찍힌 지문은 종이 주민등록증에 찍히 지문에 비해 식별이 훨씬 용이하므로 범죄자 색출이 그만큼 쉬워진다는 게 경찰당국의 자랑이다. 그렇다면, 누가 봐도 뻔한 범인을 관할구역 탓하며 미루다 놓치고 시민이 잡은 범인도 유유히 사라지는 판국에, 경찰은 지금까지 지문을 식별 못해 범인을 못 잡았을까? (39쪽)


임산부는 언제부터 환자가 되었을까. 서양의 경우, 여성들의 오랜 영역이었던 출산에 남성들이 개입하면서 의과분야로 흡수하게 되었다 … 이후 경험 많은 산파보다 남성 의사들이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고, (50쪽)


대지를 오염시키며 다국적기업의 이익에 충성하는 생산력 증대가 이 시대의 대안일 수 없다. 요컨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생의 페미니즘’이다. (수렵채취 사회에서 남성의 수렵행위보다 여성의 채취 역할이 식솔들을 먹여살리는 데 훨씬 큰 몫을 담당했다고 한다) (62쪽)


‘물질과 정신의 분리’ 이래 인간 이외의 물질은 오직 인간을 위해 이용되어야 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식물도 동물도 다 마찬가지였다. (139쪽)


인구증가보다 더 무서운 것은 중앙공급식 소비문화에 획일적으로 매몰되는 인간들의 과소비 풍조다. 이제 우리는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자발적인 가난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독특한 지역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가진 자급자족 공동체의 회복 가능성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 (155쪽)



생명공학기술이 혹세무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 목숨다룸길이 눈가림을 하는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려야 한다

36쪽


산아제한을 꾸준히 수행한다고 해도

→ 아기를 꾸준히 안 낳는다고 해도

→ 아이르 꾸준히 막는다고 해도

56쪽


부가가치를 먼저 생각한다

→ 돈을 먼저 생각한다

→ 덤을 먼저 생각한다

→ 벌이를 먼저 생각한다

57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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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자연으로 간다 - 자연 결핍 장애를 극복하고 삶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리처드 루브 지음, 류한원 옮김 / 목수책방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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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숲책 / 환경책 읽기 2023.8.10.

숲책 206 


《지금 우리는 자연으로 간다》

 리처드 루브

 류한원 옮김

 목수책방

 2016.2.26.



  《지금 우리는 자연으로 간다》(리처드 루브/류한원 옮김, 목수책방, 2016)는 “The Nature Principle : Human Restoration and the End of Nature-Deficit Disorder” 같은 영어를 옮겼습니다. “숲길 : 사람을 살리며, 숲을 잊은 굴레를 끝내다”를 나타낸다고 할 만하니, “오늘 우리는 숲으로 간다”처럼 풀어낸 이름이 꽤 어울릴 수 있습니다. 배움길에서는 ‘자연결핍장애’ 같은 이름을 쓰는 듯싶은데, ‘숲멍울’이나 ‘숲을 잊다’라 해야 알맞다고 느껴요. 자꾸 ‘장애·결핍장애’ 같은 굴레를 씌우지 않기를 바라요. 숲이 모자라거나 없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숲을 등지거나 멀리하거나 잊을 뿐입니다. 사랑길을 등지거나 멀리하거나 잊기에 숲도 등지거나 멀리하거나 잊어요. 푸른넋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에 멍들고 다치고 아픕니다.


  풀이 조금만 자라면 모기가 끓느니 뱀이 나온다느니 두려움에 무서움이라는 마음을 심는 짓도 숲멍울이라 여길 만합니다. 이 별에는 모기하고 파리에, 지네하고 지렁이도 함께삽니다. 벌나비만 함께살지 않아요. 매미랑 풍뎅이도 함께살지요. 잠자리랑 다슬기도 함께살아요.


  그러나 자꾸 숲을 등지면서 다 다른 숨결이 다 다르게 어우러지는 터전을 망가뜨립니다. 이 땅에서 범하고 여우하고 늑대를 몰아내고서 빼곡하게 때려박은 빠른길(고속도로)이 널렸기에 사람살이가 나아졌나요? 핵발전소는 나쁘다고 손가락질하면서 멧골·갯벌·바다·못에까지 햇볕판을 잔뜩 때려박았으니 뭔가 나아졌는지요? 기름 먹는 쇳덩이(자동차)한테 빛(전기)을 먹이니 사람살이가 나은가요? 오히려 길에 쇳덩이가 더 늘면서 갑갑한 죽음터로 뒤덮이는 얼거리 아닌가요?


