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아닌 것이 없다 - 사물과 나눈 이야기
이현주 지음 / 샨티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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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아가는가
 [책읽기 삶읽기 104] 이현주, 《사랑 아닌 것이 없다》(샨티,2012)

 


  아침에 일어나서 들새 소리를 들으며 뒷간으로 가서 똥을 눕니다. 똥을 한창 누고 나올 무렵 멧새 소리를 듣습니다. 섬돌에 신을 벗고 들어갈 무렵, 처마 밑 옛 둥지 손질해서 암수 짝을 이루어 새로 들어온 제비 두 마리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우리 집은 시골마을에 작은 집 하나만 마련했습니다. 우리한테는 꼭 이 집 한 채 얻을 돈만 있었거든요. 시골에서 살아가지만, 막상 밭이고 논이고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시골마을에서 예쁘고 즐거이 살아갑니다. 이웃집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돌보는 밭을 바라보고 논을 들여다봅니다. 때때로 두레를 나가고 곧잘 일손을 거듭니다. 때때로 푸성귀를 얻고 곧잘 쌀을 얻습니다.


.. 마음을 모으지 않고서 어떻게 아름다운 가을의 황금 들녘을 볼 수 있겠는가? … 자네가 누구를 기·다·린·다·면 자네는 영원토록 그를 만나지 못할 걸세 … 사람이 사람으로 살지 않는 수도 있나 ..  (21, 75, 99쪽)


  이제 마을 논마다 물을 가득 댑니다. 물이 가득 찬 논은 무논이라 합니다. 무논에는 개구리가 오붓하게 살아갑니다. 아침이고 낮이고 저녁이고 개구리 노랫소리가 온 고을을 채웁니다. 낮보다는 저녁이나 밤에 더 개구지고 힘차게 울어대는데, 아무래도 낮에는 온갖 새들이 날아들어 저희를 잡아먹으려 하기 때문일 테지요. 깊은 밤이나 새벽에 첫째 아이 오줌 누이러 바깥으로 나오면, 언제나 곽곽 크게 울어대는 개구리 노랫소리를 즐깁니다. 첫째 아이는 오줌그릇에 앉아 쉬를 누며 꾸벅꾸벅 졸고, 아버지는 곁에서 아이가 넘어지지 않게 붙들면서 개구리 이야기를 듣습니다.


  논 옆을 지나갈 때에 가끔 개구리가 뽀롱 튀어나옵니다. 멋모르는 개구리는 찻길로 올라섭니다. 찻길로 올라선 개구리라 하더라도 우리 마을 언저리로 지나가는 차는 매우 드뭅니다. 한참을 내다 보더라도 차 한 대 지나갈 일이 없습니다. 다른 곳과 달리 우리 마을 무논 개구리는 나그네 자동차한테 치여 죽거나 밟혀 떡이 될 일이 없다 할 만합니다. 아이들과 마실을 다니며 길바닥을 내려다보아도 납짝꿍이 된 떡개구리는 아직 못 보았어요.


.. 기차에서 내리기 직전, 서둘러 안경알을 닦는다. 안경이 스스로 안경을 닦지 못한다는 사실이 따스한 위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면서 … 타고난 목소리보다 크게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는다 …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나무 이름이지 나무가 아니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나무 이름이 아니라 나무에 붙여진 이름이다 ..  (46, 58, 177쪽)


  엊그제 이웃집 마늘밭 일손을 조금 거들었습니다. 그리 안 넓은 밭뙈기인데, 땡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마늘을 캐고 엮고 나르고 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마을 어르신들은 당신 딸아들을 모두 도시로 보내고 늙은 몸 움직여 마늘을 심고 돌보다가 캡니다. 도시 사람은 시골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허리 구부러지며 일군 마늘을 돈 몇 푼 치러서 사다 먹습니다.


  참 고된 일이기에 당신 딸아들한테 마늘밭 일이건 무논 일이건 물려주고 싶지 않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돈을 더 벌려고 짓는 흙일이 아니라, 시골마을에서 조용하면서 오붓하게 살아가는 꿈과 사랑을 누리려고 짓는 흙일이라 한다면, 굳이 밭뙈기에 마늘만 가득 심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여러 푸성귀를 골고루 심을 만하고, 여러 열매나무를 알뜰히 심을 만해요.


  식구들 먹을 푸성귀라면 아주 마땅히 풀약이고 비료이고 안 쓰겠지요. 살붙이들 먹을 열매라면 아주 마땅히 거름만 낼 테며, 흙이 보드랍고 기름지도록 땀을 흘리겠지요. 이렇게 일구어 거두는 열매와 곡식과 푸성귀라 한다면, 저잣거리에 내다 팔더라도 제값을 옳게 받을 수 있으며, 흙일꾼이건 도시사람이건 모두 좋으며 흐뭇하리라 느껴요.


.. 사랑 아닌 것도 사랑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명심해 두어라. 이 세상에는 사랑의 표현 아닌 것이 존재할 수 없음을 … 세상에 순결하지 않은 물건이 있는가 … 이 땅에 생명이 있든 없든, 존재하는 것은 모두 사랑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길밖에는 걸어야 할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  (84, 96, 164∼165쪽)


  우리한테 아직 땅이 없지만, 오래지 않아 넉넉하고 너르며 푸른 땅뙈기가 찾아오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는 우리 땀과 똥오줌으로 땅뙈기를 한결 푸르며 어여삐 아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마을마다 흙을 살찌우고 땅을 북돋우며 이웃을 사랑하는 꿈결이 널리 퍼지리라 생각합니다. 이제껏 시골에서는 어린이와 젊은이를 온통 도시로 보내기만 했지만, 앞으로는 도시 어린이와 젊은이가 모두 시골로 찾아오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은 서로서로 겨루거나 서로서로 밟고 올라서서는 살아갈 수 없거든요. 사람은 서로서로 믿고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거든요. 사람은 서로서로 기대고 돌보며 얼싸안을 때에 살아갈 수 있어요. 사람은 서로서로 웃고 얘기하며 밥을 나눌 때에 살아갈 수 있어요.


  돈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밥을 먹는 사람이에요. 기름이나 자가용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에요. 풀을 먹고 열매를 먹는 사람이에요. 아파트를 먹지 못하고, 아파트는 오래지 않아 허물어야 해요. 사람은 흙을 먹고 흙을 누며 흙을 물려받아요.


.. 자네가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고 있는데, 내가 무슨 말로 장단을 맞춘단 말인가 … 누가 나를 버렸는지 그건 모를 일이나 나는 버림받지 않았네. 아무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버릴 수 없으니까 … 나는 나무요 흙이요 물이요 공기요 태양이요, 나는 모든 것이다 ..  (64, 92, 111쪽)


  이현주 목사님 생각주머니를 담은 《사랑 아닌 것이 없다》(샨티,2012)를 읽습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온갖 ‘것’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먼저 말문을 열기도 하고, 나중에 말문을 열기도 합니다. 돌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개구리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마, 파리라든지 제비라든지 모기하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책을 다 읽고 나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


  뒤꼍 뽕나무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앞마당 노랑붓꽃이랑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처마 밑 제비들이랑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마을 들새랑 멧새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논둑 자운영이랑 광대나물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오월이 무르익으며 한껏 해맑은 찔레꽃이랑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벌써 꽃씨 날리는 민들레 줄기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나는 내가 사랑할 만한 누군가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며 서로 어깨동무할 만한 벗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 손길이 그득 밴 부엌칼이랑 도마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빨래비누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내 책들과 연필과 베개와 자판과 옆지기 뜨개실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느 무엇보다 우리 사랑스러운 옆지기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며, 우리 어여쁜 두 아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하고, 우리 좋은 동무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또, 하느님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지구별이랑, 숲이랑, 바다랑, 해랑, 달이랑, 별이랑, 구름이랑, 빗물이랑, 무지개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4345.5.24.나무.ㅎㄲㅅㄱ)


― 사랑 아닌 것이 없다 (이현주 글,샨티 펴냄,2012.3.9./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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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 쉽고 재미있게 익히는
배상복.오경순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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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모른다
 [책읽기 삶읽기 103] 배상복·오경순,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21세기북스,2012)

 


  배상복 님과 오경순 님이 함께 쓴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21세기북스,2012)를 읽습니다. 책이름처럼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잘 모릅니다. 한국땅 학교에서 한국말을 옳게 가르치는 틀이 없기도 하지만, 한국땅에서 나고 자라는 사람들부터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배우며 옳게 쓰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않기도 합니다.


