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무속논고 - 남국의 무속
진성기 지음 / 민속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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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기 님 이 책은 목록에 없는 만큼

아직 절판 안 된 다른 진성기 님 책에

이 느낌글을 걸쳐,

고마운 마음을 바칩니다.

 

..

 

 

사라진 책을 읽는다 2

 


쓰레기 버릴 때에 문화는 없다
― 제주민속의 멋 1
 진성기 글·사진
 열화당 펴냄, 1979.12.30.

 


  요즈음은 퍽 적은 돈으로 차릴 만한 수수한 밥상 이야기를 다루는 ‘밥책’이 곧잘 나옵니다. 예전에는 수수한 밥상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름부터 ‘밥책’이 아닌 ‘요리서적’이었습니다. 수수한 사람들이 먹는 수수한 밥이 아니라, 궁중사람이 먹는, 또는 임금님이 먹는 밥을, 아니 ‘요리’를 다루었습니다. ‘요리책’이라 할 적에는 여느 사람으로서는 꿈꾸기 어렵거나 손이 너무 많이 가서 도무지 여느 때에 마련해서 먹기 어려운 ‘요리’를 다루곤 합니다. 때때로 남다른 밥을 차릴 수 있다지만, 날마다 여러 끼니를 이처럼 차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집일을 하고 아이를 돌보며 밭일이나 논일에다가 길쌈이라든지 방아찧기라든지, 끝없이 갖은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남다른 밥’을 아무 때나 덜컥덜컥 차릴 수는 없어요.


  생각해 보면, 한갓지게 밥상을 받을 수 있던 기득권이나 권력자 아니고서야 ‘전통요리’라는 ‘궁중요리’를 먹을 수 없습니다. 밥어미가 따로 있고, 심부름꾼이 따로 있으며, 애보개가 아이를 도맡아 돌보던 기득권이나 권력자 들이 먹던 요리를 역사나 문화로 쳐서 ‘전통요리’로 여기곤 해요.


  그러니까, 여느 살림집에서 으레 하는 ‘여느 밥짓기’와 ‘여느 반찬하기’와 ‘여느 국 끓이기’를 보여주는 ‘여느 밥책’은 뜻밖에 거의 안 나왔어요. 시골에서 수수하게 살아가며 수수하게 먹는 밥 이야기는 문화로도 역사로도 여기지 않았습니다.


.. 가죽감태는 겨울철에 주로 한라산의 노루사냥 때 많이 사용하여 왔다 … 가죽보선은 쇠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겨울철 사냥 때가 아니면 신지 않으며, 평상시에는 집안의 아궁이 위의 벽 같은 데에 매달아 둔다. 아궁이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가 쏘여지므로 좀이 스는 것을 예방하는 생활의 슬기라고 보여진다 … 가죽보선을 신고 이 위에 다시 초신(짚신)을 신는데, 그렇게 하면 겨울철 한라산 속의 추위는 거뜬히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  (9, 11쪽)


  곰곰이 돌이켜봅니다. 여느 살림을 꾸리는 여느 사람들로서는 애써 밥책이든 요리책이든 들출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며 익힌 대로 밥을 하고, 집집이 이어온 밥차림을 몸으로 배웁니다. 손으로 마련해 손으로 맛을 내지, 조미료나 요리책으로 마련하거나 맛을 내는 밥이 아닙니다. 입에서 입으로 밥을 물려줍니다. 몸에서 몸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삶에서 삶으로 밥을 물려주고 물려받아요.


  이제는 모조리 사라졌다 할 만한 지난날 일노래나 놀이노래는 어느 한 번도 ‘문화 다루는 책’에 적바림되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일본사람이 거의 처음으로 적바림하다가 나중에야 한국사람이 다시 적바림했어요. 한겨레붙이 스스로 한겨레붙이 삶과 넋과 말과 꿈을 고이 돌보지 않았어요. 예전에도 이러했고 오늘날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으레, 맛집이니 멋집이니 하고 따지거나 찾지만, 막상 ‘내 어머니가 내 할머니한테서 배우고, 내 할머니는 또 이녁 어머니한테서 배운 밥’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짚으면서, ‘날마다 우리 집에서 먹던 여느 밥’이 무엇인가를 더듬는 일이란 몹시 드뭅니다.