  ‘핵발전소를 햇볕판으로 바꾸기’는 ‘뒷돈 빼먹는 끼리질(카르텔)’입니다. ‘기름 쇳덩이를 빛 쇳덩이로 바꾸기’도 ‘뒷돈 우려먹는 끼리질’이에요. ‘빛터(발전소) 하나를 안 돌릴 수 있는 나라’로 바꿀 일입니다. 싸움연장(전쟁무기)을 만드는 길에 빛(전기)을 허벌나게 쓰는 민낯을 깨달을 노릇입니다. 자맥배(잠수함)나 싸움날개(전투기)를 자꾸 때려짓느라 목돈뿐 아니라 빛(전기)을 끝없이 써대는 수렁에서 벗어나려고 마음을 기울이고 참모습을 들여다볼 적에, 비로소 ‘숲멍울 아닌 숲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안 건드리는 풀숲을 넓게 두면, 모기는 사람피 아닌 이슬만 먹으면서 조용히 잘 살아갑니다. 우리는 숲으로 나아가는 몸짓으로 거듭나야 할 뿐 아니라, 숱한 숲에는 발자국을 안 남기면서 그대로 살리는 길을 틔울 노릇입니다. ‘함께살기’를 참답게 깨달으려 할 적에 비로소 푸른별이 푸른별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삶터일 수 있습니다.


ㅅㄴㄹ


기술이 우리를 매일 조금씩 더 옥죄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일까? (30쪽)


우리 사회는 지능을 높이는 방법을 찾으려고 다른 방법들은 샅샅이 검토하면서 자연의 영역만 빼놓고 있는 것 같다. (49쪽)


소년 시절에 나는 자연의 치유력을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74쪽)


부모들, 특히 자라 때 자연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던 수많은 어른들 중 한 명이라면, 야외로 첫발을 내딛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215쪽)


사람들을 자연에 연결하는 일은 촉망받는 산업이 된다. 우리의 집, 일터, 삶을 자연을 통해 탈바꿈시키는 새로운 사업들이 생겨난다. (413쪽)


#RichardLouv #TheNaturePrinciple #HumanRestorationandtheEndofNatureDeficitDisorder


