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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풍 진단을 받은 이후로 한 달째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유지하고 있다. 고기를 안 먹고 사니까 정신적으로 괴로운 점은 없다. 나는 집밥을 거르지 않고 챙겨 먹는데 반찬 대부분이 채소류가 많다. 집에서 소시지 반찬을 마지막으로 먹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군인으로 복무했을 시기에 소시지 반찬을 많이 먹었다. 어머니가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채소 반찬을 선호한다. 게다가 일부러 음식을 싱겁게 만든다. 덜 짜게 먹는 게 건강이 좋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반찬 투정을 부렸을 법한데 그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소시지 반찬 안 먹은 지 진짜 오래됐어요라고 말하면서 소심하게 투정을 부린 적은 있어도 밥상을 뒤엎어버리면서 꼬장부리는(상대방이 일이나 행동 등을 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행위를 의미하는 은어) 패륜적인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군말 없이 먹기만 했다.

 

그렇다고 고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밖에 나가서 고기를 먹게 되면 순순히 집밥을 먹던 그 모습이 아니다. 당연히 고기 먹는 날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고기를 많이 먹는데도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다. 조금 먹어도 살이 찌는 사람에게는 부러운 체질이지만, 정작 많이 먹어도 몸이 마른 사람들은 괴롭다. 덩치가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몸이 마른 사람들이 비실비실하게 보인다. 그리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괴롭히고 싶어 한다. 이런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지금도 마초 맨(macho man)를 싫어한다. 마초 기질이 있는 동성을 만나면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내가 만난 마초들을 보면 일단 남자다움을 과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남성성을 동성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주변 남자들이 마초 맨을 좋게 보기 시작하면, 마초 맨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대학교 선배 중에 성격이 쾌활한 마초 맨 한 사람 있었다. 그는 덩치가 컸는데, 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선배들은 대학교 행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후배들과 같이 어울려서 잘 논다. 그런데 이 선배의 문제점은 술에 취하면 마초 기질을 드러낸다. 술을 못 마시는 후배가 있으면 모임 분위기를 흐리게 한다고 농담을 한다. 그런데 그 농담을 가볍게 보면 안 된다. 마초 선배를 오랫동안 잘 아는 과 학생들은 긴장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마초 선배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암시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초 선배가 오는 날이면 평소 술자리보다 더 활기찬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마초 선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꼰대스러운 잔소리+단체 얼차려콤보를 받는다. 심하면 후배에게 손찌검까지도 한다. 마초 선배는 자신보다 아래인 후배들에게 얼차려를 줌으로써 남자다움을 한껏 뽐내려고 했다. 한 번은 자신의 여자친구와 함께 대학 축제 주막에 들린 적이 있는데, 여자친구가 보는 앞에서도 후배들에게 얼차려를 줬다. 후배들은 얼차려 받을 만한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선배는 여자친구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말 한 마디하면 후배들이 잘 따른다고.” 이건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행동이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선배라는 지위를 마음껏 누렸다.

 

마초 선배가 술자리가 있는 날에는 누구나 피하려고 한다. 그런데 피할 수가 없다. 그 당시 마초 선배 학번이 최고 학번이었기 때문이다. 마초 선배는 졸업을 코앞에 둔 사람인데도 학과 생활에 관심이 많았다. 마치 자신이 특별하고도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려서 남들로부터 관심받고 싶은 사람처럼 말이다. 딱히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성격인데도 지금도 그와 연락하는 학교 동기들이 있다. 평소에 성격이 좋아서 어울릴만한데, 문제는 같이 술 마실 때는 되도록 피한다고 하더라.

 

 

 

 

 

 

 

 

 

 

 

 

 

 

 

    

 

남자들이 여러 명 모이면 동성사회성이 높아진다. 쉽게 말하자면 남자들 간의 우애를 의미하는데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동성사회성이 강화되면 남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특권적 지위에 위치하는 존재로 여긴다. 자신들만의(편향된) 기준으로 타인과 세상을을 바라본다. 이렇다 보니 동성사회성이 차별과 혐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와 여성 혐오가 어쟀다구?》의 '다른 목소리로: 남성 피해자론 및 역차별 주장 분석하기' 편에 소개되어 있다.

 

사실 이야기가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새고 말았다. 원래는 채식에 관한 내용을 쓰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불편했던 과거가 불쑥 생각나는 바람에 그동안 묵혀 놓은 감정들을 드러냈다. 나는 그 마초 선배가 고맙다. 군대 가기 전에 미리 군기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 다행히 진짜 군대에 가서는 선임 병들의 단체 얼차려를 받지 않았다. 아니, 그런 상황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딱 내가 입대를 한 시기부터 강압적인 군기 문화를 탈피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임 병으로부터 구타나 폭언을 받은 적이 없다. 제대하면서 알았다. 마초 선배는 군대 똥군기의 향수를 잊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부아르의 명언을 빌리자면, 마초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가 만드느냐? 내 주변에 있는 남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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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6-01 1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그런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마찬가지 행동을 해요. 제가 너무 불편해하는 게, 남자 상사들이 신입 직원들의 군기를 잡는 걸 보는건데요, 회식 자리에서 싫어하는데도 뻔히 무언가를 명령한다던가 하는거죠. 으.. 질색. `야, 신입이 그것도 안해?`, `야, 막내가 그것도 안해?` 이러는데 진짜 꼴보기 싫어요. 그때마다 번번이 `싫다는데 왜 자꾸 시키냐, 그러지마라` 고 말해도 통 고쳐지질 않더라고요. 뭐랄까, 그게 선배(?)의 당연한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윽. 저는 군기를 잡는다는 그 말부터 너무 싫어요 진짜.

