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맑은 물살 창비시선 137
곽재구 지음 / 창비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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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85



시와 피리

― 참 맑은 물살

 곽재구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5.11.10.



  아침저녁으로 멧새 노랫소리가 싱그럽습니다. 겨울에 듣는 멧새 노랫소리는 추위에 떠는 숨결이로구나 싶다면, 봄에 듣는 멧새 노랫소리는 산뜻하고 상큼한 숨결이로구나 싶습니다.


  이레쯤 앞서부터 우리 집 뒤꼍에서 매화꽃이 터졌고, 엊그제부터 매화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집니다. 아이들은 매화꽃잎을 손바닥 가득 주워서 입김으로 후후 날립니다. 이러더니 다시 꽃잎을 주워 손바닥에 얹어서 또 후후 날립니다.


  떨어진 꽃잎이 많으나 대롱대롱 달린 꽃잎도 많습니다. 이 꽃잎이 모두 지면 천천히 매화알이 익을 테지요.  



.. 무꽃들이 바람에 나부끼면 / 북채 잡은 손끝에서 절로 흰 나비 난다 / 가시내야 속썩는다고 봉초 말지 말아라 / 앞산 숲그늘 뻐꾹새 울음 피 쏟던 바로 그 자리 / 산벚꽃나무 한 그루 속불 지폈으니 ..  (흥타령-남동리 김생임 할아버지가 안성단 할머니에게)



  어제부터 몽실몽실 부풀던 앵두나무 겨울눈도 터집니다. 앵두나무도 나뭇잎보다 꽃송이가 먼저 터집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집 앵두나무에서 꽃송이 하나가 활짝 터지고, 꽃송이 둘이 곧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합니다.


  가까이 다가서서 앵두나무 곁에 서면, 참말 앵두내음이 납니다. 매화나무 곁에 서면 매화내음이 나지요. 살구나무 곁에 서면 살구내음이 나고, 복숭아나무 곁에 서면 복숭아내음이 나요.


  열매를 따서 먹어야 그 열매내음이 나지 않습니다. 나무에서도, 잎사귀에서도, 꽃잎에서도 똑같은 냄새가 훅 끼칩니다. 그러면, 감나무에서는 감내음이 나겠지요? 무화과나무에서는 무화과내음이 날 테고요. 참으로 모든 나무는 저마다 다른 냄새를 훅훅 끼칩니다. 바람결에 제 상그러운 냄새를 그득 담고서 봄날을 환하게 밝혀 줍니다.



.. 산으로 들어간 당숙의 외아들과 / 나는 국민학교 동창 / 늘 혼자 보리피리를 불던 그를 / 동네사람들은 꼭 애비 닮았노라 얘기했지 / 밀입국 십년 만에 영주권을 얻었다던가 ..  (캘리포니아는 따뜻해)



  곽재구 님 시집 《참 맑은 물살》(창작과비평사,1995)을 읽습니다. 조그맣고 조그마한 마을을 찬찬히 돌면서 누린 발자국을 싯말 하나로 갈무리한 이야기로 읽습니다. 싯말 한 마디에는 할머니 목소리가 흐르고, 할아버지 노래가 흐릅니다. 싯말 두 마디에는 뱃사람 노래가 흐르고, 다방에서 물을 파는 아가씨 노래가 흐릅니다. 골골샅샅 어디에나 마을이 있고 집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는 이 사람이 보금자리를 이루고, 저 섬에는 저 사람이 살림을 꾸립니다.



.. 서울 하고도 종로 한복판에 자리한 / 조계사 총무원 건물은 / 다 아시다시피 5층 철근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 1층 출입구는 교도소 철문보다 더 튼튼한 / 쇠문으로 가려 있구요 / 선방 스님들은 이 건물 안에서 목련이 피는지 / 보리수나무가 썩는지 도무지 알 길 없습니다 ..  (자목련)



  시골에는 조그마한 마을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마을은 띄엄띄엄 있습니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논밭도 있지만, 골짜기나 숲이나 봉오리가 있습니다. 마을과 마을을 잇는 들길에는 들노래가 흐릅니다. 들녘에는 작은 새가 둥지를 틀어 새끼를 까고, 풀벌레가 해와 바람을 등에 업고 풀노래를 부릅니다.


