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 인권 운동가 오창익의 거침없는 한국 사회 리포트
오창익 지음, 조승연 그림 / 삼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고흥에만 있는 아름다움이란
[시골사람 책읽기 006] 오창익,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삼인,2008)

 


  순천에 있는 헌책방으로 마실을 다녀오려고 읍내로 나갑니다. 읍내 우체국에 들러 편지 두 통을 부칩니다. 우체국에서 나오다가 걸상 옆에 놓인 〈고흥 군민광장〉이라는 ‘고흥군 소식지’가 있어 한 부 집습니다. 큰아이하고 읍내 버스역으로 걸어갑니다. 길가에는 마을에서 딴 유자를 파는 할머니들이 줄지어 앉아 손님을 기다립니다. 굵고 노란 유자가 고운 내음 퍼뜨립니다.


  순천 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며 〈고흥 군민광장〉을 읽습니다. 유자밭 사진이 실린 겉장을 넘깁니다. 모두 16쪽짜리 ‘고흥군 소식지’인데, 겉장 사진과 끝장 고흥 지도를 뺀 14쪽에 걸쳐 ‘고흥군수’님 사진이 자그마치 18장 실립니다. 〈고흥 군민광장〉은 이름 그대로 ‘군민광장’이니 군민 이야기가 실려야 마땅할 텐데, 정작 군민 이야기는 한 줄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군청에서 꾀한 행사 이야기만 열네 쪽에 가득할 뿐입니다.


  이를테면, 고흥에서 가을날 가을걷이를 한 농사꾼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는 한 줄로도 실리지 않습니다. 고흥에서 바지락을 캐거나 김을 거두거나 매생이를 돌보는 바닷가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 또한 한 줄로도 나오지 않습니다. 고흥에서 살아가며 책을 내놓은 사람들 이야기라든지, 문학을 빚거나 문화를 나누는 사람들 이야기라든지, 고흥에서 예쁜 보금자리 돌보며 어여삐 살아가는 ‘여느 군민’ 이야기는 한 줄로도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고흥에서 살기 앞서 충청북도 음성에서 다섯 해를 살았고, 이에 앞서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일 때문에 서울에서 아홉 해를 살기도 했습니다. 세 군데 다른 터에서 나오던 ‘지역 소식지’를 돌아보면, 음성에서든 인천에서든 서울에서든 군수나 시장이나 군의회나 시의회 이야기가 꽤 크게 실리기는 하더라도, 군민이나 시민 목소리라든지, 군 역사와 문화라든지 시 역사와 문화를 밝히는 글이 한두 쪽이라도 깃들기 마련이었어요. 〈고흥 군민광장〉처럼 온통 군수님 이야기로만 가득한 지역 소식지는 처음 봅니다.


.. 국민교육헌장을 배우고 외우는 일도 웃기지만, 글자 수까지 외우게 하면서 그걸 ‘도덕’ 교육으로 생각한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도대체 뭐가 들어 있는지 지금도 궁금하기만 하다 … 한국에서 교육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국민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 어린 학생, 청소년들이 밤샘 노동으로 내몰려야 하는 나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은 많은 나라들이 일찍이 깨달은 바다 … 조교 제도를 왜곡한 가장 큰 책임은 역시 교수들에게 있다. 조교들을 종처럼 부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얼굴을 들고 학문을 가르칠 수 있는지 가끔은 신기하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이해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학문을 연구하고 강의를 한다는 것인지 의아하다 ..  (21, 44, 71, 160쪽)


  다도해 국립공원이 아니더라도 정갈하고 어여쁜 고흥군에 핵발전소를 들이밀려던 움직임은 지나갔고, 뒤이어 화력발전소를 밀어붙이려던 움직임도 지나갔습니다. 고흥에서 나고 자라 서울이나 이웃 도시로 떠난 분들은 고흥이 얼마나 정갈하고 어여쁜가를 새삼스레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서울이나 다른 도시에서 살다가 고흥으로 들어와 살아가는 사람도 고흥이 한국에서 얼마나 정갈하고 어여쁜가를 남달리 느끼리라 생각해요.


