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련

신촌에 있는 헌책집 두 군데를 들러서 등짐에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책을 많이 산다. 그리고 사진기 어깨짐과 함께 이 녀석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마을버스를 타려 했으나, 버스길을 말도 않고 갑자기 바꾸어서 이제 우리 집 언저리는 안 지나간단다.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 버스길을 바꾸면서 어떻게 말도 안 하고 바꾼 다음에도 알림글 하나 안 붙여 놓을 수 있을까. 대단한 사람들이다. 이러구러 신촌에서 우리 집 사이는 버스를 안 타고 걷기로 한다. 책집부터 집까지 짐 들고 땀 뻘뻘 흘리며 돌아와 보니 한 시간 걸리네. 그래, 한 시간 동안 몸을 잘 쓴 셈이지. 일찍 집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 고단한 몸으로 어찌 책이라도 제대로 읽을 수 있겠는가. 땀 쪽 뺐으니 시원하게 씻고 드러누울 노릇이다. 더구나 신촌서 사람 발길 하나 없는 후미진 길을, 또 터널길을, 이래저래 걸으면서 목청 틔워 노래도 불렀지.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는 길도 서울에 제법 있기에, 이런 길을 홀로 걸을 적에는 신나게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이때에는 등짐도 손짐도 어깨짐도 다 잊는다. 땀도 잊지만 추위도 잊는다. 노래를 마치고 비로소 사람 있는 골목에 접어들면 어찌나 후련하던지. 이래서 사람들이 멧봉우리에 올라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려 하는지 모른다. 씻고 빨래하고 옷을 옷걸이에 꿰어 넌다. 오늘 장만한 책을 넘긴다. 창문을 모두 연다. 불빛 아닌 별빛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하늘을 볼 수는 있다. 저 하늘을 보며 앞으로 나는 몇 해쯤 더 살면 좋으려나 어림한다. 예순? 아니, 너무 짧아. 여든? 글쎄, 좀 모자라. 백? 음, 이백 살쯤 살면 어떨까? 그때쯤이면 이 나라도, 땅덩이도 아름답게 바뀔는지 모를 노릇 아닌가. 아름다운 꽃누리를 볼 때까지 튼튼하게 씩씩하게 걸어가자. 이 다리로. 이 몸으로. 2001.7.1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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