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갑니다
미리엄 엘리아.에즈라 엘리아 지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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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나는 미술을 무지[1] 좋아합니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무지 어려워요. 그래서 나는 현대미술에 무지[2]해요.










현대미술이 어려워도 괴롭혀도 나는 안 울어요.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요? 울면 바보예요. 나는 웃으면서 미술관에 갑니다라는 책을 읽습니다.


미술관에 갑니다5살 미만 유아를 위해 쇠똥구리 출판사가 펴낸 배움 책시리즈 첫 번째 책입니다쇠똥구리 출판사는 영국의 조그만 마을 똥골(Dunging)’[3]에 있는 교육 전문 출판사입니다출판사의 신조는 배움은 똥에서 온다입니다


본문 밑에 새로운 낱말이 있어요. 책에 나온 모든 낱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받아쓰기 시험 성적을 잘 받기를 원한다면 이 책을 권하세요. 아이가 단어를 완전히 이해할 때까지 반복적으로 쓰도록 하세요. 교육비를 최대한 아끼면서 자녀에게 조기 교육을 해주고 싶은 현명한 부모라면 배움 책시리즈를 선택하세요.







미술관에 갑니다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현대미술이 아무리 어렵다고 해도 요즘 나오는 작품들의 가격은 계속 치솟고 있습니다. 미술품 하나 사들이세요. 당신이 소유한 미술품의 가격이 상승하면 매력적인 상품이 되거든요. 당장 미술품을 살 돈이 없으면 아이에게 미술품에 투자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세요. 그러려면 제일 먼저 현대미술을 알아야 해요. 미술관에 갑니다는 현대미술의 모든 것을 알려 줍니다. 이 책을 읽은 자녀는 미술품을 가지고 노는 벤처 자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자녀와 함께 미술관에 가길 원하는 부모는 미술관에 갑니다를 반드시 읽어야 합니다. 미술관을 죽도록 즐기는[4] 방법을 알 수 있어요.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자녀에게 죽도[5]로 때리면서 가르치지 마세요. 자녀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미술관에 같이 가도 늦지 않습니다. , 자녀가 미술관에 갑니다를 반복해서 읽어야 합니다. 자녀가 미술관을 좋아하도록 세뇌[6]해야 합니다.


이 책의 주인공 수전(Susan)(John)은 엄마와 함께 미술관에 갑니다. 엄마는 술은 싫어해도 예술은 좋아해요. 미술관에 간 엄마는 예술에 취해 기분이 좋은 상태예요. 하지만 수전과 존은 미술품을 볼 때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쓰러질 지경입니다.







현대미술을 처음 접하는 아이들은 이 책을 보자마자 당혹스러워할 겁니다. 그러면 당신은 자녀에게 이렇게 얘기하세요. 이해 안 되는 게 좋아.”







만약에 자녀와 미술관에 같이 가게 되면 부모인 여러분이 직접 도슨트가 되십시오. 호기심 반 의문 반을 품은 자녀가 부모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할 겁니다. 당신은 친절하게 대답해 주세요. 되도록 어려운 용어를 섞으면서 말하세요. 아이들은 부모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대답을 잘하면 아이들은 현대미술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알고 싶어서 질문을 계속하는 아이가 있을 거예요. 더 이상 대답하기가 곤란하면 아이에게 스마트폰으로 직접 검색해 보라고 말하세요요즘 아이들은 책보다 스마트폰을 더 좋아하거든요. 


미술관에 갑니다를 구매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하세요. 당신의 자녀가 이 책을 수백 번 지겹도록 읽었는데도 현대미술을 모르겠다고 말할 수 있어요. 책값과 자녀가 이 책을 읽는 데 허비한 시간이 아까울 거예요. 그렇지만 쇠똥구리 출판사는 이 상황에 대해서 절대로 책임지지 않습니다.







현대미술을 이해하지 못한 아이를 꾸짖지 마세요현대미술을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한 아이는 지혜롭답니다. 본인이 무지하다는 것을 잘 아는 자녀는 미래에 소크라테스(Socrates) 뺨치는 철학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에게 현대미술 대신에 철학을 공부하도록 권장해 보세요. 쇠똥구리 출판사는 올해에 어린이를 위한 철학책 시리즈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시리즈 이름은 개똥철학 배움 책입니다. 쇠똥구리 출판사는 신조를 철저히 지킵니다비록 중소 출판사이지만, 직원들은 구텐베르크 은하계를 지탱할 정도로 똥이 단단합니다.