곰곰생각하는발 2016-06-01 18:38   좋아요 0 | URL
캐공감.. 제발 그런 짓 좀 하지 말았으면.... 나이 쳐먹고 무슨 나이 유세인지..

cyrus 2016-06-01 20:16   좋아요 0 | URL
마초 선배도 그랬습니다. 후배들 만나면 일단 명령을 합니다. 만약에 노래 잘 부르는 후배가 있다고 하면 갑자기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켜요. 대선배가 시키는 걸 거절하면 선배한테 찍힐 수 있으니까 부르기 싫어도 불러야 합니다. 노래방 가서 흥을 못 살린다고 해서 개지랄을 떱니다. 그래서 신입 후배들은 미친 척하면서 놀아야 합니다. 이건 뭐 선배 기분 맞춰주는 노리개 신세가 되는 거죠. 진짜 이상한 선배 몇 사람 때문에 희한한 경험 다 해봤습니다. 다락방님 말씀대로 이런 사람들은 군대에 가서도 후임 병 괴롭히고, 사회에 나가서도 자신보다 서열 낮은 사람들 괴롭혀요.

2016-06-01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1 20:20   좋아요 0 | URL
고기를 많이 먹을수록 성격이 난폭해진다는 실험 결과를 본 적이 있어요.

문제의 마초 선배는 졸업해서도 학교 축제나 졸업생들 모임이 있으면 빠짐없이 출석합니다. 그리고 후배들 모이면 자신이 학생 시절 영웅담을 늘어놓습니다. 그 다음에 후배들 노는 분위기가 어색하거나 즐겁지 않으면 학과 최고참 선배를 갈굽니다. 학과 분위기가 자신이 학부생 시절 때 같지 않다고요. ㅎㅎㅎ ㅅㅂ 진짜 자기가 뭐 되는 줄 알고 설쳐요. 마초선배가 몸집이 크고, 힘이 센 편이라 아무도 쉽게 못 건들여요.

2016-06-01 2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6-06-01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엉뚱한 전개, 너무도 잼나요..ㅎㅎ

그런 마초 선배 쉬키들이 많이 있었지요. 이상하게 그런 넘들은 술을 그렇게도 좋아하더이다. 개인플레이하는 걸 지럴겉이 싫어하고.

여튼 저도 그런 인간들, 사회에서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냥 싫다는...근데, 이 사람들의 한 가지 장점은 대개 뒤끝이 없다는 거.. 10에 7-8은 그런 경향이 있는 거 같다는..

뭐, 이런 사람 좋아하는 여자들이 꽤 있는 걸로 아는데...어쨌거나 마초는 양날의 검같다는 생각이 듭니다요~ㅎ

cyrus 2016-06-01 20:23   좋아요 0 | URL
야무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격이 괜찮다고 합니다. 인기도 많아요. 솔직히 그 선배가 부러워서 험담을 하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ㅎㅎㅎ 저만 삐뚤게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 선배는 자신과 성격이 안 맞는 사람 보면 그냥 못 지나칩니다. 은근히 무시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6-01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좀 엉뚱한 말을 하자면 : 저는 야구 때문에 술을 마시는 버릇이 있습니다. 야구는 그냥 무의식적으로 틀어놓고 있는데.. 야구를 보면 이상하게 술이 땡긴단 말이죠.. 맥주를 마시든 소주를 마시든... 한국프로야구연맹을 상대로 재판을 걸야애겠습니다.

cyrus 2016-06-01 20:2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크보 의문의 1패! 아, 진짜 댓글 보고 웃었습니다. 야구를 혼자서 보면 심심해요. 뭘 먹으면서 보면 포만감이 느껴지고, 음식, 맥주 맛이 좋아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6-06-0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0% 실화. 제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건..
술만 먹으면 개가 되는 형님이 있었죠. 술 안 마시면 선비,천사, 가브리엘 대천사이십니다.
근데 술만 먹으면 박근혜가 됨...

한번은 영등포 8차선 도로 한복판에 나가서 빤스 벗고 난동 부리다가 경찰서 갔죠.
술만 먹으면 술집에서 난동을 부려서... 내가 물어준 돈만 해도 돈 천은 될 겁니다.
이새끼 지금 생각해 보면 술값을 낸 적이 없어요. 만날 난동을 부리면 밖으로 쫒아내니..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의도적이었던 것 같기도 함..

cyrus 2016-06-01 20:30   좋아요 0 | URL
술 먹으면 같은 말 무한 반복하고, 꼰대짓하고, 난동 부리고, 길바닥에 퍼지는 사람 진짜 싫어합니다. 대학 시절부터 이런 놈들, 선배들 뒤치다꺼리 한 적 많았거든요. 게다가 아버지도 술을 먹고 나면 말 많아지는 분이라서 좋지 않은 경험 많습니다. 저도 술 좋아하는데, 많이 마시면 그냥 조용히 있거나 집에 오자마자 잠듭니다. 괜히 옆 사람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 생각인데 술 마시고 나서 말 많아지거나 행동이 과격해지는 사람들은 관심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술 마시면 성격이 달라지잖아요. 그래놓고선 술 깨면 기억 안 나는 척하고요.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6-01 21:25   좋아요 0 | URL
그 인간 항상 다음날 아침이면 저에게 이런 말을 하죠 ?

어제 무슨 일 있었어 ?

죽습니다.. 아주...

cyrus 2016-06-02 16:34   좋아요 0 | URL
진짜 저렇게 말하는 사람, 재수 없습니다. ㅡ,ㅡ

감은빛 2016-06-01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저도 남들 앞에서 남자다움을 과시하고,
다른 남자들(혹은 여자들) 무시하는 인간들 싫어하지만,
가끔 술에 취하면 제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었을 것 같아 두렵기도 하네요.