  책을 찬찬히 읽다가, 오늘날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떠올립니다. ‘국어(國語)’라는 한자말은 일제강점기부터 널리 쓰였다 하지만, 이 한자말을 바로잡거나 고치려는 공공기관이나 교사는 그리 안 많습니다. ‘國語’라는 낱말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본말’을 가리키던 낱말이요, 일본 제국주의자가 이 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며 ‘일본말’을 ‘國語’라는 과목으로 가르쳤습니다. 한국말은 ‘조선말’이나 ‘조선어’라는 이름으로 가르쳤어요. 더 깊이 헤아려도 이와 같아요. 한겨레는 예부터 ‘한겨레 말’을 썼을 뿐입니다. 다만, 한겨레 스스로 한겨레 말을 가리키는 이름은 따로 없었어요. 굳이 이런 이름이 있어야 할 까닭을 느끼지 않았으니까요. 조선 때에 한겨레 글이 태어나기는 했으나, ‘한겨레 글’인 ‘훈민정음’은 여느 사람(백성)이 쓰는 글이 아니라 권력자와 지식인이 쓰는 글이었습니다. 이 나라가 식민지가 되고서야 비로소 학교라는 데가 생기며 여러 과목을 가르쳤고, 이때에 이 나라 이름은 ‘조선’이었기에, 학과목은 ‘조선말’이나 ‘조선어’였어요. ‘국어’라는 말은 안 썼어요.


  그나저나, 국어라는 낱말이 이러하건 저러하건, 이 말을 쓰건 말건, 한국사람이 오늘날 쓰는 한국말이 어떠한가를 학교에서 찬찬히 가르치지 않기도 하지만, 스스로 찬찬히 익히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같은 책을 따로 사서 읽지 않으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하기란 참 어렵습니다.


.. 언어라는 것은 태생한 배경과 문화가 있게 마련이다. 과거 전화가 귀해 이장 집으로 달려가 전화를 받고 우체국 먼 길을 가서 전화를 하던 때를 생각하면 “들어가세요.”라는 표현이 충분히 상상이 간다. 언어라는 것이 반드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할 때만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세월이 흘러 어원은 잘 모르지만 그러려니 하면서 써 온 표현도 적지 않다 … 외국어나 외래어는 우리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구나 엉터리 영어라면 우리 말을 쓰는 게 낫다 ..  (19, 141쪽)


  요즈음 한국사람은 ‘한국말’과 ‘외국말’을 제대로 가누지 못합니다. 한국말과 외국말 사이에 있는 ‘들온말(외래말)’도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외래어(外來語)’처럼 한자로 적으니 못 알아들을 수 있는데, 한자 뜻풀이 그대로 “밖에서 들어온 말”이기에 한국말로는 ‘들온말’입니다. “들어와서 쓰는 말”이라는 뜻으로 ‘들온말’입니다.


  들온말은 아직 한국말이 되지 않았으나, 한국사람이 여러모로 쓰는 낱말을 가리킵니다. 들온말을 쓰는 까닭은, 이제부터 한국말을 새롭게 빚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들온말을 여러모로 쓰면서 이 들온말을 한국말로 알맞고 슬기롭게 가다듬거나 갈고닦아 풀어낼 낱말을 빚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한국사람은 들온말을 한국말로 갈고닦지 않습니다. 들온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게다가, 들온말 아닌 바깥말(외국어, 다른 나라에서 쓰는 말)을 마치 한국말처럼 삼으며 버젓이 써요.


  ‘외국어(外國語)’ 또한 한자로 적으니 어떤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 할 수 있는데, 말뜻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 쓰는 말”, “이 나라 아닌, 이 나라 바깥에서 쓰는 말”이 ‘외국어’입니다.


  영어도 외국어요 일본어도 외국어입니다. 미국사람 쓰는 미국말이든 일본사람 쓰는 일본말이든, “한국 아닌, 한국 바깥에서 쓰는 말”입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까닭은 한국 바깥에서 쓰는 영어를 잘 익혀야 한국 바깥으로 나가서 외국사람을 사귈 때에 좋기 때문이에요. 한국에서 한국사람끼리 주고받자면서 영어를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아요.


.. 참고로, 총각김치를 담글 때 쓰이는 어린 무를 ‘총각(總角)무’ 또는 ‘알무’ ‘알타리무’라 하는데, 1988년에 개정된 표준어 규정은 순수 우리 말인 ‘알무’ ‘알타리무’가 생명력을 잃었다고 해서 한자어 계열인 ‘총각무’로 쓰도록 했다. 따라서 ‘총각무’ ‘총각김치’가 표준어이고, ‘알무’ ‘알타리무’ ‘알타리김치’는 표준어가 아니다. 순 우리 말을 버리고 한자어를 표준어로 선정함으로써 비판이 있는 부분이다 … ‘간절기’는 정체불명의 말이다. 한자어권 어디에도 이런 단어는 없다. 일본식 표현을 오역한 것일 뿐이다 … 지난 2000년 국립국어원이 ‘간절기’를 신어 목록에 올렸지만 이는 한 해 동안 신문이나 잡지 등에 새로 등장한 용어를 모은 것일 뿐이다. 이 가운데는 유행어뿐 아니라 비속어도 포함돼 있다. 그 말이 어법상 옳은 것인지는 따지지 않는다 ..  (45, 120쪽)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라는 책에도 군데군데 나오지만, 국립국어원은 나라에서 세운 ‘한국말 지킴터’다운 노릇하고는 좀 동떨어집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알맞고 슬기롭게 쓰도록 돕거나 이끄는 구실을 잘 못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신문과 잡지에 나타난 말’을 그러모으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이에 앞서 ‘한국사람이 더 아끼고 사랑할 만한 좋은 말’부터 그러모으도록 힘써야 할 노릇입니다.


  신문이나 잡지에는 누가 글을 쓰겠습니까. 한국말을 옳게 가누거나 가꾸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나요. 들온말과 바깥말을 찬찬히 가늠할 줄 아는 사람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쓰나요.


  교과서도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이고, 학교도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이며, 신문·잡지 또한 제대로 서지 않은 한국입니다.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나머지,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사람을 일깨우는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같은 책을 써야 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얼마나 모르면 이 같은 책을 애써 써야 할까요.


.. 결국 “5만 원이세요.” “10만 원이세요.”처럼 돈에다 “-세요.”를 붙이는 것은 손님이 아니라 돈을 존대하는 기형적 어투다. 고객을 존중하기는커녕 돈이나 사물을 높여 손님을 놀리는 듯한 표현이다 … ‘쿨비즈’는 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를 우리가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똑같은 운동에 똑같은 이름이 쓰였다. 일본에서 영어를 어떻게 조합해 쓰든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엉터리 영어를 가져다 우리가 국가 정책 용어에 버젓이 쓴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말로 창의적인 이름을 붙이면 얼마나 좋을까 ..  (63, 143쪽)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라는 책은 중학생 즈음이면 읽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 책에 나타나는 낱말이나 말투는 퍽 어렵습니다. “창의적인 이름을 붙이면” 같은 글월이 보이는데, “슬기롭게 이름을 붙이면”처럼 다듬을 만합니다. “돈을 존대하는 기형적 어투다” 같은 글월은, “돈을 높이는 엉뚱한 말이다”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이 어법상 옳은 것인지는” 같은 글월은 “그 말이 옳은지는”으로 다듬으면 되고, “한자어를 표준어로 선정함으로써 비판이 있는 부분이다”는 “한자말을 표준말로 삼아 비판받는 대목이다”로 다듬으면 즐겁습니다.


  67쪽을 읽으면,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역시 주체와 관련된 것을 높이는 간접 높임이므로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고 해야 한다. 아예 말을 바꾸어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로 해도 해도 된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말에서 ‘간접 높임’을 쓰든 말든, “교장 선생님 말씀이 있다”라는 말이, 참말 말이 되는지부터 살펴야지 싶어요. 이 대목부터 제대로 따져야지 싶어요.