+


그 광범위한 세계에서 분리되면 몸과 마음이 둔해지고 약해진다

→ 그처럼 너른 터전에서 떨어지면 몸과 마음이 굼뜨고 힘빠진다

25쪽


오후에 우리는 정말로 곰 한 마리를 목격했다

→ 우리는 낮에 참말로 곰 한 마리를 보았다

→ 낮에 참말로 곰 한 마리를 만났다

26쪽


생명이 절멸의 위기에서 돌아와

→ 목숨이 사라질 고비에서 돌아와

→ 숨결이 죽을 벼랑에서 돌아와

28쪽


후각 추적 능력이 연습으로 더 향상된다는 점인데 … 개가 사람보다 냄새 추적을 잘하는 이유는

→ 맡을수록 코로 잘 찾아낼 수 있다는데 … 개가 사람보다 냄새를 잘 맡는 까닭은

30쪽


도로변의 폭탄 같은 위험을 감지하는 작업을 할 때

→ 길가에서 펑 하고 터지지 않나 하고 살필 때

36쪽


더 고차원적인 힘을 느끼는 것 말이에요

→ 더 힘이 세다고 느끼듯 말이에요

→ 더 힘이 높다고 느끼듯 말이에요

37쪽


휴면을 흥미롭게 정의 내렸다. 잠들어 있지는 않지만 산만함에 빠져 있는 상태라고 말이다

→ 잠을 재미있게 풀이했다. 잠들지 않지만 어지러운 결이라고 말이다

→ 잠을 재미나게 다뤘다. 잠들지 않지만 뒤죽박죽이라고 말이다

47쪽


자연이 정신을 진정시켜 주고 집중하게 만들며

→ 숲이 넋을 달래고 모으도록 북돋우며

52쪽


운동장을 녹지화한 학교들에서는 무단결석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왔다

→ 너른터가 푸른 배움터에서는 빠지는 아이가 줄어든다

→ 너른터를 풀로 덮은 곳에서는 안 오는 아이가 줄어든다

54쪽


그 시절에 아버지가 침잠해 가는 것을 보면서

→ 그무렵에 아버지가 가라앉는 모습을 보면서

→ 그즈음에 아버지가 처지는 모습을 보면서

74쪽


땅을 파든지 정리를 하든지 잡초를 뽑든지

→ 땅을 파든지 추스르든지 풀을 뽑든지

75쪽


자연은 비만에도 효과적이다

→ 숲은 살도 빼준다

→ 숲은 살빼기에도 좋다

77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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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 제10회 우수편집도서상
조민제 외 지음, 이우철 감수 / 심플라이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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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숲책 / 환경책 읽기 2023.7.28.

숲책 읽기 197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조선식물향명집’ 주해서》

 조민제·최동기·최성호·심미영·지용주·이웅 엮음

 심플라이프

 2021.8.15.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조민제와 다섯 사람 엮음, 심플라이프, 2021)는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풀꽃나무에 붙은 이름을 《조선식물향명집》을 바탕으로 다시 하나하나 짚으면서 새롭고 깊으면서 넓게 돌아보는 얼거리입니다. 1928쪽에 이르는 두툼한 풀꽃책이고, 웬만하다 싶은 풀꽃나무 이름을 이 꾸러미로 차근차근 찾아볼 만합니다.


  엮은이 여섯 사람은 풀꽃나무를 틀에 박힌 굴레로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풀이름도 꽃이름도 나무이름도 처음에는 언제나 숲사람(시골사람)이 숲을 품고 살아가는 길에 숲빛을 담아서 고을·마을·고장뿐 아니라 집집마다 다르게 가리킨 뿌리를 헤아리려고 애씁니다.


  풀꽃나무 이름뿐 아니라, 우리가 쓰는 말도 처음에는 모두 ‘사투리’입니다. 고을·마을·고장·집마다 다르게 쓰는 말씨였는데, 서울이 크고 나라가 서면서 ‘맞춤말(표준말)’을 세웠을 뿐입니다.


  맞춤말은 으레 한 가지 이름만 세웁니다만, 사투리는 하나일 수 없어요. 또한, 맞춤말은 한 가지 이름이 그대로 흐르되, 사투리는 언제라도 새말이 태어납니다. 가만히 보면, 풀꽃나무를 가리키던 이름은 ‘고인말(고인 채 안 바뀌는 말)’이 아닙니다. 먼먼 옛날부터 조금씩 바뀌면서 흘러왔어요.


  무엇보다도 풀꽃나무 이름은 몇몇 꾼(전문가)이지 안 붙였어요. 풀살림을 가꾸고, 꽃송이를 사랑하면서, 나무를 보금자리에 품은 수수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풀꽃나무뿐 아니라, 헤엄이나 새나 풀벌레나 숲짐승 이름도 사람들이 스스로 이름을 붙였어요.


  누가 붙인 이름을 외운 살림이 아닙니다. 밥옷집도 누구나 스스로 짓고 가꾼 살림이요, 말빛도 언제나 저마다 스스로 짓고 가꾼 살림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여러 얄딱구리한 풀꽃나무 이름은 이제부터 바로잡거나 새롭게 붙일 노릇이라는 뜻입니다. 이웃나라에서 들여오는 풀꽃나무한테는 우리 나름대로 풀빛·꽃빛·나무빛을 헤아리면서 스스로 이름을 붙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붙이기 앞서까지는 풀꽃나무를 모르게 마련이에요. 예부터 모든 숲사람(시골사람)은 모든 곳에 스스로 이름을 붙이면서 스스로 얼거리를 읽고 숨결을 알고 살림살이로 품었습니다. 크고작은 새를 바라보며 이름을 스스로 붙이기에 새를 이웃으로 삼아요. 나비한테도 풀벌레나 개구리한테도, 다들 스스로 이름을 붙여 주었어요.