채식을 위주로 하려면 집에서 밥을 해먹어야 하는데,
요즘 집에서 밥 먹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네요.
또 저녁에는 술을 먹는 날이 많은데,
술을 마시려면 채식만으로는 어렵죠.
안주는 대부분 육식이니까요.

cyrus 2016-06-01 20:32   좋아요 0 | URL
뇌가 술에 취하면 판단 능력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말할 때도 주의하는 편입니다. 필터 없이 말을 막 내뱉으면 싸움의 원인이 될 수 있거든요. ㅎㅎㅎ

술자리 있을 때도 밥 조금 먹어야 합니다. 빈속으로 술 마시면 장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감은빛 2016-06-01 22:18   좋아요 0 | URL
제가 저번에 그 현상을 정확하게 느꼈지요.
젊은 여성들과 술을 마시는 흔치 않은 경우였는데,
평소 제가 말 많은 꼰대를 싫어하기 때문에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죠.
말이 많으면 불필요한 말이 섞일 확률이 높고,
되도록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앉아 있었는데,
술을 마시면서 조금씩 그들과 친해지고,
친해지다보니 조금씩 더 말이 많아졌고,
그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다 보니 어느새 긴장이 풀어졌을 거예요.
밤새 술을 마시고, 아침 무렵 문득 정신이 들었는데,
제가 느끼기에도 혀가 살짝 풀린 상태로,
뭔가 설명을 하고 있더라구요.
저를 보는 여성들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분명 욕을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진짜! 꼰대가 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신경썼건만,
결국 그렇게 되어서 저 자신이 무척 한심하다고 여겼던 기억이 납니다.

마립간 2016-06-02 07:53   좋아요 0 | URL
제가 얼마 전, 녹색당원인 학교 선배에게 `육식`과 `해외여행`에 관해 녹색당의 입장 또는 교육자료를 부탁한 일이 있었습니다. 현 사회에서 육식과 해외 여행은 Anti-생태적이지만, 처음부터 (신석기 농업 혁명 때부터) 그렇게 판단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배님으로부터 자료를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댓글 읽으면서 에피소드가 생각나서 글을 남깁니다.

transient-guest 2016-06-04 0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다른 사람이 술꼬장부리는걸 못 받아주는 성격이라서 대학교 때 고생을 좀 했지요. 술만 먹으면 맨날 똑같은 이야기, 똑같은 구성으로 여자꼬신 얘기만 하던 개고긴데, 이곳에서도 한국인들의 문화라는게 어떻게 하다보니 제가 버릇없는 사람이 되더라구요.ㅎ 뭐 그렇다는 건데, 위에 말씀하신 마초맨은 글쎄요...좀 맞아야할 듯...근데, 어릴 땐, 그런 꼬장이 무섭기도 하고, 그런 문화속에서 자라면 이걸 부당하다고 덤비지도 못하는 그런 분위기랄까...좀 안타깝기도 하구요..점심 겨우 넘긴 시간인데, 갑자기 확 올라오네요..

cyrus 2016-06-04 18:08   좋아요 0 | URL
우정 때문에 술고래 친구들을 끝까지 챙겨줬는데, 정작 이 친구들은 제 속을 많이 태웠습니다. ㅋㅋㅋㅋ 이 녀석들이 제가 챙겨주는 줄 아니까 마음 놓고 술을 마십니다. 그래도 좋은 추억거리가 생겨서 지금은 웃으면서 넘깁니다. 지금쯤이면 미국 시간은 토요일 새벽이겠네요. 오늘 아침 메이저리그 경기에다가 오후에 축구 친선경기, 야구 경기까지 보느라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습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 ^^
 

 

 

길 한번 잘못 들면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무조건 내가 옳다고 생각해서 잘못된 길을 계속 가려고 고집하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럴 때 누군가가 잘못된 길을 가면 올바로 갈 수 있도록 다른 동행자가 꾸짖어야 한다. 잘못된 길을 걸으면 비판과 충고를 해주는 게 진정한 도리다. 하물며 인류 역사상 수없이 뜨고 진 사조나 이념도 맹목적 다수의 흐름에 빠져들면 원치 않는 곳으로 가게 마련이다.

 

 

 

 

 

 

 

 

 

 

 

 

 

 

 

 

    

 

프랑스의 여성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그녀가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정면으로 비판하기 위해 쓴 책 제목이 잘못된 길 : 1990년대 이후의 급진적 여성 운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바댕테르는 보부아르의 페미니즘을 계승하여 여성해방운동(MLF)에 뛰어든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성학자다. 그녀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인식하여 남성을 가해자로 매도한다. 이러한 전략은 남녀 간의 갈등·대립을 조장하여 양성평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바댕테르는 급진적 여성 운동이 남녀 분리주의의 함정에 빠진 상태이며 심각하리만치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경고한다

 

 

여성 계층과 남성 계층이라는 대립된 층으로 일반화되는 데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다. 이원적인 카테고리는 위험하다. 하나의 성을 하나로 묶어서 비난하는 것도 성차별주의와 비슷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남성/여성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은, 우리가 제거했다고 주장하는 '성의 위계'를 새로이 등장시킨다. 게다가, 우리의 투쟁 대상인 '권력 계급''윤리적 차원의 위계'까지 적용시킨다. 즉 권력을 갖고 있는 남성은 ''이고, 박해받는 여성은 ''이라 하고 있다. 따라서 희생자들에게 '선한 계급'이라는 새로운 신분이 주어짐에 따라, 계급에 대한 인식이 더욱더 강화된다. (잘못된 길70~72)

    

 

