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사골에서 쓴 편지
고정희 / 미래사 / 1991년 10월
평점 :
절판


노래책시렁 46


《뱀사골에서 쓴 편지》

 고정희

 미래사

 1991.11.15.



  나는 꽃이다, 하고 입술을 달싹이면 참말 나 스스로 꽃이 된 듯합니다. 나는 꽃이다, 이 말이 수줍어 좀처럼 터뜨리지 못하곤 하는데, 살며시 터뜨리고, 거듭 읊고, 자꾸자꾸 말하다 보면 어느새 노래처럼 가락을 입고 흥얼흥얼 즐거워요. 나는 바보이다, 하고 입술을 놀리면 참으로 나란 녀석은 바보가 된 듯합니다. 바보스러운 짓을 했으니 이렇게 말하지만, 정작 이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아픕니다. 스스로 깎아내리거나 슬픈 말은 하지 말자고 여겨요. 《뱀사골에서 쓴 편지》를 읽으면, 노래님 스스로 꽃이 되다가 바보가 되는 가락이 넘실거립니다. 때로는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고, 때로는 슬픈 바보로 가라앉습니다. 때로는 수줍은 꽃이었다가, 때로는 슬기로운 바보이고 싶은 마음을 느껴요.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 참모습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디에 설까요? 우리 참길이란 참삶이란 참사랑이란 어떤 그림일까요? 진눈깨비가 흩날리다가 함박눈이 퍼붓는 겨울에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붙을 수 있지만, 겨우내 꽁꽁 얼다가도 포근한 볕하고 바람을 맞이하면서 기지개를 켤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 길이요 삶이요 노래이면서 하루입니다. 두 팔을 펼쳐 바람을 안습니다. ㅅㄴㄹ



잔설이 분분한 겨울 아침에 / 출근버스에 기대앉아 / 그대 계신 쪽이거니 시선을 보내면 / 언제나 / 적막한 산천이 거기 놓여 있습니다 (묵상/90쪽)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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