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용 책
신해욱 지음 / 봄날의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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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3



들꽃처럼 수수한 이야기가 바로 문학

― 일인용 책

 신해욱 글

 봄날의책 펴냄, 2015.2.23. 13500원



  어제 아침에 작은아이더러 물을 떠다 달라고 합니다. 작은아이는 그야말로 작은 물잔에 물을 찰랑찰랑 채워서 가지고 옵니다. 자전거가 논둑길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무릎이 크게 다쳤고, 기지도 걷지도 못하다 보니 다섯 살 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킵니다. 오늘 아침에 큰아이한테 물을 떠다 달라고 합니다. 큰아이도 동생처럼 작은 물잔에 물을 가득 채워서 가지고 옵니다. 조금 더 큰 잔이면 좋으련만, 이만큼 마셔도 괜찮습니다.


  여러 날 끙끙 앓으며 물도 밥도 못 먹으며 드러누웠습니다. 밥도 못 짓고 빨래도 못 하고 청소도 못 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놀지도 못 하고, 말 한 마디를 입밖으로 내놓기에도 몸이 아프니 용을 써야 합니다.


  아픈 몸으로 하루 내내 드러누워서 생각에 잠깁니다. 안 아픈 모습을 꿈꾸고, 다 나아서 아이들하고 다시 뛰노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몸이 아파서 원고지 한 장을 쓰고는 삼십 분을 누워서 쉬고, 다시 원고지 한 장을 쓰고는 삼십 분을 누워서 쉬었다는 권정생 님은 어떤 마음이었을는지 돌아봅니다.



수능시험이 있었던 몇 주 전의 어느 날은 새벽까지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데면데면 마주칠 때는 어린 여학생인 줄 알았는데, 고3 수험생이었던가 보다. 시험을 얼마나 망쳤길래 세상이 무너지듯 몇 시간째 우는 걸까. (24쪽)


영화관에 간다는 건 단순히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영화를 둘러싼 공간과 시간을 함께 호흡할 때 진정한 영화적 체험이 완성된다는 것을 나는 광주극장에서 느낀다. (33쪽)



  “아버지, 아버지가 아플 때에는 왜 어머니가 밥을 하고 빨래를 해?” 여덟 살 큰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가 아프면 몸을 하나도 못 쓰니까 어머니가 도와주지.”


  아이들로서는 아픈 몸이 어떠한 몸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아이들로서는 아픈 몸이 어떠한 몸인지 굳이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씩씩하고 튼튼하게 뛰놀아야지요. 무엇이든 하면서 마음껏 놀아야지요.


  어떤 어버이라도 아이를 다치게 하려는 어버이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닥치면 어떤 어버이라도 아이를 감싸면서 제 몸을 던지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엊그제 자전거가 논둑길에서 미끄러질 적에 아이들이 조금도 안 다치기를 바라면서 내 몸을 던졌고, 내 몸을 던지면서 ‘내 몸도 다치지 말자’ 하고 생각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이들 생각만 했습니다.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소설을 펴 들었다. 몇 개의 역을 지날 즈음, 옆에 앉은 여자도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92쪽)


적절한 비유라 생각하며 내 말에 스스로 취해 으쓱해진 나를 퍼뜩 깨워 준 건 뒤이은 질문이었다. “그런데요,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돌직구도 아름답지 않나요? 쉽지만 묵직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들이요.” (133쪽)



  시인 신해욱 님이 종이신문에 여러 해에 걸쳐서 짤막하게 썼던 글을 그러모은 산문책 《일인용 책》(봄날의책,2015)을 읽습니다. 신해욱 님이 쓴 책에는 시인으로서 바라본 사회, 집안 살림꾼으로서 바라본 삶, 여자로서 바라본 이웃, 여기에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바라본 이야기가 흐릅니다.


  산문이란 그렇지요. 꾸며서 쓰는 글은 시도 산문도 아닙니다. 억지로 짓는 글은 문학도 글조차도 아닙니다. 살면서 저절로 녹아들어 흐르는 이야기일 때에 비로소 글입니다. 이웃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삶을 글로 옮겨적기에 산문입니다.