2005년에 정희진은 잘못된 길서평에서 바댕테르에 크게 실망했다고 썼다. 이어서 바탱테르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아직 광범위한 연대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된 길이 아니라 아직 가지 않은 길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바탱테르의 주장은 페미니스트로서의 행보에 어울리지 않는다. 여성 혐오의 심각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부 남성들의 입장과 유사하다. 바탱테르는 여성은 남성의 피해자로 보는 인식을 비판했다. 여성 스스로 희생자로 자처하는 상황에 집착하면 남성의 폭력적 본성을 고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바탱테르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 있다. 잘못된 길에서 인용한 문장을 읽어보자. 바탱테르는 강간 피해 여성을 조사한 통계자료의 허점을 밝히면서 강간의 의미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성적 폭력이 모두 '강간'이 아니다. 으슥한 주차장에서 칼을 들고 위협하는 23세의 남자에 의한 '강간''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는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강간 후의 트로마(글쓴이 주-이 책의 역자는 트라우마트로마라고 썼다)와 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 후의 트로마는 엄격히 다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분간하기도 어려운 강간의 통계 수치를 부풀리는가? '폭력적인 남성과 피해를 입은 여성의 이미지'를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잘못된 길50)

    

 

정말 위험한 발언이다. 강간 후의 트라우마와 본의 아니게 당한 애무 후의 트라우마는 다르지 않다. 아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두 유형 모두 성폭력이며 성범죄다.

 

 

 

 

 

성폭력 방식이 날로 다양해지고 있다. 특히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 슴만튀(가슴 만지고 도망치기)’, ‘엉만튀(엉덩이 만지고 도망치기)’ 등 기습 성추행도 있다. 치고 도망치는 식이지만, ‘본의 아니게 당한피해 여성이 받는 정신적 트라우마는 다른 유형의 성폭행에 비해 절대 작지 않다. 이후 피해자들은 밤길을 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포심에 휩싸여 심리 상담까지 받는 경우가 많다. 강제추행은 친고죄 규정이 폐지돼 피해자의 고소의사 없이도 10년 이하 징역이나 15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는 중범죄.

 

바댕테르의 주장이 상당히 파격적이어도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제기한 뜨거운 감자들을 살펴봐야 한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 주장하는 페미니즘표현의 자유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논쟁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바댕테르는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과 여성학자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 규제까지도 비판한다. 두 사람은 포르노는 강간에 이용된다. 강간을 계획하고, 실행하며, 흥분을 일으켜 성범죄를 저지르게 한다고 주장하면서 반() 포르노 운동에 앞장섰다. 특히 1983년 포르노를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로 규정하는 법 초안을 마련하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주 토요일 한겨레 칼럼에서 정희진은 안드레아 드워킨의 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과소평가된 고전이라고 했다. (관련 칼럼: <잠재적 가해자?> 한겨레, 2016527) 캐서린 매키넌은 성차별의 한 형태로 성희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포르노 규제 조례안을 발의하기 위해서 보수적인 공화당과 손잡기도 했다.

 

 

 

 

 

 

 

 

 

 

 

 

 

 

 

 

 

포르노 규제를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었다. 여성의 신비의 저자 알려진 베티 프리단, 성의 정치학을 쓴 케이트 밀렛 등은 과도한 검열 규제가 표현의 자유와 성적 자유에 제약을 준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여성학자 우에노 치즈코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캐서린 매키넌의 사례를 소개했는데, 자신을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소수파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알고 보면 페미니즘의 세계는 광대하면서도 복잡하다. 그 속에는 자유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급진주의자 등 각양각색의 사상을 지닌 페미니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다. 생각하는 방식에 차이점이 있어도 그들이 같이 내는 목소리는 똑같다. 남녀 모두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이념에 대한 맹목적 믿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념 내 대립이다. 생각의 차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틀렸다고 비난할 수 없다. 나와 다른 생각이 불편하더라도 차이를 포용할 줄 아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즘 논의가 점점 살아나고 있다. 페미니스트가 가야 할 길도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뻗어 가고 있다.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어느 길을 가고 싶은가? 선택은 자유다. 안심해도 된다. 잘못된 길에 가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관련 자료 (링크)

 

* 정희진의 잘못된 길서평 (한국일보, 2005930)

 

* 정희진 <잠재적 가해자?> (한겨레, 201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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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5-31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Dora 2016-05-31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에 따라서 혹은 학자에 따라 달리 정립되어지면서 학문의 발전이 올텐데 우리나라 페미니즘은 숲이 생기기도 전에 나무들이 베어져버린 느낌이랄까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감사

cyrus 2016-05-31 17:49   좋아요 0 | URL
아주 좋은 표현입니다. 이제 페미니즘의 나무가 무럭무럭 많이 자라야하는데, 이 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하는 남성 벌목꾼들이 많아졌습니다.

만두 2016-06-0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cyrus님....👏👏👏 좋은말씀감사합니다

cyrus 2016-06-01 16:42   좋아요 0 | URL
책에 나온 저자들의 주장을 정리한 것뿐입니다. 논란이 되는 주제라서 한쪽 입장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썼습니다. ^^

아이스 2016-06-27 19: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계적인 여성학자인 바댕테르의 주장이 훨씬 더 근거가 있어 보입니다.

1990년대 이후의 페미니즘으로 인해 일본이나 한국이나 남자들의 초식화 절식화가 심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계속해서 남자들의 성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그 결과로 여자들의 성도 억압되겠죠.

서구사회는 자유로운 성을 향유하는데 한국은 도대체 이게 뭡니까?
결국 민족 몰락만 가속화될 뿐이겠죠.


john b calhoun 의 쥐실험 결과를 보면 숫컷들에게 가해지는 과도한 스트레스는 결국 숫컷쥐들의 절식화를 초래하고 결국 쥐사회가 멸망하게 만들었죠.
쥐실험에서 숫컷들에게 가해지는 스트레스란 숫컷들의 고유영역에 대한 방어로 인해 가해지는 스트레스였죠.

먹이나 다른 조건들은 다 충족시켜 주고 영역만 제한한 실험인데 쥐 세대주기 6세대도 채 못채우고 멸망하게 됩니다.
쥐는 3개월이면 번식가능하고 임신기간이 22일인가 된다네요.