  먼저, 이렇게 함부로 쓰는 말은 잘못입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한국말이니까요. 다음으로, 한국말은 임자말이나 토씨를 줄이거나 지우곤 합니다. 이런 한국말 빛깔을 헤아리며, “너, 할 말 있니?” 같은 말투를 돌아봅니다. “너, 할 말 있니?”에서 가지를 치면, “선생님, 하실 말씀 있어요?”가 되고, 이 흐름에 따라 교장 선생님이 아이들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할 때에도 “교장 선생님(이 하실) 말씀이 있겠습니다”처럼 될 수 있어요. 이와 같은 흐름과 결과 무늬를 찬찬히 짚을 때에, 비로소 한국사람 스스로 잘 모르는 말을 잘 생각하도록 도우리라 믿습니다.


  109쪽을 읽으면, “그래도 ‘배워 주다’를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간첩이 아닌지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갑작스레 웬 ‘간첩’? 북녘에서는 ‘가르쳐 주다’를 ‘배워 주다’로 쓰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누군가 쓴다면 ‘간첩’인지 살피라 하는 소리인데, 이와 같은 말투는 인권과 인격을 깎아내릴 뿐 아니라, 고장말을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북녘을 떠나 남녘으로 온 사람이 이웃으로 함께 살아가요. 중국에서 살다가 남녘으로 와서 살아가는 이웃이 매우 많아요. 이들은 ‘북녘 말투’를 이녁 고장말로 그대로 쓰면서 살아가는데, 이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라는 뜻일까요? 북녘말은 북녘말대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껴안을 때에 남북이 하나되는 슬기로운 길을 찾는다고 생각합니다. ‘북녘사람은 이렇게 쓰는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 됩니다. 북녘사람 말투는 나쁘거나 못된 말투라도 되는 듯 적바림한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한국사람은 틀림없이 한국말을 잘 모르지요. 그런데, 한국말을 잘 모르기도 하지만, ‘한겨레 이웃’이나 ‘한겨레 동무’나 ‘한겨레 살붙이’부터 잘 모르기도 한다고 느껴요. 한국사람은 영어를 배우고 일본말을 배우고 하지만, 정작 경상도말이나 전라도말을 얼마나 배우려 하나요. 서울말만 듣고 익힐 뿐, 막상 인천말이나 수원말이나 평택말이 저마다 어떻게 다른가를 얼마나 살피려 하나요. 북녘말을 헤아리기 앞서, 같은 울타리라는 남녘에서조차 이웃말을 돌아보지 못해요. 강원말에서도 춘천말과 원주말과 고성말과 양구말은 달라요. 경상도말에서도 마산말과 진주말과 거제말과 통영말은 모두 달라요. 통영에서도 마을마다 조금씩 달라요. 섬마다 또 살짝살짝 달라요. 우리 한국사람은 외국말은 외국말대로 배워야겠습니다만, 한국사람으로서 ‘한겨레 이웃말’부터 제대로 살피고, ‘한겨레 이웃삶’ 또한 사랑스레 돌아보며, ‘한겨레 동무마을’을 따사로이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5.5.19.흙.ㅎㄲㅅㄱ)


― 한국인도 모르는 한국어 (배상복·오경순 글,이수영 그림,21세기북스 펴냄,2012.5.14./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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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전 -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소설이다
강제윤 지음, 박진강 그림 / 호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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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책에 이름 몇 글 적히지 않아도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8] 강제윤, 《어머니전》

 


- 책이름 : 어머니전
- 글 : 강제윤
- 그림 : 박진강
- 펴낸곳 : 호미 (2012.5.1.)
- 책값 : 15000원

 


  어머니는 딸을 낳고, 어머니는 할머니 되며, 딸은 어머니 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아버지는 할아버지 되며, 아들은 아버지 됩니다. 느티나무는 느티씨를 떨구어 어린 느티나무를 키웁니다. 단풍나무는 단풍씨를 떨구어 어린 단풍나무를 키웁니다.


  어린나무가 씨를 맺어 땅에 떨굴 때까지는 퍽 오랜 나날이 걸립니다. 사람들은 열매나무를 몇 해만에 금세 키우고 굵다란 열매까지 척척 열리게끔 하지만, 꽃을 피우든 열매를 맺든 하자면, 작은 씨앗 하나는 오랜 나날에 걸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올리며 잎을 틔웁니다. 여러 해나 열 몇 해 지나야 비로소 첫 꽃송이와 첫 열매를 맺어요.


.. “배추를 생으로 쌈 싸 먹고 채독에 걸리면 그 벌레가 사람 피를 빨아 먹어. 그냥 두면 죽어라우. 한디 옥수수 수염 대려 먹으면 나섰어.” 병이 있으면 병을 낫게 해 주는 약도 곁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옛날에는 약만 먹고 살았어. 도라지랑 더덕이랑 맨날 노물(나물)로 먹고 살았제.” 할머니는 그런 약초들을 캐다 팔아 자식들을 키우고 교육시켰다 … 할머니는 어제 딴 강낭콩 두 가마니를 삼천포 장에 내다 팔고 오는 길이다. 10킬로그램에 일만오천 원, 두 가마라 해 봐야 겨우 삼만 원이다. 씨 뿌리고, 키우고 결실을 얻어다 파는 값이 이토록 헐하다. 농사가 얼마나 천대받는 시대인가 … 저 고무 대야 속 작은 전복 하나에도 잠녀들 목숨 값이 들어 있다 ..  (13, 44, 67쪽)


  우리 집 뒤꼍 뽕나무를 올려다봅니다. 이 뽕나무에서는 오디가 맺힐 테고, 오디가 맺히기 앞서 뽕꽃이 필 텐데, 뽕꽃은 어떤 모양일까 궁금합니다. 봄맞이 숱한 들꽃과 나무꽃을 말하는 사람 많은데, 막상 이른봄 찾아드는 느티꽃이라든지 굴참꽃이라든지 떡갈꽃을 생각하거나 살피거나 얘기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아무래도 하얗거나 노랗거나 분홍빛 감도는 꽃잎 아니고는 익숙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붉은 빛이거나 보라빛 아니라면 꽃잎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단풍나무에는 단풍꽃이 핍니다. 은행나무에는 은행꽃이 핍니다. 소나무에는 솔꽃이 필 테지요. 나무는 줄기를 굵고 높고 튼튼히 뻗으면서 꽃을 피웁니다.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습니다.


  사람은 생각을 하고 사랑을 나누며 차근차근 씩씩한 어른이 되면서 몸속에 씨앗을 품습니다. 몸속에 품은 씨앗으로 아이를 하나만 낳을 수 있고, 열을 낳을 수 있습니다. 씨앗을 모두 목숨으로 맺어야 하지 않아요. 씨앗은 씨앗대로 몸속에서 곱게 깃들다가 몸안으로 스며들 수 있어요. 씨앗은 좋은 꿈을 만나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어요. 씨앗은 새로운 씨앗으로 이어지며 우리들 살아가는 지구별을 아름다이 돌보는 밑힘이 될 수 있어요.


  돌이켜보면, 나무들은 나무씨를 내며 지구별을 푸르게 가꿉니다. 풀들은 풀씨를 내며 지구별을 푸르게 돌봅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씨를 내어 지구별을 어떤 빛깔로 가꾸는가요. 사람은 사람씨를 맺을 때에 어떤 꿈을 꾸고 어떤 사랑을 나누는가요. 사람은 저마다 몸에 품은 씨앗을 알뜰히 건사하나요. 사람은 스스로 몸에 품은 씨앗을 예쁘게 아끼나요.


.. “부친 모친 가시고 나니 갈 일이 있나.” 이제는 할머니가 스스로 고향이 되었다 … 장소가 고향이 아니다. 사람이 고향이다. 어머니와 형제들이 고향이다. 할머니는 이미 스스로 자식들의 고향이 되었으니 어디에 달리 고향이 있겠는가 ..  (39, 189쪽)


  아침이 되어 아이들이 하나둘 깨어납니다. 저녁이 되면 아이들이 하나둘 잠듭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무언가 집일을 해 보려 하지만, 내 몸도 고단해서 아이 곁에 나란히 쓰러집니다. 아이들이 잘 때에 함께 자고, 아이들이 일어날 때에 같이 일어나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이들보다 몇 시간 일찍 일어납니다. 아이들이 깨기 앞서 하루를 열며 아침을 맞습니다. 아침밥 차리려고 부엌일을 하든, 아이들 옷가지 빨래하려고 밑빨래를 해 두든, 아이들이 새근새근 꿈나라를 누빌 때에 조용히 일어납니다.


