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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미국의 실업가 프레더릭 테일러는 철판을 만드는 제철소를 대상으로 혁명적인 실험을 했다. 그는 제철소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제철소 노동자들이 42㎏짜리 선철 봉을 화차에 실어 나르는 모습을 찬찬히 관찰했다. 허리가 끊어질 정도로 일한 노동자 10명은 하루에 75t의 선철을 짊어졌다. 이는 이전 작업 수치의 여섯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틀간의 면밀한 관찰 끝에 테일러는 일일 공정 작업량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한 명당 하루 45t을 들어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전 작업량의 세 배였다. 이를 토대로 '테일러리즘'이라고 불리는 과학적 관리법이 만들어졌다.

 

테일러리즘의 핵심적인 관념은 과업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되는 하루의 공정한 작업을 뜻한다. 우선, 테일러는 작업도구의 형태와 사용방법을 개량하고 도구를 규격화하여 노동자들이 사용할 도구를 자세히 지시하였다. 또한, 그는 노동자들의 작업을 기본동작으로 분해한 후 쓸모없는 동작을 제거하고 각 동작별로 최선의 것을 찾아낸 후 스톱워치로 단위시간을 측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특정한 작업에 대하여 도구, 동작, 시간을 결합하여 테일러는 노동자에게 미리 부과할 수 있는 과업을 구성하였다. 작업도구와 작업방법에 관한 시간연구를 통해 과업을 설정하였고, 노동자에게 과업 실행의 유인을 제공하기 위해서 차별적 성과급제를 개발했다. 노동자들에게 하루 작업량을 제시하고 이를 초과한 사람에게는 성과급을 주고, 채우지 못한 사람은 해고한다.

 

그러나 테일러주의의 이상이 실현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기술적, 조직적 측면에만 중점을 둠으로써 인간적 측면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기계화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치중하다보면 기계와 조직의 노예로 전락한다. 더욱이 사람은 강철로봇이 아닌 이상 정해진 시간 내에 작업량을 실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시간이 초과되어 하루 작업량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실직자가 되고 만다. 시간 준수를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결과이다.

 

숨을 못 쉴 정도로 일을 해야만 하는 테일러리즘의 영향은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테일러리즘은 우리 일상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테일러리즘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어린이용 테일러리즘,

이미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테일러리즘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여름, 겨울방학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방학 시간표를 만들었다. 컴퍼스로 커다란 원을 그리고 안에 피자 조각을 나누듯이 정성껏 방학 때 해야 할 일을 채워 넣었다. 학원 다니기, 친구랑 놀기, 방학 과제물 하기, 책 읽기 등 평소 방학 기간에 할 수 있는 일정을 모조리 써넣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일정과 전혀 상관없는데도 잠자는 시간을 의미하는 ‘꿈나라’라는 큼지막하게 배치한다. 방학에는 늦잠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다. 하루 중에서 제일 기다리던 시간이 ‘꿈나라’로 갈 때였을 것이다. 그리고 방학 시간표 일정 중에서 그나마 지킬 수 있는 시간 또한 ‘꿈나라’로 갈 때다. 하지만 아침이 되면 길고 짧은 꿈나라를 떠나기가 무척 힘들다.

 

우리는 초등학생 때부터 이런 원형 시간표를 손수 만들고, 예쁘게 정성껏 꾸미는 동안 시간을 절약하고, 정해진 일정대로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그렇게 배우고 있었다. 어찌 보면 방학 시간표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자신이 직접 만들어보는 스케줄러인 셈이다. 하지만 멋진 그림과 정성껏 공들여서 만든 방학 시간표는 벽을 장식하는 멋진 그림으로 남을 뿐이다. 방학 내내 책 읽고, 친구랑 놀고,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아니다. 책 읽는 시간에 친구 만나러 다닐 수 있고, 친구랑 놀아야하는 시간에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갈 수도 있다. 스케줄러처럼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루 안에 실행하면 시간도 절약하는 동시에 알차게 하루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정에 없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반복되고 익숙한 것을 싫어하는 우리 뇌의 방해 때문에 게을러질 수도 있다. 스케줄러대로 완벽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솔직히 스케줄러만 믿고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엄격한 자기관리에 대단하게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한 느낌도 든다.