  서울에는 동네가 커다랗습니다. 서울에서는 커다란 동네와 동네가 다닥다닥 맞붙기만 합니다. 동네와 동네 사이에 찻길이 널따랗게 있기는 하지만, 자동차만 지나다닐 수 있고, 딱히 노래가 없습니다. 싱싱 가로지르는 자동차는 사람이 이 땅에서 더는 두 다리로 걷지 못하게 막습니다.



.. 아침 저녁 / 방을 닦습니다 / 강바람이 쌓인 구석구석이며 / 흙냄새가 솔솔 풍기는 벽도 닦습니다 ..  (마음)



  시멘트를 부어서 만든 층집에도 사람이 삽니다. 층집 둘레에도 꽃밭이 있습니다. 층집 둘레에 심은 나무는 층집을 허물어 새로 만들려 할 적에 뿌리가 뽑히거나 줄기가 잘리지만,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마흔 해나 쉰 해쯤 도시에서 살아남는 나무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거리나무 목숨과 도시사람 목숨이 엇비슷합니다. 도시에서 쉰 해나 예순 해를 용케 살아남는 사람처럼, 도시에서 쉰 해나 예순 해를 용케 한길을 파며 일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거리나무는 스무 해를 씩씩하게 버티기 어렵습니다. 스무 해나 서른 해를 거리나무로 씩씩하게 버티더라도 해마가 가지치기에 몸살을 앓아요. 도시에서 스무 해나 서른 해쯤 씩씩하게 버티는 사람도 해마다 연봉조정이라든지 구조조정이라든지 정리해고라든지 정년퇴직을 생각하면서 끙끙 앓습니다.



.. 산으로 가는 길에 / 산나리꽃 피었다 / 사내들아 사내들아 / 남녘 사내들아 / 웃통 벗고 나오너라 / 땅덩이 같은 너의 가슴 한복판 / 꽃등 한 송이 꺾어 들고 / 산 넘어 물 건너 / 북녘땅으로 가자 ..  (북춤)



  노래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조그마한 마을에도 노래가 있지만, 커다란 도시에도 노래가 있습니다. 다만, 커다란 도시에서는 자동차 소리에 막히고, 텔레비전 소리에 스러지며, 오늘날에는 손전화 소리에 잦아들 뿐입니다.


  곽재구 님은 남녘에서 마을을 두루 돌면서 싯말을 길어올리고 싶다는 꿈을 피웠다는데, 얼마쯤 돌았을까요. 이 나라 모든 마을에서 하룻밤씩 묵었을까요. 그러면, 이 나라 도시는 동네마다 두루 돌았을까요.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도 사람이 살고, 이야기가 있으며, 노래가 있는데, 이러한 꿈과 사랑은 싯말로 어느 만큼 삭일 만할까요.



.. 어로작업 중에 해양 순시선이 다가오면 / 비닐봉지에 싼 돈봉투 하나 바다에 던진다 / 날치다! 날치가 날아오른다! / 순시선의 박경장이 뜰채로 날치를 채 올린다 / 점에 백원짜리 고스톱 어울려 치며 / 파도보다 작은 섬 꽃섬 간다 ..  (꽃섬 사람들)



  하룻밤을 머무는 곳에서는 하룻밤만 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이틀을 지내는 곳에서는 이틀만 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열흘을 묵는 곳에서는 열흘만 한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하룻밤 묵은 이야기라서 열흘 묵은 이야기보다 덜떨어지지 않습니다. 이틀을 지낸 이야기라서 이태를 묵은 이야기보다 모자라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이야기이든, 우리가 마음을 붙여서 사랑으로 마주한다면 모두 아름답게 태어납니다. 시집 《참 맑은 물살》이 들려주는 ‘참 맑은 사람들’ 이야기는 이 나라 어디에도 고요하게 흐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저 먼 나라가 아닌, 바로 내 곁에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사람은 저 먼 데에 있지 않고, 바로 내 둘레에 있습니다. 네가 아름답고 내가 아름답습니다. 네가 사랑스럽고 내가 사랑스럽습니다. 어디에서나 피리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삶노래가 태어납니다. 4348.3.2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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