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존재들 - 결함과 땜질로 탄생한 모든 것들의 자연사
텔모 피에바니 지음, 김숲 옮김 / 북인어박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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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노자(老子)도덕경41에 속담을 인용하면서()를 설명한다.



 “크게 모가 난 것은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지만

오직 도만이 잘 돌봐주고 잘 이루게 할 수 있다.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김원중 옮김, 노자, 글항아리, 2013, 170~171)

 


모서리 없는 네모, 들리지 않는 큰 소리(이 표현은 유치환의 시 깃발의 첫 구절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연상시킨다), 형상은 있으나 형체가 없는 것이 모든 것은 현실에 없다노자의 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지만, 이름과 형체가 없어서 신비스럽.


도덕경41장의 전체 문장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네 글자가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큰 그릇은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이다. 도덕경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도덕경에 주석을 단 왕필(王弼)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라고 해석했다. 국내에 출간된 도덕경대부분은 왕필의 주석을 참고한다. ‘비단에 적힌 도덕경이라 해서 백서본(帛書本)’으로 불리는 판본이 있다백서본에 대기만성’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에 대기면성(大器免成)’으로 표기되어 있다대기면성은 대기만성과 다르게 비관적이다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 ‘큰 그릇이 되기는 어렵다로 해석한다. 최진석 교수를 포함한 학자들은 대기면성대기만성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주장한다. 반면 김원중 교수대기면성대기만성모두 옳은 해석으로 여긴다. 그는 노자가 해석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면서 도덕경을 썼다고 주장한다.


좀 늦더라도 노력만 하면 큰 그릇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대기만성을 선호한다. 하지만 형체가 없는 도의 특성상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큰 그릇을 완성할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 없다. 도덕경40장의 핵심유생어무(有生於無)’. 천하의 만물은 살아 있다(有生). 살아 있음의 시작은 없음()’이다. 도는 영원히 순환한다. 노자는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 했다(反者道之動, 도덕경40). 결국 살아 있는 것은 없음으로 되돌아간다. 큰 그릇을 빨리 만들어서 완성하든, 천천히 만들어서 완성하든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색깔이 사라지며 형태가 점점 변한다. 슬슬 금이 가기 시작하다가 언젠가는 깨진다그릇 색깔이 사라지면 다시 덧칠하면 된다. 깨진 그릇은 다시 붙이면 된다. 변형되고 파손된 그릇을 땜질하면 다시 살아난다. 도덕경40장의 유생어무41장의 대기면성완전한 형태의 도’를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은 겉으로 봐선 완벽해 보이지만, 실은 불완전한 존재.


불완전한 존재들: 결함과 땜질로 탄생한 모든 것들의 자연사유생어무대기면성의 교훈을 과학의 관점으로 설명한 책이다여전히 사람들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와 함께 나무 위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 두 발로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인간의 도구 사용은 인류 진화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지구상에서 완벽하게 진화한 종()으로 인식됐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에 빠진 인간은 조상들의 고향인 자연을 파괴하면서 살아간다. 


진화의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진보를 진화의 동의어로 생각한다. 진보와 진화를 모두 경험한 인간은 스스로 완벽한 존재라고 단정 짓는다하지만 진화는 인간이 계속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 아니다우리는 완벽함과 완전한 존재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류와 결점, 불안정성, 불완전한 존재는 발전을 더디게 하는 걸림돌이자 개선해해서 제거해야 할 문제로 취급한다한때 돌연변이는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괴물로 낙인찍혔다. 우생학자들은 완벽한 인간이 아닌 장애인은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진화 과정과 자연사는 완벽함이라는 지점에 도달하는 탄탄대로가 아니다결함과 우연’이 마주치는 가시밭길이다갑작스럽게 변한 자연환경은 대멸종을 초래했다. 여기서 소수의 종은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시밭길을 무사히 걸어갔다. 몇몇 동물은 생존을 위해 자기 신체 일부를 변형하거나 퇴화하는 전략을 선택한다타조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다리를 발달하는 대신에 날개를 포기했다. 원래 잡식성 동물인 판다는 대나무 줄기를 손에 쥔 채 먹기 위해 손목뼈를 가짜 엄지로 진화시켰다.