  똑같은 밥하기라 하더라도 집집마다 밥물 맞추기가 다릅니다. 쌀을 일거나 씻을 때에도 물맞춤과 비빔질이 다릅니다. 밥을 안치고 불을 넣는 모양새가 다릅니다. 밥을 마친 다음 뜸들이기가 다르며, 주걱으로 섞어서 푸는 매무새가 달라요.


  이에 앞서 물맛이 고을마다 달라요. 바람맛이 마을마다 달라요. 바닷마을과 숲마을과 들마을이 쌀맛이 다릅니다. 집집마다 손맛 또한 다르지요.


  우리네 밥삶을 헤아린다는 문화학자나 문화인류학자 가운데, 또 요리연구가 가운데 이렇게 다 다른 ‘밥하기 매무새’를 낱낱이 가누면서, 왜 어찌하여 어떻게 어느 대목이 얼마나 다르면서 저마다 뜻과 즐거움이 깃들었는가를 살피는 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무슨무슨 통계를 내고 임금님 통치 햇수를 따지고 연표니 도표니를 만들지만, 막상 여느 살림집이 김치를 담글 때에 몇 포기를 담고, 배추는 크기가 얼마나 되고 무게는 어떠하며, 김치속으로 넣는 가짓수라든지 손질하는 품과 겨를이라든지, 김치를 담글 때에 들이는 푸성귀를 밭에서 일굴 적에 얼마나 걸리며 어떻게 거두어 건사하는지를 두루 살필 줄 아는 역사학자나 요리학자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갈옷’이란 ‘감옷’을 뜻하며, ‘감’은 ‘갈색’이란 데서 온 말일 것이나 한자말은 아닌 것이다 … 제주도사람이면 누구나 별다른 기술은 익히지 않더라도 이 갈옷을 손쉽게 짜고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작업복이 이 고장 농어민의 생활에 얼마나 필요불가결한 것이었으며, 또한 일의 능률을 올리는 데도 큰 구실을 해 왔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 이 ‘갈옷’은 보통 6월과 7월 사이에 풋감이 익어 가는 시기를 맞아 여러 가지 옷감에 이 풋감의 떫은 물을 짜내어 염색한 것이다 … 제주도 남신(나막신)의 발굽 형태는 돌길을 멀리 걷는 데도 피곤하지 않고 걸음에서 경쾌한 율동을 일으켜 주게 되어 있다 ..  (17∼18, 33쪽)


  궁중사람 삶도 문화입니다. 틀림없이 궁중사람 삶도 문화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난날 여느 흙지기 삶도 문화입니다. 흙지기 삶 또한 어김없이 문화입니다.


  지난날 한겨레붙이 삶자락을 더듬는다면, 궁중사람은 아주 적었고, 거의 모두가 흙지기입니다. 양반은 몇 안 되고 머슴이나 밥어미가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궁중사람이나 양반 삶자락만 이야기하고 적바림합니다. 워낙, 글을 배워 책을 쓰는 사람이 궁중사람 아니면 양반일 테니까 어쩔 수 없다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배운 사람이니 지식인이니 권력자이니 교수이니 기자이니 하는 사람만 글을 배우지 않습니다. 여느 살림 꾸리는 여느 집에서도 글을 익혀 신문도 읽고 책도 읽습니다. 잘난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이녁 삶을 글로 쓸 만합니다.


  이제는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을 붙여 몇몇 훌륭한 장이를 일컫습니다만, 나무집을 짓거나 질그릇을 굽거나 궁중옷을 깁거나 종이를 뜨거나 해야 인간문화재이지 않습니다. 날마다 먹는 밥을 짓고 날마다 입을 옷을 기우며 날마다 지내는 집을 쓸고닦는 사람 누구나 사람문화재예요. 아니, 사람보배입니다. 사람빛이에요.


