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루 GD 시리즈
티아구 호드리게스 지음, 신유진 옮김, Nyhavn 사진 / 알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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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희곡 가게 <인스크립트> 2024‘1월의 인스크립트추천 도서]


<인스크립트> 인스타그램 계정

https://www.instagram.com/inscriptbooks/





유령은 희끄무레하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다. 이와 반대로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유령이 있다. 이 유령의 이름은 엑토플라즘(ectoplasm)’이다. 이것은 유령이라기보다는 신비로운 물질에 가깝다. 엑토플라즘은 영매(靈媒)의 몸에서 나온다. 그것하얗고 끈끈한 액체로 되어 있다. 엑토플라즘이 흘러나오는 부위는 입, 콧구멍, 귓구멍이다밖으로 나온 엑토플라즘은 죽은 자의 모습으로 변한다사람들은 엑토플라즘이 영혼의 실체를 밝혀 줄 수 있는 물적 증거로 확신했다. 그들은 엑토플라즘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하지만 엑토플라즘을 찍은 사진 대부분은 조작되었거나 가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시간은 항상 뜨겁다. 시간은 식을 줄 모르고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열기를 내뿜는 시간 앞에서 살아있는 존재는 맥을 못 춘다. 파릇파릇한 생명은 점점 누렇게 변하면서 사라진다. 기억은 정교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시간의 열기가 닿는 순간 기억은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르르 녹는다이처럼 시간은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한다엑토플라즘이 가짜라고 해도 죽은 자를 잊지 못한 사람들은 죽은 자가 엑토플라즘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란다. 영매는 시간에 태워져서 재로 남은 기억을 뭉쳐서 복원한다.


<소프루>는 무대 위에 열연(熱演)하는 배우들, 이 사람들의 뜨거운 연기 열정을 덥혀 주는 극장에 다시금 불을 지피는 희곡이다. 소프루(sopor)’는 포르투갈어로 을 뜻한다. 우리가 내쉬는 숨은 눈에 보이지 않고, 한순간에 사라진다. 배우들의 연기도 마찬가지다. 배우는 무대 위에 오르기 전에 캐릭터(character)와 한 몸이 된다. 캐릭터가 된 배우는 숨 쉬듯이 연기한다. 종이에서 살고 있던 캐릭터는 무대에서 다시 태어난다배우는 온몸을 이용해 캐릭터의 성격을 보여주고, 표정과 목소리로 캐릭터의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관객은 배우들의 숨소리(연기)와 숨결(연기력)에 집중한다. 연극이 끝나고 나면 배우의 몸속에 캐릭터는 남아 있지 않다. 무대 위에서 숨이 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극장에 배우만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살아 있다. 하지만 관객은 그 사람을 볼 수 없다. 그 사람의 정체는 프롬프터(prompter)프롬프터는 무대 근처에 있다. 배우들이 열심히 숨 쉬는 무대 뒤쪽이나 아래쪽에. 프롬프터는 무대 근처에 숨어 있다. 배우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대사를 읊어준다. 캐릭터가 된 배우가 숨 쉬는 도중에 동작과 대사를 잊어버리면 캐릭터의 생명력이 끊긴다. 프롬프터는 배우를 위해 다음 동작과 대사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프롬프터는 배우와 캐릭터를 살리는, 아주 중요한 존재다.

 

<소프루>에 등장하는 예술감독은 프롬프터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예술감독은 프롬프터가 주인공인 연극을 만들고 싶어 한다.

 


 프롬프터, 당신을 말하고 싶어요. 프롬프터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진짜 프롬프터인 당신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에게 대사를 알려주고 그들을 구조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사고를 다루는 이야기를 쓰는 거죠. 사고가 났을 때의 구조대원 이야기요. 나는 당신을 위한 연극을 쓸 거예요


(<소프루> 3, 12)

 