프랑스의 유전학자 프랑수아 자콥(Francois Jacob)이 말한 대로, 진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땜질하는과정이다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단순히 완벽함에 이르기 위해 진화하지 않는다. 오로지 잘 살고 싶어서 진화한다. 불완전한 결함을 받아들이고, 이를 수정한다. 오류와 결함은 진화의 원동력이다


우리는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완벽함을 이루기 위한 노력만 강조하는 대기만성은 이제 더 이상 위로의 말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현실적인 위로의 말은 대기면성이다. 불완전한 존재들에 나온 이 문장은 대기면성의 뜻을 담고 있다.



 인류는 생명체의 정수라기보다 여전히 만들어지는 중이다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


(223)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큰 그릇을 만들고 싶다면 계속 만들어라완벽한 도()를 담은 그릇보다 볼품없어도 용도(用途, 쓸모) 있는 그릇이 더 좋다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완성이 덜 된 그릇도 제 눈에는 만족스러워 보인다완성형 존재가 아닌 우리는 삶을 땜질하면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든다.






<cyrus의 주석>



* 194

 




 인간의 남성은 여성이 임신할 준비가 된 순간을 감지하지 못한다. 개코원숭이, 맨드릴개코원숭이, 침팬지 그리고 보노보노[주]와는 확실히 다르다.


[]보노보의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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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4-05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노보노‘도 감지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ㅎㅎ

cyrus 2024-04-08 06:40   좋아요 1 | URL
나름 재미있는 오자였어요. ^^
 
우주의 수학 - 최소한의 수식으로 이해하는
스토 야스시 지음, 전종훈 옮김, 강성주 감수 / 플루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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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천체물리학자 우주에 관심이 많은 물리학자. 천체(天體)우주에 살고 있는 행성, 항성, 성단, 성운 등을 아우르는 용어. 사실 천체물리학자를 천문학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천문학자 심채경이 쓴 책 제목처럼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천문학자들이 보는 것은 별이 움직이는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이다.


일본의 천체물리학자 스토 야스시(須藤 靖)는 우주를 보지 않는다. 그는 우주에 깊이 스며든 수학을 본다. 야스시는 우주가 수식과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그가 쓴 우주의 수학오랫동안 우주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수학 법칙들을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과 수학이 있다고 믿는 파에 속한다. 기호로만 이루어진 수식이 저자의 눈에는 아름답게 빛난다


대부분 물리학자와 수학자는 설명하기 복잡한 자연 현상을 단순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한 방정식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하지만 수학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수식이 낯설다. 이런 사람들은 수학으로 가득한 우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수학-우주론이 우주를 설명하는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다 읽은 독자에게 우주가 법칙과 수학의 지배를 받을 리 없다는 파를 계속 지지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저자는 솔직하다. 자신도 어려운 수식을 보면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겸손한 태도는 수학이 싫어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즐거움조차 포기할 것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랜다저자는 수식이 도출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우주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기본적인 수식만 알려준다. 물리학자는 수식으로 법칙을 표현한다. 법칙이 우주는 이렇다라는 형태로 된 문장이라면, 수식은 그 문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글자다글자 한두 개 빠지면 읽을 수 없는 어색한 문장이 되듯이, 수식이 없으면 법칙을 오롯이 설명할 수 없다.


우주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법칙은 크게 세 가지다. ‘1 법칙’, ‘2 법칙’, ‘3 법칙으로 알려진 케플러(Johannes Kepler) 법칙은 행성이 움직이는 경로인 궤도가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뉴턴(Isaac Newton)은 자신이 발견한 운동법칙(물체의 질량과 가속도의 곱은 그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같다)과 케플러 제3 법칙을 결합하여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다. 만유인력은 중력을 뜻한다. 사실 만유인력은 뉴턴 역학을 다룬 외국 서적을 접한 일본 학자들이 ‘universal gravity’를 한자로 번역해서 나온 단어다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질량을 가진 물질이 중력을 발생시켜, 시공간이 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곡면을 이용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영감을 얻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견한다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은 수학의 도움을 받아 인류가 나타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한 우주의 법칙들을 이해했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까지 천문학자들은 맨눈으로 밤하늘을 관측했다. 하지만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그들이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맨눈으로 볼 수 없다. 천문학자는 우주 어딘가에 숨어 있는 법칙을 보고 싶어 한다. 시력이 좋은 눈을 가진 천문학자가 매일 밤하늘을 관측해도 우주가 꼭꼭 숨긴 법칙을 찾지 못한다. 법칙을 발견하려면 눈은 밤하늘을 바라보되 머리로 생각하면서 우주에 물어봐야 한다. 우주를 향해 법칙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질문하고, 우주가 천문학자에게 알려준 법칙과 관련한 단서를 분석하려면 수학이라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우주가 수학을 잘 아는 존재라면 천문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수학을 모르는 천문학자는 날 보려고 하지 마!






