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전라도닷컴> 2016년 10월호에 실었습니다. 즐겁게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즐겁게 읽으신 분들은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이나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이나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같은 책도 어여삐 읽어 주시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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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짓는 글살림
2. 가을에 기쁘게 짓는 말


  예전에는 누구나 스스로 말을 지어서 썼습니다. ‘예전’이라고 첫머리에 말씀합니다만, 이 ‘예전’은 새마을운동이 생기기 앞서요, 학교라는 곳이 없던 무렵이며, 찻길이나 자동차가 시골 구석까지 드나들지 않던 때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전에 누구나 스스로 말을 지어서 쓰던 때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누구나 스스로 삶과 살림을 짓던 때입니다. 돈으로 밥이나 옷이나 집을 사지 않던 때에는, 참말로 사람들 누구나 제 말을 스스로 지어서 썼어요. 학교에서 배우지 않고 어버이와 동무와 언니와 이웃한테서 말을 물려받던 때에는 고장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다 다른 말을 저마다 즐겁고 고우며 정갈하게 썼어요.

  오늘날 시골에서는 시골말이 차츰 밀리거나 사라집니다. 오늘도 즐겁고 예쁘게 고장말을 쓰는 할매와 할배가 많습니다만, 할매와 할배가 아닌 마흔 줄이나 쉰 줄만 되어도 고장말을 드물게 쓰고, 스무 살이나 서른 살 즈음이면 높낮이를 빼고는 고장말이라 하기 어려워요. 열 살 언저리라면 시골에서도 서울말하고 거의 같지요.

  예전에는 ‘외지인(外地人)’ 같은 한자말을 쓰던 시골사람이 없습니다. ‘외지인’ 같은 한자말은 거의 다 일제강점기 무렵 이 땅에 총칼과 군홧발하고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예전에는 시골사람이 어떤 말을 썼을까요? 바로 ‘손·손님’입니다. 때로는 ‘길손’이라 했고, ‘나그네’라고도 했어요. 도시에서 시골로 왔대서 모두 ‘서울사람’은 아니지만, 시골 할매나 할배는 도시에서 시골로 여행이나 관광을 온 사람을 두고 곧잘 ‘서울 손님’이라 말씀합니다. 이때에 ‘서울’은 인천 옆에 있는 그곳이 아닌 ‘시골하고 멀리 떨어진’ 도시를 두루 가리킵니다.

  한가을을 맞이하여 시골마다 ‘수확’으로 바쁘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도 으레 ‘수확’이라고만 합니다. 농협에서도 마을 이장님 방송에서도 읍내에서도 하나같이 ‘수확’입니다. 신문도 방송도 책도 하나같이 ‘수확’ 타령이에요.

  ‘수확(收穫)’은 “1. 익은 농작물을 거두어들임. 또는 거두어들인 농작물 2. 어떤 일을 하여 얻은 성과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 ‘거두어들이다’나 ‘거두다’로 손보면 되고, ‘열매’나 ‘보람’으로 손볼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말사전을 살피면 “큰 수확을 거두었다” 같은 보기글이 있습니다. “큰 열매를 거두었다”나 “크게 보람이 있었다”로 손보아야 할 텐데, ‘수확 1’가 “거두어들임”을 뜻하기도 하는 만큼 겹말이기도 해요. ‘거두다·거두어들이다’를 쓰기만 해도 넉넉할 텐데, 굳이 한자말을 따로 쓰려 하면서 엉성한 말투까지 나타나지 싶습니다. 그리고 한국말사전에서 ‘거두어들이다’를 찾아보면 “1. 곡식이나 열매 따위를 한데 모으거나 수확하다”로 풀이합니다. ‘수확 = 거두어들이다’로 풀이하면서, ‘거두어들이다 = 수확하다’로 풀이하는 겹말풀이 얼거리입니다. 참 얄궂습니다.

 벼 수확 → 벼베기 / 벼 거두기
 수확의 계절 → 거두는 철 / 거두어들이는 철
 수확을 보다 → 열매를 얻다 / 거두다 / 거두어들이다
 학술회의에서 얻은 수확이 크다 → 학술모임에서 얻은 열매가 크다
 큰 수확을 거두었다 → 크게 거두었다 / 큰 열매를 거두었다
 벼를 수확하다 → 벼를 거두다 / 벼를 거두어들이다

  ‘수확’과 함께 가을에 흔히 듣는 말로 ‘추수’가 있습니다. ‘추수(秋收)’는 “가을에 익은 곡식을 거두어들임”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한국말사전에는 “≒ 가을걷이·추가(秋稼)”처럼 비슷한말을 싣는데, ‘가을걷이’는 “= 추수(秋收)”로 풀이하고 ‘추가’도 “= 추수(秋收)”로 풀이해요. 그런데 ‘추가’ 같은 한자말은 쓸 일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나저나 ‘추수 → 가을걷이’로 말풀이를 바로잡을 노릇이고, ‘가을걷이 = 가을에 익은 곡식을 걷는 일’처럼 말풀이를 고쳐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추수’는 ‘가을걷이’나 ‘벼베기’로 손질하면 되는데, 벼가 아닌 곡식을 벤다면 ‘밀베기·콩베기·보리베기’처럼 ‘-베기’를 뒷가지로 삼아서 새 낱말을 넉넉히 지어서 쓸 수 있어요.

