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의 문화 인문과학 코스모스 4
이로카와 다이키치 지음, 박진우 옮김 / 삼천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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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6



권력자는 왜 ‘국정 교과서’를 들이미는가?

― 메이지의 문화

 이로카와 다이키치 글

 박진우 옮김

 삼천리 펴냄, 2015.10.16. 25000원



  ‘역사(歷史)’라는 낱말을 어른이 보는 한국말사전에서 살펴보면,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으로 풀이합니다. 어린이가 보는 한국말사전에서는 “인간이 사회와 국가를 이루면서 살아온 지난날의 자취. 또는 그 기록”으로 풀이합니다. 어느 한 가지로 보자면 사회와 나라가 걸어온 길을 역사라 하는 셈이고, 다른 한 가지로 보자면 지난날 발자취라 하는 셈입니다.


  역사책에 남는 이야기를 보면 으레 ‘정치 권력자’ 발자취를 갈무리하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사회를 이루는 바탕인 ‘수수한 사람들’ 모습이나 삶이나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역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역사를 책으로 쓰는 분들이 가르는 ‘시대 구분’은 언제나 ‘정치 권력자 역사’입니다. 조선, 고려, 발해와 신라, 세 나라와 가야, 옛 조선처럼, 정치 권력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이 나라 발자취를 살피지요.



일본이 단 한 번도 대륙의 강대국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우연이나 대담한 무사도 정신 덕분이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몬순 아시아 풍토의 평화로운 국제 환경 덕분이다. 특히 중국과 조선 민족이 장대한 방벽 역할을 해서 천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은 호전적인 기마민족의 침략에서 일본을 지켜 준 덕분인 것이다. (18쪽)



  앞으로 쉰 해나 백 해쯤 뒤에 역사를 갈무리할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2010년대 오늘날 역사를 ‘정치 권력자’인 대통령을 한복판에 놓고 발자취를 살피리라 느낍니다. 이제껏 역사를 갈무리한 흐름을 그대로 좇는다면, 쉰 해나 백 해 뒤뿐 아니라 이백 해나 오백 해 뒤에도 똑같은 틀로 나아가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역사를 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싶습니다. 정치 권력자가 무엇을 했느냐를 따지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되새기는 역사를 읽고 써야지 싶습니다. 정치 권력자가 어떤 훌륭한 일을 하거나 멍청한 일을 했느냐를 적는 역사보다는, 수수한 여느 자리에서 즐겁게 삶을 지은 사람들 이야기를 아로새길 수 있는 역사로 거듭나야지 싶어요.


  왜냐하면,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역사 지식을 넓히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옛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삶을 아름답게 지을 슬기를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우리는 앞으로 이곳에서 지을 삶을 씩씩하고 참다우며 사랑스레 가꿀 때에 하루하루 즐겁기 때문입니다.



메이지는 일본 민족의 재능을 해방시켜 아시아 최대의 군사력과 공업력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망적인 농촌과 도시 빈민의 비문화적 상황, 그리고 구조로서의 천황제를 불러왔다. 그 병폐는 민중의 체내를 돌아 뿌리 깊은 노예 구조로 정착했다. (35쪽)



  이로카와 다이키치 님이 쓴 《메이지의 문화》(삼천리,2015)라는 책을 읽으면서 일본 사회와 역사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역사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까요? 일본도 한국처럼 ‘임금님 이름’을 외우도록 시키거나 ‘임금님마다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가르치거나 ‘정치 권력자마다 어떤 전쟁을 벌여서 땅을 얼마나 잃거나 빼앗았는가’를 알려줄까요? 아니면, 일본 사회는 사람들한테 슬기로운 삶을 북돋울 만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까요?



메이지 시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일본의 도회지에 절망하고 있다. 거기서 보이는 것은 악취 나는 권력 의지와 이권을 챙기려는 욕심, 노골적인 돈벌이 근성이 벌이는 추악한 투쟁이었다. (51쪽)


우리가 여태 이름조차도 몰랐던 헌법초안 작성자와 마을 지도자가 모두 한 집안의 가장이자 농민이요 초등학교 교원이며 민중 생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평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59쪽)



  일본 정치나 사회는 자꾸 군국주의로 치닫습니다. 일본이 지난날 역사를 뉘우치지 않는 모습은 일본 정치·사회 권력자한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역사를 제대로 안 가르친다고 할 만하고, 삶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바탕이 제대로 안 섰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이런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이런 뿌리를 찾아낸다면 어떻게 고치거나 가다듬을 만할까요. 일본은 앞으로 아름다운 나라로 거듭나서 아시아뿐 아니라 이 지구별에 평화로운 길을 여는 이웃이 될 만할까요. 한국은 앞으로 아름다운 나라로 다시 태어나서 남북녘 사이뿐 아니라 이웃 아시아 나라들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평화로운 나라가 될 만할까요.