평생 숨어 있는 존재로 살아온 프롬프터는 예술감독의 제안을 거부한다. 프롬프터는 항상 시커먼 옷을 입는다. 보이지 않으려고 철저히 숨으면서 살아온 프롬프터는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야 하는 무대 정중앙이 낯설다예술극장은 프롬프터를 극장의 호흡’, ‘극장의 기억’, ‘극장의 허파’(<소프루>, 19, 80)로 표현하면서 찬사를 보낸다. 프롬프터는 자신과 함께 일했던 배우들의 숨소리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나는 대사에 밑줄을 긋고 날짜를 적어뒀습니다. 늘 그렇게 해왔어요. 만약 누군가 극장의 기록 보관소에서 내가 프롬프터로 참여했던 모든 대본을 찾는다면, 내가 지금까지 일하는 동안에 속삭였던 모든 대사들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소프루> 20, 82)

 


<소프루>의 프롬프터는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들도 기억한다. 스태프는 배우가 숨 쉴 수 있는 무대를 만든다관객은 무대 위에 흘린 배우의 땀을 기억하지만, 무대를 만들다가 흘린 스태프의 피는 모른다. 그래서 프롬프터의 기억력은 소중하다.


프롬프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직업이다. 그러나 프롬프터가 없으면 배우와 캐릭터의 숨소리도 영영 사라진다. 프롬프터는 뜨거운 시간 한가운데 뛰어들어 타버린 배우와 캐릭터 모두를 다시 살릴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소프루>는 프롬프터의 눈과 입에서 흘러나온 액터플라즘(actorplasm)’이다. 액터플라즘이 많을수록 좋다. 한 번 나오는 순간 금방 사라지는 배우의 숨소리를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아, 그런데 프롬프터가 진짜로 사라진다면 이 일은 누가 해주지? 극장을 찾는 관객이 하는 수밖에…‥




우리는 극장에서 모두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배우, 스태프들, 인물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늘 같은 이야기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공기를 마십니다.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각자만의 방식으로 숨을 쉬지만 그 공기는 같습니다.

 

나는 그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숨을 쉬어보려고 합니다.



(<소프루> 16, 57~59, 프롬프터의 대사)

 

 

관객도 배우와 함께 호흡하고, 같은 공기를 마신다. 관객인 나는 배우들이 숨 쉬는 것처럼 숨을 쉬어보려고 한다. 비록 정확하지 않더라도 나만의 액터플라즘을 만들 것이다. 





추신

 

* 소프루》에 <소프루><그녀가 죽는 방식>, 총 두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 ‘actor’남자 배우를 뜻한다. 여배우는 ‘actress’를 쓴다. 하지만 내가 만든 조어 액터플라즘(actorplasm)에 남배우/여배우로 명시되는 젠더 이분법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배우의 연기 활동을 설명할 때 자주 거론되는 기준들, 즉 연령(성인 배우/아역 배우), 연기 비중(주연/조연/단역) 또한 배제되어 있다. 따라서 액터플라즘의 액터배우를 통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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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 -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저자 은유 추천
낸시 슬로님 애러니 지음, 방진이 옮김 / 돌베개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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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글쓰기는 종이 위에 호흡하는 일이다. 숨을 들이쉬면 산소를 마시고, 내쉴 때마다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우리 몸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산소의 농도가 낮아진다. 이때 숨이 가빠지면서 어지러운 증상이 나타난다.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우리 삶의 이산화탄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부정적인 감정들이다부정적 감정의 생김새는 다양하다분노는 시간이 지나도 화를 품고 있어서 항상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질투와 미움은 타인의 마음을 찌르는 날붙이다. 열등감은 내 마음을 쪼그라들게 하는 감옥이다. 좁은 열등 감옥에 오랫동안 갇히면 마음의 몸집이 작아진다. 열등 감옥 수감자는 작아져서 초라해진 자신의 존재를 더더욱 감추려고 한다이산화탄소 농도가 짙은 삶은 정신 건강에 해롭다. 건강한 내 삶을 지키고 싶으면 글을 써보자종이에 대고 이산화탄소를 뱉자.[주] 어떻게 하면 뱉을 수 있을까.


내 삶의 이야기를 쓰는 법은 종이에 호흡하기, 즉 글쓰기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책이다. 호흡과 글쓰기의 공통점은 생명 활동이다. 호흡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 또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다이 책에서 말하는 내 삶의 이야기는 자전적 수필(essay)을 뜻한다자전적 수필을 쓰려면 부정적 감정의 이산화탄소를 끄집어내서 뱉어내야 한다. 부정적 감정의 이산화탄소는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살인 기체. 하지만 살인 기체가 종이를 만나면 이라는 울창한 숲이 생긴다. 이산화탄소를 흡수한 글 숲은 글 쓰는 사람을 위한 치료제다부정적 감정의 이산화탄소에 중독되면 삶이 무기력해진다글을 쓰면 정신이 개운하다. 글 숲의 주인은 글쓴이다. 글 숲의 주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리 높여 외친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이런 것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었고, 지금 나는 여기에 있어(13)’라고.