<cyrus의 주석>




* 69

 

 1609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당시 발명된 망원경을 처음으로 천체 관측에 사용했습니다.[1] 이전의 천문학자나 철학자들은 맨눈으로 천체를 관측해야만 했죠.

 

[1] 영국의 천문학자 토머스 해리엇(Thomas Harriot, 1560?~1621)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보다 4개월 먼저(정확한 날짜는 1609726)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했고, 달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을 남겼다. 하지만 해리엇은 달 그림을 발표하지 않았고, 갈릴레오는 1610년에 자신이 직접 그린 달 그림을 발표했다.


[참고문헌 1] 로베르타 J. M. 올슨 & 제이 M. 파사쇼프, 곽영직 옮김

COSMOS 우주에 깃든 예술, 북스힐, 2021

 

[참고문헌 2마이클 벤슨, 지웅배 옮김

코스미그래픽: 인류가 창조한 우주의 역사, 롤러코스터, 2024






* 153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세계지도는 지구 표면을 평면으로 펼친 지도입니다. 하지만 지구는 실제로는 구형이어서[2] 완벽하게 평면으로 펼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차원 평면으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죠.





[2]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 아니다. 적도 지방이 부푼 타원체다. 따라서 지구는 찌그러진 형태라서 지역마다 중력의 강도가 다르다. (출처: [‘지구는 더 이상 둥글지 않다?’ 사진 공개맞을까 틀릴까] 매일경제, 201142일 입력)





* 203

 

 2019410일 천문학 역사에서 중요한 날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날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 공통 연구팀이 타원은하 M87[3]의 중심에 위치한 초거대 블랙홀의 첫 이미지를, 전 세계에 있는 전파망원경에 연결해 촬영했습니다. ‘사건의 지평선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의 다른 표현으로,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블랙홀의 경계를 말합니다.


[3] M87처녀자리에 있는 타원은하. 처녀자리 A 은하라고도 부른다. ‘M’‘Messier’의 약자, 천체 목록을 만든 프랑스의 천문학자 샤를 메시에(Charles Messier)에서 따왔다.





* 참고 문헌 237쪽





 매튜 스탠리, 아인슈타인의 전쟁: 상대성이론은 어떻게 국가주의를 극복했는가?, 국내 미출간. [주4]


[주4] 아인슈타인의 전쟁: 상대성이론은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했나(김영서 옮김, 브론스테인, 2020)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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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4-05 0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우주가 보고 싶은데, 수학실력이 부족해서 지금은 안되겟어요.ㅠㅠ

cyrus 2024-04-05 06:33   좋아요 0 | URL
저도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고등학생 때 수학능력시험 수리 영역 점수를 잘 받으려고 정말 수학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문과인데도 수학 성적 올리는 데 노력했죠. 그렇게 2년 공부해서 수학능력시험 때 받은 수리 영역 점수가 27점이었어요.. ㅋㅋㅋㅋ 그때부터 제가 수학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어요... ㅋㅋㅋ 그래도 수학을 책으로 보는 건 좋아해요. 수학 관련 도서에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거든요. ^^
 




가까이서 보면 희곡멀리서 보면 연극


No. 3












고도를 기다리며

2023년 12월 19일 ~ 2024년 2월 18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024년 1월 6일 토요일 오후 2시 공연 관람