  내 어머니도 내가 갓난쟁이였을 적에 이와 같았겠지요. 내 아버지도 내가 어린이였을 무렵에 이와 같았겠지요. 내 어머니와 아버지를 낳아 돌본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와 같았을 테고, 차근차근 거슬러 올라가며 마주할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이와 같았을 테지요.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는 언제나 아이들하고 함께하면서 아이들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더 널리 살피며 더 깊이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는 늘 아이들하고 복닥이면서 아이들보다 더 힘을 쓰고 더 사랑을 북돋우며 더 꿈을 키웁니다.


  나는 내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받은 사랑을 누립니다. 내 아이들은 나와 옆지기한테서 받는 사랑을 누립니다. 사랑을 물려주는 어버이는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사랑을 물려주지 못하는 어버이는 사랑 없이 메마르게 살아갑니다.


  나무는 씨앗에 무엇을 담을까 생각해 봅니다. 풀은 씨앗에 무엇을 실을까 헤아려 봅니다. 어른나무는 작은 씨앗이 앞으로 어떻게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기 바랄까요. 봄날 짙푸르게 우거지는 풀들은 저희 풀씨가 앞으로 어떤 땅에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기를 꿈꿀까요.


.. 아주머니는 난생처음 본 나그네지만, 집에 들렀으니 뭐라도 대접하고 싶었던 게다.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넙죽 받아먹는다. 평생 다시 마주칠 일 없을 나그네한테 베푸는 마음이란, 대체 어떤 마음일까 … “오늘 연락선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우리 손죽도가 훤합니다.” 할머니는 손죽도를 찾아와 준 나그네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  (105, 156쪽)


  섬마을을 돌며 ‘어머니’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강제윤 님이 빚은 《어머니전》(호미,2012)을 읽습니다. 《어머니전》에 나오는 이들은 강제윤 님한테 어머니라 할 만한 분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이들 ‘어머니’가 ‘할머니’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이들 ‘어머니’가 ‘동무’일 수 있습니다.


  강제윤 님이 섬마을에서 만나는 예순 일흔 여든 아흔 줄에 접어든 어머니 들은 하나같이 일을 합니다. ‘일’이라 했지만, 당신들 어머니 삶을 이어온 하루를 날마다 새롭게 맞이합니다.


  바다에 나가든 물을 만지든 흙을 보듬든, 어머니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아주 늙은 오늘까지 일을 하고 삶을 꾸리며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들은 언제나 몸을 움직이고 마음을 씁니다. 어머니들은 어디에서나 아이들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며 들판을 사랑합니다.


  몸으로 아이를 품는 어버이라서일까요. 몸으로 아이를 품지 않더라도 가슴으로 아이를 품는 어버이라서일까요. 아버지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은 왜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사랑처럼 따스하거나 너르거나 깊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아버지들은 왜 스스로 아이한테 따스하며 너르면서 깊은 사랑을 물려주려는 넋을 품지 않는 듯 보일까요. 아버지도 아이였을 적에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았을 텐데, 아이일 적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사랑을 스스로 어버이가 된 다음 아이한테 얼마나 어떻게 물려주는 삶일까요.


.. 다 밥 먹고 살자고 사는 세상 아닌가. 밥 먹고 살 수만 있다면 섬이라고 무엇이 다르랴. 많은 사람이 도시에 살지만, 그들 또한 밥벌이를 위해 직장이라는 섬에 갇혀 살지 않는가 … 어느 쪽이든 자동차를 타고 서둘러 왔다가 서둘러 떠난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도 대개는 섬에 몰입하기보다는 놀이나 식도락에 몰두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섬에 와서도 섬을 보지 못한다 … “조개도 옛날 같지 않고 밤낮 자디잘아유. 원래 이게 물물이 크는 건데 밤낮 봐야 콩알 같아. 삶아 논 것마냥 안 커요.” 보름 한 물때마다 몰라보게 씨알이 굵어지던 것이 이제는 삶은 조개처럼 아예 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근처에 있는 보령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매연 때문이다. 나무들도 시들시들하다가 썩어 주저앉는다. 밭작물도 제대로 자라는 것이 없다 ..  (159∼160, 162, 174쪽)


  ‘밥 먹고 살자’는 누리입니다. 나도 먹고 너도 먹으며 함께 살아가자는 지구별입니다. 어른도 밥을 먹고 아이도 밥을 먹습니다. 사람도 밥을 먹고 벌레도 밥을 먹습니다. 나무도 풀도 꽃도 새도 나비도 밥을 먹습니다. 저마다 밥상이 다르고, 저마다 집이 다르며, 저마다 아기씨가 다릅니다. 다 다른 곳에서 저마다 사랑을 피우면서 생각을 빛냅니다.


  밥은 얼마나 어떻게 먹을 때에 즐거울까요. 내 몸을 따스하게 채우는 밥은 얼마쯤 먹을 때에 흐뭇할까요. 밥은 어떻게 차릴 때에 기쁠까요. 내 마음을 너그러이 보듬는 밥은 누구하고 먹을 때에 아름다울까요.


  고속도로는 누가 지을까요. 제철소와 발전소는 누가 지을까요. 고속철도는 누가 지을까요. 공항과 항구는 누가 지을까요. 군대는 누가 만들까요. 탱크와 전투기와 항공모함은 누가 만들까요. 경제발전은 왜 이루어야 할까요. 사회복지와 문화예술은 왜 이루어야 하나요. 대학교에는 왜 가야 하고, 인터넷은 왜 해야 하나요.


  무엇을 하며 살아갈 때에 기쁜 하루일까요. 무엇을 누리는 삶일 때에 아름다운 꿈일까요. 무엇을 아이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즐기면서 고마운 나날일까요.


.. 나그네는 수백 년을 이어 온 이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 못내 애석하다. 문화재란 무엇일까. 이미 사라져 쓸모없는 관청 건물을 새로 짓는 것이 과연 문화적 가치가 있는 일일까. 저 오래된 마을과 집과 돌담과 나무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닐까 … 이 마을에도 돌담 대신 담장들은 대부분 블록 벽돌담이다. 사십여 년 전, 새마을운동을 시작할 때 돌담을 헐어 버리고 쌓은 것이다. 돌담은 수백 년 세월에도 변함없이 튼튼한데 저 벽돌은 벌써 썩어서 시커멓다 … 이들 섬에는 각기 드라마 촬영장과 영화 촬영지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이 관광 상품으로서, 가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풍광 좋은 해변마다 촬영장이 들어서고 그것들이 마치 섬을 대표하는 문화처럼 선전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오래된 섬살이의 흔적들은 증발해 버리고 가상의 드라마가 현실의 자리를 대체해 버렸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온 수천 년 역사의 섬에서 고작 내세울 것이 멜로드라마나 영화 촬영장뿐이라면 그것은 코미디다 ..  (17, 54, 162쪽)


  어머니들이 살아가는 오늘은 고스란히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삶이야기’이고, 하루를 지나면 ‘옛이야기’입니다. 아버지들이 살아가는 오늘 또한 하나하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삶이야기’이고, 이듬날부터는 ‘옛이야기’입니다.


  누구나 어디에서나 이야기를 짓습니다.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이야기를 짓습니다. 더 좋다거나 더 궂다 싶은 이야기는 없습니다. 더 기쁘다거나 더 슬프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살아가며 누리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며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며 웃고 우는 이야기입니다. 좋다 싶은 일을 마주하면 좋다 싶은 생각으로 이야기를 빚습니다. 궂다 싶은 일을 부딪히면 궂다 싶은 생채기로 이야기를 빚습니다.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기도 하고, 푸른개구리는 엄마개구리 말하고 어긋난 짓을 일삼다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눈도 코도 귀도 손도 발도 하나뿐인 아이는 홀로 씩씩하게 크며 힘센 기운을 착한 곳에 씁니다. 팥죽을 나누어 먹은 밤알이며 까치이며 늙은 할멈을 거들어 범한테서 작은 보금자리를 지킵니다. 콩쥐도 팥쥐도 모두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흥부도 놀부도 한결같이 귀여운 아이입니다. 방귀를 뀌어도 며느리요, 바느질이 서툴어도 옆지기입니다. 낫질을 잘 해도 옆지기일 테고, 글을 못 읽어도 사위일 테지요.