저자는 글 쓰는 사람의 영혼은 배움을 즐기고, 자신을 위해 성장하고, 성찰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글 쓰는 사람의 영혼을 우리말로 표현하면 이다. 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뜻을 가진 단어다. 긍정적인 의미의 얼은 정신과 영혼이다. 반면 부정적 의미의 얼은 밖으로 드러나 있는 흠 또는 다른 사람 때문에 겪는 피해. 자전적 수필은 얼의 두 가지 얼굴이 있는 글이다. 글에서 표현된 얼의 한쪽 얼굴은 글쓴이의 내면 상태다. 글을 쓰면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있다. 자전적 수필에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숨기고 싶은 흠이나 약점을 솔직하게 글로 표현할 수 있다. 또 타인의 말과 행동으로 생긴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 진단하기 위해 기록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전적 수필은 글쓴이의 얼이 담긴 얼글이다.


우리는 상황과 주변 환경에 따라 변한다. 자전적 수필을 꾸준히 기록하면 시시각각 달라진 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 ‘글 숲이 우거질수록 이야기는 풍성해지고,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글 숲 주인의 모습과 얼도 다양해진다. 한 사람이 종이에 만든 글 숲속에 얼의 화음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진다. 하나의 글 숲은 ()의 얼글이다.





[] 김수영의 시 의 시구들(‘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 마음껏 뱉자’)를 인용해서 패러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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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5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08 0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정암고전총서 플라톤 전집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아카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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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여러분, 저는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지금 제 머릿속에 텅텅 비어 있는 상자들로 가득하답니다. 그 상자의 정체는 ‘무지()’이에요. 이 무지함에 무얼 채워 넣어야 할까요? 저는 책을 삽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 눈동자는 바삐 움직여요. 무지함에 담을 만한 지식을 찾는 거죠. 그 순간 뇌도 분주해요. 눈동자를 통과한 지식을 무지함에 담을 수 있게 깎고, 자르고, 다듬어요.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비어 있는 무지함이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아요. 아무것도 없어서 새까맸던 무지함은 잘 정돈된 지식을 품은 똑똑함()’으로 변하거든요.똑똑함은 빛이 나요. 똑똑함이 많은 사람의 생각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요.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은 무지함이 많은 사람을 만나는 거예요.


똑똑한 사람이 타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말을 걸어와요. 타인과 대화할 때 똑똑함의 빛으로 상대방의 말을 두드려 봅니다. 똑똑, 가벼운 말 속에 아무것도 없어요. 똑똑, 계속 두드리면 이상한 소리가 나요. 개가 짖는 소리가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 소리를 개소리라고 불러요. 개소리는 무지한 사람의 귀에 잘 들리지 않아요똑똑한 사람은 무지한 사람이 보이면 자신의 빛을 쏘아 대요. 국어사전은 이런 행위를 계몽(enlightenment)’이라고 알려주네요. 우리는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질 수 있다고 믿어요. 누구나 선망하는 똑똑한 빛은 책을 많이 읽은 기업가의 빛일 거예요. 그들의 빛은 재물(財物)이 되니까요.


, 여러분. 여러분에게 질문할게요. 똑똑한 빛의 강도가 세면 좋은 걸까요? 책을 많이 읽으면 우리의 똑똑한 빛은 영원히 화려할까요? 책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찬찬히 검토해 봅시다.