대구 공연

2024년 3월 29일 ~ 3월 31일

아양아트센터 아양홀

3월 30일 토요일 오후 2시 공연 관람









[원작]

사무엘 베케트, 오증자 옮김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 2000)



연출 오경택

조연출/무대 감독 최현서

 

[출연진]

신구 (에스트라공/고고 역)

박근형 (블라디미르/디디 역)

박정자 (럭키 역)

김학철 (포조 역)

김리안 (소년 역)






아일랜드의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소설 율리시스(Ulysses)를 쓰면서 수많은 수수께끼를 심었다고 공언했다.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율리시스에 묻힌 수수께끼들을 발굴해서 정답을 알아내느라 끙끙댈 것이고, 그 사이에 자신의 불멸이 보장되리라 생각했다.


















* 제임스 조이스, 이종일 옮김 율리시스(2, 문학동네, 2023)

* [4 개역판] 제임스 조이스, 김종건 옮김 율리시스(어문학사, 2016)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2년 동안 영어 교사로 일했다. 타지에서 같은 고향 사람인 조이스를 만났다조이스의 문학에 매료된 베케트는 그의 비서가 되었다. 베케트는 시력이 좋지 않은 조이스를 위해 글을 읽어주거나 원고를 대신 써줬다.

















* [절판] 사무엘 베케트, 이원기 옮김 사무엘 베케트 희곡 전집(2, 예니, 1993)




40대 중후반의 베케트는 중견 작가임에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쓴 소설들이 난해한 데다가 사생활을 잘 드러내지 않은 성격이라서 일반 독자들은 베케트를 어려워했다이때 당시 베케트는 조이스처럼 영원히 마르지 않은 명예를 듬뿍 마시는 불멸의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중년의 위기를 느낄 만한 나이에 접어든 베케트는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아래 고도)를 발표한다.
















고도(Godot)’는 희곡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극 중 인물들뿐만 아니라 관객들 모두 하나가 되어 고도의 얼굴 한 번 보기 위해 하염없이 기다린다고도끝이 있는데도, 제대로 끝났다고 할 수 없는 희곡(play)이다. 왜냐하면 이제 고도는 실체가 없는 인물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알아야 하는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가 되었기 때문이다따라서 고도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일은 정답 없는 수수께끼를 푸는 놀이(play)와 같다. 연극이 끝나도 관객들은 이 놀이는 끝내려고 하지 않는다. 관객들의 머릿속에 자꾸만 고도가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권으로 된 사무엘 베케트 희곡 전집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은 장막극뿐만 아니라 단만극도 수록되어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 외(용경식 옮김, 하서, 1995)은 알라딘에 등록되지 않은 책이라서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다. 이 책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포함한 열두 편의 희곡이 수록되어 있다제일 밑에 있는 얇은 책은 국립극장이 발간한 고도를 기다리며프로그램 북이다. 작품 분석, 연출 정도, 배우들의 인터뷰 등을 볼 수 있는 자료다. 



생전에 베케트는 고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근거를 대면서 고도가 누군지 추측했다. 그렇지만 베케트는 독자와 관객들이 스스로 풀어야 하는 고도라는 수수께끼를 남겼으면서도 다양한 해석을 반기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새로운 해석들이 줄줄이 나오면 작품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연출가들에게 대본에 적힌 대사나 지시 사항을 충실히 지킬 것을 요구했다. 수수께끼를 만든 사람이 수수께끼를 푸는 놀이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도록 규제를 가한 셈이다.

















* 그레고리 번스, 홍우진 옮김 라는 착각: 뇌는 어떻게 인간의 정체성을 발명하는가(흐름출판, 2024)




고도를 두세 번 읽어도, 서울에서 한 연극 고도를 봤는데도, 고도가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십여 년 전에 고도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시도한 글을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 누군가가 먼저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남들과 다른 특별한 한 고도를 드디어 찾았다면서 우쭐거린 그때 내 모습이 부끄럽다신경과학자 그레고리 번스(Gregory Berns)는 자신의 책 라는 착각에서 우리 뇌가 타인의 생각을 너무 쉽게 흡수한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믿는 생각, 내 견해가 온전히 내 머릿속에 나온 것이라고 착각한다.