  김 양식을 해서 돈을 얼마나 번다든지, 친환경 농사를 짓거나 어떤 높은소득 농사를 지어 돈을 얼마나 번다든지, 하는 대목은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김을 거두어 돈을 만지든, 흙을 일구어 돈을 얻든, 땅과 햇살과 바람과 물과 숲이 정갈하고 어여쁘니까, 이처럼 살림을 꾸릴 수 있습니다. 정갈하지 못한 땅과 햇살과 바람과 물과 숲이라 한다면, 오늘날처럼 고흥 갯것·뭍것·바닷것이 두루 사랑받을 수 없으리라 느껴요.


  우리 식구가 고흥으로 들어와 살기로 한 까닭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첫째, 고흥에는 고속도로가 들어오거나 지나가지 않습니다. 자가용을 몰지 않는 우리 식구한테는 안타깝게도 2012년 12월에 고흥으로 들어오는 나들목이 생긴다고 하는데, 고흥이 고흥답게 정갈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면, 바로 고흥으로 들어오는 길목이 좁고, 고속도로가 지나가지 않아서입니다. 고속도로가 지나가거나 고속도로가 가까이 있는 다른 시·군은 바람이 매캐하고 햇살이 눈부시지 않습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란 바람과 햇살을 아주 더럽히니까요. 고흥은 고속도로 피해를 안 받는 ‘한국에 몇 안 되는, 어쩌면 꼭 한 군데밖에 없다 할’ 아주 아름다운 시골입니다.


  둘째, 고흥에는 골프장이 없습니다. 골프연습장 비슷한 시설이 한 군데 있는 듯하지만, 골프장은 없습니다. 땅이 그리 넓지 않다는 한국이지만, 골프장 넓이는 ‘땅넓이하고 견주어 지구별에서 가장 넓다’고 해요. 한국은 봄부터 겨울까지 뚜렷하다고 하는 나라예요. 이런 나라에서 골프장 잔디밭을 건사하자면 농약을 어마어마하게 뿌리고, 지하수 또한 엄청나게 뽑아서 써야 해요. 제주에 있는 골프장에서 쓰는 지하수는 제주삼다수에서 뽑아서 쓰는 지하수보다 훨씬 많기까지 해요. 고흥에는 골프장이 없어 마을마다 지하수를 맛나게 길어서 마실 수 있어요.


  셋째, 고흥에는 공장이 없다 할 만합니다. 시멘트 만드는 데가 있고, 곡식이나 물고기를 다듬는 시설은 있지만, 공산품을 만들어 큰도시에 내다 파는 공장은 거의 없다 할 만하구나 싶어요. 이런 공장이 한 군데라도 있을까요? 고흥은 골프장과 공장을 찾아보기 어려우니까 냇물이며 바다며 숲이며 들이며 햇살이 맑고 눈부실 수 있어요.


  넷째, 고흥에는 기찻길이 안 지나가요. 고흥에서 지내며 서울이나 부산으로 나들이를 가자면 순천역까지 가서 기차를 타야 하니 번거롭지만, 조금 번거롭기 때문에 고흥살이가 한결 싱그럽습니다. 말이야 번거롭다 하지만, 푸른 숲을 누리며 천천히 순천으로 나가는 길이 퍽 예뻐요.


.. 이런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쏟아내었던 김수근이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건물은 김수근의 작품 연보에서 빠져 있기 때문이다 … 명절만 그런 것도 아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맞벌이 부부의 경우, 아내의 가사 노동 시간은 3시간 28분인데, 남편은 겨우 32분이었다. 평균 텔레비전 시청 시간(2시간 6분)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시간이다. 맞벌이를 해도 아내가 남편보다 6.5배나 더 가사 노동을 하는 거다 … 한국은 골프장 개수에서는 세계 16위이고, 국토 면적 대비 골프장 넓이는 세계 정상이다. 그런데도 모자란단다 … 운동 삼아 걷거나 뛰는 인구는 국민의 절반쯤 된다. 가장 힘들다는 마라톤 인구만 해도 200만 명이다. 그런데도, 잘 걷고 잘 뛰고, 또는 자전거 타기 좋게 하기 위해서 농사짓는 땅에 오솔길이나 자전거 도로를 만들겠다는 말은 없다. 그저 골프만이 좋은 운동이고, 그저 골프만이 진흥해야 할 운동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권력을 차지한 탓이다 ..  (49, 134, 236∼237쪽)


