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넋 58. 한국말에 없는 ‘소유격 조사’
― ‘-의’를 쓸 까닭이 없는 까닭
흔히 쓰는 말이면서도 흔히 잊고 지나가는 말이 많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우리는 바람을 늘 마시는 목숨이면서도 늘 바람을 마시는 줄 잊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바람을 늘 마시지만, 참말 바람을 1초라도 안 마시면 죽는다고 여기면서 늘 ‘바람 마시기(숨쉬기)’만 생각한다면 아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늘 쓰는 말을 굳이 더 헤아리지 않기 일쑤입니다. 아주 부드럽게 흐르는 바람이듯이 아주 부드럽게 흐르는 말입니다. 아이와 어른 모두 쉽게 바람을 마시듯이, 아이와 어른 누구나 쉽게 말을 합니다. 많이 배우거나 똑똑하거나 힘센 사람만 숨을 쉴 수 있지 않듯이, 적게 배우거나 조금 어리숙하거나 힘이 여린 사람도 얼마든지 말을 합니다.
‘소머리국밥’이라고 합니다. ‘콩나물해장국’이라 합니다. ‘된장찌개’라 합니다. ‘들꽃’이라 하고, ‘복숭아나무 열매’라 하며, ‘상추쌈’이라 합니다. ‘언니네 이발관’이요 ‘쌀집’이며 ‘전주식당’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하면서 ‘-의’를 사이에 넣는 일이 아예 없다시피 합니다. ‘-의’를 넣는 말투는 그야말로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아예 없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그런데 ‘남의집살이’나 ‘닭의장풀’ 같은 자리에는 ‘-의’가 들어갑니다. ‘-의’를 아예 안 쓰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말을 쓰면서 ‘남집살이’나 ‘달개비’라는 말도 함께 씁니다. ‘-의’를 붙인 제법 오래된 낱말이 있어도 ‘-의’를 안 붙인 훨씬 오래된 낱말이 나란히 있습니다. ‘남의집살이’라는 낱말을 가만히 보면, ‘딴집살이·한집살이’ 같은 낱말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나의집살이’라고 하지 않아요. 이와 맞물려 ‘너의집살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남의집살이’ 같은 말은 언제부터 왜 누구 입에서 먼저 튀어나왔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한국사람은 ‘딴집살이’처럼 말을 짓는 삶이었어요. 이 틀을 안 살피고 ‘-의’를 함부로 넣으려고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한국말에는 ‘소유격 조사’가 없습니다. 왜 없을까요? 처음부터 없었기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한국말에는 처음부터 소유격 조사가 없을까요? 한국말에서는 쓸 일이 없으니까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왜 소유격 조사를 쓸까요? 쓸 일이 있으니 쓴다고도 할 테지만, 쓸 일이 없으나 ‘학교 문법’이나 ‘사회 문법’으로 이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쓴다고 하겠습니다. 서양 말법 틀에 따라 한국 말법을 억지로 짜맞추다가 소유격 조사가 생기고, 일본 말투가 자꾸 스며들면서 소유격 조사를 쓸 일이 불거집니다.
한국말에서 소유격 조사를 쓸 일이 없으나 앞뒷말을 이으면서 ‘ㅅ(사이시옷)’을 쓰기도 하기에, ‘나뭇잎’이나 ‘나뭇가지’처럼 ‘ㅅ’을 넣습니다. 그런데 ‘나무토막·나무젓가락·나무집·나무뿌리·나무눈·나무꽃·나무껍질·나무때기·나무말미’처럼 ‘ㅅ’을 안 넣는 낱말이 무척 많습니다. 앞뒷말을 이으면서 ‘ㅅ’을 쓰기는 하되 ‘ㅅ’조차 그다지 안 쓰는 한국말입니다. 일본사람은 ‘나무껍질’을 ‘木の皮’로 적습니다. 이를 잘못 옮기면 “나무의 껍질”처럼 됩니다. 일본사람은 ‘나무꽃’을 ‘木の花’로 적어요. 이를 잘못 옮기면 “나무의 꽃”이 되고 맙니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야 하면서 학교 문법을 배웁니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의’를 소유격 조사로 여기면서 배웁니다. 어른들이 사회에서 일자리를 얻거나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사회 문법에 따라 ‘-의’를 손쉽게 소유격 조사로 삼아서 퍼뜨립니다.