 

만약에 테일러리즘 또는 방학 시간표처럼 죽을 때까지 반복되고 고정된 시간과 일상을 지키면서 산다고 상상해보라. 여기서 시간과 일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만든 시간표대로 사는 것이다.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이런 삶을 기쁘게 팔을 벌려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남이 내 일상을 마음대로 재단할 이유가 없다. 그것도 내가 죽을 때까지 남이 만든 시간표대로 살아야 한다고? 이것은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다. 나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브게니 자먀찐의 소설 『우리들』의 배경인 기원후 29세기의 세상은 시간과 계획에 철저히 종속당한 인간상을 묘사하고 있다. 이곳은 그야말로 숨이 막힐 정도로 완벽함 그 자체다. 사람들은 모두 ‘시간 율법표’에 따라 움직인다. 시간 율법표. 벌써부터 느낌이 올 것이다. 기원후 29세기에 사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시간 율법표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밥 씹는 횟수까지도 ‘한 숟가락당 50번’으로 정해져 있다. 심지어 섹스마저도 시간 율법표에 정해진 시간에만 할 수 있다. (이런 쉣더퍽!)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들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하나인 듯 일을 시작하고 동시에 일을 끝낸다. 생활은 질서로 꽉 짜여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가슴에 황금색 번호가 적힌 푸른 제복을 입고 있다. 자먀찐의 소설 속 기원후 29세기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을 ‘번호’라고 부른다. 자신을 ‘개인’이 아닌 ‘단일제국’이라는 이름의 국가 전체를 이루는 벽돌 한 조각으로 여길 뿐이다. 모두가 똑같은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생활은 과거 구닥다리 시대의 낡은 언어에 불과하다. 시간 율법표를 어기면 ‘단일제국’을 통치하는 ‘은혜로운 분’의 벌이 기다린다. 시간을 지키는 특이한 취향이 테일러와 비슷하다. 그나마 차이가 있다면 테일러는 시간을 못 지키는 노동자에게 ‘You're Fired!(너는 해고야!)’라고 화끈하게 외치지만, 단일제국의 지배자이신 은혜로운 분은 자신이 만든 세계에 반하는 국민에게 ‘You're Dead!(너는 뒈졌어!)’라고 단호하게 처벌한다.

 

쟈먀찐의 『우리들』은 완성된 지 4년 후에야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당시 고국인 소련 내에서 출간 금지 처분을 당했다. 『우리들』이 1920년대 소비에트의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한 비판 섞인 풍자라는 이유로 자먀찐은 반혁명분자로 낙인 찍혔다. 자먀진의 궁극적인 비판 대상이 자유를 억압하는 소비에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체제의 대척점인 자본주의 또한 풍자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노동의 표준화를 강조한 테일러리즘의 발전은 현대 자본주의의 노동 형태를 낳게 되었다.

 

자먀찐의 소설에 ‘테일러’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 율법표’는 테일러리즘의 원리를 그대로 일상생활에 적용시킨 실사판이다. 테일러리즘이 만들어 낸 암울한 삶의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대목이 있다. 단일제국 사람들에게 고대인(지금의 21세기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와 동떨어진 어리석은 존재들이다. 다만 그들이 ‘은혜로운 분’ 다음으로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테일러다. 오랫동안 테일러리즘의 원리가 몸에 밴 단일제국 사람들은 자신을 살아있게 만드는 테일러를 천재라고 치켜세운다. 혹시 ‘은혜로운 분’이 20세기에 살다간 위대한 경영자로 평가받는 테일러의 후손이 아닐까?