  옛 어머님들이 쓰던 걸레 한 장이야말로 고마운 문화재입니다. 먼지떨이 하나가, 빗자루 하나가, 밥그릇 하나가, 숟가락 하나가, 섬돌 하나가, 짚신 하나가, 댕기 하나가, 부젓가락 하나가, 문고리 하나가, 새끼줄 한 꾸리가 모두 문화재요 문화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우리 삶이요 빛이니까요.


  오늘로 치자면 무엇이 문화재이거나 문화라 할 만할까요. 까만 비닐봉지? 손전화? 낡은 셈틀이나 자판? 망가진 빨래기계나 라디오? 빈 페트병나 소주병? 오늘날 우리 삶에서는 무엇을 문화재나 문화로 여길 수 있으려나요?


  해묵은 담배갑이나 우유병이나 복권이나 우표나 이름표나 교과서가 문화재가 되기도 합니다. 예전에 누구나 골목에서 갖고 놀던 딱지나 구슬이 꽤 비싸게 사고팔리기도 합니다. 어쩌면, 문화재이기 앞서 골동품처럼 되지 않느냐 싶은데, ‘추억’이라는 이름을 걸어 ‘화폐경제’에 걸맞게 돈벌이를 하는 연모가 되는 셈입니다. 살림살이마다 배거나 스민 이야기를 나누기 앞서 돈값이 먼저가 됩니다.


.. ‘봇디창옷’이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처음으로 입게 되는 옷의 한 가지로서 … 봇디창옷의 소재를 삼베로 하는 것은, 삼베가 연약한 아기의 살결을 튼튼하게 한다는 데 연유한다고도 한다 … ‘애기구덕’은 아기를 눕혀 재우는 요람이다. ‘구덕’이란 대바구니를 말한다 … 구덕의 높이 중간 부분을 끈으로 얽어매어 그물을 만들고, 그 위에 보릿대를 깔고, 다시 그 위에 요에 해당하는 헝겊을 깐 다음 아기를 눕힌다. 보릿대를 깐 것으로 아기의 체온이 조절되며 오줌을 싸도 아래로 새어나와 버린다 … 제주도의 어머니들은, 애기를 재우기 위해 입으로 노래를, 발로는 애기구덕을 흔들며, 손으로는 길쌈을 하는 등, 발과 입과 손이 제각기 다른 일을 동시에 해내는 것이다. (48∼49, 61, 64쪽)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에는 쓰레기가 없습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생활문화’일 테고, 쉬운 말로 하자면 ‘삶문화’요 ‘삶빛’이며 ‘삶’일 텐데, 생활문화이든 삶문화이든 삶이든, 살림살이를 버리는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오래오래 쓰고, 두고두고 건사하며, 길이길이 물려줍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재활용’이나 ‘재사용’일 터이나, 이런 어려운 말은 모르더라도 따로 버릴 것이 없습니다. 궁중사람이나 양반한테는 쓰레기가 있지만, 여느 흙지기한테는 쓰레기가 없습니다. 흙을 돌보는 사람이 수천 수만 해쯤 살림을 이었는지 수십만 수천만 해쯤 살림을 일구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흙지기가 쓰레기를 만들어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없습니다. 흙지기는 모든 밥과 옷과 집을 숲에서 얻은 뒤, 즐겁게 누리다가, 숲에 거름으로 돌려줍니다. 이와 달리 궁중사람이나 양반은 이녁 물건을 숲에서 얻지 않아요. 그러니, 궁중사람과 양반은 늘 쓰레기를 낳습니다. 궁중사람과 양반이 남긴 쓰레기를 오늘날에 와서는 ‘문화재’로 삼지만 말이에요.


  쓰레기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사람은 바로 오늘 우리 도시사람입니다. 도시가 생기면서 쓰레기가 생기고, 스스로 흙을 일구지 않는 동안 쓰레기가 넘칩니다. 전기 먹는 물건을 돈으로 사서 쓰는 때부터 쓰레기가 흘러넘칩니다. 자동차를 몰고 회사를 다니며 대학교를 마치는 사이 갖은 쓰레기가 춤을 춥니다.


