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번

나는 대학교를 그만두었으니 고졸이다. 고졸로 살아가는 사람한테 자꾸 “그래도 대학교에 들어갔다가 그만두었다니까 학번이 있을 거 아니에요? 몇 학번이에요?” 하고들 물어본다. “제가 대학교를 다니다 그만두기는 했습니다만, 제 삶에서 잊은 일이기에 몇 학번인지는 모릅니다. 제 나이를 알고 싶으시다면, 저는 1975년 토끼띠로 태어났으니 더하기 빼기를 하시면 됩니다.” 하고 대꾸하는데 끝까지 학번을 물고늘어진다. 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며 손을 맞잡거나 절을 하고서도 하나같이 “몇 학번?” 하고 물으며 어느 대학교 무슨 학과를 다녔는지 따진다. 이른바 전문가 무리라고 하는 글쟁이밭이나 그림쟁이밭은, 또 책하고 얽힌 기관이나 연구소는 왜 이렇게 학번을 좋아할까? 기자들조차도 학번을 묻는다. 참으로 지겨운 나라이다. 학번을 묻는 그들은 학번으로 줄을 세우려는 뜻이 뼛속까지 새겨졌다고 느낀다. 사람 아닌 숫자를, 또 대학교 배움줄을 따지는 이들이 버젓이 판친다면, 이 나라는 멍텅구리 꼴에서 맴돌고 말리라. 2000.3.2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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