  ‘이름(이르다 + ㅁ)’이란 “이르는 소리”요, ‘말’을 가리키는 다른 소리마디입니다. 마음을 담은 소리가 ‘말’이요, ‘서로 잇고 이야기하면서 이곳에 함께 있는 숨빛으로 담아내는 소리’가 ‘이름’입니다. 아름나무 같은 아름책 한 자락을 품는 이웃님이 늘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전나무의 옛이름은 젓나무로, 구과(毬果) 또는 가지에서 흰 젓이 나오는 것에서 ‘젓’ + ‘나모’가 ‘젓나모 → 젓나무 → 젼나무 → 전나무’로 변화해 현재의 전나무가 되었다. (120쪽)


15세기경부터 그 표현이 확인되는 옛이름인 부들은 붇곶(붓꽃)과 어원을 같이하는 이름으로, 지상부(주로 꽃이삭)의 모양이 붇(붓)처럼 보이는 것에서 유래했다. (142쪽)


버드나무라는 이름은 ‘버들’과 ‘나무’의 합성어로, 옛 표현은 버드나모(버들나모)인데 이는 다른 나무에 비해 자라는 형태가 특징적인 데서 비롯했다. 즉 ‘버들’은 (꼬부렸던 것을) ‘쭉 피다’라는 뜻의 ‘뻗다·벋다’에서 유래한 말이며, 따라서 버드나무는 위를 향하여 쭉 벋어가는 나무를 뜻한다. (417∼418쪽)


누튀의 ‘누’는 누렇다의 뜻으로 느릅나무에 비해 여러 면에서 노란색이 강하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며, 느티나무라는 이름의 어원에 따른 뜻은 ‘누런색을 띤 나무’이다. (498쪽)


무라는 이름은 고유어로 이해되지만, 그 정확한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다. (783쪽)


콩이라는 이름은 고리 또는 둥근 것을 가리키는 고 또는 공이 어원으로 둥근 것을 뜻한다. (993쪽)


조록싸리라는 이름은 벗겨놓은 줄기 껍질의 가느다란 모양을 ‘조록’하다고 본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주요 자생지인 경상남도 방언을 채록한 것이다. ‘조록’은 ‘조록조록’에서 유래한 말로 잔주름이 고르게 많이 잡힌 모양을 말한다. (1003쪽)


그러나 많은 초본성 식물을 널리 식용했던 전통적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쇄채에만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도 합리성이 없고, (1806쪽)


민들레라는 이름은 ‘뮈움/뮈윰’(‘움직이다’ 또는 ‘흔들리다’라는 뜻의 옛말 ‘뮈다’의 명사형)과 ‘달외’(들꽃)의 합성어로, 깃털이 있는 열매가 바람에 날려 멀리 퍼지는 들꽃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1820쪽)


+


미역취라는 이름은 자원식물로 이용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 미역취라는 이름은 밑살림풀로 삼으면서 생겼으며

→ 미역취라는 이름은 밑풀로 누리면서 생겼으며

1815쪽


일본을 거쳐 국내에 유입되었는데, 야생화하여 귀화식물로 분류되고 있다

→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 왔는데, 들꽃이 되어 들온풀로 여긴다

1772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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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채식이 뭐예요? 어린이 책도둑 시리즈 24
이유미 지음, 홍윤표 그림 / 철수와영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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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숲책 / 환경책 읽기 2023.7.2.

숲책 읽기 205


《선생님, 채식이 뭐예요?》

 이유미 글

 홍윤표 그림

 철수와영희

 2022.7.12.



  《선생님, 채식이 뭐예요?》(이유미, 철수와영희, 2022)를 읽고 하나부터 열까지 아쉬웠습니다. 풀밥(채식)이 나쁠 일은 없지만 ‘낫지’는 않습니다. 풀을 먹든 헤엄이를 먹든 열매를 먹든 고깃살을 먹든 모두 ‘물빛이 깃든 숨결’입니다. 닭이나 소나 돼지만 ‘산 목숨’이 아닙니다. 고등어나 오징어나 정어리만 ‘산 목숨’일까요? 조개랑 가리비랑 꼬막도 ‘산 목숨’일 뿐 아니라, 김이랑 미역이랑 파래도 ‘산 목숨’이에요. 시금치랑 무랑 배추도 ‘산 목숨’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먹든 ‘죽은 몸’이 아닌 ‘산 몸’을 먹습니다. ‘죽은 몸’이면 이미 파리가 꼬여요. 고깃살이건 나물이건 ‘물빛이 머금은 산 몸뚱이’를 싱싱하게 건사해 놓고서 사고팔며, 손질하고 다루어 밥으로 차립니다.