 

수백만의 우리는 마치 한 사람처럼 기상한다. 동일한 시간에 우리는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시작하고, 수백만이 한 사람처럼 일을 끝낸다. 그리고 하나로 합쳐져서, 수백만의 손을 가진 단일한 몸체처럼, 우리는 시간 율법표에 의해 지정된 동일한 순간에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고, 그리고 동일한 시간에 산보를 나가고, <테일러의 연습> 강당에 가고, 취침한다. (18쪽)

 

테일러란 인물은 고대인들 중 가장 우수한 천재였음이 틀림없다. 물론 그는 자신의 방법을 삶 전체로, 매 걸음걸음마다로, 24의 체계를 1시부터 24시까지 통합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39쪽)

 

테일러리즘과 더불어서 현대식 자본주의 대량생산 체제로 문을 열게 만든 것이 바로 포디즘이다. 세계 최초의 자동화 대중화 시대를 시작한 헨리 포드에서 유래된 관리방식과 경영시스템은 자본주의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드가 착안한 것은 노동자가 작업대에 가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물이 이동하여 정해진 위치에 있는 작업자들에게 흘러가는 컨베이어벨트였다. 이전까지 자동차는 장인들, 즉 노동자들의 수공 조립품이었다. 포드는 이동 조립라인을 통해 단기간의 훈련을 거쳐 생산현장에 투입되는 미숙련 노동자를 고용해 낮은 비용으로 높은 생산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생산시스템을 구축했다. 컨베이어벨트가 활용되려면 작업자 한 사람마다 과업이 구분되도록 분업화가 이뤄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복잡한 공정이 표준화되어야 한다. 테일러식 노동분업과 포드의 기계식 생산시스템의 절묘한 만남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촉진시키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일구어낸 중심축이 되었다.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은 포드 전후로 나눌 수도 있다.

 

그러나 포디즘 역시 테일러리즘과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분업과 기술적 합리성에만 의존하여 노동의 인간화 요구를 무시했기에 노동자들의 불만과 집단적 저항의 표적이 되었다.

 

 

 

 

 

 

 

 

 

 

 

 

 

 

 

과학과 산업발전에 초점을 맞춘 세상에서 인간성의 가치는 상실된다. 그런 세상은 더 잘 사는 세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가 된다. 쟈먀찐은 테일러리즘이 자유와 인간 고유의 가치(사랑)마저 잊히고 낡은 유물로 치부해버리는 디스토피아를 묘사했다면,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포디즘이 등장한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디스토피아를 반어적으로 묘사한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영문판에는 ‘A.F’란 표현이 나온다. ‘After Ford’를 줄인 것으로 (문예출판사 번역본에서는) ‘기원’이라고 번역했다. 포디즘이 등장한 이후를 의미하는 기원 632년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A.F’라는 용어 자체는 포드가 예수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인물임을 웅변한다.

 

“포드 님의 은혜로 세상은 태평천하로소이다.” (57쪽)

 

‘A.D'를 ’A.F'로 알파벳 철자 하나를 바꾸어 포디즘이 지배한 섬뜩한 현실을 강조하고, 그런 현실에 적응, 아니 철저하게 순응하고 마는 알파 플러스 계급의 견습생 헨리 포스터는 헨리 포드를 연상케 한다. 결국 포스터가 멋지게 생각하는 ‘신세계’는 자동화된 기계를 이용해 인간의 노동을 합리화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하며, 현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제를 낳은 사회구조적 틀이라고 할 수 있다.

 

쟈먀찐의 디스토피아는 권력이 개인의 시간에 침투하여 전체주의의 틀로 옳아 매어 자유를 억압했다면, 헉슬리의 디스토피아는 쟈먀찐보다 지독한 철저한 계급사회다. 태아가 유리병 속의 기계적 환경에서 자라나고 날 때부터 적성과 지능, 유전자에 따라 계급이 정해진다. 정해진 계급에 맞게 삶을 살아야 한다.

 

같으면서도 다른 두 작가의 디스토피아가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시간 율법표’에 맞춰서 살아야 하고 나보다 계급 높은 사람한테 복종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밖에 나가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노예사회다.

