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 ‘한여’? 아니, 그냥 ‘사람’

― 싸움 붙이는 책장사가 가는 길이란? 예스24 막말



  누가 ‘한남’이라 말하면, 저는 서울 한남동을 떠올립니다. 그곳 한남동을 디딘 일이 거의 없지만 으레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남’은 “한국 남자”를 줄인 낱말로, 이름 그대로 한국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사내를 가리키기보다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내를 비아냥거리거나 깔보려는 뜻으로 쓰는 이름”이라고 한다고 해서 깜짝 놀랍니다. 왜냐하면 준말이든 준말이 아니든, ‘한남·한국 남자’나 ‘한녀·한국 여자’를 비아냥거리거나 깔보려는 자리에 쓰면, 말이 무너지거든요.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쓸 말에 얄궂은 마음을 담는다면, 우리는 서로 아무런 이야기를 못 하고 맙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한국 사내가 바보스럽거나 어리석거나 엉터리이거나 엉성할 수 없습니다. 거꾸로 모든 한국 가시내가 바보스럽거나 어리석거나 엉터리이거나 엉성할 수 없어요. 대구·경북에서 나고 자란 분 가운데 바보스러운 이도 있고, 광주·전라에서 나고 자란 분 가운데 바보스러운 이도 있습니다. 고장 탓이나 성별 탓을 할 수 없습니다. 탓을 한다면, 어떤 사람이 어떤 모습이나 몸짓이 되기까지 거친 길이나 삶에서 하나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길을 탓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내·가시내’라는 낱말을 쓰면 어떤 이는 ‘가시내’가 “성차별 용어”라고 여기면서 ‘여자’로 고쳐야 한다고 따집니다. 한자말로는 ‘남자·여자’요,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까마득히 오랜 낱말인 ‘사내·가시내’입니다. ‘가시내’는 ‘가시버시·각시·아가씨’ 같은 낱말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남북이 갈리면서 수수한 낱말 ‘동무’가 마치 “빨갱이 용어”라도 되듯이 몰아붙인 독재정권마냥, ‘가시내’는 먼먼 옛날부터 그저 이 말씨로 가만히 있었을 뿐이지만 요즈막에 들어와서 날벼락을 맞은 셈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가시내’라는 수수한 말씨가 제자리를 잃거나 빼앗겼다면, 왜 이 수수한 낱말이 제자리를 잃거나 빼앗겼는가를 살펴서 이를 가다듬거나 고치거나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가시내’라는 낱말을 “성차별 용어”로 쓰는지 낱낱이 따지고 살펴서 그들이 수수한 말에 엉뚱한 마음을 담지 못하도록 나무라고 타이르고 가르쳐야겠지요. 왜 그럴까요? 왜 ‘가시내’라는 말을 지키고 살려야 할까요? 이 수수한 말을 지키거나 살리지 못할 적에는 바로 요즈음처럼 ‘한국 남자’ 같은 수수한 말이 엉뚱하게 흔들리거나 무너지거든요.


  생각할 노릇입니다. ‘한남·한국 남자’란 말이 또다른 “성차별 용어”라 한다면, 이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누가 왜 이런 수수한 말을 함부로 “성차별 용어”로 마구 휘두를까요? 그들은 무엇을 노리면서 수수한 말을 마구 짓밟거나 짓뭉개려 할까요?