  무엇을 먹든 ‘잘못했다!’는 마음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아니, 무엇을 먹든 ‘반가워! 내 몸으로 새롭게 빛나렴! 사랑해!’ 하는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푸른콩도 커피콩도 푸른 숨결이 흐릅니다. 살구에도 배에도 능금에도 살림물이 감돕니다. 낟알 하나도 씨앗이요, 씨앗에는 새롭게 싹트고 뿌리내리는 기운인 숨빛이 있어요.


  ‘풀밥을 안 먹으면 나쁜짓이다’ 같은 마음으로 다그치는 일은 오히려 우리 숨결을 갉거나 좀먹습니다. 우리는 ‘나쁜짓이 아닌 좋은짓을 할 뜻’으로 풀밥을 누리지 않아요. 고깃살도 풀포기도 저마다 다르게 싱그러우면서 아름다운 숨결인 줄 온마음으로 깨닫는 기쁜 사랑으로 받아들이기에 ‘밥살림’입니다.


  풀밥이기에 더 좋거나 낫지 않습니다. ‘풀밥을 먹는 나는 착하고 나은 사람이야!’ 하는 마음이라면, 이웃을 낮잡거나 얕보게 마련이에요. 아무리 손수 심어서 가꾸어 먹더라도 ‘살림빛’이 아닌 ‘죽음물’이 듭니다.


  “잠깐의 즐거움을 멈추고(5쪽)”는 뭘까요? ‘즐거움’은 이런 자리에 쓰는 낱말이 아닙니다. “가벼운 재미”나 “얕은 재미”라 해야겠지요. 풀밥을 먹으면 ‘큰그림’이고, 고기를 먹으면 ‘작은그림’인가요? 갈라치기를 안 하기를 바랍니다.


  제철 아닌 엉뚱한 철에 딸기나 수박을 먹는대서 ‘기쁜’지 아리송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늦봄에 나는 멧딸기 아니면 손조차 안 대고, 한여름에 이를 무렵 비로소 수박을 즐깁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 시골에서 살기에 ‘제철’을 더 느낄는지 모르나, 이보다는 ‘비닐집에서 기름·꼭짓물(수돗물)·죽음거름(화학비료)을 먹이는 딸기’에서 기름맛에 꼭짓물맛에 죽음거름맛을 느껴요.


  능금 한 알을 먹으면서 ‘능금밭에서 뿌리는 죽음물(농약)맛’을 느끼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틔워서 속빛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길을 살아갈 노릇이라고 여겨요. 돈벌이에 사로잡힌 나머지 ‘흙살림’이 아닌 ‘죽음살림(화학농법)’으로 거둔 나물이더라도, 사랑이란 눈길로 바라보고 사랑스런 손길로 쓰다듬으면서 숨결을 바꾸어 내는 마음으로 거듭날 노릇입니다.


  요새는 ‘친환경농약’이 춤춥니다. ‘친환경’을 거짓으로 붙이는 이들이 꽤 많습니다. “맛있는 고기를 못 먹는다(86쪽)” 같은 대목은 무척 얄궂습니다. 글을 쓴 이유미 씨부터 아예 “고기 = 맛있다”처럼 여기는 마음인데, “맛있는 밥을 왜 먹지 말라고 하는가?” 하고 묻는 아이들한테 무슨 말을 들려줄 셈인가요? ‘고기라서 맛있’지 않아요. 사랑으로 맞이하는 밥이기에 사랑맛입니다. 사랑은 ‘좋은맛’이 아니에요. 사랑은 살림빛으로 물드는 맛입니다.