  다른 나라 눈치를 보면서 평화를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평화를 생각해서 평화라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저 나라에서 전쟁무기 한 가지를 줄이니 우리도 줄이자는 생각이어서는 평화를 이루지 못해요. 저 나라에서 새 전쟁무기를 늘였으니 우리도 새 전쟁무기를 늘이자는 생각에 갇히면 앞으로도 평화가 아닌 전쟁에 사로잡힙니다.



봉건 지배 아래에서는 그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야말로 인민은 무학무지의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제는 180도 전환이다. 사회의 폐풍을 교정하여 참된 문명을 낳고 국가의 영광을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인민이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기도 다카요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69쪽)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로 하늘을 난 것은 1903년이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발명, 발견을 거의 군사적인 측면에 이용하고 민간에서 자동차 시대나 비행기 이용은 반세기나 늦어진다. (82쪽)



  《메이지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 사회가 되도록 발판 구실을 했다는 ‘메이지’ 언저리에 정치 권력자가 아닌 ‘시골 지식인과 젊은이와 여느 마을사람’이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는가, 라고 하는 대목을 짚으려 합니다. 정치 권력자 발자취로 읽는 문화나 역사나 사회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밑바탕을 다스리면서 샘솟거나 터져나오려고 하던 문화나 역사나 사회를 읽어서 ‘일본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를 밝히려고 하는 책입니다.


  《메이지의 문화》를 읽으면, 일본 정치·사회 권력은 무척 오랫동안 ‘일본 인민(또는 민중 또는 백성 또는 사람들)’이 못 배우도록 배움길을 가로막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다가 메이지 사회 언저리에 이르러 ‘일본 인민이 학교교육을 밟아야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잘 해내는 심부름꾼(또는 톱니바퀴 또는 부속품 또는 노예)’ 구실을 할 만하다고 깨달아서, 비로소 ‘국민 교육’을 펼친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본 정치·사회에서 ‘인민 무교육’으로 오랫동안 흐르다가 ‘인민 교육(또는 국민 교육)’이 되었을 적에, 정치 권력자는 ‘국정 교과서’를 사람들한테 내밀었다지요. 나라에서 교과서에 적은 대로 배워서, 나라에서 가르치는 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라는 뜻이었을 테지요. 나라에서 가르치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머릿속에 담지 말라는 뜻이었을 테지요.



온화하고 금욕적이며 참을성 강하고 무엇보다도 ‘관리’를 무서워하던 산촌의 인민이 어떻게 다년간의 소극주의를 넘어서 의기양양하게 권력에 맞서 대항할 수 있었을까. 이 비밀은 그들이 자신의 내면적인 도덕관념으로서 민중 도덕을 극한 상태까지 관철하고 그 한계까지 파고들었을 때 비로소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94쪽)


일본인의 지식인도 대중도 어느새 그 네 모서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자에 갇혀,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고통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탄식하면서 죽어 갔다. 그러한 황상의 상황, 더구나 그러한 모든 상황의 대상화를 용납하지 않는 속박의 논리가 대중 측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가공할 만한 일인 것이다. (264쪽)