지금 일본이나 한국에서 일어나는 초식남 절식남도 쥐실험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봅니다.
민족의 소멸이라고 하면 되려나요?

남자들에게 계속해서 더더욱 많은 여러 가지 압력을 가하면 됩니다.
그럼 쥐실험의 아름다운자들처럼 남자들이 더더욱 초식남 절식남될 것으로 봅니다.

참고로 쥐들에게 나타난 이상반응을 보면 숫컷들이 자신의 둥지를 버리고 쥐실험장 한가운데서 숫컷들끼리 모여서 먹을 것 먹고 자신의 털 고르고 잡니다.
털은 윤기있고 생기있고 그래서 그 쥐들을 아름다운자들이라고 칭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절식남하고 비슷하지 않나요?


물론 일부 숫컷과 암컷들은 암수구별없이 마구 교미하고 공격적으로 변해서 서로 물어죽이기도 하고 쥐고기를 먹기도 하죠.


참 재미있는 실험이고 인간에게는 어떻게 적용되어질지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남자들에게 과도한 짐을 지우는 사회치고 출산율이 높은 나라가 없더군요.

그러다보면 낮은 출산율을 보충하고자 결국 이민을 받아들이고 출산율이 높은 나라들인 이슬람이나 아프리카출신들을 받아들이게 되고 결국 나중엔 여성들의 인권도 다시 추락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제가 그 때 까지 살아서 전체 결과를 볼 수는 없겠지만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죠.


한국도 지금 혼인율이 70%정도 됩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1.7명정도 아이를 낳고요.
0.7*1.7=1.19

지금 출생아수가 43~48만명정도 되는데 앞으로는 결혼적령기 인구가 60만명대라서 몇년안에 출생아수가 35~39만명대로 낮아질 것으로 봅니다.
2000년대 이후의 출생아수가 43~48만명대이기에 2030년~2047년까지의 출생아수는 25~29만명대로 줄어들 것이고요.

지금추세라면 한민족은 아마도 90년기간이면 출생아수가 1/4로 축소될 것으로 봅니다.
1970년대의 출생아수가 90~100만명정도였으니 60년정도의 기간에 1/3~1/4이 되었죠.

뭐 이민자들이 낳는 아이들은 제외하고 한민족이 낳는 아이들만 고려한 것입니다.

이대로 계속 외국인을 받아들인다면 나중에 한민족이 한국내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해서 고통받을 것은 안봐도 알 수 있겠죠.

외국인을 거의 안 받아들이고 있는 일본은 한국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걸을 것으로 봅니다.
서구는 지금정도의 출산율로는 사회를 유지할 수 없고 결국 이민을 계속 늘릴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슬람화되어서 여성인권이 후퇴할 것으로 봅니다.

제가 보고 있는 관점이 맞는지 틀린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으로 봅니다.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제이컵 솔 지음, 정해영 옮김, 전성호 부록 / 메멘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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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는 ‘수학’ 다음으로 머리 아프게 하는 학문이다.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 연구자, 인문계열 학생이라면 회계 앞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마련이다. 재무제표, 복식부기, 대차평균의 원리, 기업회계기준, 원가회계. 회계를 공부하면 알아야 할 내용이 상당히 많다. 오죽하면 회계학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이들도 회계가 골치 아프다고 말한다. 그런데 괴테는 회계를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경제는 신용사회를 기반으로 한다. 신용사회 기반인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회계감사 시스템이 개발됐다. 적정한 회계처리와 엄정한 회계감사는 자본주의 경제를 든든히 세우는 시스템이며 필수 절차다. 회계를 잘 모르더라도 ‘분식회계’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분식회계는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몰고 온다. 1999년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은 분식회계가 가져올 수 있는 재앙이 어느 정도인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 바로 회계의 불투명성이었다. 2000년 미국 7위의 매출액을 자랑하던 엔론(Enron)은 분식회계를 통해서 순익을 부풀리다가 끝내 회계부정 사실이 적발되어 순식간에 파산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이컵 솔은 어둠의 경제를 밝힌 회계의 찬란한 역사를 주목한다. 경영학과 출신이나 기업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를 읽어보시라. 누구도 회계를 외면하면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역사 속 회계는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다. 만약 회계가 없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바벨탑 같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회계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세까지도 채권·채무나 재산관리를 위해 기록해두는 단식부기에 머물렀다.

 

 

 

 

 

복잡한 상거래를 한눈에 파악하게 하는 복식부기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이 세 사람을 능가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루카 파치올리다. 그는 복식부기를 확산시키며 주식회사 출범과 근대적 자본의 축적을 이끌었다. 사실 파치올리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다빈치의 친구였다. 유유상종이다. 복식 부기의 가장 큰 긍정적 효과로는 상인 계급에 대한 공신력을 크게 높였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투명하고 정확한 원칙은 회계 정보에 대한 신뢰를 끌어올렸다. 회계 정보 작성 과정뿐만 아니라 회계 감사의 효율성도 제고됐다.