  ‘좋은길’을 아이들한테 억지로 밀어붙이는 풀밥(채식)으로 나아간다면, 오히려 살림빛도 살림넋도 아닌 ‘길든 굴레’를 내세우고 맙니다. 풀을 먹어야 하느냐 고기를 먹어야 하느냐가 아닌, 어떤 마음으로 먹을 적에 우리가 스스로 몸을 살찌우고 삶을 빛낼 수 있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사랑으로 지은 밥은 넘치게 안 먹습니다. 사랑을 담은 밥은 가볍게 조금 누려도 배부릅니다. 사랑이 없는 밥은 넘치게 먹어도 배고픕니다. 사랑이 없는 밥이 온누리에 넘치기에 밥쓰레기도 그토록 넘쳐요. 이제부터 우리가 바라볼 곳을 ‘풀밥이냐 아니냐’가 아닌 ‘사랑밥으로 가는 길’로 돌리기를 바랍니다.


ㅅㄴㄹ


잠깐의 즐거움을 멈추고 이제 세상을 한번 보도록 해요.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더 큰 그림이 기다리고 있어요. (5쪽)


제철이 아니라도 먹고 싶은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에요. 문제는 이런 기쁨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을 버리고 있다는 거예요. (61쪽)


로컬 푸드 매장을 이용하면 뜻밖의 즐거움을 만날 수도 있어요. 판매되고 있는 식재료가 어느 마을에서 왔는지, 누가 생산했는지 보는 재미가 있어요. 어떨 때는 생산자 이름에서 아는 사람을 발견할 수도 있을 거예요. (69쪽)


친환경 농산물은 재배할 때부터 우리 몸에 안 좋은 물질은 쓰지 않아요. 그래서 안심하고 먹을 수 있죠. 종류는 크게 유기농, 무농약이 있어요. (74쪽)


맛있는 고기를 못 먹는다고 아쉬워하기보다는 지구 환경을 위해 큰 선택을 한 자기 자신을 마음껏 칭찬해 주면 좋겠어요. (86쪽)


+


우리가 소비하는 무수한 음식 속에 채식의 가치가 훼손되는 모습들이 있었던 거예요

5


잠깐의 즐거움을 멈추고 이제 세상을 한번 보도록 해요

→ 가벼운 재미를 멈추고 이제 둘레를 봐요

→ 얕은 재미를 멈추고 이제 온누리를 봐요

5


푸른 초원에서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

→ 푸른들에서 아늑하게 살아야 하는

→ 푸른들판에서 조용히 살아야 하는

28


극심한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요

→ 물이 몹시 모자라요

→ 물이 메말랐어요

54


따뜻한 햇살 대신

→ 따뜻한 볕이 아닌

→ 따뜻한 햇볕 없이

60


제철이 아니라도 먹고 싶은 과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이에요

→ 제철이 아니라도 먹을 수 있는 과일은 고마워요

→ 제철이 아니라도 과일을 먹을 수 있으니 고마워요

61


문제는 이런 기쁨을 위해 더 중요한 것을 버리고 있다는 거예요

→ 그런데 이렇게 하려고 값진 살림을 버리고 말아요

→ 그런데 이렇게 누리려고 빛나는 삶을 버린답니다

61


로컬 푸드 매장을 이용하면 뜻밖의 즐거움을 만날 수도 있어요

→ 텃밥가게를 찾으면 뜻밖에 즐거운 일이 있어요

→ 마을밥가게에 가면 뜻밖에 즐거울 수도 있어요

69


생산자가 동네 이장님일 수도 있고

→ 지음이가 마을지기일 수도 있고

69


지구 환경을 위해 큰 선택을 한 자기 자신을 마음껏 칭찬해 주면 좋겠어요

→ 푸른별을 헤아려 큰길을 걸은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요

→ 푸른별을 돌보는 큰마음을 품은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요

8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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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라니 NIE Eco Guide 1
김백준.이배근.김영준 지음 / 국립생태원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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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숲책 / 숲노래 환경책 2023.6.21.

숲책 읽기 193


《한국 고라니》

 김백준·이배근·김영준

 국립생태원

 2016.3.28.



  《한국 고라니》(김백준·이배근·김영준, 국립생태원, 2016)를 읽고서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들짐승을 괴롭히거나 죽이는 나라가 드뭅니다. 범에 여우에 늑대가 자취를 감추었고, 곰도 없다시피 하지만 겨우 몇 마리를 살려서 풀어놓는데, 멧돼지하고 고라니를 아주 숨도 못 쉬도록 짓밟아요.