  모두들 사랑스럽게 얼크러지며 밥을 먹는 삶입니다. 저마다 살가이 어깨동무하며 밥을 나누는 삶입니다. 어머니들은 섬에서 수천 해 수만 해를 살았습니다. 따로 이름 석 자 없이도 아이를 사랑으로 낳고 사랑으로 돌봅니다. 족보나 역사책에 이름 몇 글 적히지 않아도 아이를 사랑으로 보듬도 사랑으로 키웁니다. 《어머니전》은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삶”입니다. “어머니 사랑”입니다. “어머니 꿈”입니다. 아이를 낳고 돌보며 즐거이 누린 고운 빛입니다. (4345.5.1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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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1950년, 받지 못한 편지들
이흥환 엮음 / 삼인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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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으로 짓는 작은 사람 이야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7] 이흥환 엮음,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책이름 :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 엮은이 : 이흥환
- 펴낸곳 : 삼인 (2012.4.10.)
- 책값 : 15000원

 


  다섯 해를 함께 살아가는 첫째 아이는 새벽 세 시 무렵 밤오줌 한 차례 누고 아침 여덟 시 무렵 아침오줌 한 차례 누면 속이 개운하구나 싶습니다. 때로는 밤새 쉬를 안 누고 아침에 일어나서 한 차례 누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바지에 오줌을 조금 지리고 나서 “나 바지 갈아입을래.” 하고 말하며 새 속옷과 새 바지로 갈아입고 자리에 눕습니다. “나 오줌 지렸어.”나 “나 오줌 쌌어.” 하고 말하지 않지만, 속옷과 바지를 갈아입을 때에는 오줌으로 옷가지를 버린 때입니다.


  밤 열두 시에 옆지기한테서 둘째 아이를 받습니다. 둘째를 가슴에 얹고 재웁니다. 스르르 곯아떨어집니다. 어느 결엔가 둘째 아이가 내 오른팔을 베개 삼아 잡니다. 베개 삼아 자던 아이가 낑낑거려 퍼뜩 잠에서 깨어 왼손으로 아이 가슴을 토닥입니다. 이불을 여미면서 오른팔을 슥 뺍니다. 몇 시간 이렇게 잤나 모르겠지만 오른팔이 없는 듯 뻑적지근합니다. 첫째 옷을 갈아입히고 뒷밭에 아이 오줌을 뿌리고는 나도 쉬를 하고 하늘을 보니 파랗게 물들며 동이 트려 합니다. 처마에 있는 제비집에서는 암수 제비 두 마리가 삣삣삣 하면서 새 하루를 열려고 부산을 떱니다.


  새벽 다섯 시 십 분. 밤개구리 소리는 천천히 잦아들고, 들새와 멧새 지저귀는 소리 차츰 커집니다. 이웃집은 슬슬 하루를 열 테고, 우리 집도 우리 집대로 새 날을 엽니다.


- 봉석이는 히죽히죽 웃는다고 하였으나 요사이에는 내가 손을 달라고 하면 손을 척 내주곤 합니다. 봉식이 크게 웃을 적에는 당신의 생각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봉석이 아버지, (중략) 할 말이 많으나 이것으로 끝맺습니다. 우스운 소리도 할 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믿을 데도 없으나 봉석이를 보면 웃습니다. 그리고 망나(막내) 아주버님이 일하시고 집에 들어와 말도 안 할 적에는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생각은 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당신 하나밖에 없습니다. 해답 빨리 해주시요. (1950년 6월 8일 은애 올림/22쪽)
- 아-아 고향 삼천리를 떠나 산 설고 물 설은 먼 곳에 있는 사랑하는 나의 동생에게 발 없는 편지야 빨리 빨리 달아나라. (1950년 10월 8일 백홍섭/49쪽)


  어제 저녁을 먹고 누런쌀을 불리려 했는데 깜빡했다고 떠오릅니다. 얼른 일어나서 누런쌀을 씻고 불려야겠습니다. 그나마 요사이는 날이 따뜻해서 새벽녘 누런쌀을 불리면 아침에 새로 밥을 지을 만합니다. 다른 밥거리는 어제 먹고 남은 삶은고구마 있고 말랑두부국이 있습니다. 뒤꼍에서 풀을 뜯어도 됩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도시나 시골이나 모두 길러서 먹어 버릇하는 삶입니다.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자라나는 풀이나 열매를 기쁘게 얻어 알맞게 먹어 버릇하는 삶은 아주 드뭅니다. 곰곰이 돌이키면, 사람들이 땅을 일구어 몇 가지 곡식을 거두기 앞서까지 어떻게 살아갔을까 하면, 하나같이 풀과 열매와 고기를 먹었겠지요. 스스로 살아가는 풀과 열매와 고기를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었겠지요. 비료도 사료도 항생제도 풀약도 없이, 온통 가장 깨끗하고 가장 정갈하며 가장 아름다운 목숨을 내 몸으로 받아들였겠지요.


  바다에서 낚는 조기 이야기를 다루는 어느 책을 읽으니, 1960년대 끝무렵에 이르러 연평도에서든 남녘 바다에서든 조기낚기가 몹시 힘들어졌다 합니다. 갑작스레 씨가 마르듯 크게 줄었다 합니다. 고기잡이배가 더 커지고 고기그물이 더 발돋움한 탓에 새끼고기까지 잡아들이느라 조기가 확 줄었다 할 테지요. 그런데 ‘문명 발달’과 ‘마구 낚기(남획)’ 때문에 조기가 줄어들기만 했을까요. 1960년대 끝무렵이라 하면 새마을운동이 한창 온 나라를 휩쓸던 즈음입니다. ‘유기농’이나 ‘친환경’이라는 이름을 모르고도 언제나 유기농과 친환경으로 흙을 아끼고 살찌우던 사람들이 새마을운동 때문에 비료와 사료와 풀약과 항생제를 마구마구 쓰던 즈음입니다. 화력발전소가 부쩍 늘고, 폐수와 매연을 마구 내뿜는 공장이 엄청나게 늘던 즈음입니다. 고속도로와 함께 자동차가 끝없이 늘어나며, 사람들 스스로 환경을 아름다이 지키려던 마음을 한꺼번에 내팽개치던 즈음입니다.


- 당신하고 같이 사진 한 번 찍지 못한 것이 유감이 되어 어떡하면은 좋은런지 막 안타까운 것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사진은 나의 가슴에서 죽을 때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 당신에게 나의 사진을 보내드리니 살아 있는 동안에 잊지 말 것을 부탁합니다. 편지를 쓰면서도 폭탄 소리에 몇 번씩 놀라면서 점심시간에 감추고 쓰기 때문에 문구가 되지 못하더라도 잘 보시오. 인제 우리 학교는 어느 곳으로 이주될런지 모르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 시간을 이용하여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1950년 10월 11일 오후 10시 10분/36∼37쪽)
- 동무에게 부탁하는 것은 어머님이 자식을 서이식(셋씩) 전선으로 내보내게 되여 서운하실 것인데, 동무들이 만히(많이) 위려하여(위로하여) 주십시요. (1950년 10월 8일 정원/66쪽)


  이 나라 온 들판과 멧자락과 냇물과 바다는 쉰 해 남짓 비료와 사료와 풀약과 항생제에 찌들었습니다. 국립공원 멧자락이라 하더라도 솔잎혹파리를 잡는다며 갖가지 풀약과 항생제를 끝없이 뿌립니다. 깊디깊은 두메라 하더라도 풀약과 항생제 그늘에서 홀가분하기 어렵습니다. 마음 놓고 풀을 뜯어서 먹을 만한 시골이나 멧골은 없다 해도 될 만큼 슬프며 메마른 터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웬만한 시골이나 멧골도 흙길을 모조리 시멘트길이나 아스팔트길로 닦습니다. 깊은 멧자락 등성이나 봉우리까지 자동차가 붕붕 달립니다. 언젠가 관악산에 한 번 오르니, 꼭대기에서 냉장고를 들여 얼음과자에 막걸리에 라면 따위를 팔던데, 사람들은 스스로 먹고 마시고 버리고 더럽히는 짓을 끔찍하게 저지르며 하나도 안 느낍니다. 풀과 나무가 없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줄 안 느낍니다. 풀과 나무가 깃들 흙이 싱그럽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줄 안 느낍니다. 물고기와 바닷고기가 튼튼하고 씩씩하게 살아갈 수 없으면 사람도 살아갈 수 없는 줄 안 느낍니다.