  곰곰이 보면, 성차별은 어른 사회에서 일으키는 못난 짓입니다. 아이들은 서로 성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자꾸 성차별을 하니 아이들은 어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고스란히 따라합니다. 요즈음도 꽤 많은 아이들은 길에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데요, “왜 여자가 머리 짧아?”라든지 “왜 남자가 머리 길어?”라든지 “왜 여자가 바지 입어?” 같은 말을 읊더군요. 아이들은 왜 이런 말을 할까요? 바로 어른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 (예스24에서 책광고를 하면서 쓴 말)


  누리책집 ‘예스24’는 지난 2018년 12월 2일에 광고글월을 띄웠습니다. 저한테도 이 광고글월이 왔습니다만, 광고글월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쓰레기통에 들어갔더군요. 누리글월 쓰레기통을 뒤져서 이 광고글월을 찾아냈고, 이런 광고글월을 보낸 뜻이나 줄거리나 누리책집 사과글을 하나하나 챙겨 읽었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누리책집 예스24에서 책소개를 하는 일꾼들, 또 ‘채널예스’를 꾸리는 일꾼은 거의 다 가시내인 줄 압니다. 제 책상맡에 ‘종이잡지’인 《채널예스》 2018년 12월호가 있어서 살피니, 편집후기에 이름을 적은 네 사람은 다 가시내입니다.


  가시내 일꾼이 있기에, 또는 오직 가시내 일꾼만 있기에, 이분들이 ‘남혐’을 아무렇게나 한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 여혐이나 남혐을 한다면, 게다가 여혐이나 남혐이 말썽이 되는 줄 모르고서 일을 저지른다면, 이는 어쩌다가 툭 튀어나오는 잘못이기 어렵습니다. 여느 자리하고 여느 때에 늘 그러한 말을 쓰면서 살거나 일하기에, 그러한 말이 매우 쉽고 부드럽게, 또 아무렇지 않게 불거질 뿐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한(국)녀(자)스럽니? (예스24 책광고를 살짝 바꿔 본 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한녀’가 자랑스럽다면 “어쩌면 그렇게 한(국)녀(자)스럽니?”가 자랑스레 들릴 테고, 자랑스럽지 않다면 안 자랑스러이 들리겠지요. 그런데 자랑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남자·여자 또는 여자·남자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말을 함부로 책장사에 쓰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싸움을 붙여서 돈을 벌기만 해도 된다는 생각을, 싸움이 한바탕 일어나면 누리책집은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번다는 생각을, 설마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부디 이런 생각은 안 했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그렇게 장사꾼스럽니? (예스24 막말 일꾼한테 물어볼 말 1)

 어쩌면 그렇게 바보스럽니? (예스24 막말 일꾼한테 물어볼 말 2)


  자, 이런 말을 누리책집 일꾼이나 ‘채널예스’ 일꾼한테 누가 들려준다면, 예스24 일꾼은 듣기 좋습니까? 뜻있는 책을 알리려 한다면, 뜻있는 말씨를 곱게 골라서 알뜰살뜰 가다듬기를 바랍니다. 널리 읽히고 싶은 책을 널리 퍼뜨리고 싶다면, 그래서 책장사도 신나게 하고 싶다면, 남녀나 여남 사이에 싸움을 붙이는 막짓은 부디 그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제대로 고개를 숙이시고, 고개를 숙이실 뿐 아니라, 한동안 붓을 꺾으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우리 삶터가 “한쪽 성별에 치우치지 않도록 성평등 기틀을 마련하”듯이, 누리책집에서도 한쪽 성별에 치우치지 않도록 제도를 마련하기를 바랍니다. 누리책집에서 책소개 글을 쓰거나 “웹진 채널예스”나 “종이잡지 채널예스”를 엮는 일꾼 가운데 50%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만큼은 ‘성별 균형’을 맞추기를 바랍니다. 공공기관뿐 아니라 책마을과 누리책집에서도 제대로 ‘성별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앞으로 이와 비슷하게 서로 싸움질이나 금긋기질을 부추기는 말썽이 또 불거지리라 봅니다.


  우리는 ‘한국 남자’나 ‘한국 여자’라는 겉모습에 앞서 ‘사람(한 사람)’입니다. 서로 슬기롭게 어우러져서 곱고 즐겁게 사랑을 지피어 참답고 눈부신 살림을 같이 지을 ‘사람(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서로 이웃이 될 사람)’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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