  고흥 농어민이 ‘한 해 벌이 오천만 원’이든 ‘한 해 벌이 일억 원’이든 할 까닭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고흥에는 돈으로는 도무지 사거나 얻을 수 없는 기쁨과 이야기가 훨씬 크고 많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왜 하와이로 놀러갈까 생각해 봐요. 사람들이 왜 필리핀으로 나들이를 가는지 생각해 봐요. 호주나 뉴질랜드나 캐나다로 떠나는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거나 느끼는지 생각해 봐요.


  서울이나 인천이나 경기도에서 왜 ‘고흥 물고기’를 사들여 새벽같이 큰 짐차로 실어나르는지 생각해 봐요. 고흥에서 나는 바지락이나 유자나 석류를 왜 이웃 도시로 내다 팔 수 있는지 생각해 봐요. 울릉섬 시골이나 제주섬 시골에서 고흥군 시골만큼 밤하늘 별을 느낄 수 있을까 생각해 봐요. 사람들이 울릉섬이나 제주섬으로 여행을 많이 간다 하지만, 여행 손님이 많은 곳일수록 외려 들과 숲과 바다가 더 더러워지는 모습을 헤아려 봐요.


  넓은 길이 뚫리거나 비행기가 오가거나 빠른기차가 달린대서 ‘시골살이가 나아질’ 일은 없어요. 넓은 길이 뚫리거나 비행기가 오가거나 빠른기차가 달리면, 이 빠르기만큼 시골살이가 무너지기 마련이에요.


  고흥에는 고흥에만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요. 고흥 시골사람은 미리내를 언제나 볼 수 있어요. 고흥 시골사람은 무지개도 볼 수 있어요. 고흥 시골사람은 봄날 제비춤 흐드러지는 하늘놀이를 볼 수 있어요. 삶을 북돋우는 아름다움이 무엇일까요. 삶을 살찌우는 사랑이 무엇인가요. 삶을 이끄는 꿈이란 어떻게 세우는가요.


.. 여론 조사 회사들 중에서 어떤 곳도 한글 명칭을 쓰지 않는 것은 가히 ‘영어 왕국’, 국교가 영어인 나라에 사는 신민다운 발상이 아닌가 … 돈 내고 전철을 이용하는 내가 왜 저런 광고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푸른 산이나 나무, 강과 바다, 꽃 같은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서 다닐 수는 없는 걸까 ..  (55, 274쪽)


  오창익 님이 쓴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삼인,2008)을 읽습니다. 한국에 깃든 슬프거나 안타깝거나 터무니없는 얄궂은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입니다. 바보스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멍청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밝히며, 어리석게 살아가는 모습을 알립니다.


  아마, 고흥에도 ‘어디에도 없이 고흥에만 있는 얄딱구리한 모습’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 식구가 고흥에서 살아가려는 까닭을 생각하면, 고흥에서 나고 자라며 고흥을 품에 안은 이웃들 삶을 생각하면, 고흥에는 ‘바로 고흥이기에 이곳에 있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으리라 느껴요.


  고흥 아이들 앞에 선 고흥 어른들 스스로 ‘고흥에 깃든 아름다운 꿈과 사랑과 이야기’를 하나하나 보듬어 어여삐 보여줄 수 있기를 빌어요. 4345.11.24.흙.ㅎㄲㅅㄱ

 


―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오창익 글,조승연 그림,삼인 펴냄,2008.5.6./11000원)

 

(최종규 . 2012 - 시골사람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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