  게다가, 풀·나무·흙·새·물고기 들을 살리는 길이 ‘옛날로 돌아가는 고단한 삶’인 줄 잘못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밥을 먹는 사람은 ‘풀 열매’를 먹는 사람이에요. 하얀 쌀밥을 먹더라도, 이 하얗게 깎은 벼알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풀이에요. 세겹살을 싸서 먹는 상추를 비닐집에서 키우더라도 흙이 있어야 자랍니다. 흙 없이 물로만 상추를 기르기도 한다지만, 전기로 밝힌 등불을 쬐며 물만 마시는 상추가 사람 몸에 좋은 기운으로 스며들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햇볕을 쬐며 빗물을 마시며 기름진 흙에서 자라는 상추나 배추나 무나 당근이나 호박이나 쑥이나 냉이나 버섯이 되어야 비로소 사람 몸에 좋은 기운으로 스며들리라 느낍니다.


  나는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사람답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바람을 마시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햇살을 쬐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물을 먹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흙에 보금자리를 짓고 싶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어, 좋은 바람·햇볕·물·흙을 꿈꿉니다.


- 어머님께 3천 원 쥐어 보냈는데 이제는 돈 보낼 일도 막연합니다. 어린 아해(아이)들을 맡겨놓으니 겨울 날 일 앞으로 지낼 일 참으로 가슴이 막힙니다. 어떻든 목숨만 붙어놔주시요. 아해들 어떻든 잘 길러주시요. 정세가 좋아지면 곧 만나겠지요. 급한 길가에서 씁니다. (강계 국립건설은행 북지점 한운봉/115쪽)
- 오라버님,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내가 보낸 이 편지를 품 안에 넣고 집으로 가지고 돌아오십시요. 부탁합니다. 꼭!! (1950년 9월 23일 복실은 올림/189쪽)


  도시에서도 먹이를 얻으며 목숨을 잇는 비둘기나 고양이나 참새나 까치나 개는 너무 딱하고 안쓰럽습니다. 들짐승다운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도시짐승하고 닮습니다. 도시짐승이 들짐승다운 모습이 하나도 없듯, 도시사람한테는 들사람다운 모습이 조금도 없습니다. 가공식품과 화학약품에 길들어진 도시사람입니다. 물질문명과 제도권 울타리에 얽매이는 도시사람입니다. 스스로 책을 지을 수 있고, 스스로 학교를 세울 수 있으며, 스스로 흙을 일구거나, 스스로 삶을 가꿀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 삶이 내 책입니다. 내 넋이 내 아이와 나를 함께 북돋우는 학교입니다. 내 하루가 내 보금자리 밭자락과 논자락을 북돋우는 땀방울입니다. 내 사랑이 내 생각을 보듬으며 내 삶이 됩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이 살아가던 때에는 ‘쓰레기’라는 낱말을 안 썼습니다. 쓰레기라든지 찌꺼기라는 낱말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 살림살이에서 쓰레기가 될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이 살아가지 않고 물질문명을 누리거나 퍼뜨리면서 쓰레기가 어마어마하게 생깁니다. 태워도 화학물질이 남는 쓰레기입니다. 묻어도 썩지 않는 쓰레기입니다. 전기를 만들며 수십만 수백만 해 동안 방사능이 남는 쓰레기입니다. 자동차를 만들고 옷을 만들고 아파트를 만들고 고속도로를 만들며 언제나 쏟아지는 쓰레기입니다. 쓰레기를 먹고 쓰레기를 누리며 쓰레기를 둘러놓고 살아가는 문명이고 물질입니다.


  그리 멀지 않은 우리 삶을 헤아립니다. 한국전쟁이 터질 즈음 사람들 삶은 어떠했을까요. 새마을운동 따위 없던 때 사람들 삶은 어떠했을까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아니던 때, 이씨 임금들이 봉건 위계질서로 사람들을 내리누르지 않던 때, 서로 제 잘났다며 땅빼앗기를 일삼던 여러 나라가 우글거리지 않던 때, 조그맣게 마을을 이루거나 조그맣게 외딴집을 이루던 작은 사람들은 어떤 삶 어떤 꿈 어떤 이야기 어떤 나날을 지으며 사랑을 누렸을까요.


- 과히 놀라지 말아라. 평양 소식을 알린다. 9월 16일에 놈들의 공습에 무사히 지내든 우리 사는 사택에다가 80개의 폭탄을 던지며 수백 명 사람 죽고 하는 중에 우리의 두 집 식구는 천명으로 살아났다. 작은어머님 집도 폭탄에 치여 형편이 없고 무너지는 집 속에서 살아나고, 우리 집 식구는 집 안에 있다가 폭탄 파편에 겨우 몸을 빠져서 살아났다. 나는 현장에 갔다가 연기가 매우 나서 집에 돌아온즉 식구들은 울고 있는 현상이다. (210쪽)
- 집에서 네가 사랑하는 토끼 2마리, 돼지 2마리 모두 가지고 큰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한 가지 섭섭한 것은 을태 삼촌이 논에서 베를 베다가 적의 폭격에 희생되었다. (1950년 10월 10일/226쪽)


  이흥환 님이 엮은 인문책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삼인,2012)를 읽습니다. 한국전쟁이 불거지면서 ‘보낸 사람은 있되 받을 사람은 없’어지고 만 편지꾸러미를 예순 몇 해만에 풀어내어 선보입니다. ‘혁명’과 ‘새 조국 건설’을 외치는 목소리가 더러 있으나, ‘삶’과 ‘사랑’을 속삭이는 목소리가 거의 모두라 할 작디작은 편지에 담긴 이야기를 읽습니다.


  남녘이든 북녘이든, 총이나 폭탄이나 전투기나 군대는 무슨 값을 하겠습니까. 전쟁이나 무력통일이나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무슨 보람을 하겠습니까.


  사람은 그저 사람입니다. 사람답게 살아가고픈 사람입니다. 사람답게 사랑을 나누고 사람답게 꿈을 피우고 싶은 사람입니다.


  전쟁통에는 해방군도 적군도 아군도 인민군도 국군도 없습니다. 모두 바보입니다. 총을 든 사람은 몽땅 바보입니다. 총을 들어 평화를 지키겠다고 외친다지만, 총만 들어서는 아무도 살지 못해요. 한창 총을 쏘다가도 배가 고픈걸요. 한창 폭탄을 떨구다가도 똥이 마려운걸요. 한창 칼을 휘두르며 ‘내 이웃이거나 동무였을 적군’ 배를 가르고 팔다리를 자르다가도 졸음이 쏟아지는걸요.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살아갑니다. 사람은 똥오줌을 누어야 살아갑니다. 사람은 잠을 자야 살아갑니다. 사람은 두 다리 쪽 뻗고 가뿐하게 드러누울 좋은 보금자리가 있어야 살아갑니다.


  이쪽도 저쪽도, 속으로는 ‘북진통일’이나 ‘남진통일’이 아닌, 아무런 정권도 주의주장도 권력도 체제도 울타리도 틀도 제도권도 없는, 그저 사랑스러우며 좋은 보금자리가 되기를 바랐으리라 생각합니다.


.. 한국전쟁의 전쟁터에 불려 나간 청년들의 태반이 이런 젊은이들이었다. 그런데도 남에서든 북에서든 국가의 이름으로 나중에 써낸 전쟁사에는 이런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빠져 있다. 대개의 전쟁사가 전투 기록, 전략전술사로만 기술된 군사이거나 전쟁의 배경, 원인에만 치중한 정치사이다. 이런 기록은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이 없다는 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며, 생명력이 없는 기록은 그래서 잊히기 쉽다 ..  (엮은이 말/164쪽)


  역사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사회나 정치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목숨(생명력)’이 없는 역사나 사회나 정치가 여느 사람들한테 무슨 꿈이 되거나 어떤 사랑이 될는지 생각합니다.