똑똑한 사람은 무지를 경멸해요. 계몽주의자는 무지로 어두운 세상을 원하지 않아요. 본인은 똑똑하다는 자신감은 계몽을 위해 쓰이는 빛의 강도를 높여줘요. 그런데 똑똑하다고 자부했던 사람들이 왜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일까요? 앞서 제가 개소리하는 사람들은 본인의 말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했어요. 본인의 무지함을 잘 모르는 거죠. 여러분, 똑똑함을 100개든 1,000개든 엄청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도 무지해요. 똑똑하다고 자신만만한 사람은 정작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알지 못하거든요. 이를 심리학 용어로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라고 해요.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면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 크게 부풀려서 상대방에게 보여 주려고 해요. 똑똑함의 빛이 과장되면 그 빛나던 상자는 오만함()’으로 변해요오만함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오만한 빛으로 자신의 생각과 다른 타인을 공격하며 제압하려고 해요. 오만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밝아지기는커녕 빛 좋은 개소리가 더 많아집니다. 겉은 화려해도 속은 칙칙한 빛이죠.


여러분, 저는 똑똑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책을 읽을 때도 항상 무지함 한두 개는 따로 챙겨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의 머릿속에는 똑똑한 상자뿐만 아니라 무지한 상자도 여러 개 있었을 거예요. 소크라테스는 본인은 무지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거든요. 그는 자신이 똑똑한지, 아니면 상대방이 똑똑한지 검토하기 위해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어요. 질문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소크라테스가 익숙하지 않은 아테네인들은 불만이 많았어요. 결국 멜레토스(Meletus)라는 사람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했습니다. 아테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검토 없이 사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소크라테스의 변명38a, 101)’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항상 책을 검토하듯이 읽어요. 한 개의 단어가 눈동자를 지나가다가 걸리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거든요. 이때 저는 생각해요. 책에 적힌 단어의 정의가 과연 사실일까?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단어의 정의를 잘못 알고 있었나? 제일 먼저 의심합니다. 책 읽기를 멈추고 단어를 검토해 봅니다. 단어의 정의를 뒷받침해 주는 타당한 근거나 단어의 정의를 다르게 보는 견해를 찾기 위해 책을 또 사고, 또 읽습니다. 여러 권의 책을 요리조리 보면서 검토하면 내가 무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만약 검토 없이 책을 읽는 삶을 살았더라면 나의 무지함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거예요.

 

똑똑함에 보관된 싱싱한 지식은 시간이 지나면 시들어요. 삭은 지식은 버려야 해요. 똑똑함 속에 담긴 지식을 검토해야 해요. 그러려면 제일 먼저 내가 똑똑하다는 자신감을 덜어내야 해요. 똑똑함의 빛이 과하면 나의 무지함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면 더닝 크루거 효과와 같은 편견에 빠지게 돼요. 똑똑한 사람이 무조건 지혜로운 건 아니에요. 소크라테스는 무지한 자신이야말로 지혜롭다고 믿었어요. 만약에 자신이 방면되면 숨 쉬고 있고 할 수 있는 한 지혜를 사랑하는 일(29d, 74)’을 절대로 멈추지 않을 거라고 포부를 밝혔어요.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은 데카르트(Descartes)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ōgitō ergo sum, 코기토 에르고 숨)’라고 말했어요.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나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 삶을 검토하기 위해서 책을 많이 사고, 글 쓰는 일이 좋은 일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저는 제 일이 즐거워요. 그래요, 저는 내년에도 지혜를 사랑할 예정입니다.[주] 저는 모르는 것이 많거든요.





* 函(지닐 함): 옷이나 물건 따위를 넣을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든 통



[] 어제 12월 31일에 서평을 썼다서평 제목은 변윤제의 시 내일의 신년, 오늘의 베스트 마지막 문장 ‘그래요,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 패러디했다. 이 시가 실린 시집 제목은 저는 내년에도 사랑스러울 예정입니다(문학동네,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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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1-01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혜를 사랑하고.
즐겁기때문에 책을 읽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매번 저의 무지함 상자는 1000개가 넘습니다.
더 읽어야겠어요^^

cyrus 2024-01-05 07:41   좋아요 1 | URL
올해는 읽고 쓰는 일에 좀 더 시간을 투자해야겠어요. 작년에 책도 많이 읽고, 공연도 보고, 재미난 경험을 많이 했는데 글로 쓰지 못한 게 아쉬웠어요. 저는 무지함도 많고, ‘나태함’도 많아요 ㅎㅎㅎ

서니데이 2024-01-01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오늘부터 2024년입니다.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새해복많이받으세요.^^

cyrus 2024-01-05 07:4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페크pek0501 2024-01-01 18: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 반갑네요.
새해에도 건강과 건필, 기원합니다.