 

그러나 회계가 재평가받기 전까지만 해도 파치올리는 ‘잊힌 천재’였다. 파치올리 이외에도 회계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 있었으나 시대는 그들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회계 업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곱지만 않았다. 회계 업무 종사자들은 늘 항상 죄책감을 느끼면서 회계 장부를 들여다봐야 했다. 회계사의 수호신 성 마태오는 재산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돈 만지는 일이 세속적인 죄라고 주장했다. 회계사들은 수호신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업무를 중대하고 신성한 일로 여겼지만, 도덕주의자들은 돈 거래하는 회계사들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스페인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는 처음에는 파치올리의 회계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회계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왕도(王道)를 찾지 못했다. 그는 회계 공부의 어려움에 절망하여 ‘회포자(회계를 포기하는 자)’가 되었다. 결국, 회계업무를 다른 행정가들에게 맡겼다. 왕실 회계원들은 스페인의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 사실을 펠리페 2세에게 알리지만, 왕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왕실 자금을 비밀리에 횡령하던 고위 관리들은 자신들의 부정이 왕실 회계원들에 의해 발각될까 봐 두려웠다. 스페인 왕실은 행정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회계원 양성을 소홀히 했다. 회계에 무지한 스페인 왕과 고위 관리들의 어리석은 컬래버레이션은 정부의 재정 문제를 악화시켰고, 스페인이 쇠퇴하는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과 동시에 회계가 태어났다. 회계는 정직과 성실을 가장 중시하는 학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경영의 기틀을 잡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회계의 장점을 알고 있었다. 책 뒤편에 한국의 전통 회계 방식에 관한 부록이 있다. 파치올리보다 200년 이상 앞서 고려 개성상인들이 복식부기를 썼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개성상인의 후손이 소장한 19세기 회계장부 14권은 2014년에 등록문화재 제587호로 지정되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조상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왜 계승하지 못하고 단절됐는지 아쉬움이 크다. 정부가 앞장서서 우리나라의 회계 관련 법제도 등을 선진화해 왔고, 특히 국제회계기준(IFRS)을 전면 도입하여 회계 선진화의 획기적인 진전을 이뤄낸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회계에 대한 기본 인식을 선진국 수준으로 제고하려면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많다. 회계를 회계사들만 관리하는 특별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회계도 엄연히 말하면 돈 관리하는 일 중 하나인데도 우리는 여러 은행 금리가 어떤지 비교하거나 재테크 전략만에 관심을 쏟고 있다.

 

기업의 성장은 국가의 경제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회계는 바로 그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회계 업무의 조건에 정직과 도덕적 책임성을 무시할 수 없다. 분식회계 같은 어둠의 경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밝혀야 할 회계도 가끔 어두워질 때가 있다. 부정회계에 눈 감은 회계사는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의 모습만 보일 뿐 호혜적 인간의 향기는 느낄 수 없다. 이럴 때 정직한 회계와 회계사들의 입장은 난처하다. 신의 시대가 아닌 지금, 성 마태오를 불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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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0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30 19:53   좋아요 0 | URL
제가 대학생 때 복수전공으로 경영학을 신청했습니다. ‘재무회계’ 과목이 필수과목이었는데, 기본 회계를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덤비는 바람에 좋은 학점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전공으로 변경했습니다. ㅎㅎㅎ

회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단해요. 회계가 복잡하다고 해도 한 번 문제를 풀면, 꽤 빠른 시간 내에 다 풉니다. 저는 계산하는 능력이 많이 딸립니다. ^^;;

yamoo 2016-05-3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계와 자본주의 역사라...재밌는 책인 듯합니다. 근데,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제고해 봐야 할 여지가 있긴 합니다.

자신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이아몬드는 일단 주장하고 보는 거 같아요..ㅎ 근거가 매우 박약하거든요. 저 주장 다음에 뭔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니...문자를 만들어 활용하다보니 회계라는 발견을 했을 수는 있지만...저런 인과는 정말 다이아몬드 스럽습니다..ㅎㅎ

어쨌거나 흥미있는 분야의 책이라 저도 관심이 동하긴 합니다.ㅎ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5-30 19:55   좋아요 0 | URL
제가 책 내용을 잘못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총균쇠>를 들춰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야무님 말씀대로 다이아몬드의 주장 중에는 억측이 있긴 합니다. <나와 세계>를 읽고 실망했습니다. ^^

alummii 2016-05-3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회포자 나라 망치다 ..제가 젤 싫어하는 분야가 회계에요..이래서 사업은 절대로 못 한다는 ..ㅋ사실 월급 관리도 못해요ㅋ

cyrus 2016-05-30 19:56   좋아요 0 | URL
회계도 알아두면 좋은 내용인데, 경제학과 더불어 일반인이 어렵게 생각하는 저주받은(?) 학문입니다.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5-3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포자..ㅋㅋ 저도 수포자였으니 회포자 될 가능성이 높겠죠ㅠㅠ 회사는 역시 숫자로 말하는 곳이라 일찌감치 수학 포기한 걸 정말 후회하고 있습니다. 살짝 흥미가 생기는 책이었는데 싸이러스님이 재밌게 써주셔서 급땡기네요. 근데 이 책 읽으면 회계능력이 좀 느나요~? 0자 맞추는데 스트레스 왕창 받아요ㅠㅠ