  목숨이 아닌 역사 기록은 잊히기 쉽지 않습니다. 아무 뜻도 값도 없습니다. 아무 뜻도 값도 없는 역사 기록을 굳이 생각할 까닭이 없습니다. 잊히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처음부터 떠올릴 만하지 않고 얘기할 값어치 없는 역사 기록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대단한 역사 기록이라 한다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임금님 발자국을 좇는 이야기만 실리지, 여느 사람들이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사랑을 빚는가 하는 이야기는 안 실립니다. 역사 기록이라는 테두리에서는 값을 할 테지만, ‘삶·꿈·사랑·믿음·이야기’라는 보금자리로 돌아보자면 아무 값을 못 합니다.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에 실린 작디작은 글월은, 어느 글월이나 애틋하고 구수하며 살가운 사랑을 한 자락씩 보여줍니다. 바로 이 애틋하고 구수하며 살가운 사랑이 감도는 이야기이기에 즐거이 읽을 만합니다. 이렇게 애틋하고 구수하며 살가운 사랑이 풍기기에 반가이 읽을 만합니다. 1950년 6월에도 9월에도 10월에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랑과 꿈과 눈물과 웃음과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4345.5.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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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기행 학고재 산문선 6
시바 료타로 / 학고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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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섬에서 평화를 지키는 평화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46] 시바 료타로, 《탐라 기행》

 


- 책이름 : 탐라 기행
- 글 : 시바 료타로
- 옮긴이 : 박이엽
- 펴낸곳 : 학고재 (1998.2.20.)
- 책값 : 9800원

 


  매화꽃잎이 집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에 따라 말갛게 눈부시던 꽃잎이 하나둘 지면서 마늘밭 푸른 물결 사이로 톡톡 떨어집니다. 시골마을 매화나무는 이렇게 마늘밭 사이로 꽃잎을 날리는데, 도시에서 조그마한 흙자락 겨우 얻어 뿌리를 뻗는 매화나무는 고운 꽃잎을 어디로 날릴 수 있을까요. 꽃이 지고 열매를 맺어 씨를 떨굴 때에는 어디로 어떻게 새 아기들을 퍼뜨릴 수 있을까요.


  사람 발길이 거의 안 닿는 숲길을 거닐면 하늘을 가릴 만큼 뻗은 큰 나무들 밑으로 아이들 손가락 길이만큼 자란 뾰족뾰족한 풀줄기를 보곤 합니다. 숲길을 그냥 지나치며 보면 풀줄기가 솟았구나 하고 여길 테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쪼그려앉아 들여다보면 여느 풀줄기 아닌, 둘레에 우람하게 자라는 나무들이 씨앗을 떨구어 겨울을 나고 이듬해에 새로 돋은 아기나무인 줄 알아챌 수 있습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둘레에는 한 해를 자란 아기 느티나무부터 두 해를 자란 아기 느티나무나 서너 해를 자란 자그마한 아기 느티나무를 볼 수 있습니다. 어린 느티나무는 서너 해를 자랐어도 키가 아주 작습니다.


  작은 나무는 사람 발길이나 손길을 타지 않으면 마음껏 자랍니다. 마음껏 자라며 서로 얼키고 설킵니다. 얼키고 설키다가 어느 나무는 죽고 어느 나무는 높이 뻗습니다. 한 사람 삶으로는 나무들 얼키고 설키는 삶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따로 가지치기나 사이베기를 하지 않아도 나무들은 스스로 숲을 일구고 돌보며 어루만집니다. 스스로 알맞게 자라고, 스스로 죽어 거름이 됩니다. 스스로 씨앗을 내리고, 스스로 새싹을 틔웁니다.


.. 생각하면, 사대부 또는 그것을 지향하는 지식인들이나 독서생들이 거의 불모라 할밖에 없는 신학 논쟁을 5백 년이나 계속하였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보더라도 기이한 일이라 할 만하다. 중국인이나 조선인만큼 정신적 활력이 풍부한 민족이, 세계가 근대로 들어서는 가장 중요한 다섯 세기를 말장난 같은 학문에 소모해 버렸다고 하는 것은 통탄할 노릇이다 … 한국의 옛 건축물을 보고 공통적으로 느끼는 인상은 우아함과 유연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근대 이전의 중국 건축과는 완연히 구별되는 듯하다. 중국의 대건축에는 정권의 위용을 형태로써 보여주고자 하는 의식이 있으나, 한국의 그것에는 설사 그것이 궁전이라 할지라도 그런 의식이 적다. 아마도 나라의 넓이가 작은 데다 단일민족이라는 요소도 가세하여, 건물로써 위압을 주어야 될 필요는 없었던 까닭인가 한다 ..  (14, 64쪽)


  봄을 맞이해 개구리가 깨어납니다. 개구리가 깨어나면 뱀도 깨어나겠지요. 이 나라에 사람들만 득시글거리며 온 골골샅샅 찻길이나 구멍이 뚫리지 않던 때에는 곰도 깨어났어요. 곰과 함께 다람쥐가 깨어납니다. 들토끼나 멧토끼는 새로 돋는 봄풀을 맛나게 뜯어먹으며 긴긴 겨울이 얼마나 춥고 힘들었는가를 떠올립니다.


  이 나라에서 마지막 멧곰이 마지막 겨울잠을 깨던 봄은 언제였을까 헤아립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멧곰 식구들한테 보금자리를 내주기 힘들 만큼 더 넓은 땅을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은 자동차를 더 빠르게 내달려야 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봄을 맞이한 뒤 자전거를 타고 읍내나 면내로 달리면, 길바닥에 차에 치여 죽은 짐승과 벌레를 숱하게 만납니다. 자동차는 사마귀나 방아깨비를 밟아 죽여도 느끼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모는 어른들은 길알림판이나 앞차를 바라보는 데에 바쁘지, 새까만 길바닥 한켠에 사마귀가 몸을 따뜻하게 덥히다가 그만 커다란 쇳덩이가 덮치며 납짝쿵이 되고 마는 줄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나비를 치든 잠자리를 밟든, 범나비 애벌레를 밟든 동박새를 치든, 자동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릴 뿐입니다.


  봄비 내려 논마다 물이 찹니다. 물이 찬 논마다 개구리가 웁니다. 개구리 우는 논자락에는 새들이 살포시 내려앉아 개구리 먹이를 찾습니다. 개구리 우는 논 둘레 찻길에는 멋모르고 올라온 개구리가 자동차한테 밟혀 또다시 납짝쿵이 됩니다. 개구리들 사이에는 새까만 찻길은 얼핏 따뜻하다고 여길 수 있다지만 아무 무시무시하다는 이야기를 유전정보로 대물림하지 못할까요.


.. 강재언 씨는 보기 드문 애국자다. 대한민국이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니 하고 두 쪽으로 갈라져 맞서고 있는 마당에, 애국자 노릇을 계속한다는 것은 바로 고독 그것이다 …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차이는 한국에는 지식인이 있을 뿐, 일본같이 지적인 기인이 없다는 점이다.” 하는 말을 10여 년 전 어느 한국인의 글에서 읽은 일이 있다 … 경상도 사람들이 자신의 자부심을 한껏 높이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러다 보니 자기가 소속된 지역 자랑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딴 지역을 폄하하게 되는 것이다 … 문제는 문장의 교졸로 인하여 한 사람은 천상의 생활이 보장되고, 다른 수백만 명은 땅바닥에 엎드려 기는 삶을 강요당해야 하는 제도에 있다 ..  (24, 95, 103, 160쪽)


  모처럼 네 식구 다 함께 이웃 순천시로 나들이를 다녀온 지난주 일을 떠올립니다. 순천시는 이웃한 광양시보다 작고, 광양시는 광주광역시보다 작으며, 광주광역시는 대전이나 인천보다 작으며, 대전이나 인천은 서울보다 작습니다. 그러나, 순천시는 보성군이나 장흥군이나 고흥군보다 큽니다. 찻길이 넓고 시내가 넓으며 사람이 많습니다. 높은 건물과 아파트가 줄줄이 늘어섭니다.