 

테일러와 포드의 유령은 지금도 배회하고 있다. 기업은 ‘포스트 테일러리즘’ 또는 ‘포스트 포디즘’이라는 괜찮은 이름으로 생산성을 확보하고 침체된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70~80년대에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를 가져왔지만, 노동자의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문제점을 보완하지 않는 이상 경제상정 모델로서 적합한 지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테일러리즘과 포디즘에 길들여져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오늘날에 시간 관리는 효율적인 업무 향상과 성공적인 자기계발을 위한 역량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항상 스케줄러를 들고 다니고 확인하는 사람은 정말 잘 사는 사람일까. 그리고 그런 삶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작년에 시청자의 고민을 소개하는 ‘안녕하세요’라는 TV 프로그램에서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을 좋아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직접 딸의 스케줄러를 만들고 강요(?)하는 사연을 본다면 스케줄러 라이프스타일이 무조건 훌륭한 인재상에 적합한 모범 사례라고 볼 수 없는 것 같다. 차라리 시간 관리를 철저히 지키는 완벽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융통성 있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해야 하는 일은 꼭 하는 삶을 선택하겠다. 놀 땐 놀고, 공부할 땐 공부하는 삶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산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우리나라는 70년대부터 경제발전이 가속화되면서 근면의 역량을 강조했다. 새마을운동의 정신 중 하나가 ‘근면’이었고, 부지런하게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도 제대로 관리할 줄 아는 능력과 연관되기도 한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은 우리가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처럼 겨울을 대비해 여름에 일하는 부지런한 개미가 되기를 원했고, 베짱이는 시간 개념도 없이 놀고, 먹기 만하는 게으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과연 『우리들』의 단일제국과 『멋진 신세계』는 상상의 영역에 머물고 있을까. 글쎄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부모가 직접 미래를 결정하는 풍토와 두 개의 디스토피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가 좋은 명문고를 가기 위해서 하루에 학원 세, 네 개 정도 다닐 수 있도록 유명 학원가를 알아보는 부모. 아이는 부모의 말을 어기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 방과 후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없다. 학교 다음에 가야하는 곳이 학원 또는 독서실이다. 부모의 지나친 교육열에 아이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학원에 가기 싫어도 안 가면 안 된다. 기특하게도 자신의 미래를 생각해 준 부모를 생각해주는 것도 있지만, 학원 한 군데라도 가지 않았다가는 부모에게 꾸짖음을 듣기 때문이다. 지금도 방학이 다가오면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간표를 만들 것이다. 다만 그 시간표 안에는 ‘친구들과 놀기’, ‘TV 보기’와 같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자유로운 유희의 시간이 적혀 있지 않을 것이다. 그 공간 대신에 ‘학원 가기’, ‘독서실에서 공부하기’만 가득하고, ‘꿈나라’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테일러는 규정된 일을 하지 못한 노동자에게 해고의 칼바람을 휘둘렀고, ‘은혜로운 자’는 시간을 지키지 못한 ‘번호’에게 죽음의 올가미를 씌웠다. 그리고 지금 우리나라의 부모는 시간과 공부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아이에게 사랑 아닌 사랑의 매를 들고 있다. 자식이 잘 살아야 부모도 잘 살 수 있다는 유토피아는 없다. 알고 보면 디스토피아는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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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버려라. 어떤 책이든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한두 개로 모아 진다. 책의 메시지를 파악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보물 찾기 하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하라. 일단 과녁을 정한 후 활을 쏘면 , 어디로 쏴야 할지 모르고 무작정 덤빌 때보다 훨씬 덜 지루하다.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과감히 넘겼다가, 책의 핵심주제를 찾아낸 다음 다시 돌아와 읽으며 이해하라.

 

 

2. 저자와 대담하는 기분으로 읽어라.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묻고 그에 대한 저자의 답을 책 안에서 찾아가는 방식이다. 책을 읽을 때 한 손에 펜을 들고 책의 빈 공간에 내 생각을 적어 넣는다. ‘핵심 주장’, ‘좋은 사례’, ‘근거 부족’, ‘무엇무엇과 비교할 것’ 등, 저자가 건넨 이야기에 읽는 이 나름의 평가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책읽기를 저자와의 대담으로 여기는 순간, 독서는 지겨운 안구운동에서 흥미진진한 대뇌운동으로 전환한다.