쇠똥구리 출판사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은 미술관에 갑니다미술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린 이걸 기서[7]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새로운 낱말 사전>

 


[1] 무지: 아주 대단히

[2] 무지: 無知. 아는 것이 없음

[3] Dunging: 비료를 뿌리는 행위, 배설

[4] 죽도록 즐기기: 미국의 평론가 닐 포스트먼(Neil Postman)의 저서 제목

[5] 죽도: 대나무로 만든 칼. 한때 교사들이 선호했던 사랑의 매’였음.

[6] 세뇌: 가스라이팅

[7] 기서奇書, 내용이 기이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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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4-02-10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올해도 건강하고 좋은 한 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복많이받으세요.^^

cyrus 2024-02-11 19:16   좋아요 1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니데이님. 설 연휴 잘 보내고 계시죠? 벌써 마지막 연휴 하루가 남았어요. 시간이 금방 흘러가서 아쉽지만, 마지막 날도 즐겁게 보내세요. ^^

stella.K 2024-02-10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 세뇌라고 하면 될걸 어느 때부턴가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가스같이 화~악 퍼졌어. ㅋ 역시 책을 많이 읽더니 언어유희가 장난이 아니군. 죽도 가지고 널 죽도록 패 줄 수도 없고. ㅋㅋㅋ 암튼 명절 연휴 잘 보내라.^^

cyrus 2024-02-11 19:18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잘 읽어 보면 개그 포인트가 여러 개 있어요. ㅎㅎㅎ 마지막 연휴 하루 남았지만, 내일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출산의 배신 - 신화와 비극을 넘어서
오지의 지음, 박한선 감수 / 에이도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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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 여행스케치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1994) 노랫말 중에서 -




Ignorance is bliss. 모르면 행복하다. 이 말을 반대로 뒤집어 보자. 알면 불행하다. 정말 그렇다. 부정적인 상황을 직시하면 불안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이 편해진다.

 

모르는 게 약이다. 불편한 진실을 알고 나면 기분이 찝찝하다. 그럴 때 눈 딱 감고 ‘몰라(mola)라는 약을 꿀꺽 삼키면 된다. ‘몰라는 약국에 팔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이 약을 지어서 처방한다. ‘몰라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기약보다 제일 많이 먹은 약이다꼭 알아야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알고 싶지 않을 때 몰라를 꺼내 먹는다미혼인 사람들이 회피하고 싶은 대화 주제가 결혼이라면 기혼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대화 주제는 출산과 육아다. 이들 모두 연휴 기간에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몰라를 먹는다. 


출산은 인간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출발선이다.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지만, 한편으로는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인생의 최대 고비다. 출발선을 통과하기도 전에 죽는 아기가 있다. 출발선을 너무 빨리 넘어선 아기는 오래 살지 못한다. 의사들은 이 아기를 미숙아로 진단한다.


우리는 출발선을 무사히 통과해서 지금까지 잘살고 있다. 그런데 출산을 생소하게 여기거나 불편해한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한다. 그녀들은 국가 소멸로 이어지는 저출산 현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산고(産苦). 그뿐만 아니라 출산 후에 일어나는 몸의 변화에 거부감을 느낀다. 예전의 날씬한 몸으로 되돌리기 힘들다막연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출산을 피한다출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세히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출산을 실제로 알고 나면 더 무섭다이럴 때 모르는 게 약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몰라를 남용한다. 출산에 대한 두려움을 잊은 그들은 행복하다. 의도적으로 무지를 복용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출산이 남의 이야기로 들린다.


남자들에게 임신과 출산은 입 밖으로 먼저 꺼내기 쉽지 않은 대화 주제이다. 요즘 남편들도 출산 휴가를 사용할 수 있고(회사 눈치 보느라 마음 놓고 활용하지 못하는 배우자들이 여전히 있다), 임신한 아내를 위해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 줄 안다. 그래도 임신과 출산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남자들은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지 않아서 신체적 · 정신적 변화를 알지 못한다.