cyrus 2016-05-30 19:5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역사책이라서 회계 지식 몰라도 됩니다. 회계 관련 용어를 옮긴이가 주석으로 잘 설명해놓았습니다. 회계로 이점을 보는 사람과 반대로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 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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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2014년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이 남긴 발언이다. 분단된 남북을 통일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물적 인적 자원이 필요한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과실은 실제로 대박일까? 통일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수십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통일 비용을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또 남북 주민 간의 문화적 이질감을 통합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비용 또한 무시 못 한다. 통일이 실제 이뤄지면 60년 넘게 분단된 이산가족들의 재결합 등 국가와 사회적 치유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물적 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에 정책연구와 집행에 있어 경제적 득과 실을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통일되면 남북의 인구 9천만 명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효과를 볼 수 있어 당장 내수 시장의 확대 효과가 발생한다. 북한의 지하자원 가치는 약 6,700조 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북한의 자원에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합쳐진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통일을 통해 남한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전자회로 등 핵심부품에 쓰이는 희토류 등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면 남한에는 ‘횡재(windfall)’의 기회다. 이코노미스트는 ‘통일은 횡재다’라고 예상했다. ‘조갑제닷컴’ 대표 조갑제는 자신의 칼럼에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을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뻥 뚫리는 명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통일 한국이 되면 독일 수준의 강대국이 될 거라고 믿었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확보한 나라는 정말 강대국이 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 않다. 콩고, 앙골라,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국가들이라는 것 말고도 이들 나라엔 공통점이 있다. 내전에 시달린다는 점과 천혜의 자원이 풍부한 국가라는 점이다. 땅만 파면 석유, 천연가스, 다이아몬드가 쏟아지는 나라들이 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 땅에서 서로 싸우는 걸까.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내린 결론이 있다. 이름하여 ‘천연자원의 저주’다. 나라 경제를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일수록 가난하고 부패한 독재자를 갖기 쉬우며 내전에 휩쓸리기 쉽다. 돈으로 쉽게 환산할 수 있는 자원으로 백성들 배를 불리면 좋으련만 지도자는 부패와 손을 잡고 저 혼자 부자가 돼버린다. 자원보유국의 관심이 더 큰 파이를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 파이의 더 큰 몫을 차지하는 데만 쏠려있다. 그러면 정권을 유지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경제성장을 위한 물적, 제도적 기반을 닦는 데는 소홀해진다. 이를 눈뜨고 봐줄 수 없는 반대파는 무기를 들고 일어서게 마련이다. 천연자원들은 손에 돈을 쥐여 줄지는 모르지만, 일자리를 만들지는 못한다. 천연자원 중심 산업에 너무 쏠리면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통일대박론’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다. 통일 한국이 아프리카 빈국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파 경제학자들은 ‘천연자원의 저주’ 사례를 들면서 자원을 국유화한 나라의 실정을 비판하는데 우리나라가 잘 사는 이유를 ‘자원이 없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의 빠른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우익의 거두 조갑제는 우리나라가 통일되면 ‘무지무지한 지하자원을 얻는 대박’이라고 주장한다. 대기업 산하 경제연구소 소속 경제학자들도 통일 한국의 북한 땅에 매장된 지하자원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지하자원을 이용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통일 한국의 청사진을 벌써 그려놓는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한국이 다이아몬드와 석유가 없어서 복 받은 나라라고 말한다. 통일 한국은 다행히 다이아몬드와 석유가 없다. 베네수엘라처럼 천연자원을 국유화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비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천연자원을 개발할 권리를 얻기 위해 기업들이 정부에게 로비를 펼칠 거고, 권력과 기업이 불건전하게 공생하는 정경유착의 그늘이 우리나라 경제에 드리워진다. 부국(富國)이 되려면 국민의 생산 의욕을 증진하는 ‘좋은 제도(good institution)’가 정착되어야 한다. ‘좋은 제도’가 이루어지는 조건 중 하나가 바로 부패가 없는 사회다. 대통령의 ‘통일대박론’, 이코노미스트의 ‘통일 횡재론’을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통일 한국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천연자원의 저주’를 대비할 수 있도록 경제 기초체력(Fundamental)이 안정적으로 탄탄해야 한다.

 

통일 한국이 ‘천연자원의 저주’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천만다행이다. ‘통일대박론’을 비관적으로 보는 내 입장의 근거가 부실하게 느껴진다면, 그에 대한 반박을 인정하겠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를 읽으면서 통일 한국의 미래상을 나름대로 예측해봤다. UN의 대북 제재 이후 북한 체제가 점점 흔들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저절로 북한이 붕괴하기를 원한다. 남한 정부와 남한 국민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상황은 북한만의 위기가 아니라 언제가 닥쳐올 정세 변화를 맞아야 하는 남한의 위기일 수도 있다. 현실적이지 않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통일 한국의 문제를 ‘건설적 편집증(constructive paranoia)’으로 조심스럽게 보고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창안한 표현이다. 전통사회의 사람들은 현대인이 보기에 지나치게 조심성이 많다. 현대인은 전통사회의 구성원이 경험으로 습득하였던 것보다 위험을 잘못 평가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남북한이 통일되는 상황은 기쁜 일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성과는 화려해 보이지만, 문명사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는 극히 짧은 순간일 뿐이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보는 성과 역시 매우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우리나라뿐만 전 세계가 지구의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 생산의 감소, 불평등 문제, 그리고 환경자원이 감소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우리나라는 통일이라는 특별한 내적 변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복잡한 요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이를 간과한 채 국가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면, 위기의 균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러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한마디로 ‘(정부가) 정신 못 차리면 통일은 쪽박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 딴죽걸기

 

 

 

 

* 2장에 국가의 ‘성쇠의 반전’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주장한 학자로 ‘다론 아제모을루(Daron Acemoglu)’와 ‘제임스 로빈슨’이 언급되었다. (70쪽) ‘다론 아제모을루’ 발음이 어려운데, 이 두 학자가 쓴 책이 2012년에 번역되어 나왔다. 원제는 ‘Why Nations Fail’, 번역본 제목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다. 이때 Daron Acemoglu을 ‘대런 애쓰모글루’로 표기되어 있다.

 

*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일본의 문화적 가치입니다’ (115쪽)
일황 호칭을 ‘천황’, ‘덴노(てんのう)’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호칭 표기에 대한 논란이 많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중국이 일황을 ‘황제’로 부른다.

 

 

* 책 부록으로 실린 질의응답 형식의 글 ‘재레드 다이아몬드에게 문명의 길을 묻다’를 보면서 약간 실망했다. 다이아몬드는 한국 교육을 미국 교육과 비교하면서 한국 교육의 장점을 칭찬했다. 212쪽에 있는 문장을 인용해본다.

 

“내가 알기로는 학교 교사의 위상이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높고, 학력 테스트에서도 한국 학생의 성적이 미국 학생보다 더 높습니다.”