 

 

3. 북 토크를 하듯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남들에게 들려주라. <코스모스>를 읽어 보니 이런 이야기더라, <통섭>은 어떤 함의를 가진 책이더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소감이나 책 속의 인상적 구절이 아닌 ‘자신만의 용어와 문장’으로 저자의 핵심논지와 적절한 사례를 요약할 것. 그 후에 더 생각할 거리를 발굴해 덧붙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책읽기의 끝은 적극적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다른 이에게 비판적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 출처: 중앙일보 2014.5.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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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지치게 하는 것들
라파엘 보넬리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몹시 굶주린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 숲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그때 나무에 높이 달린 포도송이가 보였다. 여우는 포도송이를 따려고 몸을 세우고 앞발을 위로 뻗은 채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포도송이에 발이 닿지 않았다. 여우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위로 솟아올랐다. 닿을락 말락 하긴 했지만 역시 포도송이를 따진 못했다. “내가 솔직히 재주가 없어서 저 포도송이를 따지 못하는 건 아냐. 가만 생각해 보니 저 포도는 덜 익어서 먹지 못할 것 같아.” 여우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심리적인 위로와 안정을 찾는다. 즉 인간은 ‘자기합리화’의 달인이며, 때로는 자신이 왜곡한 현실을 정말로 믿어버리는 ‘자기기만’의 능력까지 발휘한다.

 

짝사랑하던 사람을 떨구고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 휴대전화를 잃고는 “어차피 바꾸려 했던 고물인데...” 등등 하며 쓰린 속을 애써 달랜 기억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두고 심리학에서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가 발동했다고 분석한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는 바라는 욕구가 있으나 원만히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자기합리화 및 자기기만은 일종의 심리적 진통제일 뿐, 실제적인 성장과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 나쁜 행동을 저지르게 되면 그 죄를 마음속에서 밀어내느라 애쓴다. 사람은 심한 자책에 빠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에 등을 돌린다. 타인을 탓하기도 하고, 사회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죄책감은 조금씩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모토 아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결국 인간관계의 파국을 부른다.

 

환경보호 강경론자인 어느 아버지. 그는 스포츠카를 산 뒤 자주 타는 일이 없을 테니 환경을 지킨다고 말하며 가족을 어이없게 만든다. 10대 청소년은 늦은 밤 골목에 있는 자동차의 사이드미러 20개를 발로 차서 깨놓은 뒤 "내 발이 다쳤다"며 고발하겠다고 우긴다. 어떤 남성은 여성 정신과 의사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자신의 자살 시도를 막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라파엘 보넬리의 『우리의 관계를 지치게 하는 것들』은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이를 부인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속에 소개된 9명의 문학작품 주인공(파우스트, 스크루지, 미하엘 콜하스, 라스콜리니코프, 장발장 등)의 이야기와 45개의 실제 상담 사례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마주하는 이야기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슷한 기질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완벽주의다. 우리는 누구나 ‘완벽한 나’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완벽주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성숙한 수준의 즐거움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완벽주의라면 오히려 그 사람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허점을 보이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미숙한 나르시즘적 요소도 있다. 강박적인 완벽주의는 노이로제로 이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죄를 자신에게 가하는 위협으로 느껴 매우 사소한 허점에도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적 반응을 경험하지 못해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자신의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적 건강까지 망칠 수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나코프의 고해처럼 말이다. 심리학자 융은 고해가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라고 말한다.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잠시 심리적 부담을 더는 일에 불과하며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만 새로운 행동의 여지가 생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죄를 고백할 수 있고, 고백을 통해 죄를 갚고자 하는 동경을 갖고 있다. 용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하찮은 일로 치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당한 부당함으로부터 해방되는 최적의 상태를 말한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완벽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도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완벽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완전한 자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로 인식할 때 이해와 용서가 가능하다. 용서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나 관계가 간절히 유지되기를 원하는 게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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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기온, 습도 등의 날씨 변화는 사람들의 정서에 민감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봄이 되면 들뜨고, 여름에는 짜증나고 공격적이 되며, 가을과 겨울에 감각과 사고가 또렷해지고 집중력이 높아지는 등의 현상은 바로 햇빛의 강도와 호르몬 분비 및 뇌 구조 기관들의 작용과 상관관계를 갖는 과학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원리가 날씨로 인한 우발적 범죄 예방과 소비자 심리 연구에 크게 기여할 정도라고 한다. 한줄기 햇살, 바람 한 점에 마음이 흔들리는 여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다른 날,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분처럼 각기 다른 계절의 같은 풍경을 담아낸 그림도 많은 느낌의 차이를 전달한다. 날씨와 계절, 시간 등에 의해 변하는 대상에 대한 느낌을 가장 열성적으로 관찰하고 표현했던 화가로 클로드 모네를 떠올릴 수 있다.