출산의 배신: 신화와 비극을 넘어서는 출산과 양육의 세계를 덮고 있던 무지와 외면의 베일을 확 벗긴 책이다저자는 산부인과 의사다.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이 있으며 누구보다도 임신과 출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전문가다. 그렇지만 저자는 산부인과 의사가 알고 있어야 할 지식과 엄마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현실이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지식과 현실이 서로 어긋나면서 생긴 거대한 틈에 빠진 저자는 출산과 양육이 왜 힘든 일이 되었는지 이야기한다.


저자는 임신과 출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본인의 경험에 과학적 지식을 입혀서 설명한다임신, 출산, 육아 활동을 아우르는 삶을 전문 용어로 재생산이라고 한다저자는 여성의 재생산 활동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출산과 양육의 부정적인 면모만 두드러졌다고 지적한다


인구 늘리기에만 골몰한 국가는 여성에게 출산을 강요한다. 심지어 출산과 육아를 한 번 경험한 여성에게도 아이를 더 낳아달라고 재촉한다. 국가의 명령에 충실한 사람들은 여성들에게 갖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여자는 어머니가 되면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모성이다. 몸이 아프더라도 자식 건강이 우선이다.’ 아이와 함께 산전수전 겪어봤으니 다음 출산과 육아도 잘할 거라고 믿는다. 반면 자신들이 요구한 것을 실행하지 못하면 비난하고 질책한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면 엄마의 양육 방식을 문제 삼는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불임의 책임을 여성에게만 떠넘긴다우리 사회는 여성의 재생산 활동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일단 해보라는 식으로 밀어붙인다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성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도둑놈 심보.


출산의 배신출산과 육아가 여성만 하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책이 출산을 장려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책은 여성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출산 문화를 비판한다. 출산과 육아는 상당히 까다롭고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생산 활동이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으며 상식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을 불편해하고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출산과 육아는 힘든 일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출산과 육아라는 단어를 들으면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더 크게 느낀다출산과 육아를 바라보는 관심이 점점 줄어들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진다출산과 육아를 모르는 것은 절대로 약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에게 독이 된다무지함이 지속되면 우리 삶에 아주 밀접한 단어인 출산과 육아가 희미해져서 보이지 않게 된다그뿐만 아니라 임산부와 어머니의 삶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출산에 대해서 누구나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우리는 출산이라는 인생의 첫 출발선을 넘은 다 큰 애들아닌가



출산한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 cyrus의 주석

 

 


* 38

   




 재생산과 연관된 호르몬의 파고는 확실히 평소와 다른 감정 상태를 만든고[주1] 평소에 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하게 만든다.

 


[1] 만들고의 오자.





* 196~197




 

 암컷은 언제나 스스로 낳은 아기가 분명한 자기 자식인 것을 알 수 있지만, 수컷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특히 우리의 유인원 친척들처럼 다부다처제나 할렘[2]을 이루고 살아간다면 더욱 확신이 떨어진다.



[2] 할렘(harlem)’은 빈민가의 대명사로 알려진 미국 뉴욕에 있는 지역 이름이다. 중동 국가의 일부다처제로 잘못 알려진 용어하렘(harem)’으로 표기해야 한다. 하렘은 무슬림 여성들만 모여 있는 방을 뜻한다. 그런데 동양 문화를 과대평가한 18~19세기 유럽 지식인들, 소위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빠진 그들은 하렘을 퇴폐적인 일부다처제로 왜곡해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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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토요일 오후에 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가 처음으로 서점 <일글책>에서 진행되었다. ‘두루미의 의미는 예전에 쓴 <어두운 방, 밝은 방>이라는 제목의 갤러리 감상문에 언급한 적이 있다.


