cyrus 2024-01-05 07:42   좋아요 1 | URL
페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필하세요. ^^

은오 2024-01-01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의 읽기 너무 멋지고 존경스럽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단어의 정의를 의심하고 검토하고 또 읽고.... 이렇게 해야 사이러스님처럼 서평을 쓸 수 있는 거군요?! 🥹

cyrus 2024-01-05 07:46   좋아요 0 | URL
틀리더라도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보려고 해요.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일이지만, 해보면 재미있어요. 내가 몰랐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을 알고, 책의 저자 또한 실수하고 착각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거든요. ^^

새파랑 2024-01-02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는 좀 지혜로워 졌으면 ㅡㅡ 사이러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지혜 사랑이 계속되길 바라겠습니다~!!

cyrus 2024-01-05 07:47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꼬마요정 2024-01-02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있어요!! 저는 cyrus 님 글을 보며 제 무지를 깨닫습니다. 게을러서 무지함을 알지만 개선 못하는 저를 또 반성합니다. 존경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4-01-05 07:48   좋아요 1 | URL
저도 게으른 편이라 무지함 다음으로 많은 게 ‘나태함’이에요 ㅎ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얄라알라 2024-01-02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새로운 형식의 리뷰 멋져요! 완전 독창적이고 지성미 뿜뿜! 2024 리뷰 문화를 선도하실 듯한 이 예감!

cyrus 2024-01-05 07:49   좋아요 0 | URL
다양한 형식으로 글을 써보려고 해요. 철학과 과학 같은 독자들이 어려워하는 주제의 책을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있답니다.. ^^;;

transient-guest 2024-01-03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뭔가를 남기는 독서가 너무 어려워서 그냥 읽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에서 만족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4-01-05 07:50   좋아요 1 | URL
t-guest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stella.K 2024-01-05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귀엽고 야무지게 썼구만. ㅋ 정말 글을 자꾸 쓰다보면 단어에 집착이 생겨. 내가 지금 이 단어를 잘 쓰고 있는지 단어가 뜻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쓰는지. 하지만 난 너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책을 사지는 않지. 그럼 머리가 아파질 거 같아서. 그냥 무지함에 넣기로하는 거지 뭐. ㅋㅋ

cyrus 2024-01-08 06:39   좋아요 0 | URL
올해는 도서관에 책을 빌려 보기로 했어요. 해를 거듭할수록 도서 지출비가 늘어나고 있어서 이제는 줄일 필요가 있어요. ^^;;
 
소크라테스
루이-앙드레 도리옹 지음, 김유석 옮김 / 소요서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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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상의 모든 철학이 장난감 블록이라면? 모든 철학자가 즐겨 쓴 철학 장난감은 무엇일까? 이 철학 장난감의 원산지는 그리스 아테네. 제조 일자는 기원전 5세기(B.C. 500~401). 제조사는 아리스토클레스(Aristocles)제조사 대표는 체격이 상당히 좋다. 특히 이마와 어깨가 넓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조사 대표를 플라톤(Plato)’이라고 부른다.[주] 플라톤은 철학 장난감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아카데미아(academia)’라는 학교를 세웠다빠르게 변하는 유행의 흐름 속에서도 아테네산 철학 장난감은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철학 장난감의 이름은 소크라테스(Socrates).


소크라테스 장난감의 주 소비층은 아테네 청년들이다아고라(agora)에 가면 소크라테스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청년들을 볼 수 있다철학 장난감이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유사품들이 족족 나오기 시작했다군인이었던 크세노폰(Xenophon)소크라테스 X’를 만들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회상이라는 철학 장난감 설명서를 썼다







* 루이-앙드레 도리옹, 김유석 옮김 소크라테스(소요서가, 2023)

 

* 플라톤, 강철웅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명(아카넷, 2020)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2년 차(2024)]

* 플라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도서출판 숲, 2012년 구판)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1년 차(2023)]

* 아리스토파네스, 천병희 옮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도서출판 숲, 2010)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소크라테스 장난감 열풍을 비꼰 구름이라는 작품을 썼다. 그는 소크라테스 장난감을 당시에 유행하던 또 다른 철학 장난감 소피스트(Sophist)처럼 묘사했다소크라테스 장난감 열풍은 오래 가지 못한다. 소크라테스 장난감을 고발하는 고소인들이 등장한다. 결국 소크라테스 장난감은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처했고, 판매 정지 처분을 받는다. 사형이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장난감 재판의 경과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 책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다.