  무엇보다 시내 가까이에 논이나 밭이 없습니다. 논이나 밭이 없는 순천 시내에서는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어쩌다가 참새 소리를 듣는다지만, 동박새나 노랑할미새나 직박구리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까마귀나 노랑조롱이나 종달새 소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서울보다 작고, 인천보다 작으며, 광주보다 작고, 광양보다도 작은 순천시이지만, 이 순천시에서 뱀을 만날 길은 없습니다. 개구리뿐 아니라 다람쥐도 사마귀도 방아깨비도 만날 길이 없어요.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자동차를 걱정합니다. 쉬지 않고 달리는 자동차 소리에 귀가 멍합니다. 바라볼 만한 푸른 숲이나 들이 없어 눈이 아픕니다.


  나도 도시에서 나고 자랐지만, 도시에서 살아가던 나는 자동차 소리가 하나도 반갑거나 좋지 않았습니다. 어린 우리들 놀이터를 자동차가 차지하는 일이 몹시 싫었습니다. 국민학교 운동장에 자동차가 들어오면 그렇게 싫었습니다. 한창 공차기를 하는데 뒤에서 빵빵 울리며 비키라 하는 어른들 자동차가 대단히 싫었습니다. 집과 학교 사이를 걸어서 오가는 사오십 분 길을 두 귀가 멍하도록 큰길을 달리는 자동차가 참으로 싫었습니다.


  네 식구 함께 시골로 옮겨 자동차 소리하고 동떨어진 삶자락에서 지내며, 내 몸이 얼마나 시골을 바랐고, 자연을 꿈꾸었으며, 풀과 나무와 꽃을 기다렸는가 하고 깨닫습니다. 아마, 사람이라면, 여느 사람이라면, 물로 이루어지고 흙에서 태어났으며 햇살을 먹고 자라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어디에서 제 숨결을 가장 사랑스럽고 어여삐 빛낼 수 있는가를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 한 가지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은, 한국인이나 조선인은 뛰어난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일본 문화를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사실이다. 일본 것을 연구하려고 들면, 어딘가 바보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일까 … 과거에 응시할 만한 사람은 우선 방대한 중국 고전을 암송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오직 주자의 주석을 따라야 한다. 그런 연후에 바늘끝만 한 정의를 향하여 스스로의 지성을 응축시켜야만 한다 … 그들 중에는 더러 에라스무스의 두뇌를 가진 자, 뉴턴이 될 만한 인물도 있었으련만, 몽땅 판에 박은 분재송이 되어 버렸다 … 만일 그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논쟁토록 하였다면, 이후의 조선 사상사는 엄청나게 풍부하게 되었을 것이다 … 진실이란 그러한 틀 속에는 들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일본을 얼마만큼 나쁘게 보든 상관없으나, 자유로운 시각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는 것을 서울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  (38, 84∼85, 87, 207쪽)


  제주섬을 생각합니다. 제주섬은 ‘제주’라는 이름이기 앞서 ‘탐진’이었고, 탐진이라는 이름이기 앞서 ‘탐라’였다 합니다. 이곳을 다스린다고 하던 나라님은 ‘탐라’가 ‘홀로 한 나라를 나타내는 이름’이기에 못마땅해서 ‘라’를 ‘진’으로 고쳤고, 나중에는 아예 ‘탐’까지 없애고 ‘진’에서 한 자리 낮추어 ‘주’를 붙였다 해요.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한국사람이 쓴 글이나 책에서 읽지 못합니다. 한국사람이 쓴 글이나 책에서는 어느 때에 어떻게 이름이 바뀌었다 하고만 나올 뿐, 왜 이렇게 이름을 바꾸어야 했는가 하고 찬찬히 밝히거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한국역사를 배웠으나, 이러한 발자취를 배운 일이 없어요. 일본사람 시바 료타로 님이 쓴 《탐라 기행》(학고재,1998)을 읽으며 비로소 이 같은 발자취를 깨닫습니다.


.. 조선이라는 나라의 까다로운 성격은, 순수한 중국인에 대하여도 꺼리고 멀리하여, 될 수 있는 한 서울에서는 살지 못하게 하였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조선 전체가 자신의 관념이 만들어낸 누에고치 속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 지폐 위에 찍혀 있는 이퇴계는 분명 훌륭한 인물임에 틀림없으나, 중국 주자학을 몇 세기 뒤에 전달해 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 조선 왕조는 도그마에 얽매인 관료들이 고의로 문명을 정체시켰다. 이러한 견지에서 보지 않으면, 무슨 동화 속의 이야기로 들리기 십상이다. 조선사람들은 짐을 짊어지고 걸어간다. 만약 수레가 있다면 얼마나 경제가 진보하고, 민생이 풍요로워질 것인가 하는 소리가 실학자들의 지론이었다 … 생각해 보면 조선은 중국의 이웃 나라일 뿐 아니라 중국을 종주국으로 받들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전통적인 산업기술을 스스로 격리시켜 온 것은 그 형이상적 이유 때문이다 ..  (169, 187, 193쪽)


  남녘땅 정부는 제주섬, 이라 해야 할는지, 탐라섬, 이라 해야 할는지, 이곳 한켠에 군부대를 새로 지으려 합니다. 남녘땅 정부가 새로 지으려 하는 군부대가 이곳 한 군데뿐인가 싶지만, 남녘땅 정부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 가운데 한 곳이 되도록 하려고 애쓸 뿐 아니라, 남녘땅에서 손꼽히는 관광도시로 키운다고 하지만,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허울을 내세워 군부대 짓기를 밀어붙입니다.


  남녘땅 사람들은 제주섬 올레길을 걷는다고 말합니다. 제주 도지사는 올레길을 닦는 데에 돈을 꽤 많이 씁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런 곳에 군부대가 들어섭니다.


  사람들은 옳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군부대는 평화를 어떻게 지켜 줄까요. 정부 일꾼은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군사시설은 평화를 어느 만큼 지켜 주나요.


  전투기가 평화를 지킬까요. 항공모함이 평화를 지키나요. 박격포와 전차가 평화를 지킬는지요.


  십억이나 백억에 이르는 돈을 베풀어야 사랑이 꽃피지 않습니다. 사랑이 꽃피려면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서울 강아랫마을 아파트를 사거나 값나가는 자동차를 산다 해서 사랑이 샘솟지 않습니다. 사랑이 샘솟자면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평화는 평화로 지킵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이룹니다. 꿈은 꿈으로 빛냅니다.


.. 제주도에 와서 반가운 일 가운데 하나는 낡은 초가집을 아직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오늘날의 문명에는 바보스러운 데가 있다. 학교를 난립시켜, 아이들을 몽땅 우리 속에 가둬 놓고 어느 우리가 더 나은지 등급을 매기고 있다. 사회나 부모가 다 아이들을 닦달하여 등급이 매겨진 우리 속에 밀어넣고 자타를 구별함으로써 안도하는 사회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신분제가 없는 사회가 되면 흡사 광장공포증에 걸린 생쥐 같은 심리 상태가 되어, 그런 우리를 만듦으로써 일종의 신분적 차별성을 향유하는 것이다 … 생각하면, 이름의 한자 따위는 허식일 뿐인 것이, 훌륭한 뜻을 지닌 한자 이름을 가졌다고 전복 한 개를 더 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  (55, 253, 264쪽)


  일본에서 내로라하던 시바 료타로 님은 한국땅 제주섬을 돌면서 책을 하나 써냅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글쟁이라면, 사진쟁이라면, 그림쟁이라면, 춤쟁이라면, 노래쟁이라면, …… 이녁은 어떠한 이야기를 빚을 수 있을까요. 제주섬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며 무엇을 꿈꿀 수 있을까요.


  일본에서 손꼽히던 글꾼 시바 료타로 님은 한국땅 제주섬을 생각하는 이야기를 글로 여미면서 책이름에 ‘탐라’라는 말을 적습니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글꾼이라면, 환경모임 일꾼이라면, 사회모임 일꾼이라면, 정치모임 일꾼이라면, …… 당신은 어떠한 이름으로 어느 한 터전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한국사람이 한국땅을 착하게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람이 이웃나라를 참답게 아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사람이 지구별을 곱게 건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기를 든 평화란 평화가 아닌 ‘무기를 든 전쟁’입니다. 학력을 쥔 평등이란 평등이 아닌 ‘학력을 내세운 차별’입니다. 돈을 앞세운 사랑은 사랑이 아닌 ‘돈을 앞세운 거짓’입니다. (4345.4.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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