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란 무엇인가



  ‘이야기’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먼저 이 낱말이 어떤 뜻인가를 살펴봅니다. 한국말사전에 나온 대로 적자면, “(1)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 (2) 자신이 경험한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남에게 일러 주는 말 (3) 어떤 사실에 관하여, 또는 있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꾸며 재미있게 하는 말 (4) 소문이나 평판”, 이렇게 네 가지입니다. 그리고, ‘옛날이야기’라는 낱말이 있습니다. 이 낱말도 한국말사전에서 뜻풀이를 살펴보면, “(1)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2) 옛날에 있었던 일”,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예부터 사람들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예부터 사람들은 어른이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아이를 앞에 앉히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이녁 아이한테 들려주는데,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아이’는 이녁 딸이나 아들이에요. 그러니,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낳은 딸이나 아들은 무럭무럭 커서 새로운 딸이나 아들을 낳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두 세대’에 걸쳐 이야기를 들려주는 셈입니다.


  지난날에는 어느 겨레이든 서로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삶을 가꾸었습니다. 책이나 글로 지식이나 정보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지구별 어느 겨레이든 이야기로 모든 지식과 정보를 물려주었습니다.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 모든 정보와 지식이 ‘이야기’가 되어 어버이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선물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언제나 삶에서 비롯합니다. 집·옷·밥이란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살림입니다. 먹고 입고 자는 삶을 누리려면 살림을 꾸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사람들은 한집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여러 집이 어우러지는 마을도 있지만, 마을이 되기 앞서는 언제나 한집입니다. ‘한집안’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러한 사람들이 차츰 하나둘 모여 마을이 됩니다. 가만히 보면, 마을이란, 다 다른 ‘한집’이면서도 밑뿌리는 모두 같은 ‘한집’입니다. “씨족 공동체” 같은 말을 쓰기도 하는데, “한집 사람들”은 스스로 뿌리를 내린 시골자락에서 모든 삶을 스스로 짓습니다. 오늘 하루 무엇을 하면서 누리는가 하는 삶부터 짓고, 집이며 밥이며 옷이며 스스로 짓습니다. 웃음을 스스로 짓고, 노래와 춤을 스스로 짓습니다. 이야기 또한 스스로 짓습니다. 모든 삶을 스스로 지으니 이야기를 스스로 지을밖에 없습니다.


  “한집 사람들”한테는 절집이 없습니다. 예배당이 없습니다. “한집 사람들”한테는 우두머리가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나 경제 지도자나 문화 지도자나 교육 지도자가 따로 없습니다. 한집안에서 슬기로운 어른(어르신)이 있을 뿐, 권력을 휘두르거나 이름값을 내세우거나 지식을 뽐내는 사람은 “한집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온갖 ‘이름’은 지난날 “한집 사람들”이 모두 지었습니다. 다만, 오늘날 사회에서는 갖가지 외국말이 넘나듭니다. 갖가지 외국말도 밑뿌리를 따지고 보면 ‘그 외국말을 쓰는 사회에서 지난날 조용히 한집안을 이루던 사람들이 쓰던 말’이겠지요.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는 ‘우리한테 없어서 받아들이는 외국말’이 아니라 ‘우리한테 있지만 스스로 잊거나 잃어서 받아들이는 외국말’이 훨씬 많습니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교육과 같은 테두리에서 권력자가 나타나면서 “한집 사람들”이 짓던 삶과 말과 살림과 이야기를 모두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한집 사람들”은 아예 사라졌습니다. “한집 사람들”이란, 한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 이렇게 모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집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렇게 ‘큰 집안’을 이루면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짓고 하루를 스스로 짓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을까요? ‘세 세대’가 모여서 사는 집은 더러 남았지만, ‘세 세대’뿐 아니라 ‘밥·옷·집’을 스스로 짓는 집은 이제 없습니다. 이 때문에 이 나라에는 ‘이야기 짓기’도 없고 ‘이야기 물려주기’도 없습니다. 이야기를 짓지 못하고, 이야기를 물려주지 못하니, 아주 마땅히, 외국말을 받아들여서 ‘오늘날 새로운 문화나 문명을 가리킬 낱말’로 삼을 수밖에 없는 얼거리가 됩니다. 우리가 예부터 쓰던 말로 얼마든지 새로운 문화나 문명을 가리킬 수 있지만, 우리는 스스로 생각을 잃었고, 생각을 다스리는 마음을 잃었습니다.