 








수수께끼가 된 고도를 기다리는 게임도,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푸는 놀이를 지금부터 중단한다. 고도가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자길 보러 오라면서 나댄다. 나는 더 이상 고도를 만나고 싶지 않다. 그것은 내가 만나고 싶은 고도가 아니라 타인이 만났던 고도. 고도에 지나치게 집중하면 배우들의 연기에 몰입하기 힘들다. 대구에서 하는 연극 고도을 볼 땐 고도를 찾지 않을 것이다



잘 가라, 고도. 오늘은 배우들의 목소리, 숨소리, 몸짓에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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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3-30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에 고도를 기다리며, 의 연극을 보고 어이없어했던 기억이...

cyrus 2024-04-03 06:30   좋아요 1 | URL
저는 원작을 먼저 읽어서 그런지 인물들의 대사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

햇살과함께 2024-03-3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이네요! 재밌게(?) 보세요~ 저는 몇년전에 정동환 배우로 봤네요

cyrus 2024-04-03 06:33   좋아요 1 | URL
<고도를 기다리며> 프로그램 북에 국내 <고도> 공연 역사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햇살과함께님이 보신 공연은 2019년에 했군요. 정동환 님이 디디를, 안석환 님이 고고를 연기했어요. ^^

햇살과함께 2024-04-03 08:55   좋아요 0 | URL
아, 19년이었군요. 맞아요 안석환님~
제가 지난 주 본 연극 <욘> 커튼콜에서 구두를 무대 위에 놓고 끝나는데,
<고도를 기다리며> 오마주라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페넬로페 2024-03-30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연극 보고 싶었는데 놓쳤어요.

대학때 단과대 학생들이 공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 보며 지루해 미치는 줄 알았어요 ㅋㅋ
근데 노배우들의 공연은 깊이가 있을 듯 하네요. 즐거운 관람 되시길요^^

cyrus 2024-04-03 06:35   좋아요 0 | URL
같은 공연을 두 번 보면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다를 줄 알았는데, 저는 아니었어요. 솔직히 공연을 보다가 졸음이 왔어요.. ^^;;

stella.K 2024-03-30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오래 전 이 연극 봤지.
알 수 없는 4차원의 언어를 쓰지만 그 나름대로 괜찮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해.
와, 근데 입장료가 장난 아니네.ㅠ

cyrus 2024-04-03 06:36   좋아요 0 | URL
두 번 공연 모두 맨 앞줄에 앉았어요. 서울 공연 예매할 때 가지고 있던 포인트를 모두 쏟아부었어요... ㅋㅋㅋㅋ

blanca 2024-03-3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 감상평 듣고 싶어요. 서울에서 할 때 볼걸 아쉬워요.

cyrus 2024-04-03 06:40   좋아요 0 | URL
조만간 2차 연극 감상에 대한 평을 남길게요. 사실 같은 공연을 봐서 그런지 조금은 지루했어요. ^^;;
 



최근에 사진 철학의 고전으로 유명한 책이 절판되었다. 작년 12월에 이 책이 언급된 글을 썼을 때까지만 해도 절판되지 않았다. 지난주에 사진집 서평을 쓰면서 그 책을 또다시 언급했는데, 이때 책이 절판된 사실을 확인했다.





















* [절판] 롤랑 바르트, 김웅권 옮김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동문선, 2006)

 

* [No Image, 절판] 롤랑 바르트, 조광희 옮김 카메라 루시다: 사진에 관한 노트(열화당, 1986)




절판된 책의 정체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밝은 방(La Chambre Claire)이다. 이 책은 사진에 관한 에세이. 바르트는 사진을 볼 때 자기 자신은 야만적이고 무지한 사람이 된다고 말한다. ‘야만적이고 무지한 사람은 사진 기술이나 사진작가의 표현 방식을 분석하는 사진 담론을 거부한다. 오로지 자신만의 관점으로 사진을 본다바르트는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형태를 스투디움(studium)’푼크툼(punctum)’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두 용어는 사진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절판] 롤랑 바르트 & 수전 손택, 송숙자 옮김 《사진론: 바르트와 손탁》 (현대미학사, 1994)