 추수가 한창인 논 → 벼베기가 한창인 논
 추수를 끝낸 훤한 논밭 → 가을걷이를 끝낸 훤한 논밭
 벼를 추수하다 → 벼를 거두다 / 벼를 베다
 그해 가을에 추수한 햅쌀 → 그해 가을에 거두어들인 햅쌀
 쌀 삼천 석은 너끈히 추수할 → 쌀 삼천 석은 너끈히 거둘
 추수하는 즉시로 → 거두어들이는 대로 / 거두는 대로 곧

  가을에 거두거나 베면 이제 낟알을 떨지요. ‘낟알떨이’라 할 테고, 밤나무 곁에서는 ‘밤떨이’를 해요. 감을 얻으려고 한다면 ‘감떨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낟알을 떠는 일을 놓고도 요새는 ‘타작(打作)’이라는 낱말만 널리 쓰는구나 싶어요. 이런 흐름은 한국말사전에도 이어져서 ‘타작’은 “1. 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낟알을 거두는 일 2. =배메기”처럼 풀이하고, ‘바심’은 “= 타작”으로 풀이해요. 오랜 나날 시골사람 삶과 살림하고 함께 흐르던 ‘바심’은 꼬랑지로 처지는 낱말이 되었어요. 이러다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릴는지 모릅니다. ‘콩바심’도 ‘깨바심’도 ‘조바심’도 시골사람 입이나 손이나 귀에서 차츰 잊혀져요. “조바심을 낸다”로도 쓰는 ‘조바심’은 조를 바심하는 일에서 비롯했어요.

  ‘가을말’을 그려 보고 싶습니다. 가을에 짓는 푸진 가을살림을 헤아리면서 우리가 오늘 새롭게 지을 가을말을 찬찬히 노래해 보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가을말을 그려 보고 싶어요. 가을에 피는 꽃은 ‘가을꽃’입니다. 가을에 피니 가을꽃일 뿐입니다. 한국말사전에는 ‘추화(秋花)’라는 한자말도 나오는데 구태여 ‘추화’ 같은 낱말은 안 써도 된다고 느낍니다. 봄에 피는 꽃은 ‘봄꽃’일 테지요. 굳이 ‘춘화(春花)’ 같은 말을 안 써도 됩니다. 꽃은 봄가을에만 피지 않기에 ‘여름꽃·겨울꽃’도 있을 텐데, 한국말사전에는 ‘여름꽃’이나 ‘겨울꽃’이라는 낱말이 아직 안 오릅니다. 안타깝습니다.

  여름에 하는 일이라서 ‘여름일’이요, 가을에 하는 일이라서 ‘가을일·갈일’이에요. 시골에서는 여름이나 가을뿐 아니라 봄이나 겨울에도 똑같이 일을 합니다. ‘봄일·겨울일’이 따로 있지요. 그러나 한국말사전에는 ‘봄일’이나 ‘겨울일’ 같은 낱말은 아직 안 실려요. 아리송한 대목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 즐겁게 노래를 부릅니다. 봄에는 ‘봄노래’요, 가을에는 ‘가을노래’입니다. 일할 적에는 ‘일노래’요, 놀이할 적에는 ‘놀이노래’예요. 들에서는 ‘들노래’이고, 밭에서는 ‘밭노래’예요. 숲이라면 ‘숲노래’요, 바다라면 ‘바다노래’일 테지요. 이처럼 우리 나름대로 부르는 노래는 언제나 노래이니, 홀가분하면서도 즐겁게 ‘-노래’를 뒷가지로 삼아서 쓰면 됩니다. 그래서 살림을 짓는 살림꾼은 ‘살림노래’를 부르고, 서로 아끼는 사랑님은 서로 ‘사랑노래’를 불러요. 글로 이야기를 나누는 벗님이라면 ‘글노래’나 ‘벗님노래’를 부르지요. 손전화 쪽글로 이야기를 나눌 적에도 ‘글노래’예요.

  비록 오늘날에는 뚝 끊어진 노래이지만, 예부터 시골에서는 ‘시골노래’를 부르곤 했어요. ‘농요’가 아닌 ‘시골노래’입니다. ‘노동요’가 아닌 ‘일노래’이고, ‘동요’가 아닌 ‘놀이노래’나 ‘아이노래’예요. ‘민요’라고 하는 이름도 막상 여느 사람들로서는 안 쓰던 말이었으리라 느껴요. 여느 사람들은 ‘요(謠)’가 아닌 그냥 ‘노래’만 불렀을 테니까 말이지요.

  한국말사전에서 ‘한가위’를 찾아보면 “= 추석(秋夕)”으로 풀이합니다. 이는 ‘한가위’보다 ‘추석’이라는 한자말을 쓰라고 하는 말풀이입니다. ‘추석(秋夕)’은 “우리나라 명절의 하나. 음력 팔월 보름날이다. 신라의 가배(嘉俳)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햅쌀로 송편을 빚고 햇과일 따위의 음식을 장만하여 차례를 지낸다.”처럼 풀이해요. 아무래도 앞뒤가 바뀌었어요. 이 가을에 우리는 오롯이 기쁜 마음으로 가을말을 새롭게 지을 수 있을까요? 삶과 살림을 손수 지으며 말도 늘 손수 짓던 수수한 시골지기 마음을 이어받아 새롭게 아름다운 가을말을 노래하는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2016.9.19.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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