  정치 권력자가 ‘국정 교과서’ 하나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까닭은 ‘국정 교과서가 가장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국정 교과서가 안 아름다울 뿐 아니라, 아름다움하고 동떨어진 책’이기 때문에 오직 이런 교과서로 아이들을 길들이려고 한다고 느낍니다. 나라에서 엮은 교과서가 ‘아름다운 책’이라면, 나라에서 그 교과서로 배우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배우려 하기 마련입니다. 나라에서 엮은 교과서가 ‘안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에 마치 독재권력을 휘두르려는 몸짓으로 ‘국정 교과서’ 하나로 사회와 역사와 문화와 얽힌 지식을 가두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리하여, 한국 정치·사회에서도 ‘국정 역사 교과서’를 펴내겠다고 하는 흐름이 불거집니다. 학교에서 참다운 가르침을 베풀려고 하는 정책을 내놓지 않고, 좀 엉뚱한 정책을 밀어붙입니다.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정책에는 등을 돌리면서, 아이들을 ‘한쪽으로 치우친 지식’에 옭아매려고 하는 독재 몸짓이 나타납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치라도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이용되고 메이지 43년(1910년)의 국정교과서에 채용되어, 이미 존재하던 메이지 민법의 ‘이에’와는 무관했던 이름도 없도 재산도 없는 대중 가족의 마음속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307쪽)


러일전쟁은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를 대중심리 속에 남겼다. 그것은 조선과 만주의 전쟁터로 갔던 수백만의 일본인이 거기서 직접 중국 민중을 접하고 그들에 대한 확실한 멸시 의식을 남겼다는 점이다 … 민권운동을 탄압한 후 정부는 학교령을 개정하여 ‘교육칙어’를 반포하고 반체제 교육을 단속하는 동시에 교과서를 비롯한 교과과정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체계화에 착수한다. (314, 317쪽)



  책 하나를 놓고 헤아려 본다면, 이른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만 책이 아닙니다. 천 부가 팔릴 동 말 동하는 책도 ‘책’입니다. 이천 부나 삼천 부밖에 안 팔렸대서 이러한 책이 ‘안 아름다운 책’일 수 없습니다. 십만 부나 백만 부쯤 팔려야 ‘아름다운 책’이 되지 않습니다.


  많이 팔린 책은 그저 ‘많이 팔린 책’이고, 적게 팔린 책은 그저 ‘적게 팔린 책’입니다. 첫판도 다 팔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 책은 ‘잘 안 팔린 책’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교육이나 문화 행정을 맡은 일꾼이라면, 국정 교과서 같은 굴레에 스스로 갇히려 하는 몸짓이 아니라, ‘아름다운 책’이 골고루 나올 수 있는 길을 여는 몸짓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한두 가지 책만 읽고 책을 더 안 읽는 바보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람들이 ‘아름다운 책’을 꾸준히 골고루 읽으면서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슬기를 보듬도록 이끄는 참다운 정책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교과서는 여러 가지가 있어야지요. 너무 마땅합니다. 정당도 여러 곳이 있어야지요. 아주 마땅합니다. 대통령은 한 사람이어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지역이나 정당마다 골고루 있어야 할 테고, 공무원도 지역마다 부서마다 골고루 있어야지요.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고토쿠 등이 몸을 던져 제시한 것은 천황제가 자애에 가득 찬 무한 포용의 체계가 아니라 이단 배제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포학한 것이며, 그 화기애애한 그늘에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가혹함을 숨기고 있는 모순 덩어리라는 진실이었다. (327쪽)



  ‘고른 삶’하고 동떨어질 적에 독재가 되거나 군국주의가 됩니다. ‘나누는 삶’하고 멀어질 적에 반민주가 되거나 제국주의가 됩니다. 일본 사회를 들여다보는 인문책 《메이지의 문화》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독재 아닌 평화’로 나아가고, ‘반민주 아닌 민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정치·사회 권력자가 할 일이란 참 많을 텐데 역사 교과서 하나를 바보스레 엮는다고 하는 데에 이렇게 힘을 기울이는 일이란 얼마나 부질없는지 부디 알아차릴 수 있기를 빕니다. 먼 뒷날 역사를 내다볼 수 있기를 빌어요. 오늘날 정치·사회 권력자는 평화와 평등을 이루는 길을 살펴야 하고, 에너지와 식량을 슬기롭게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이런 데에 힘을 쏟아야지요.


  평화와 엇나가거나 민주를 등돌리는 정치 권력이나 사회 권력은 ‘오늘 이곳’에서는 온갖 권력을 휘둘러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듯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고작 다섯 해 뒤에도, 열 해 뒤에도,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도 역사가를 비롯한 ‘생각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권력자가 저지른 어설픈 몸짓을 환하게 알아채면서 ‘새 역사를 쓰리’라 느낍니다. 어제와 모레를 함께 바라보면서 오늘을 곱게 일구는 삶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4348.11.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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