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로즈의 어린 시절에는 사실적인 묘사에 집중하던 작가의 글은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판타지적인 흐름을 취하게 되는데, 종반부로 갈수록 현실적이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까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소설은 일정한 시차를 돌연히 뛰어넘어가며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이 소설에서 연령은 소설의 흐름에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해를 나타내더군요. 어느 날 음식을 통해 음식을 만든 이의 감정을 느끼게 된 로즈(9살), 엄마가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것을 알게 된 로즈 (12살), 오빠의 실종을 마주하게 된 로즈(17살) 같이 다양한 연령대에는 로즈의 일상을 기복케 만드는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이런 가족의 변화를 통해 로즈의 성장도 진행하게 되고요. 작가는 주인공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 하는 이벤트를 엮어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합니다.
책의 모든 부분들이 디테일하게 구상되었음을 알 수 있더군요. 9살 때는 어머니에 관한 서술 위주로 등장하지만, 12살 때는 가족 한 명 한 명에 대한 서술로 로즈의 세계가 점차 넓어지는 부분이라든지, 처음에는 거의 비중 없이 등장하는 아빠가 로즈의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로즈의 삶에서 영역을 넓혀 가는 부분이라든지, 여러 과정을 통해 가족의 비밀을 조금씩 알게 되는 로즈를 표현하는 문장들은, 마치 수학 공식처럼 꼭 알맞은 정도의 문장이 늘어나거나 빠지면서 완성되었습니다. 오빠가 자꾸만 사라지는 미스터리, 아빠를 존중하면서도 멈추지 않는 엄마의 불륜, 아빠 가족이 가지고 있는 의문스러운 초능력같이 주인공 세계의 외연은 점차 선명하게 변하지만, 마찬가지로 불행의 원인이 더 다양해지는 것을 보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더 깊숙이 이입하게 되더군요.
독자의 감정을 우려내는 방식이 기가 막히게 뛰어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12살 로즈의 초능력을 통해 알 수 있는 엄마의 불륜 장면을 보면서, 꼭 그 정도 나이에 보았던 주말의 명화를 떠올렸습니다. 그 영화는 '남편을 버리고 바람을 피우는 아내'에 대한 영화로 어린 시절의 저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소설을 통해서 현재가 아닌 어린 시절 제가 가졌던 감정을 소환할 정도면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가요?
저는 이 소설이 일본의 여성 작가 몇몇과 상당히 유사한 감정을 우려내는 느낌을 읽는 내내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생각나는 건 '에쿠니 가오리'였습니다. '에쿠니 가오리'를 보면, 그럴듯한 문장 몇 개를 이용해 감정을 자아내고 그 감정을 책을 읽는 내내 유지하게 만드는 소설을 쓰곤 합니다. 소설 입문자였던 시절을 제외하고 그녀의 소설이 꼭 맞게 느껴진 적은 없었지만, '에쿠니 가오리'가 분위기를 덜어내고 이야기의 구성에 힘썼다면 이 소설의 한 챕터 정도를 완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러모로 '에쿠니 가오리'의 진화형 작가 같은 느낌입니다.
이 책을 첫판이 발행된 2011년도에 접했다면 몇 장 읽다가 책장에 소중히 보관만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행복함이 머물러 있는 듯 보였지만 이면은 행복하지 않은 가족이나, 바람을 피우면서도 가족을 유지하고 싶은 어머니 같은 캐릭터는 이해하지 못했을 테고 지나치게 스타일만 추구하는 작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당시의 저와 같이 '선, 악이 또렷한 자존감 강한 20~30 대 남성'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입니다. 또, 이 소설은 열린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의 흐름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시원한 전개에 이은 깔끔한 결말을 원하는 독자분이라면 지양하는 것이 좋겠더군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뛰어난 소설로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