아카데미아를 졸업한 플라톤의 후계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 장난감 제조 방식과 용도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했다. 그들은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장난감과 같은 유사품들과 철저히 구분하기 위해 아리스토클레스에서 만든 장난감을 소크라테스 P’라고 붙였다. P는 제조사 대표 이름의 머리글자다. 플라톤의 후계자 중 가장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소크라테스 장난감의 단점을 보완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철학 장난감을 만들었다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력 덕분에 소크라테스 P’는 믿고 쓰는 정품 철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반면 정품이 아닌 소크라테스 장난감은 쓸모없는 짝퉁으로 취급받는다소크라테스 장난감 연구자들은 정품과 짝퉁을 한데 모아 진짜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복원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실제 소크라테스 장난감을 다시 만들기 위해 고증의 필요성을 느꼈고, 이른바 소크라테스의 문제에 뛰어들었다어떤 연구자는 플라톤의 생각이 반영된 소크라테스 장난감 또한 정품이 아닐 수 있다고 의심한다. 그들은 짝퉁을 선호한다


고대 철학 장난감을 연구한 루이 앙드레 도리옹(Louis-Andre Dorion)순수한 진품에 가까운 소크라테스 장난감을 복원하는 작업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의 저서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소크라테스 장난감들의 용도와 특징을 꼼꼼하게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 P’,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X’,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 묘사된 소크라테스를 주목한다.


소크라테스한 사람만의 소크라테스’를 보여주는 책이 아니다. 얼룩덜룩한 소크라테스를 상세하게 보여준다. 소크라테스 장난감은 한 사람만 소유할 수 없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철학자가 소크라테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소크라테스 장난감은 철학자들의 생각 흔적들이 묻어 있어서 지저분하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못생겼다고 생각한다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 장난감 블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립했다그들이 많이 사용할수록 완전한 소크라테스는 점점 희미해진다니체(Nietzsche)플라톤의 소크라테스 장난감을 망치로 두드려서 잘게 부순 철학자. 그는 소크라테스 장난감에서 나는 도덕 냄새를 매우 싫어했다.


소크라테스의 지저분함에 매력을 느낀 독자라면 다양한 종류의 소크라테스 장난감으로 재미있게 놀아 보자.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겠지만, 여러 명의 소크라테스를 만날 수 있다. 젊은이의 혼을 사랑할 줄 아는 유혹의 대가 소크라테스(플라톤), 성찰의 중요성을 알기 전에 자연 탐구에 관심을 보인 소크라테스(아리스토파네스), 덕의 획득보다 신체를 돌보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한 소크라테스(크세노폰) 등을 만날 수 있다. 이제 골치 아픈 소크라테스의 문제’는 잊자. 소크라테스가 좋든 싫든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철학 장난감을 만져본 모두가 소크라테스의 사람들이다.





[] 아리스토클레스는 플라톤의 본명이다. 플라톤은 이마 혹은 어깨가 넓다라는 뜻이다.



<cyrus의 주석>

 

책 제일 뒤에 참고문헌 목록국내 자료_고대 문헌국내 자료_2차 문헌이 나온다. 여기에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

 


* 국내 자료_고대 문헌, 189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김진성 옮김, 이제이북스, 2007.

2007년 번역본은 절판되었고, 2022 서광사에서 재출간되었다.

 

* 국내 자료_2차 문헌, 191

박규철, 소크라테스의 도덕 · 정치철학, 동과서, 2003.

정확한 제목은 플라톤이 본 소크라테스의 도덕 · 정치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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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12-26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재밌겠다. 근데 철학책답찮게 좀 얉네. 🤔

cyrus 2024-01-01 10:55   좋아요 0 | URL
분량이 얇다고 가볍게 보지 마세요... ㅎㅎㅎ 이 책에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따로 설명한 장이 있는데 꽤 깁니다. ^^
 
시간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물리학 - 세계적인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알려주는 시간에 대한 10가지 이야기
콜린 스튜어트 지음, 김노경 옮김, 지웅배 감수 / 미래의창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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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자네들 가운데 아무도 이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 잘 알아 두게.”