 

 

  

 

 

클로드 모네  「양산을 쓴 여인」  1886년

 

 

주로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모네에게 「양산을 쓴 여인」 3점의 인물화는 드문 주제였지만 ‘빛을 사랑했던 화가’라는 별칭만큼 빛을 좇는 그의 붓놀림이 경쾌하게 살아있는 작품이다.

 

인상주의 화법은 마치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반사하는 사물의 색채감을 묘사한다. 혼합하지 않은 여러 색채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 놓고 착시현상을 일으키듯 인간의 시선 속에서 용해되어 빛이 터지는 듯한 효과를 낳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이 화사한 빛이 맑게 퍼지는 모네의 캔버스 위에서 또 다시 여리게 흔들리고 있다.

 

 

 

 

 

 

 

 

 

 

 

 

 

짧은 붓 터치가 만들어 낸 새털구름과 풋풋한 풀 무더기들이 여인을 받쳐 안는다. 이내 여인의 치마폭을 감싸고도는 바람이 빛과 어둠, 구름과 풀무더기에 자연의 역동성을 불어넣어 준다. 화가는 하늘빛과 잡초의 일렁임을 바람에 맡김으로서 조화의 극치를 추구한다. 바람이 하늘과 대지로 나타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배하도록 함으로써 여인이 안고 있는 불확실성을 극대화하지만, 멀찍이서 여인을 바라보는 어린 신사의 시선, 바로 모네의 사랑에 찬 눈빛을 등장시킴으로써 그림 전체의 안정감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에 가난한 예술가의 작품에의 열정과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클로드 모네  「양산을 들고 있는 카미유와 아들 장」 1875년

 

 

두 점의「양산을 쓴 여인」을 그리기 전에 모네는 양산을 쓴 여인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아들인 장 모네와 나오는 그의 아내 카미유다. 모네만큼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화폭에 자주 담은 화가도 드물다. 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무려 56점의 작품에서 카미유를 화폭에 담았다. 모네는 다른 모델은 마다하고 오직 카미유만을 불러들였고 카미유도 청년의 순수함에 이끌려 즐거운 마음으로 아틀리에를 방문하곤 했다. 둘은 낮에는 화가와 모델로 만났고 밤에는 연인으로 만나 떨어질 줄 몰랐다.

 

꿈같은 행복의 연속이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젊은 커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카미유와의 동거 이후로 큰아들 장을 임신했지만 모네의 식구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모네가 동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의 집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보내줬는데 1870년 카미유와 혼례를 올린 다음부터 아예 송금을 끊어버렸다. 견디기 힘든 고통의 세월이 그의 사랑을 시샘이라도 하듯 앞길을 가로막았다. 며칠 동안 맹물만 마시며 넘기는 때도 있었다.

 

 

 

 

클로드 모네  「정원의 여인들」  1866~1867년경

 

“저는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지금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이주헌 『화가와 모델』 중에서, 175쪽)

 

그러나 가난의 세월 속에서도 모네의 창작욕은 더욱 뜨거워졌다. 카미유를 향한 사랑의 열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1866~1867년에 제작된 「정원의 여인들」에 나오는 네 명의 여인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바로 카미유이다.

 

1871년부터 모네의 그림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여느 예술가들이 그렇듯 모네 역시 셈이 흐렸다. 그는 이런 꿈 같은 현실이 마냥 계속될 줄 알고 돈을 물 쓰듯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를 후원한 화랑이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수입은 순식간에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카미유는 가난한 시절의 낙태 후유증을 앓고 있었지만 병원비를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들였지만 생활비와 치료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사의 수술 권유도 비용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이때부터 모네는 새로운 거처를 마련,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의 부인이자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적이 있었던 알리스 오슈데의 식구들과 한 지붕 아래 생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슈데는 예전에 모네를 흠모했던 여인이다. 모네와 카미유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카미유의 사진과 편지를 모두 불에 태워야 한다고 협박할 정도로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슈데는 허약해진 카미유를 정성을 다해 간호해주었고 그녀가 임종할 때까지 끝까지 지켜주기도 했다.