  여느 도시사람은 날마다 먹고 마시는 밥뿐 아니라 똥오줌마저 쓰레기입니다. 차려서 먹는 밥을 말끔하게 비워 밥쓰레기 한 알 안 나오도록 하는 도시사람이 있는가요. 먹은 밥을 똥이나 오줌으로 내놓을 적에 똥거름·오줌거름이 되도록 애쓰거나 마음쓰는 사람이 있는지요.


  삶부터 삶이라기보다 죽음입니다. 삶이 삶답지 못하면서 쓰레기만 낳습니다. 이런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삶이라 하겠으며, 어떠한 삶인지 알쏭달쏭한 터에 무슨 문화를 밝힐 수 있겠습니까. 영수증도 차곡차곡 모으면 놀라운 ‘기록’이 됩니다만, 문화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전기세 고지서도 하나하나 갈무리하면 엄청난 ‘기록’이 될 테지만, 문화는 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수많은 신문과 잡지와 인터넷 ‘기사’는 ‘기록’입니다. 어마어마한 정보들은 하나같이 기사이면서 기록입니다. 그렇지만, 이들 신문 기사나 잡지 기사 가운데 ‘문화’가 될 만한 ‘글’은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습니다. 어쩌면 ‘역사’로 갈무리할 수 있겠으나 ‘삶’이라 말하기는 힘듭니다.


.. 먼 옛날부터 높은 산과 푸른 바다에서 어떻게 활동했으며, 그 활동이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 내려왔나 하는 전통의 문제를 놓고 골똘한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 우리가 우리끼리 서로 밀고 끌고 일하는 것이 그 얼마나 보람된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  (94∼95쪽)


  쓰레기를 버릴 때에는 문화가 없습니다. 쓰레기가 나오는 살림집은 살림도 집도 아닙니다.


  즐거이 살다가 즐거이 죽을 수 있어야 할 목숨이요 사람입니다. 누구나 고맙게 살다가 고맙게 죽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삶이며 죽음이라 말하고, 이러한 삶과 죽음을 문화나 역사로 아로새깁니다. 이야기 있는 삶이자 죽음이 되며, 이야기 있는 삶이자 죽음은 곧 아름다운 목숨이기에, 저마다 너른 이야기를 품습니다. 너른 이야기를 품는 사람들은 저마다 사뭇 다른 문화입니다.


  살림 이야기를 길어올리기에 삶문화입니다.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기에 삶빛입니다. 살아숨쉰 나날을 돌이키기에 삶이에요. 흙을 일구고 고기를 잡으며 푸나무와 벗삼으면서 먹을거리와 땔감과 보금자리를 얻는 나날은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공장을 세워 값싼 물건을 척척 찍는 일은 돈벌이는 되지만, 삶이나 문화는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두 다리로 서서 두 손을 움직이며 살림을 꾸릴 적에 비로소 삶이면서 문화입니다. 손을 쓰고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아니, 쓰레기가 나올 수 없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니까 쓰레기가 태어나고, 돈이 아닌 삶을 꾸리는 사람한테서는 사랑과 믿음과 아름다움이 배어나옵니다.


.. 어쩌면 농촌의 피서는, 도시인이 선풍기나 에어컨으로 몸을 식히는 방법과는 대조적으로,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사딧소리(김매는 소리)로 김매는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나무방아도 그 기능을 점차 잃게 되어, 농촌에서는 한때 이 방아를 소의 쇠죽통으로 쓰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유행은 돌고돌아 근래에 와서는 고급주택의 고급골동품으로서 안방 응접실에 옮겨지면서 귀중한 테이블 노릇을 하게 되었다. 천 년 동안이나 자랐을 아름드리 나무가 잘리워 남방아로 만들어지고, 농촌 생활의 귀중한 연장으로서 쓰임을 다할 때 들려주던 방아 찧는 노래의 흥겨운 가락, 이 가락이 남방아를 테이블로 사용하고 있는 현대인의 귀에도 들릴는지 ..  (27, 31쪽)