  우리나라는 틀림없이 작습니다. 작되 멧골과 숲과 들과 바다가 넓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라지기도 고을지기도 이 작은 나라에 깃든 아름다운 들숲바다를 아름빛으로 살리는 길을 여태·아예·그야말로 안 갑니다. 이 작은 나라에 총칼(전쟁무기)은 끔찍하게 많고, 이 작은 나라에서 돌이(남성)는 갓 스무 살에 싸움터에 끌려가서 바보로 뒹굴어야 합니다. 그런데 돌이 가운데 돈·이름·힘이 있으면 싸움터에 안 끌려가고 뒷길로 빠져나옵니다. 또는 종잇조각(대학생 신분)이 있으면 싸움터를 한참 미루거나 빠져나올 길이 있어요.


  이 땅에 고라니가 몇 마리가 있는지 알 길이 없다지요. 푸른별(지구)에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용케 살아남은 작은 들짐승인 고라니인데, 이 작은 나라는 고라니한테 ‘밉짐승(유해동물)’이란 이름을 붙입니다. 곰곰이 보면 고라니가 밉짐승일 수 없습니다. ‘밉짐승 = 사람’이라 해야 어울립니다. 좀 세게 말을 해본다면, ‘으뜸밉짐승 = 서울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라니도 사람도 ‘밉놈’이지 않아요. 고라니는 고라니이고, 사람은 사람입니다. 곰은 곰이고, 참새는 참새입니다. 모든 숨결은 저마다 다른 이름으로 저마다 다르게 푸른별에서 제 보금자리를 일구어요. 다 다른 숨결이자 숨빛이기에 서로 새롭게 마주하고 바라볼 눈망울로 이야기를 짓는 하루를 누립니다.


  사람들은, 누구보다 서울사람은 고라니를 볼 일이 없습니다. 고라니를 볼 일이 없어서 고라니를 모릅니다. 시골사람은 고라니가 파먹는 풀줄기나 풀뿌리나 풀잎이 못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서울사람은 고라니를 볼 일이 없지만, 고라니 터전을 무시무시하게 빼앗았습니다. 시골사람은 고라니를 으레 보지만, 고라니가 누릴 들숲바다를 풀죽임물(농약)으로 잔뜩 망가뜨렸습니다. 우리는 ‘고라니 눈길’로 ‘사람살이’를 바라본 적이 없다시피 합니다.


  언제나 이웃 마음이 되어 헤아릴 노릇입니다. 곰이 보기에 사람은 어떠할까요? 고래가 보기에 사람은 어떠할까요? 닭이 보기에 사람은 어떠한가요? 정어리가 보기에 사람은 어떠하지요? 고르르르 꼬르르르 울음소리를 내면서 멧골에서 조용히 살아가고픈 고라니입니다. 사람이 두렵고 무섭다고 여기는 고라니인데, 여우에 늑대에 범은 모두 쫓겨났어도 아직까지 이 땅에 살아남았습니다. 고라니는 숱하게 치여죽고 맞아죽으면서도 ‘숲에서 살아가는 매무새’를 고이 건사한 이웃이라고 여길 만하구나 싶습니다.


ㅅㄴㄹ


영어로 고라니의 이름은 ‘Water Deer’, 즉 ‘물사슴’이다. 그만큼 고라니는 물을 좋아하고 또 의외로 수영을 잘하는 동물이다. (47쪽)


고라니의 짝짓기나 출산 등에 대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관심이 없다. 고라니가 흔하다 해도 그 흔한 고라니가 언제 짝을 짓는지, 언제 새끼를 낳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57쪽)


2014년 한 해에만 충청북도에서 1만 2000여 마리의 고라니가 유해동물이라는 이유로 포획됐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서식하는 고라니의 개체 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다. (101쪽)


전국 170여 개 시·군으로 보면 5만 1000∼8만 5000여 마리의 고라니가 매년 구제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는 수렵으로 잡는 수를 감안하면 해마다 6만∼10만 마리 정도의 고라니가 직접적으로 사냥을 당하고 있다. 이 숫자는 밀렵 등으로 사라지는 수는 제외한 것이다. (109쪽)


로드킬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도로의 과잉 건설을 막아야 한다. 무분별한 도로 건설이 마치 발전의 상징인 양 포장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우리나라는 행동권이 극히 좁은 고라니마저 살 곳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115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리는 사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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