 

카미유는 그렇게 가난 속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서서히 무너져갔다. 카미유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879년 3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곁을 지키고 있던 모네는 카미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클로드 모네  「카미유의 죽음」 1879년

 

“내게는 너무도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친구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주헌 『화가와 모델』 181쪽)

 

「카미유의 죽음」을 살펴보면 임종 순간에 느껴진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했던 모네의 말과는 달리, 그가 후에 여러 차례 터치를 하여 세심하게 매만진 흔적이 보인다. 푸른색에서 흰색으로 점차 창백하게 변하는 그녀의 얼굴은 곳곳에 분홍색이 가미된 긴 붓 터치로 그려진 베일에 싸여있다. 어찌 보면 영원히 자신 곁을 떠나려 하는 연인의 마지막 이미지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양산을 쓴 여인」그림 두 점은 카미유가 죽은 지 7년 후에 그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미유가 죽은 후 재혼한 알리슈의 딸 쉬잔이 카미유의 빈 자리에 서 있었다. 먼저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한 것일까. 얼굴이 묘하게 흐릿한 것을 보면 카미유를 모델로 삼았을 때의 연작을 재현하면서 그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담긴 듯하다. 카미유가 살아있을 때 양산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린 1875년의 작품과 비교하면 밝은 색의 자연 풍경은 여전하지만 카미유의 이목구비는 흐릿하기만 하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영혼의 모습처럼. 어쩌면 카미유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세월에 씻기어 생김새가 흐릿해진 것일지도.

 

카미유는 모네에게 사랑과 창작의 원천이며 힘들고 어렵던 시간마다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의 근원이었다. 카미유만이 그의 영원한 모델이자 그의 작품에 표현된 빛 그 자체였다. 하나의 작품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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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 보급판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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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관심이 있어 대중을 위한 과학교양 서적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본격적으로 과학 지식을 공략해 보겠다는 생각이 솟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때 용감무쌍하게 전공 서적을 들춰보았다간 내 인생과는 아무 관련 없는 수식과 용어들에 다시 기가 죽고 목표를 수정하게 된다.

 

자연과학과 공학의 기초가 되는 물리학이 과학기술 발전에 결정적으로 공헌했음에도 학생들에게 기피대상이 되고 있다. 아마도 어렵고 재미없다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물리학자들에게 왜 물리를 선택했느냐고 물어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물리가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물리학은 분명히 재미있는 학문인데 우리가 그것을 재미없게 혹은 어렵게만 대해 온 때문이지는 않는가?

 

아인슈타인은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충분히 잘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했을 만큼 지식을 전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세계적인 과학 천재들이 모여 공부하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들도 1960년대 초에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 이곳 학부생들이라면 수학, 과학 분야에서 미국 최고의 영재들임에 틀림없는데 왜 물리공부를 힘들어 하는가,고민하다가 그들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양자전자기학을 완성한 뛰어난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에게 일반물리학 강의를 맡겨보기로 한 것이다.

 

파인만의 강의는 명강의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가장 큰 특징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주제라도 완전히 자신의 언어로 소화한 후에 전달하기에 항상 새로운 영감과 깨달음의 감동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강의철학을 이렇게 얘기한다.

 

“우선 당신이 강의하는 내용을 학생들이 왜 배워야하는지, 그 점을 명확하게 파악하라. 일단 이것이 분명해지면 강의 방법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머리말에서, 23쪽)

 

1961년부터 2년간 행해진 파인만의 일반물리 강의는 대히트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강의를 특히 즐긴 사람들은 정식으로 수강신청을 한 학부 신입생들이 아니라 대학원생과 교수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파인만 강의의 특징이 아주 잘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파인만 자신이 대학 학부 1학년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의 일부라 그다지 어렵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현상으로 물리 법칙을 설명하는 파인만 특유의 접근법이 녹아 들어있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일상에서 심오한 물리학 이론을 유추해낸다. 원자에서 시작해서 기초 물리학, 물리학과 다른 과학과의 관계, 그리고 에너지, 중력, 양자적 행동 등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를 소개한다.