 


  제주사람 넋을 갈무리한 조그마한 책 《제주민속의 멋 1》(열화당,1979)를 읽습니다. 이 조그마한 책을 쓴 분은 제주섬에 제주민속박물관을 1964년에 세운 진성기 님입니다. 제주섬에서 1936년에 태어나 1958년부터 제주사람 살림살이와 이야기와 말을 그러모으는 일을 했습니다. 제주민속박물관 또한 진성기 님 혼자서 일구어 열었습니다. 1958년부터 등사판으로 《제주도민요》와 《제주도속담》과 《남국의 설화》 같은 자료책을 내놓았고, 1970년대에 이르러 ‘열화당미술문고’로 《제주민속의 멋》 두 권을 내놓았으며, 《보배를 지키는 마음》(열화당,1982)을 써내어 제주사람 살림살이를 그러모으며 제주민속박물관을 꾸리던 눈물과 웃음을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 사람들은 제사를 기회로 해서 귀신도 위하고 이웃도 사귀는, 다시 말하면 귀신도 즐기고 사람도 즐기는 복합적인 의미의 행사라고 할 수 있다 … 통통하면서도 귀엽게 생긴 아이들을 만나면, 이곳 노인네들은 “어! 그놈 부시개기같이 북시락하다.”고 칭찬하기도 하는데, 이렇듯 부개기(씨앗주머니)의 통통한 맵시는 귀엽고 앙징스러운 매력이 있다 .  (39, 50∼51쪽)


  이 땅에 “서울살이 멋”이나 “부산살이 멋”을 갈무리할 사람이 있는가요. 이 땅에 “강릉살이 멋”이나 “고흥살이 멋”을 그러모으는 사람이 있을까요. 임금님이나 양반님들 노리개 아닌, 수수한 여느 시골사람 흙삶을 가꾸던 살림살이를 헤아리면서 “사람살이 멋”을 들려줄 사람이 있으려나요.


  가만히 보면, 고장말이나 고을말이나 마을말이나 집말을 알뜰히 지키는 사람조차 없습니다. 신문과 방송 때문에, 학교와 책 때문에, 아주 빠르게 고장말과 고을말과 마을말이 사라지고 집말이 스러집니다. 말높이나 말씨로 살피는 고장말조차 흐릿합니다. 고장과 고을과 마을마다 다 다르게 가리키던 풀이름과 나물이름이 모조리 잊혀집니다. 학자들은 이런 이름을 캐거나 모으려고 부산했지만, 정작 수많은 풀이름과 나물이름이, 물고기이름과 벌레이름이, 나무이름과 새이름이, 마을이름과 들이름이, 표준말과 한자말에 밀려 없어집니다.


  어느새 시골살이가 쓰레기처럼 버려진다고 할까요.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는 몽땅 도시로 가서 돈벌이 일만 찾고, 시골에는 늙은 할매와 할배만 남아서 이녁이 언제 흙으로 돌아갈까만 손꼽아 기다리는 셈이 된다고 할까요.