[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첫 번째 선정 도서]

* 가와우치 아리오, 김영현 옮김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다다서재, 2023)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한 걸음씩 뛰어넘으면, 우리는 새로운 시선을 획득한다. 그 결과 세계를 두루두루 보는따뜻한 시선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가와우치 아리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중에서, 205)

 


이 문장에 영감을 받아 전시회 및 갤러리 감상문을 모아놓은 카테고리 이름과 예술 책 읽기 모임을 두루미로 정했다.아름다울 미()’를 뜻하는 영어 ‘me’,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전시회에 가서 예술작품을 두루두루 보는’ 개인적 경험을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두루미두루미 첫 번째 모임 선정 도서는 당연히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은 정오에 마무리된다. ‘두루미는 오후 2시부터 시작되었다. 빡빡한 일정이다. 오전 독서 모임이 끝나면 쉬거나 식사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하다. 그래도 긴 시간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사이에 나는 책방 <환상 문학>에 갔다. <환상 문학>은 알라딘 서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책방에 미리 주문한 책과 알라딘으로 주문한 책들을 받으러 두 곳을 들렀다.


두루미모임을 어떻게 진행할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책을 다시 훑어보지도 않았다. 오해하지 마시라. 모임을 잘 진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여유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다. 난 평소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주말이면 책방에 가서 (책을 사고), 책방지기를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독서 모임에 참석하는 일상이 올해로 13년째로 접어들었다. 처음은 2011년 서울 종로에 진행된 펭귄 클래식고전 읽기 모임으로 시작했다. 이때 모임에서 만난 분들과의 인연이 이어져서 달의 궁전(달궁)’이라는 모임에 합류했다. 대구 독서 모임은 우주지감 페미니즘 독서 모임 레드스타킹으로 같은 해에 시작했다. 지금은 <일글책> 모임에 정기적으로 출석하고 있으며 달궁은 간간이 참여하고 있다.


각기 다른 특징이 있는 독서 모임에 참여하면서 여러 유형의 사람들을 짧게, 때로는 길게 만났다. 모임에 꾸준히 나오다가 갑자기 불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모임 진행 분위기에 불만을 느꼈다. 이들은 독서 모임이 자신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다고 판단했고, 끝내 불참을 결정했다. 그런 분들을 봤기에 상대방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모임 시작 전에 미리 말했다.

 


 “오늘 모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편안하게 각자 하고 싶은 말하세요. 모임 다 끝나고 나서야 내 생각을 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마세요.”

 


자유로운 대화 진행에 걸림돌이 될 만한 모임 발제를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만들고 싶은 독서 모임은 편안하게 내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한다.


모임장은 공연을 전체적으로 총괄하는 연출가의 역할과 비슷하다내가 언급한 연출가는 공연작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배우의 연기와 무대 장치 등에 꼼꼼히 보고 개입하는그런 흔한 연출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예전에 희곡 전문 가게 <인스크립트>에 갔을 때책방지기이자 배우 권주영 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연출가의 역할은 뭐에요?’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봤다주영 님은 배우들이 편하게(능동적으로연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자신이 지향하는 연출이라고 대답했다짧게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간 대화였지만배우에게 제대로 배우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독서 모임을 진행하게 되면 저런 연출가처럼 되어야겠다고생각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 [마카롱 에디션]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펭귄클래식코리아, 2015)




두루미모임 진행은 처음이 아니다. 생애 첫 독서 모임 진행은 펭귄 클래식모임에서 시작했다. 그때 읽은 책이 니체(Nietzsche)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그날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내가 만든 모임 발제를 입술과 심장이 떨면서 말했던 순간은 잊지 못한다.
















* 웬다 트레바탄, 박한선 옮김 여성의 진화: , 생애사 그리고 건강(에이도스, 2017)




2019725<우주지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모임 선정 도서는 여성의 진화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내가 추천한 과학책이었다. 모임 장소는 침산동에서 고성동으로 이전한 지 얼마 안 된 <서재를 탐하다>였다. 7월 모임을 위해 발제 세 개를 만들었지만, 그때도 발제에 중점을 두지 않았다. 나는 독서 모임에 참여한 분들에게 당부했다. 완독에 쫓기지 말고, 다 못 읽더라도 각자의 관심사와 관련 있는 내용은 꼭 읽어오기,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들을 자유롭게 말하기. 5년이 지났는데도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방식이 한결같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 숀 캐럴, 김영태 옮김 우주의 가장 위대한 생각들: 공간, 시간, 운동(바다출판사, 2024)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숀 캐럴(Sean M. Carroll)은 자신의 책 공간, 시간, 운동 서문에 자신의 꿈을 밝혔다.