사진의 피사체로서야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 주름살은 얼굴의 골목인 것도 같고 삶의 미로인 것도 같고 시간의 형상인 것도 같다. (172쪽)


남자는 밖에서 무슨 재밌는 일을 겪었는지 활짝 웃으며 여자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여자의 손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랬다. 수화였다. 여자가 나를 향해 펼친 손가락을 잠시나마 오해한 게 무안했다. (195쪽)



  마당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갑니다. 아픈 무릎을 손바닥으로 감싸면서 끙끙거리는데 나비 한 마리가 보입니다. 며칠째 집 바깥으로 한 걸음도 못 떼는데, 마당에서 노니는 나비가 한 마리 보입니다.

  부추꽃이 한창이고, 고들빼기꽃이 피려고 합니다. 모시꽃은 모시잎처럼 푸른 빛깔 꽃을 가득 피우고, 쇠무릎꽃도 쇠무릎잎처럼 푸른 빛깔로 길쭉하게 꽃을 내놓습니다.


  엊그제까지 이 모든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서지도 기지도 못하는 채 드러누워서 하루를 보내야 하니 이 모든 모습을 하나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아예 생각조차 할 길이 없습니다. 마루문을 열고 몇 발짝만 내려가면 만나는 들꽃이지만, 이 들꽃이 이제 너무도 먼 나라입니다.


  아픈 삶을 붙잡아야 하는 이웃들도, 고단한 삶을 날마다 되풀이해야 하는 이웃들도, 힘들고 지친 삶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웃들도, 이녁 둘레에서 피고 지는 작은 들꽃을 쳐다볼 겨를이 없을 테지요.



놀랍다.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많은 여자들이 손수 옷 만드는 기술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다니. 물끄러미 내 손을 들여다본다. 직접 옷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손이다. 사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212∼213쪽)


‘남의 나라’에서 ‘자기 말’의 데시벨을 낮추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걸까 무례한 걸까. 이런 것도 같고 저런 것도 같고. (256쪽)



  신해욱 님 산문책에서 신해욱 님이 스스로 놀랍게 여기듯이,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이 나라 거의 모든 가시내는 옷을 손수 지었고, 이불도 손수 마련했습니다. 옷이나 이불을 돈 주고 사서 쓴다는 생각을 안 했지요.


  집은 어떠할까요?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참말 집도 누구나 손수 지었습니다. 밥도 손수 지어서 먹었지요. 냄비에 올리면 되는 밥이 아니라, 논밭을 일군 뒤 나무를 해서 불을 지피고는 솥을 써서 밥을 지었어요. 이 모든 삶이, 그러니까 ‘자급자족’을 하던 삶은 고작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어른들은 돈을 모아서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어른들은 옷집을 찾아가서 돈으로 옷을 사거, 맛집을 살피면서 맛난 밥을 사 먹습니다. 뜨개질을 익히거나 텃밭을 일구려는 어른이 매우 드뭅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뜨개질이나 텃밭 일구기를 배우지 못합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도 매한가지입니다.



집에 돌아와 단원미술관이 어디에 있나 검색해 보았다. 안산이었다. 김홍도는 안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역시 몰랐던 사실이다. 안산의 단원이라. 그렇다면 세월호에 탑승했던 학생들이 다닌 단원고등학교의 ‘단원’도, 김홍도의 그 ‘단원’이란 말인가. (300쪽)



  《일인용 책》은 신해욱 님 한 사람 삶을 드러내 보이는 책입니다. 말 그대로 “한 사람 책”입니다. 한 사람 이야기가 흐르고, 한 사람 넋이 빛나며, 한 사람 숨결이 바람처럼 감겨듭니다.


  문학은 뭇사람한테 널리 읽히면서 사랑과 꿈을 퍼뜨립니다. 그런데 뭇사람한테 사랑과 꿈을 퍼뜨리는 모든 문학은 언제나 “작고 수수한 한 사람 삶”에서 비롯합니다. 대단하게 살았어야 쓰는 대단한 문학이 아니고, 훌륭하게 살았어야 쓰는 훌륭한 문학이 아닙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꽃처럼 수수한 들꽃 같은 이야기가 바로 뭇사람 가슴을 적실 수 있습니다. 4348.9.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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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5-09-0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출판사 이름까지 무척 마음에 듭니다. 봄날의 책 예뻐라. 예전에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왔던 민중자서전(?)이 참좋았는데 이책도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숲노래 2015-09-04 15:13   좋아요 0 | URL
씩씩한 1인출판사예요.
책을 많이 펴내지는 않지만
알찬 책을 잘 골라서
앞으로도 멋진 출판사로 널리 이야기꽃을 나누어 주리라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