  이야기는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말로 나타납니다.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말이 모두 이야기입니다. 꽃 한 송이한테 붙이고 나무 한 그루한테 붙이는 이름도 모두 말이면서 이야기입니다. 둘째, 노래로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이든 놀면서 부르는 노래이든, 모두 이야기입니다. 셋째, 춤으로 나타나는 이야기예요. 즐거울 때나 슬플 때나 몸을 살몃살몃 움직이다가 힘차게 휘두르는 춤사위가 바로 이야기입니다. 넷째, 마음으로 나타나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으로 나타나는 이야기는 꿈과 사랑이라는 모습으로 피어납니다.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란 삶을 아는 사람입니다. 삶을 아는 사람이란 스스로 하루를 짓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난날에는 “한집 사람들”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작은 집 살림”이 바로 배움터이자 마을이요 온누리였습니다. 깊은 멧골에서 조용히 홀로 살림을 일구던 옛 시골사람은 따로 학교를 안 다니고 학문이나 책을 몰랐어도 스스로 삶을 짓고 삶을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집이 바로 학교요 사회이자 나라였으니까요.


  마을이 커지고, 커진 마을에 따라 고을이 생기며, 커진 고을이 어우러진 고장이 나타나면서, 어느새 정치권력을 거머쥐려는 우두머리가 나타났고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사회가 어지럽게 흐릅니다. 어지러운 사회를 아름답게 다스리고픈 뜻으로 부처님 같은 이들이 나타납니다. 부처님 뜻을 섬기려는 절집에서는 어른(큰스님)이 아이(갓 절집에 들어온 스님)한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절집 어른이 절집 아이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는, 불교라는 종교가 중국에서 들어온 만큼 중국말로 ‘화두’라는 낱말을 씁니다. ‘화두’란 ‘이야기’입니다. 먼 옛날부터 지구별 어느 겨레에서나 스스로 삶을 짓고 사랑을 지으며 꿈을 짓던 이야기가 바로 절집에서 일컫는 ‘화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절집에서도 ‘이야기’를 찾거나 깨달을 수 있는 한편, 나 스스로 내 삶을 가꾸고 일구면서 짓는 몸가짐이 된다면, 절집에 드나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스스로 ‘이야기’를 찾고 지으며 누려서 나눌 수 있습니다.


  ‘이야기 찾기(화두 찾기)’란 ‘삶찾기’입니다. 삶찾기란 ‘길찾기’입니다. 길찾기란 ‘마음찾기’이고, 마음찾기란, 내 마음이 나아갈 아름다운 곳을 바라보는 일이니 ‘사랑찾기’가 된다고 느낍니다.


  지난날 여느 수수한 시골사람이 스스로 삶을 지어서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준 까닭을 생각합니다. 어버이요 어른으로서 스스로 이녁 삶을 사랑하기에 이야기를 짓습니다. 어버이요 어른으로서 스스로 지은 즐거운 이야기를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곁에 두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사랑스러운 말에 담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호미질과 낫질은 춤사위와 같습니다. 따로 빙글빙글 웃으면서 어깨춤을 추기도 하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매무새가 모두 춤사위입니다. 밥을 짓든 비질을 하든 모두 춤사위입니다.


  아이들은 춤사위를 어버이 곁에서 익힙니다. 아이들이 뛰노는 몸짓은 스스로 가다듬는 춤사위입니다. 이야기란 무엇일까요? ‘판타지’나 ‘창작’이나 ‘화두’여야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야기는 이야기입니다. 살면서 스스로 짓는 꿈과 사랑이 모두 이야기입니다. 아름다운 길을 스스로 찾으면서 짓는 말과 이름과 생각이 늘 이야기입니다. 4347.9.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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