 


 나의 꿈은 사람들 대부분이 현대물리학에 관해 열정적으로 자기 의견을 알리는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런 세상에서는 직장에서 힘든 하루를 보낸 후 친구들과 선술집에 몰려가 무엇이 최적의 암흑물질 후보인지, 또는 무엇이 최상의 양자역학 해석인지를 놓고 떠들고 놉니다.

 

(서문, 9)



독서 모임에 늘 환영받지 못한 책과 주제가 있다. 과학, 정치, 종교다. 이런 주제는 어렵고, 지루하고, 내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기 부담스럽게 만든다. 독서 모임 선정 도서 대부분은 소설, 에세이, 또는 읽기 편안한 주제를 다룬 책들이다그리고 독서 모임을 위한 책을 추천할 때 신간보다는 이미 많이 알려진 구간 도서를 선호한다. 올해 나의 꿈은 편안하게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의 책을 읽고, 자기 의견을 편안하게 말할 수 있는 독서 모임을 진행하는 것이다내가 좋다고 생각한 책들은 편안하게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에 관한 것들이다. 편안하게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의 책을 함께 읽는 독서 모임을 만들어서 좋은 책을 보는 나의 안목을 증명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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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03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을 저도 몇개 하고 있는데, 저도 같은 고민입니다. 편안하게 의견을 말하게 하자니 다른 회원이 불편해 하고...^^ 시간에 쫒기고...

두루미 이름 찾아보러 갑니다.

cyrus 2024-02-09 10:09   좋아요 0 | URL
<소모임>이라는 어플에 <일상 속의 글과 책>이라는 모임명이 있어요. 제가 그곳에 소속되어 있어요. <일상 속의 글과 책>이 책방 ‘일글책’의 뜻이고 이곳이 <두루미> 모임 장소에요. <소모임>에 모임 공지를 올리면 편해요. ^^

blanca 2024-02-03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수 쳐드리고 싶네요. cyrus님이라면 충분히 꿈을 이루실 수 있을 것 같아요.

cyrus 2024-02-09 10:11   좋아요 0 | URL
이제 슬슬 시작해 보려고요. 모임 진행을 하게 되면 책을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읽고, 리뷰도 잘 써지겠죠? 제가 모임을 만든거니까 모임 후기도 꼭 써야겠어요. ^^;;

꼬마요정 2024-02-04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멋져요!! 꼭 꿈을 이루실 거예요!!
‘편안하게 대화하기 어려운 주제‘... 일단 먼저 이해를 해야 입이라도 떼볼텐데 말이죠. 얼마나 노력해야 할까요. 힘을 내야겠습니다!!

cyrus 2024-02-09 10:14   좋아요 1 | URL
저는 생각이 많으면 실행하지 못하는 성격이에요. 그래서 독서 모임 선정 도서 한 권을 다 읽은 뒤에 모임 공지글을 바로 올리려고 해요. 저를 제외한 두 명만 모였으면 좋겠어요. ^^

서니데이 2024-02-04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주말에 독서모임에 참여하시나요. 독서모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편한 주제를 선택하기도 하지만, 새로운 책과 주제를 선택해서 같이 공부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기회가 없다면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거나 선택하지 않을 내용들도 있을 것 같아서요.
잘읽었습니다.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cyrus 2024-02-09 10:18   좋아요 1 | URL
네, 평일 저녁에도 독서 모임에 참석하거나 모임을 만들고 싶은데 칼퇴근 시간이 생기는 날이 잘 없는 편이라서 쉽지 않아요. 6~7시에 마치면 좋은데, 잔업을 하면 8~9시에 마치곤 해요. 그래서 주말 모임을 선호해요. ^^
 




전망 좋은 []

 

EP. 23







환상 문학

마르틴 베크 시리즈 완간 기념 굿바이 북토크

2024128일 일요일 오후 2시~4시





일하다가 작업복 안주머니 속에 있는 휴대폰을 몰래 꺼냈다. 집중력은 단 1초 만에 내 엄지손가락을 지나서 인스타그램 앱을 가리켰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장르 소설 서점 <환상 문학> 계정의 게시글이었다. 그 글은 <환상 문학>에서 진행되는 북토크 홍보물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와야 할 텐데, 하고 봤다. 엄지손가락에 머무르던 내 집중력이 홍보물에 적힌 이름을 가리켰다. 김명남. 김명남? 김명남! 아니, 이분이 <환상 문학>에 오신다고! OMG!


