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경상도 안동에서 오늘 하루도 두 끼니만 먹으면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권정생 할아버지는 우리들한테 이야기한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다고 보면 안 돼요.” 하고. 이 말을 제대로 곰삭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권정생 할아버지는 이녁을 찾아오는, 이른바 ‘(학교) 선생님’이나 ‘(큰 신문사) 기자’나 ‘(글깨나 쓴다는) 작가’들한테도 한 마디 한다. “나보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기예요. 나 대신 아파 주면 좋겠어요.” 하고. 이 말 또한 얼마나 알아들을까? 아마 거의 알아듣지 못하리라. 그저 ‘늙은이가 이제 노망까지 들었나? 주책이야, 원!’ 하고 생각하는 분이 제법 많더라. ‘권 선생님이 너무 아프니, 이런 말까지 다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분도 퍽 많고. 권정생 할아버지는 ‘선생님·기자·작가’한테 두 가지 이야기를 대뜸 한단다. 이런 말씀을 하는 할아버지 곁에서 빙그레 웃으며 대꾸한다. “그러게요. 다들 참 너무 몰라요. 이 쉬운 얘기를 왜 알아들으려고 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알아듣기 싫어서 모르는 척하지는 않을까요?” 안동에서 권정생 할아버지를 뵙고서 무너미마을로 돌아온다.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하고 책을 갈무리하는 한밤에 문득 두 마디 이야기를 낱낱이 풀어서 적어 보자는 생각이 든다. 뒤엣말을 먼저 생각하겠다. “나 대신 아파 달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가? 이는 바로 “아픈 사람 마음이 되라”는 뜻이다. “아픈 사람처럼 작은 목숨, 작은 일도 고맙게 고이 여기며 낮은 목소리로 조촐하고 조용하게 살자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스스로 제발 아파 보라는 뜻이다. 스스로 모질게 아파 보지 않고서 섣불리 ‘오래 살라’는 말 좀 그만하라는 뜻이다. 생각해 보라. 아픈 채 오래 살면 기쁠까? 날마다 끔찍하게 아프면서 헉헉대는데, 이 삶을 오래오래 이르라고 하는 말이란, 아픈 사람이 듣기 좋은 말이 될까? 참 많은 사람들이 입에 얹는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가고, 어린이처럼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입에 얹더라도 이 말뜻을 속속들이 짚지는 않는 듯하다. 왜냐하면 ‘어린이처럼 사는’ 사람이 아주 드무니까. 지식만으로 살아가는 길이 대단히 아찔한 줄 뻔히 아는 사람들조차 ‘지식이 아닌 경험’과 ‘지식이 아닌 마음과 생각’을 고이 여기지 않기 일쑤이다.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하고 ‘한마음 한몸’이 되지 않고서는 돕는 손길을 내밀 수 없다. 아니, 돕는 손길이 아니라 어깨동무하는 손길이 못 된다. 그저 불쌍해서 동전 몇 닢 던져 주는 사람은 잘난 멋에 딱하게 볼 뿐, 참으로 함께하는 손길이 아니다. 한결같이 몸과 마음 모두 아늑하고 폭신한 자리에 있으면서 입과 말로만 시끄럽게 ‘가난한 이를 돕자’는 소리만 떠들면 무엇하겠는가? ‘환경을 지키자’는 이야기를 목소리로만 외치지 말자. 알찬 환경책을 읽자고 추천하지 말자. 이런 말 하나 내세우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숲사람이 되어 살아가면 된다. 스스로 숲이 되어 살면 넉넉하다. 자가용을 장만해서 몰 생각보다는, 바람이 되어 훨훨 날아다닐 생각을 할 노릇이다. 고속도로를 더 놓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홀가분히 바람으로 날아다니면 넉넉한 줄 알 노릇이다. 더 빠른 길이 아닌, 다 같이 즐거운 길을 헤아릴 노릇이다. 자가용을 몬대서 나쁘지 않다. 이 하나를 알 노릇이다. 자가용 모는 즐거움처럼 버스나 기차를 타는 즐거움이 있고, 자전거를 달리거나 걷는 즐거움이 있으며, 텃밭을 일구는 즐거움이 있고, 숲길을 맨발로 거닐거나 드러누워 하늘바라기를 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 뭇즐거움이 고루 어우어져야 참말로 즐거운 삶 아닐까? 앞엣말을 생각하자. “동화 몇 편 썼다고 대단히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헛된 이름에 놀아나지 말라는 소리이다. 헛된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어서, ‘이름도 감투도 없는 낮고 여린 사람 목소리와 삶’을 놓치거나 쉬 지나치거나 얕보거나 깔보는 못된 버릇을 버리라는 소리이다. 이 땅에서 가장 알뜰하고 훌륭하며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바로 헛된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고 머리가 빈 사람들이 가장 깔보고 짓밟고 비웃는 ‘못 배우고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 삶자리에서 태어나곤 한다. 왜 그럴까? 왜 짓밟히거나 깔보이거나 얕잡히는 삶자리에서 참으로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이야기가 꽃으로 피어날까? 가만 보면 바로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숱한 글이 이렇다. 다만 누구나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글을 쓸 까닭은 없다. 어느 자리에 있든 제 손으로 살림을 짓는 따사롭고 넉넉한 마음으로 이 하루를 그대로 글로 옮기면 된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빛이 아닌, 어깨동무하면서 같이 앞길을 바라보는 눈썰미로 거듭나면 된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마음으로 넌지시 얘기한다. ‘여보게, 훌륭한 스승은 먼 데 있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있지도 않으며 바로 그대돌 가까이에, 옆에 있는데, 왜 못 보고들 그리 사는가? 그대가 바로 그대 스승인 줄 아는가, 모르는가?’ 하고. 2005.6.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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