* 수전 손택, 이재원 옮김 《사진에 관하여》 (이후, 2005)




밝은 방번역본은 세 권이다. 출간 연도순으로 언급하면 열화당(1986), 현대미학사(1994), 동문선(2006) 판본이다. 대부분 독자가 추천하는 번역본은 열화당의 카메라 루시다. 현대미학사 판본은 수전 손택(Susan Sontag)사진에 관하여(On Photography)와 함께 실린 번역본으로, 제목은 사진론: 바르트와 손탁이다









현대미학사 판본과 동문선 판본의 번역에 만족스럽지 못한 독자들의 후기가 알려지면서 사진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미 절판된 카메라 루시다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쏟아졌다. 카메라 루시다는 헌책방에 구하기 힘든 책이라서 중고가가 꽤 높은 편이다.











카메라 루시다20155월에 알라딘 중고로 샀다. 운이 좋게도 책값은 15,000이었다. 이 책을 판매한 사람은 카메라 루시다‘1997년에 나온 6이며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는 정보를 알려줬다. 이 때문인지 중고가가 낮게 책정된 듯하다. 판매자는 정직했다. 책에 밑줄이 많이 그어져 있었고, 테이프를 붙였다가 떼어낸 흔적이 많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책은 6쇄가 아니라 1986년에 나온 초판본이었다. 절판된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초판본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카메라 루시다를 추천한 독자들은 밝은 방의 번역과 책에 실린 사진의 밝기를 문제 삼는다. 원서에 실린 사진이 전부 흑백사진이다. 카메라 루시다는 오래된 책인데도 흑백사진 도판은 지금 찍은 사진 못지않게 명암이 선명하다. 하지만 밝은 방에 실린 도판은 흑백사진 특유의 명암 대비 효과가 사라졌다. 도판의 화질이 지나치게 밝아서 흑백사진 속 인물의 얼굴이 흐릿하게 나왔다.


밝은 방에 평점을 낮게 준 독자들은 번역문이 별로라고 혹평한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을 분노케 한 문장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과연 이들의 견해대로카메라 루시다밝은 방보다 번역이 좋은 책일까? 사진과 문장의 질이 떨어진 밝은 방을 무시하고, 무조건 카메라 루시다를 읽어야만 할까?

 

카메라 루시다는 번역이 잘된 책이 아니다. 오자가 군데군데 눈에 띈다카메라 루시다를 찬양한 독자들은 오자 정도는 눈 감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그들은 오자가 한두 개가 아닌카메라 루시다》에 관대하다


카메라 루시다오역이 있다.



 1926년 케르테츠는 (외알 안경을 쓴) 젊은 러시아 황제의 인물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푼크품의 선물, 즉 은혜와도 같은 시선의 보충에 의해 내가 주시하는 것은 문틀을 짚고 있는 황제의 손, 손톱이 선명하지는 않지만 커다란 그의 손이다.

 

(카메라 루시다중에서, 48)



러시아 황제는 오역이다. 1926년이면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이후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인 소비에트 공화국(소련)으로 완전히 들어선 해이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의 차르(Czar, Tsar, Tzar) 니콜라이 2(Nicholas II)의 로마노프 왕조 일가 모두 볼셰비키 조직원들에게 총살당하면서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1926년에 케르테스는 (외알 안경을 낀) 젊은 차라의 인물 사진을 찍었다. 푼크툼의 증여, 은총과 같은 이런 보충적 시각을 통해 내가 주목하는 것은 문틀 위에 놓인 차라의 손, 손톱이 별로 선명하지 않은 그 커다란 손이다.

 

(밝은 방중에서, 61)




바르트가 언급한 사진의 주인공은 황제가 아니라 트리스탄 차라(Tristan Tzara)차라는 루마니아에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활동한 시인이며 초현실주의 그룹 회원으로 활동했다카메라 루시다 역자가 트리스탄의 성() ‘Tzara’를 황제를 뜻하는 차르(Tzar)로 착각했다원서에는 안드레 케르테스(Andre Kertesz)가 찍은 젋은 차라의 모습이 실려 있지 않다. 사진이 있었다면 역자가 오역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밝은 방역자는 책을 번역할 때 카메라 루시다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그는 젊은 차라로 썼으며 트리스탄 차라가 누군지 주석을 달아 설명했다.