  예부터 논일은 가을에 갈무리한 나락 가운데 씨나락(볍씨)을 따로 건사해서 이듬해 봄에 모를 내어 새로 심으며 했습니다. 수천 해나 수만 해나 수십만 해에 이르도록 고장과 고을과 마을과 집마다 ‘스스로 돌보고 건사하던 씨앗’이 있었어요. 시골에서 씨앗을 지킨다 할 적에는 삶, 곧 문화를 지키는 셈입니다. 시골에서 씨앗을 모두 중앙정부(농협)와 재벌(다국적 씨앗재벌)한테 빼앗겨 돈을 주고 해마다 새 씨앗을 사다가 심어야 한다면, 시골에는 삶도 문화도 모두 빼앗기거나 짓밟힌 셈입니다. 농협이나 씨앗재벌한테서 사들여 쓰는 씨앗은 화학비료와 화학농약이 아니고는 제대로 자리지 않아요. 흙일을 하면 할수록 비료푸대와 농약병 쓰레기가 나와요. 게다가 흙을 비닐로 덮으며 비닐 쓰레기가 나와요. 도시도 쓰레기투성이가 되는데, 시골도 쓰레기밭이 돼요. 쓰레기가 나뒹굴면서 플라스틱 그릇을 쓰고, 플라스틱 그릇은 햇볕에 바래 쉬 망가지면서 새로운 쓰레기 돼요. 독재정권이 부추긴 새마을운동 바람 때문에 지붕을 슬레트와 시멘트기와를 얹었는데, 이 또한 새삼스레 쓰레기 돼요. 짚으로 잇던 지붕은 한 해나 두 해마다 걷어서 논밭에 내놓아 거름으로 삼았지만, 슬레트도 시멘트기와도 모두 쓰레기가 될 뿐입니다. 요즈음 많이 올리는 양철기와도 서른 해나 쉰 해쯤 지나면 모조리 쓰레기가 됩니다.


.. 그밖에도 우장은 물건을 덮어 두는 데도 쓰인다. 제주민의 조상이 자연물을 재료로 해서 슬기롭가 만들어 놓은 이 우장은 편리하고 실용적이기 때문에,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많이 애용되어 온 생활필수품 중의 하나이다 … 소를 기르는 농가에는 대개 소의 진드기를 제거하는 기구의 하나로서 ‘부그리글갱이’라는 일종의 빗을 갖추어 놓고 있는데, 이 부그리글갱이로 진드기를 긁어내릴 때마다 쇠털이 조금씩 빠져나오게 된다. 농부들은 이렇게 뽑혀 나오는 쇠털을 모았다가 분량이 많아지면 이것을 가지고 벙거지를 만드는 것이다. (68∼69, 86쪽)


  박물관 으리으리하게 지어 지난날 흙지기가 빚은 옷이나 살림살이를 모신다고 해서 문화재나 유물이 되지 않습니다. 풀에서 얻은 실로 짠 옷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풀이 돋을 거름이 되어야 옳습니다. 옷은 새로 돋은 풀에서 새로운 실 얻어 새롭게 지어서 입어야 옳습니다. 바구니도 둥구미도 섬도 씨오쟁이도, 해마다 새로운 짚으로 새롭게 엮어야 맞습니다. 박물관에 유물로 가두어 둔대서 유물이 안 되고 문화재란 이름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문화재가 되자면,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내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절구질을 하고 방아를 찧으며 베틀을 밟을 적에 문화와 문화재가 됩니다. 우리 삶에서는 죄 사라졌는데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짓는대서 역사나 문화로 남지 않아요. 이를테면, 골목동네를 모조리 삽차로 부수어 아파트만 올려세운 뒤 ‘달동네박물관’ 짓는대서 골목문화가 남을까요? 구경거리는 남겠지만 삶이나 문화는 안 남습니다.


  조그마한 이야기책 《제주민속의 멋》은 바로 이 대목을 건드립니다. 살아서 싱그러이 숨쉬는 이야기 아닌 박물관에 가두는 유물로는 아무런 이야기가 샘솟지 않는다고 밝힙니다. 박물관장이나 박물관지기나 박물관 일꾼 어느 누구도 새끼를 꼬지 못하면서 여느 시골사람 짚살림 잔뜩 그러모으면 어떤 문화나 역사가 될까요? 어떤 이야기 들려줄 만할까요?


  날마다 지어서 먹는 밥이 문화입니다. 날마다 아이들과 복닥이며 노는 하루가 역사입니다. 날마다 하늘숨 마시고 빗물 맞으며 흙 만지고 밟는 삶이 교육입니다. 쓰레기 아닌 이야기 있는 삶이 문화입니다. 문명이나 물질이 아닌 사랑과 꿈이 감도는 이야기가 웃음꽃으로 피어날 때에 비로소 문화요 역사이며 교육입니다. 4346.1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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