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동시인이 될 적에 아름답다



나는 아줌마처럼 사는 아저씨이다. 아줌마는 아니기에 아줌마살림을 모른다. 다만, 아저씨라는 몸으로 아이를 돌보고 살림하는 길을 걷기에, 아줌마라는 자리는 어떤 결일까 하고 늘 생각해 보고 헤아려 보면서 마음에 그리려 한다. 아저씨라는 몸으로 살기에 둘레에 있는 아저씨는 으레 나를 ‘같은 아저씨 꾸러미’로 묶으려 하는데, 나는 그런 아저씨 꾸러미에서 언제나 슬금슬금 빠져나온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앞서도 집안일을 도맡아서 했고, 아이들이 태어난 뒤에 똥기저귀도 척척 빨고 삶았으며, 아이들이 무럭무럭 크는 동안에도 함께 마실길을 누리며 서로 배울 하루를 찾는다. 이러면서 생각한다. “모든 아줌마는 동시인(시인)인데, 모든 아저씨도 동시인(시인)이 될 수 있으면 시나브로 평등하고 민주가 뿌리를 내려서 참으로 아름답겠구나.” 하고. 문인이나 작가라는 허울이 아닌, 아저씨로서 동시를 쓰는 어른이 하나둘 늘기를 빈다. 문학이나 비평이라는 껍데기가 아닌, 아저씨라는 자리에서 신나게 놀이하듯 동시를 노래하는 어른이 차츰 늘기를 빈다. 대통령 아저씨도, 군수 아저씨도, 술집 아저씨도, 버스지기 아저씨도, 택시지기 아저씨도, 길장사 아저씨도, 회사원이나 공무원 아저씨도, 한 발 두 발 다가서면서 아이를 품에 안고서 동시를 꿈꾸는 새로운 길을 가기를 빈다. 아름다운 삶을 지을 적에 그야말로 보금자리도 마을도 나라도 아름답고, 우리가 쓰는 모든 글도 아름답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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