절판된 책이라고 해도 오역이 있으면 지적해야 한다그래야 절판본에 대한 몇몇 독자들이 지나치게 부풀린 평가와 절판본을 비싸게 팔려는 판매자들에 속지 않는다절판본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거나 이 책을 어떻게든 구해서 읽으려는 독자들을 위한 서평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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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면 희곡멀리서 보면 연극


No. 2











죽음의 집

극단 폼(form) - 2024 제3회 더파란 연극제(대구, 322~29) 참가작



윤영선, 윤성호 지음

김소희 연출

김민우 조연출

액팅 코치 조영근

홍보 정명훈 [주]


 

[출연진]

이영찬 (황상호 역)

이혜림 (이은희 역, 원작자가 쓴 대본에 나온 이름은 이동욱’)

박지훈 (박영권 역)

곽수민 (강문실 역)

 


우전 소극장

322일 금요일 저녁 740분경 관람






잠깐만, 이 글을 보는 사람(단 한 사람도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은 본인 스스로 누군지 잘 생각해 본 후에 글을 끝까지 읽을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세요.

 

당신은 죽음을 두렵지 않다거나, 본인이 현재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이 글을 안 봐도 됩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만족스러운 당신이 이 글을 보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이 글을 보는 것보다 본인이 우선 하고 싶은 것을 즐기면서 사세요.


! 이런 사람들도 내 글을 안 봐도 돼요.또 책 얘기야? 이번엔 뭘 읽었다고 잘난척하는 거지? 혼자서 책만 보고 글 쓰면서 사는 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을까?’라고 생각한 사람들. , 저도 알아요. 제 삶이 화려하지 않다는 거요. 그래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에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저는 이제 연극과 책에 대한 글을 써야 해서요.다들 좋아하는 일들 하면서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





긴 사이.










<죽음의 집>2007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윤영선 극작가의 미발표 희곡이다. 2012년에 낭독 공연에서 대본 일부가 낭독되면서 <죽음의 집> 초고가 처음으로 극장 무대의 조명을 받았다. <죽음의 집> 초고를 확인한 극작가 겸 연출가 윤성호가 작가 노트를 단서 삼아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새로 썼다. <죽음의 집> 대본의 1부는 고인의 초고이며 2부는 윤성호가 쓴 것이다. 죽은 자가 쓴 글‘살아있는 자가 쓴 글이 포개진 희곡, 즉 미완성과 완성이 뒤엉킨 <죽음의 집>2017년 윤영선 극작가의 10주기 추모 페스티벌에 초연되었다. 2020년 제41회 서울연극제에 공연된 <죽음의 집>은 희곡상(윤영선, 윤성호)과 연출상(윤성호)을 받았다.





















* 윤영선, 윤영호 죽음의 집(이안재, 2020) [주2]

* 2020 서울연극제 희곡집(서울연극협회, 2020)

* [절판] 윤영선 윤영선 희곡집: 키스(지안, 2008)





극단 폼이 만든 <죽음의 집>은 윤성호와 윤영선이 쓴 대본을 무대 위에 올린 것이다. 황상호는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인물이다. 상호는 살아있는친구 이은희를 자기 집에 초대한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기이한 상황을 고백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접한 은희는 혼란스럽다. 상호는 친구 박영권과 그의 아내 강문실도 초대한다. 그런데 부부 또한 상호처럼 이상한 말을 한다. 두 사람은 상호의 집에 오면서 말다툼했고, 홧김에 자살했다고 고백한다. 은희는 졸지에 집에서 유일하게 살아있는자가 되는데…‥ 상호의 집에 점점 이상한 상황이 일어나자, 은희의 머릿속에 불현듯 궁금증이 일어난다. ‘나도 죽었나?’