예부터 한겨레는 ‘밥맛’이나 ‘된장맛’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밥의 맛”이나 “된장의 맛”처럼 말법을 깨면서 쓰기 일쑤입니다. 한국말은 ‘들꽃’이나 ‘멧꽃’이나 ‘숲꽃’이지만, 한국 말법을 잊은 채 “들의 꽃·산의 꽃·숲의 꽃”처럼 잘못 쓰는 사람이 늘고, 이러한 말투가 올바른 줄 여기는 사람마저 나타납니다. 일본 영화 “茶の味”를 한국에서 “녹차의 맛”으로 옮겼는데, 일본 사람은 ‘の’를 넣더라도, 한국사람은 “녹차맛”이나 “차맛”으로 영화이름을 적어야 올바릅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들어온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한자말도 소유격 조사를 부채질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앞서까지 한국에서 여느 사람은 한자말을 쓸 일이 없었고, 지식인이 한자를 쓰더라도 ‘-의’를 사이에 넣어 말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사회와 교육이 모두 식민지가 되면서 ‘-의’를 곳곳에 넣는 글투와 말투가 퍼졌고, 해방이 된 뒤에도 이를 바로잡으려는 물결은 일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끝무렵에 처음으로 ‘우리 글 바로쓰기’ 물결이 제법 일면서 ‘-의’를 바로잡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이내 시들해졌어요. 요즈음은 초등학교이든 중·고등학교이든 대학교이든 사회이든 ‘-의’를 살뜰히 털면서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쓰려고 생각을 가꾸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바람맛을 몰라도 누구나 바람을 마실 수 있습니다. 바람내음을 몰라도 누구나 바람을 쐬면서 살 수 있습니다. 바람을 생각하면서 숨을 쉬는 사람이 참으로 드뭅니다.
말맛을 몰라도 누구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말결을 몰라도 누구나 말을 나누면서 살 수 있습니다. 말을 생각하면서 말을 주고받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대단히 드뭅니다.
‘문체’나 ‘표현 방법’을 바꾸어야 ‘내 글투’가 되지 않습니다. 바람맛을 헤아리듯이 말맛을 헤아릴 수 있어야 ‘내 말씨’가 깨어납니다. 말마다 다른 숨결을 살피면서 읽을 때에, 사람마다 다른 넋인 줄 살피면서 읽습니다. 사람마다 다른 숨결로 살아가는 넋인 줄 살피면서 읽을 때에, 삶마다 다른 숨결이로구나 하고 살피면서 읽을 수 있고, 다 다른 사랑결과 생각결과 꿈결을 느낍니다.
나라마다 ‘쓰는 말’이 다릅니다. 나라마다 ‘쓰는 말’이 똑같다면, 지구별에서 모든 사람이 한 가지 말만 쓸 테지만, 나라마다 ‘쓰는 말’이 다르고, 삶과 넋이 다르기에, 어디에서나 ‘다른 말’을 씁니다. 그래서, ‘관사가 없는 말’이 있고, ‘관사가 있는 말’이 있습니다. ‘관사도 성별을 갈라서 쓰는 말’이 있고, ‘관사를 쓰더라도 성별을 안 갈라서 쓰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유격 조사를 쓰는 말’이 있을 테고 ‘소유격 조사가 없는 말’이 있어요. ‘토씨(조사)와 씨끝(어미)에 따라 달리 쓰는 말’이 있고, ‘토씨와 씨끝이 안 달라지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분사와 현재진행형과 온갖 때매김(시제)’을 낱낱이 가리는 말이 있다면, 이를 하나도 안 가리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이 나라 삶과 넋에 따라서 살펴야 합니다. 영어에 ‘소유격 표현’이 있으니 한국말에도 ‘소유격 표현’이나 ‘소유격 조사’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국말을 제대로 씁니다. 한국말을 한국말답게 배우고 가르쳐야 한국사람 누구나 한국사람답게 삶을 가꾸면서 사랑을 북돋우고 슬기롭게 꿈을 지을 수 있습니다. 4348.4.20.달.ㅎㄲㅅㄱ
(최종규/숲노래 . 2015 - 우리 말 살려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