김명남 님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번역했다. 과학 도서, 에세이,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번역했다. 이분이 번역한 책들의 저자는 다음과 같다.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 리처드 도킨스 자서전), 진화론에 관해서 도킨스와 치열하게 논쟁했던 스티븐 제이 굴드(여덟 마리 새끼 돼지), 글 잘 쓰는 뇌과학자 올리버 색스(고맙습니다), 미셸 오바마(비커밍),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역자님은 마이 버자이너, 질의응답 등 여성 의학 관련 책들도 번역했다





[내가 읽고 서평을 쓴 김명남 역자의 책들]

















*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창비, 2018)

 

* [절판] 에릭 셰리 일곱 원소 이야기: 주기율표의 마지막 빈칸을 둘러싼 인간의 과학사(궁리, 2018)

 

* 옐토 드렌스 마이 버자이너: 세상의 기원, 내 몸 안의 우주(동아시아, 2018)

 
















* 율라 비스 면역에 관하여(열린책들, 2016)

 

* 칼 세이건, 앤 드루얀 외 지구의 속삭임(사이언스북스, 2016)

 

* 조 슈워츠 똑똑한 음식책: 귀 얇은 사람을 위한(바다출판사, 2016)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 2016)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 2015)

 

* [절판] 베른트 하인리히 생명에서 생명으로: 인간과 자연, 생명 존재의 순환을 관찰한 생물학자의 기록(궁리, 2015)










 








* 리처드 C. 프랜시스 쉽게 쓴 후성유전학: 21세기를 바꿀 새로운 유전학을 만나다(시공사, 2013)

 

* 닐 슈빈 내 안의 물고기: 물고기에서 인간까지, 35억 년 진화의 비밀(김영사, 2009)

 

*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김영사, 2007)

 




역자님의 책들을 읽었고, 서평과 에세이를 썼다. 서평을 쓰지 않았지만, 완독했거나 읽다가 만 역자님의 책들도 가지고 있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10]

* 마이 셰발, 페르 발뢰 함께 씀, 김명남 옮김 테러리스트(엘릭시르, 2023)




그런데 역자님이 범죄소설을 번역한 사실을 <환상 문학> 공지글을 보고 알았다. 더 놀라운 건 범죄소설 한 권이 아니라 시리즈로 된 열 권을 전부 번역했다! 스웨덴 출신의 마이 셰발(Maj Sjowall)페르 발뢰(Per Wahlöö)라는 두 작가가 쓴 <마르틴 베크>(Martin Beck) 시리즈







마르틴 베크는 범죄소설 시리즈의 주인공인 형사 이름이다. 셰발과 발뢰는 연인 관계다. 두 사람을 이어준 건 글쓰기와 마르크스주의였다. 두 사람이 함께 쓴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부르주아 사회의 문제점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사회파 범죄소설이다작년에 마르틴 베크 시리즈 마지막 작품 테러리스트가 출간되었다.

     

사회파로 분류되는 범죄소설과 추리소설 주인공은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명탐정이 아닌 발로 뛰어다니면서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 사회파 범죄 · 추리소설에 나오는 범인 역시 주인공이다. 사회파 범죄 ·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들은 범인이 죄를 저지르는 동기를 상세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예리한 질문을 던진다.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서 죄를 저지른 범인에게 무조건 욕하면서 손가락질해야만 하는가? 사회파 범죄 · 추리소설은 독자들의 분노를 유도하기 위해 범인에게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인간을 삐뚤어지게 만드는 사회 문제를 제대로 보라고 가리킨다.
















