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제635호 : 2019.11.19
시사IN 편집국 지음 / 참언론(잡지) / 2019년 11월
평점 :
품절


나는, 문화나 예술이 짝짓기 춤,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서른 셋 넘어가면 더 이상 찾아서 노래를 듣지 않는데,라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주억거리고, 나의 어떤 문화적 열광이 십대, 이십대에 고착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그래서, 문화나 예술을 더 많이 누리는 데 어떤 지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게 한심하다. 

세계의 더 많은 곳을 여행했다는 것에도, 맛있는 걸 많이 먹어봤다는 것에도 그렇다. 

그 자체가 만족스럽다면, 나한테 저렇게 자랑하고 반응을 기대하지는 않겠지,라고도. 

그러면서 글을 쓰고 싶다고 이렇게 쓰고 있는 걸 보면, 나도 참 복잡한 욕망으로 복잡하게 살고 있구나, 한심해한다. 


이번 호 시사인에서 내가 뭔가 화를 내고 싶은 글은 학교의 속살,이다. '진짜 '도농 격차'가 뭔지 아세요?'라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쓴 글이다. 

아이들에게 '심심한 게 인생이야, 버텨'라고 말하는 나는, 도시화된 젊은 교사가 아이들을 이렇게 판단하는 게 싫다. 교사가 이렇게 판단하고 있어서, 아마도 아이들은 더 많이 결핍을 느낄 것이다. 

자신의 글이, 선의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상을 알린다고, 농촌에 문화적 혜택이 더 많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개선하려는 의도라고. 나는 선의라고 해서, 그 글이 용납되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규모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문화가 생존 다음이고, 짝짓기 춤처럼 젊은 한 때의 열광일 뿐인 나에게 도시의 삶은 필수가 아니지만, 문화가 생존만큼 중요하고 사람의 교양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교사에게 도시의 삶은 '필수'가 되어버린다. 도시의 삶을 지적으로 우월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이 젊은 교사의 눈에, 시골의 아이들은 '불쌍한 아이들'이 되는 것이다. 도시화된 젊은 교사가 한갖 짝짓기 춤을 보고 문화라고 지적 우월을 과시하면서 어린 학생들을 불쌍하다고 지면을 통해 말할 때, 어린 학생들은 도시화된 젊은 교사가 그런 마음으로 자기 앞에 서 있는 걸 그대로 느끼면서 자기도 그 교사도 '패배자'라고 인식하거나-도시에 살고 싶으나, 도시에 살지 못하는-, 자기 마음 속 들끓는 부당함을 말할 곳이 없다고 생각할 거다. 

도시화는 소용돌이처럼,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규모가 필요한 모든 일들이 도시라면 더 많이 가능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 도시는 삶을 구성하는 일차적인 것들, 단순한 요소들을 무시하게 하는 문화를 강화시킨다.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의 절박함 가운데, 도시는 더 편리해지고, 부는 더욱 집중되고, 삶의 과정들은 무시된다. 아이를 낳는 일, 기르는 일, 먹이고 입히는 일을 하찮다고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서로를 아는 일들을 또 그렇게 여기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발언은 또 이런 지면을 통해 공개된다. 

이게 바로, 앞서 지방소멸에 대해 기사를 냈던 시사인의 감수성이다. 차별이나 혐오표현을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런 말들이 가지는 차별이나 혐오에 대해서는 아예 자각하지도 못한다.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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