 

(플라톤, 향연216c~d, 강철웅 옮김, 아카넷, 2020년)




리처드 파인먼(Richard Feynman)양자역학과 전기역학을 통합한 양자전기역학을 정립한 미국의 물리학자다. 1965년에 파인먼은 양자전기역학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물리학을 배우는 대학생들에게 양자역학에 대해 농담 섞인 진담을 남겼다.



I think it is safe to say that no one understands 

quantum mechanics.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데다가 확률에 기반한 양자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고백이기도 하다양자역학처럼 과학자들이 설명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과학 용어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시간이다.


고대 로마의 교부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과학자들보다 먼저 시간의 불가사의한 실체를 인정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을 때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설명하려 하면 모르겠다.



시간 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물리학 서문은 시간을 잘 모른다고 밝힌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책은 물리학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다룬다이 책을 쓴 과학 해설자(science communicator) 콜린 스튜어트(Collin Stuart)는 시간을 과학계의 가장 오래된 불가사의라고 소개한다. 그는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시간은 과학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임을 알려준다. 시간에 관한 무지를 정직하게 고백한 저자의 태도는 학생들에게 양자역학의 기기묘묘함을 알리고 싶은 파인먼의 심정과 같다.


우리는 1년은 365일로 이루어져 있다고 배웠다. 그렇지만 왜 1년이 365일이 된 이유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하루의 길이는 달과 지구 사이에 생긴 중력의 영향에 따라 달라진다. 달의 중력은 지구의 바닷물을 밀거나 끌어당기는 조석 현상을 일으킨다. 달의 중력을 가까이서 받는 바다의 해수면은 높아진다


바다는 자신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모른다. 누군가는 얼음이 있는 혜성이 지구에 내려와서 바다가 생겼다고 주장한다.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면서 거대한 얼음이 녹아 물이 된 것이다. 혜성이 아니라 물이 있는 소행성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중력의 영향으로 여러 개의 소행성이 부딪히면서 우리가 아는 태양계 행성들이 생겼다. 물이 있는 소행성과 물기가 전혀 없는 건조한 소행성이 충돌하면서 생긴 태양계 행성이 지구다


바다는 달의 중력이 가까이 올 때마다 자신의 고향이 우주임을 확신했다. 우주가 그리운 바다는 달의 중력이 내민 손을 잡고선 놓지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도는(자전) 지구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바다가 떠나면 지구는 생명체가 살 수 없는 행성이 되고 만다. 지구의 자전 방향은 달의 반대쪽이다. 달이 바다를 당기면, 지구가 달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진 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다. 달과 지구 사이에 바다가 끼이면 지구 자전 속도는 느려지고, 하루 길이가 늘어난다. 바다는 아주 오래전부터 달과 지구 눈치를 보면서 지내왔다. 양쪽에서 자꾸 당길 때마다 엄청 아팠을 텐데 바다는 달과 지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바다가 떠날까, 남을까 고민할 때마다 하루 길이는 조금씩 조금씩 늘어났다. 지금도 하루 길이가 100년마다 0.0017초씩 길어지고 있다고 한다.


시간 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물리학은 분량이 얇은 책이다. 하지만 얇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시계 안에 갇힌 시간을 부숴버리는 도끼와 같은 책이다. 시계 안에 갇힌 시계는 과거, 현재, 미래순으로 안정적으로 흐른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시간의 복잡한 특성을 알려준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 과거, 현재, 미래 모두 있다고 생각했다. 물리학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블록 우주(block universe)’라고 부른다. 이곳에 시간은 존재한다. 다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어떤 물리학자들은 시간을 완전히 없애고 싶어 한다그들에게 시간은 복잡하게 묶여 있어서 풀기 어려운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이다양자역학만큼 까다로운 시간을 없애면 시간의 실체에 대한 오래된 난제가 단번에 해결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입문서를 잘 쓰는 저자는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방대한 내용을 선별하고 요약한다. 하지만 글 쓰는 과정에서 개념이나 이론에 대한 설명을 절반 정도 생략해야 한다. 