<죽음의 집>은 희곡으로 표현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메멘토 모리는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이다. 집은 편안히 쉴 수 있는 아늑하고, 안전한 공간이다. 하지만 행복하고 즐거운 내 집이라고 해도 저승사자가 슬쩍 내미는 손길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17세기에 메멘토 모리를 떠올리는 그림이 유행했다. 당시 부유한 사람들의 집에 가면 두개골과 촛불이 그려진 그림 한 점 걸려 있었다. 두개골은 죽음을, 촛불은 덧없는 인생을 뜻하는 상징물이다. 그림에서 이빨을 드러내면서 실실 웃고 있는 해골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집주인에게 귀띔한다잊지 마! 당신 바로 옆에 내가 있어.


메멘토 모리가 된 배우들이 연기하는 연극이 관객들에게 말한다무대 위에 서 있는 나를 앉아서 바라보는 여러분, 죽음의 집이 실제로 없을 것 같죠여기 있어요.



















*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김수정 옮김 죽어가는 자의 고독(문학동네, 2012)




하지만 살아있는 자는 여유만만하다. 여전히 죽음은 내 일이 아니니까. 독일의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죽어가는 자의 고독에서 인간은 본격적으로 위생의 중요성을 알기 시작하면서 일상 가까이에 있다고 믿었던 죽음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노화와 질병은 사람을 노쇠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추하게 만든다. 노화와 질병이라는 직격탄을 제대로 맞아버리면 죽는다. 살아가는 힘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은 젊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는, 낡고 추레한 존재가 돼버린다. 노화를 부끄러워하는 감정이 생기면서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마저도 집 밖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엘리아스는 그들이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죽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곧 죽음을 맞이한다거나 함께 사는 사람의 죽음을 직면하면 두려워하고 당혹스러워한다.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착각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더욱 커지게 만든다.


메멘토 모리의 교훈을 잊지 않은 옛사람들은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 무덤 주변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그림도 좋아했다. 이 그림도 유행하면서 죽음의 춤(Danse Macabre)’이라는 회화 양식이 생겼다. ‘죽음의 춤은 죽음을 대비하는 살아있는 자의 몸짓이면서도 먼저 떠나간 자들과 함께하는 축제이다. 따라서 내가 죽는 것뿐만 아니라 먼저 죽은 자들도 기억하며 살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극 중간에 상호, 은희, 영권은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잊으려고 춤을 춘다. 그렇지만 즐거운 축제는 오래가지 못한다. 살아있는 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어버리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죽은 자들을 하나씩 내보낸다. 진짜로 ‘죽은영권과 문실은 잠시 밖으로 나간 뒤에 상호의 집으로 다시 들어오지만, 그들과 함께 술을 마셨던 살아있는은희는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다살아있는 자는 죽은 자를 잊어버리거나 때로는 야박하게 쫓아낸다.


<죽음의 집>에 묘사된 죽은 자들(상호, 영권, 문실)은 말이 많고, 감정이 있다. 이들은 자신을 완전히 잊은 사람들이 섭섭하게 느끼지만, 이내 자신이 죽어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생전에 하지 못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떠난다. 극작가는 이미 떠나고 없지만, 텍스트에 나온 <죽음의 집>은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 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가는 존재이다. 살아 있음과 죽음에 사이는 없다. 살아 있음과 죽음은 철저히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다. 내 인생에 착 달라붙은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서 아득바득 억지로 떼어낼 필요가 없다. 그럴 시간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자.





[주1] 2월 중순에 처음으로 공개된 포스터()3월에 공개된 두 번째 포스터(아래)의 도안이 다르다. 첫 번째 포스터에 적힌 출연진 이름에 정명훈 님이 있다. 원래 박영권을 연기하는 배우가 정명훈 님으로 정해졌으나 박지훈 님으로 교체되었다.


[2] 책에 윤영선 극작가의 <죽음의 집> 초고, 윤성호 극작가가 새로 쓴 <죽음의 집> 대본, 윤영선 극작가의 작가 노트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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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4-03-26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사회가 죽음을 삶과 철저히 분리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병적인 이상심리가 여러 방식으로 발현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이러스님 글 많이들 읽을텐데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죽음의 집>연극 줄거리도 흥미롭네요^^

cyrus 2024-03-29 06:27   좋아요 1 | URL
인간이 죽음을 기피하는 이유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거예요. 가까운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이후로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