[마르틴 베크 시리즈 4]

마이 셰발페르 발뢰 함께 씀김명남 옮김 《웃는 경관》 (엘릭시르, 2017)




<환상 문학> 책방 주인장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웃는 경관을 내게 추천했다. 그러면서 북토크에 오라고 권유했다. 책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말랑해지는 나는 북토크에 참석하기로 했다.



















* [절판] 장경현, 김봉석, 윤영천 탐정 사전: 역사상 중요한 탐정의 목록과 해설(프로파간다, 2014)




솔직히 말하자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었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웃는 경관을 읽는 것보다 역자 님의 친필 사인을 받고 싶었다. 비록 책을 읽지 않았지만,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어떤 내용인지 확인했다







전 세계 범죄 · 추리소설에 등장했던 탐정과 형사들을 소개한 탐정 사전을 참고했다. 이 책에 마르틴 베크를 소개한 항목이 있다.








북토크는 추리소설가 김세화 님이 진행했다추리소설을 즐겨 읽는 분답게 <마르틴 베크시리즈의 작품성이 높은 이유를 설명했다. <마르틴 베크시리즈는 북유럽 범죄소설의 시초이 작품이 본격적으로 알려지자헨닝 만켈(<쿠르트 발란데르 경감시리즈)과 스티그 라르손(<밀레니엄시리즈)이 나올 수 있었다
















김세화 기억의 저편》 (몽실북스, 2021)




방송 기자로 일한 적이 있는 작가님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 속 형사들의 성격 및 말투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인 역시 사회파로 분류할 수 있는 장편 기억의 저편을 썼으며, 올해 여름에 새 장편소설을 발표할 거라고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역자님도 추리소설 마니아다. 그래서 역자님은 중년 형사가 등장하는 하드보일드 소설(사건과 인물을 냉정하게 묘사한 소설. 미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문학 유파이며 가장 유명한 작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레이먼드 챈들러)을 좋아한다고 했다.






 

두 시간 동안 작가님과 역자님의 대화를 가까이서 듣고 나니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다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 권을 다 안 사도 되겠‥…. 다 살 수 없어도 시리즈 첫 번째 책부터 읽어봐야지. Hej, Martin Beck! 

     



‘Hej’는 스웨덴어로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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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2-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미, 좋았겠구만. 번역작이 꽤 많네. 열심히 사시는 분이시네. 그럼 영어는 기본이고 스웨덴어 전공이신가? 난 김봉석 님 보니까 반갑네. 이분 책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탐정사전 절판이라니 품절의뢰하면 알라딘이 찾아 줄랑가 모르겠구만.
근데 OMG는 무슨 뜻이니?

cyrus 2024-02-03 05:55   좋아요 1 | URL
역자님이 영어 전공이라서 영어로 번역된 마르틴 베크 시리즈로 번역을 시작했대요. 그런데 영어 번역본이 스웨덴 원서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은 거라서 결국 원서를 대조하면서 번역했다고 해요. OMG는 ‘Oh, My God’의 줄임말이에요. 유행한 지 꽤 오래된 신조어에요. ㅎㅎㅎ

blanca 2024-02-01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역자 번역서 중 <면역에 관하여>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기회가 되면 헨닝 만켈 책 읽어보고 싶어요. 유익한 시간 보내셨네요.

cyrus 2024-02-03 06:00   좋아요 0 | URL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게 영향을 받은 작품이 헨닝 만켈의 발란데르 경감 시리즈라고 합니다. 그래서 두 작가의 책을 동시에 읽으면 소설에 묘사된 주인공의 성격과 태도가 비슷한 걸 확인할 수 있대요. ^^
 




사실 오늘 고전 읽기 모임에 안 오려고 했었다. 한 주에 한 번 플라톤(Plato)의 대화편을 읽고 있다. 오늘이 플라톤 대화편 읽기 마지막이다. 1월 고전 읽기 모임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화편은 향연이다. 글은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것이다
















[대구 책방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파이데이아 독서 목록 2년 차]

* 플라톤, 천병희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도서출판 숲, 2012)

 

* 플라톤, 강철웅 옮김 향연(아카넷, 2020)




향연을 다 읽긴 했다. 그런데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내가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향연의 주제는 사랑이다.

