 

예를 들면 소금이 물에 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파인만을 따라 분자의 시야에서 이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주변의 다양한 현상을 ‘진짜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느낄 수 있다. 나트륨과 염소가 전기력으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던 소금의 결정은 물에 들어가면 붕괴하기 시작한다. 물에서 산소의 음이온과 수소의 양이온들이 나트륨과 염소이온을 각각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서로 반대 극성을 가진 이온들이 서로 끌어당기면서 소금 결정이 붕괴돼 물에 녹는다. 하지만 소금의 일부 원자가 결정으로부터 붕괴되는 동시에 다른 원자들은 물속에서 결정으로 되돌아온다. 소금이 물에 녹을 지, 결정이 생길 지는 물과 소금의 양에 달려있다.

 

양자역학은 현실에서 직관적으로 체험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파인만은 전자를 입자 또는 파동으로 볼 수 있는 실험을 통해 양자적 행동의 미스터리를 설명한다. 틈새를 통과하는 전자는 총알과 같은 입자처럼 덩어리로 벽에 도달하지만, 특정 위치에 도달할 확률은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전자는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결론이 그래서 나온다. 이러한 모순투성이 이론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기둥 삼아 유지되고 있다. 우리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불확정성 원리’를, 전자의 운동방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여기서 사수의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발사되는 총알을 쏜다. 2개의 철판구멍을 두고 난사되는 총알의 탄착점과 역시 2개의 구멍으로 생겨나는 물결의 간섭, 우리가 ‘입자’라고 알고 있는 전자는 어떤 운동 모델을 따를 것인가. 오늘날 수많은 물리 입문서가 모방해 낯설지 않은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재기 넘친 말투로 생생하게 전하는 설명은 듣는 이에게 분명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심리학 등과 같이 물리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다른 과학들을 설명하는 제3강은 특히 흥미롭다. 아니, 이 책에서 제3강의 내용이 제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물리학과 다른 과학에 대한 개념을 매우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이 책을 읽을 때 제3강부터 먼저 읽어도 좋다. 여기에서 파인만은 천문학과 물리학의 관계를 밝히면서 시인들의 게으름과 무관심을 질타한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목성을 쉽게 의인화하면서도 목성이 메탄과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구형의 회전체라는 뻔한 사실 앞에서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이렇게 한정된 소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들은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가?" (123쪽)

 

과학적인 발견의 축적 때문에 별의 아름다움이 상실되고 있다는 시인들의 불평불만에 대해 파인만은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새로이 알려진 사실이 오히려 지적이고 서정적인 풍요로움을 선사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물리학은 간단한 중력 법칙에 의해 깨끗하게 설명되며 중력 이론이 풀지 못한 수수께끼도 ‘상대성 이론’이 속 시원하게 해결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어쩌랴. 오늘의 물리학은 ‘맹목의 우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세계의 현상을 설명해주는 양자역학이 확률과 우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며 역정을 낸 것도 당연하다.

 

‘최첨단의 물리학은 한마디로 무식의 전당이다.’ 동료 교수들마저 어려운 과학을 쉽게 이해하는데 성공한 파인만마저도 과학의 한계를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알면 알수록 풀어야 할 수수께끼 또한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가 강의를 한 지도 40년이 흘렀다. 소립자의 계열에 질서를 세운 ‘쿼크’ 이론이나 ‘궁극의 이론’에 한발 다가섰다는 초끈 이론, M이론 등의 최신 내용은 이 책에서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파인만이 소개한 물리 이야기는 우리 주위의 자연 현상이나 새로운 기기에 다양하게 적용되거나 세상을 작동하는 과정이다. 과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무엇이 핵심이 되는지를 아는 능력이 전체를 보는 눈이며, 간단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자세한 내용을 배우는 자세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가 숨겨둔 비밀을 하나씩 벗겨나가는 지적 떨림과 즐거움은 언제까지나 가장 ‘Fine(멋진)’이다. 그리고 우리는 파인만이 남긴 'Fine'(좋은)강의록 덕분에 과학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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