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

얼토당토않은 짓을 그만 겪고 싶어서 보리출판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지 한 달.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기에 관공서를 찾아갔더니 사람을 아주 바보로 여기는 눈빛에 갖은 서류더미를 안기고, 철없는 짓(사표 던지기)을 앞으로 안 할 만한 다짐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철없는 짓을 하지 않는다는 다짐으로 바지런히 ‘구직활동’을 한다는 증거를 내놓아야 실업급여를 주겠단다. 오늘 이곳에서 그대 벼슬아치 앞에서 나나 둘레 여러 사람이 실업자일 테지만, 우리도 그대하고 같은 사람이거든? 그대들은 왜 이렇게 실업자란 이름이 살짝 붙은 이들한테 딱딱거리고 쉽게 토막말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마음을 벅벅 긁는 말을 내뱉을까. 무슨 설문을 받는다는 자리가 있기에 ‘직업 칸’을 ‘실업자’로 적으니, 설문을 받는다며 종이를 내밀던 이들도 혀를 차며 뭔 미친놈이 다 있느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왜? 그러면 ‘가정주부’로 적어야 하나? ‘직업 = 하는 일’이고, 오늘 나는 딱히 하는 일이 없이 몸도 마음도 쉬면서 지내니 실업자이다. 실업자를 딱하다고 쳐다보는 그대들이야말로 마음이 가난하고 딱해 보인다. 2000.7.3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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