* 플라톤, 강철웅 옮김 소크라테스의 변명(아카넷, 2020)




오늘 모임에 참석한 분들은 플라톤 특유의 긴 문장을 눈으로 따라가느라 힘들었지만, 그래도 사랑에 대한 향연 참석자들의 견해 일부에 공감한다고 했다. 나도 이 향연에 껴서 사랑에 대한 내 견해를 밝히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연애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 또한 지혜라고 했다(소크라테스의 변명/변론). 연인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서로 다른 내 삶과 연인의 삶이 포개진 채 살아보면 사랑이라는 감정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서 내 몸과 정신이 건강해지는 연애관이 정립된다. 연애 경험이 없는 사람이 사랑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건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연인을 만나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느껴보지 않았으면서 사랑은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는 태도는 솔직하지 못하다. 난 아직 사랑을 모른다. 나의 무지함을 알고 있어서 오늘 모임에 참석해야 말지 고민했다.


소크라테스는 사랑꾼이다. 그는 자신과 성격이 정반대이자 정념에 쉽게 사로잡히는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사랑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다친 알키비아데스를 구출했다. 동료 장군들은 전쟁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알키비아데스가 상을 받아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용기에 감탄한 알키비아데스는 장군들에게 정작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소크라테스라고 건의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에게 상을 양보한다(향연220e, : 368). 이 대목은 소크라테스의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만, 연인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사랑꾼다운 모습이기도 하다.

















* 아몬드 단거, 장미성 옮김 사랑에 빠진 소크라테스: 철학자의 탄생(글항아리, 2022)




플라톤의 대화편은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한 사람의 생애를 정확하게 기술하기가 어렵다. 여전히 소크라테스는 수수께끼에 가려진 철학자다. 비록 가설이지만, 사랑에 빠진 소크라테스는 사랑 앞에서 진지한 소크라테스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못생긴 외모육체적 욕망을 경계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노년기에 들어선 소크라테스의 모습만 보고 있다. 사랑에 빠진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대화편과 기타 문헌들을 근거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소크라테스를 새롭게 복원한다. 젊은 소크라테스는 행동이 민첩한 군인이었고, 레슬링 선수였고,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했고, 연인을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 플라톤, 이기백 옮김 《크리톤(아카넷, 2020)

* 플라톤, 전헌상 옮김 《파이돈(아카넷, 2020)




그동안 나는 크리톤파이돈에 묘사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따져가면서 읽었다크리톤에서 자신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가 나약해 보였다파이돈의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불변하다고 주장하면서 눈에 보이는 현상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그렇지만 향연을 읽었을 땐 그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만약 플라톤이 향연에 부제를 달았다면 이렇게 썼을 것이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향연에 들어오지 마라.’ [] 운이 좋게도 사랑을 진지하게 논하는 자리인 향연에 나는 한 수 접고 들어갈 수 있었다. 짧든 길든 연애를 하고 난 후에 다시 향연에 참석하고 싶다. 과연 그날이 올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 플라톤이 세운 학교인 아카데미아(academia)의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기록의 출처가 플라톤이 살았던 시대가 훨씬 지나고 나온 거라서 실제로 있었던 문구인지 불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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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1-27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혼해서 아기도 있지만, 아직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하는거지 알수 있는건 아닌 모양입니다...

cyrus 2024-02-01 05:5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사랑을 잘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SNS에 연애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짧은 영상들이 많이 나와요. 그 영상에 나오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사랑 전문가인 것처럼 말하거든요.

페크pek0501 2024-01-28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작가가(체홉이었는지...) 소설에서 그랬어요. 사랑에 대해서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고요. 사람에 따라 달라 여러 경우가 있다는 그런 내용이었어요. 케이스 바이 케이스, 로 이해했어요.
사랑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작가로 알랭 드 보통을 꼽습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같은 소설을 읽으니 도움이 되더라고요. 그 후로 발표된 작품들 중에도 사랑에 대한 소설이 많은데 소설이면서 사랑에 대한 에세이로 읽혔어요.^^

cyrus 2024-02-01 05:59   좋아요 0 | URL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정말 유명한 책인데 아직 안 읽어봤어요. 알랭 드 보통이 쓴 다른 책들 몇 권은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유독 이 책은 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