 



* 24쪽


 원자는 매우 작다. 대서양 전체의 물을 뜨는 데 필요한 티스푼의 개수보다 물 한 티스푼 속에 들어 있는 원자 수가 더 많다. 원자를 머릿속에 그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태양계의 축소판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가운데에 있는 핵은 태양과 비슷하다. 행성이 태양 주위를 맴돌 듯이 전자는 핵을 맴돌고 있다.



저자는 원자 모형을 태양계 구조로 빗대어 설명한다. 저자는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가 제안한 원자 모형을 참고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하게 설명하려는 저자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지금은 원자를 설명할 때 러더퍼드 원자 모형을 보여주지 않는다실제로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처럼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돌면 뉴턴 고전 역학과 전자기학으로 원자가 안정적인 형태로 유지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왜냐하면 전자가 원자핵 주변을 돌면서 전자기파가 나오기 때문이다전자는 궤도를 이탈하면서 원자핵 쪽으로 향하고정면으로 충돌한다.[주1] 러더퍼드 원자 모형은 양자역학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전에 나온 것이다오늘날 원자 모형은 양자역학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이 모형에 핵 주변의 전자가 도는 궤도가 없다. 오직 전자가 존재할 확률만 알 수 있다. 이러한 원자 모델을 오비탈(orbital)’이라고 한다.




* 26쪽


 윤초로 두 시간 체계를 조정하지 않고 계속 두면 언젠가는 한밤중에도 시계가 정오를 가리키는 황당한 상황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지구 자전 운동은 안정적이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지구 자전 운동이 느려지면 시간 길이가 달라진다. 이러면 표준 시계의 시간과 맞지 않게 된다. 이런 오차를 줄이려면 1초를 늘리는 윤초를 도입해야 한다저자는 윤초가 없으면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만 설명한다. 하지만 윤초가 있어도 문제가 생긴다. 2012년 미국의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이 윤초를 추가하자 홈페이지 서버가 다운됐다. 컴퓨터와 정보통신업계는 윤초로 인해 생기는 디지털 재난을 방지하려면 윤초를 폐지해야 한다고 줄곧 목소리를 냈다.[주2]  


작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도량형총회에서 2035년까지 윤초를 폐지하기로 결정되었다(윤초 폐지를 유일하게 반대한 국가가 러시아다). 그리고 올해 12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열린 세계전파통신회의에서 2035년까지 윤초를 원칙적으로 폐지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주3] 



* 45

 

 태양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인 프록시마 센타우리(Proxima Centauri)4.2광년 떨어져 있다. 빛이 우리와 프록시마 센타우리 사이의 40km나 되는 거리를 이동하는 데는 4.2년이 걸린다는 뜻이다.



별과 우주에 관심이 많은 천문학도라면 프록시마 센타우리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 미흡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프록시마 센타우리 근처에 빛나는 또 하나의 별, 알파 센타우리(Alpha Centauri)를 언급하지 않았다. 알파 센타우리 또한 태양과 가까운 별이다. 프록시마 센타우리는 60만 년에 한 바퀴씩 알파 센타우리 주변을 돌고 있다.[주4]




* 85

 




 그러나 파달카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그는 시속 27,500km로 지구를 돌고 있는 궤도 전초 기지인 미르 국제 우주 정거장에서 879일 동안 지상에 있는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시공간을 돌진했다.



미르 국제 우주 정거장의 오자. 미르(Мир, Mir)는 러시아어로 평화를 뜻한다.






[1] 참고문헌마쓰바라 다카히코이인호 옮김 물리학은 처음인데요수식과 도표 없이 들여다보는 물리학의 세계》 (행성B, 2018년)

 


[2] <윤초, 2035년까지 폐지된다“IT 기업에게 희소식”> 이정현 기자, 지디넷코리아, 20221121일 입력.

 


[주3] <들쑥날쑥 지구 자전 속도표준시 끼워 맞추던 윤초사라지나> 홍석재 기자, 한겨레, 20231213일 입력, 14일 수정.



[주4] 참고문헌: 플로리안 프라이슈테터, 유영미 옮김 100개의 별, 우주를 말하다: 불가해한 우주의 실체, 인류의 열망에 대하여(갈매나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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