 

한국 교사의 위상이 미국 교사보다 높다? 다이아몬드도 오바마 대통령처럼 한국 교육의 현실을 잘 모르는 '에듀켄탈리즘(educentalism, 교육 education과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를 합친 말)'의 환상에 빠졌다. 그것보다 다이아몬드는 우리나라가 출산율 저하 문제로 인해 교사 정원이 감소세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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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빠 2016-05-31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 놓은 지는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알라딘에서는 구매한 책에 대한 리뷰를 부탁하는데, 책을 읽는 것 보다 리뷰를 읽는 게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cyrus 2016-05-31 17:52   좋아요 0 | URL
관심 있는 책의 서평을 읽을 때, 다른 분들이 쓰신 것도 같이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제 글은 책 내용과 전혀 관련 없는 사족이 많은데다가 줄거리 요약을 친절하게 하지 않습니다. ^^;;
 

 

 

 

 

 

 

 

 

 

 

 

 

 

 

 

 

 

 

 

 

 

 

 

 

 

 

 

 

 

 

 

 

페가나북스 무크지 창간호를 보다가 ‘플레이버와이어(Flavorwire)’라는 외국 웹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플레이버와이어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대중문화 사이트다. 이 사이트에 책, 영화, 대중가요 등 다양한 문화를 주제로 다룬 기사들을 볼 수 있는데, 기사 내용이 리스트 형식이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 50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내용의 영화 30편’ 같은 방식으로 되어 있다. 플레이버와이어에 재미있는 내용의 기사가 많은데, 내가 가장 흥미롭게 본 것이 <Flavorwire 50 of the Scariest Short Stories of All Time>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플레이버와이어가 선정한 가장 무서운 단편소설 50선’이다. 이 글은 2014년에 작성되었다. 사실 이 기사 내용을 알리고 싶어서 지난주에 단편 공포소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윌리엄 W. 제이콥스의 <원숭이 손>이다. 이 작품은 ‘가장 무서운 단편소설 50선’에 포함되었다. ‘가장 무서운 단편소설 50선’ 중에 번역된 작품을 엄선하여 매주 한 편씩 소개하고 싶다. 이번 주에 소개할 두 번째 작품 역시 ‘가장 무서운 단편소설 50선’에 선정된 것이다.

 

 


No. 2 사키 – 열린 격자문 (The Open Window)

 

 

 

 

 

 

 

 

 

 

 

작품 전문 출처는 《스레드니 바쉬타》(43~48쪽, 페가나북스)

 

 


분량이 아주 짧은 작품이다. 이 작품 원문이 대한교과서 <고등 영어 I> 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한다. 페가나북스 대표가 사키 단편집 제작을 준비하다가 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작품은 흔히 ‘열린 유리창’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사키의 단편소설을 번역한 페가나북스 대표(다시 한 번 말하지만, 페가나북스는 1인 전자책 출판사다. 출판사 대표가 작품을 혼자 번역한다)는 ‘열린 격자문’으로 번역했다. 원문에는 ‘French window’로 적혀 있다. 실제로 프랑스식 창문은 여닫이 형식으로 되어 있다. 사소한 단어까지 세밀하게 번역한 페가나북스 대표의 노력이 돋보인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조카가 프램턴에게 격자문을 내다보는 이모와 관련된 으스스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녁만 되면 이모는 3년 전에 행방불명된 남편과 두 아들이 돌아올 거라 믿는다. 조카는 열린 창문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죽은 이들을 기다리는 이모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섬뜩한 기분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신경이 예민한 프램턴은 소녀가 들려주는 무서운 사연을 쉽게 믿어버린다. 이모는 프램턴에게 조금 있으면 가족들이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말한다. 프램턴은 조카가 얘기한 대로 곧 펼쳐질 무시무시한 상황에 불안해한다. 때마침 열린 창문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행방불명되었다던 세 사람이 이모의 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죽은 이들의 영혼이라고 생각한 프램턴은 무서움에 벌벌 떨면서 황급히 집 밖으로 나가 도망친다. 집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도망가는 프램턴이 누구냐고 묻는다. 이모는 유령을 만난 것처럼 겁에 질려 도망가는 프램턴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러자 조카는 프램턴이 과거에 잊지 못할 충격적인 경험을 겪고 난 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작품 전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열린 격자문>의 결말은 허무하다. 조카가 들려준 무서운 이야기는 전부 ‘뻥’이다. 이 작품이 왜 ‘가장 무서운 단편소설’로 선정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열린 격자문>은 공포소설, 괴담, 무시무시한 음모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공포소설은 일상적으로 만나는 대상과 공간을 이용,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공포의식과 공격적 본능을 끌어낸다. <열린 격자문>의 조카는 일상생활 중 한 번쯤 공포를 느꼈음 직한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여 프램턴의 불안의식과 공포를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다.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이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둔갑시킨 데에 이 소설이 갖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괴담과 음모론이 발생하는 이유도 그렇다. 불안한 사회일수록 허구의 이야기들은 인간의 음습한 심리를 파고들기 쉽고, 괴담과 음모론이 마음 놓고 춤을 출 수 있다. 괴담들이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쉽게 파고든다. 근거 없이 눈덩이처럼 부풀려진 괴담의 위력에 지배당한 대중은 진위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이성을 잃는다. 프램턴이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가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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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5-29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ㄱ 동네에 늪지대는 악어가 사나...그런 늪지대가 있는 음습한 곳은 땅값도 낮겠네요...ㅎㅎㅎ별상상 다 합니다.ㅎㅎㅎ

cyrus 2016-05-29 18:19   좋아요 0 | URL
상상력의 힘이 무섭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한 사람의 일상생활을 방해하기까지 합니다. 90년에 ‘빨간 마스크’ 괴담이 유행했을 때 골목길에 혼자 못 가는 아이가 많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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