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 - 서울대 송호근 교수가 그린 이 시대 50대의 인생 보고서
송호근 지음 / 이와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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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귀로(歸路) 세대가 처한 현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날의 추억을 아파하지 마라 / 나는 왜 귀로(歸路)를 맴돌고 있나 아직 꿈이 가득해 그 자리에….’

 

10년 만에 나온 ‘가왕’ 조용필 앨범에 들어 있다는 ‘어느 날 귀로에서’ 한 대목이다. 사회학자 송호근 서울대 교수가 노랫말을 붙여 화제가 된 곡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돌아오는 퇴직자의 발그림자가 처연하게 느껴지는 가사다. 송 교수는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는다>라는 특이한 형식의 보고서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베이비부머의 내밀한 사연과 냉철한 세대분석을 교직한다.

 

1970년대에 베이비부머는 이른바 신문명의 담지자가 되었고, 이후 1980년대 ‘운동권 세대’, 1990년대 ‘탐닉 세대’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즉 베이비부머는 ‘근대’가 끝나는 절벽에서 ‘현대’로 나아갈 수 있는 교량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스스로 몸을 누이면서 말이다. (8쪽)

 

 

 

2013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50대란 어떤 모습일까? 가정에선 외로운 아버지로, 직장에선 뒤안길로 밀려나는 선배로, 사회에선 말 안 통하는 꼰대 아저씨로 비춰지는 것이 씁쓸한 현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베이비붐세대 10만 명 당 자살율이 2008년 31.4명에서 2011년에는 40.6명으로 늘었다. 하루 평균 6명씩 자살로 세상과 작별 한다. 자살의 주된 원인은 2010년 글로벌경제위기 이후 조기은퇴와 창업실패 등 경제적 어려움과 질병 이라고 한다. 충격적인 것은 이 같은 내용이 보도 되었음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OECD 자살율 1위 국가다운 우리 사회의 무덤덤한 반응이 더 무섭다. 한국의 중장년층, 농경시대에 태어나 산업화 시대의 주력으로 치열한 생존경쟁 무대에서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으며 IT 시대의 서막을 열고 퇴장하는 베이비부머들이 주류다. 대부분이 닮은꼴인 고단한 삶의 여정을 달려 왔다. 그럼에도 인생의 끝자락까지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짊은 그대로 진 채 고려장 같은 은퇴자로 밀려나 자살로 마감하는 이 시대의 암울한 초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한때는 독재정권에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민주화 투사들이었고, 찬란한 미래를 꿈꿨던 한 가정의 가장이었으며, 실상 이 땅의 산업화를 일군 성공의 주역들이다.

 

베이비부머는 경륜, 기술, 인간관계가 성숙한 경지에 도달했고 이제 남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재가동하려는 투지로 가득한 연령 집단이다. 본격적인 고등교육을 받은 양질의 인력(人力)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에선 이들에게 귀가조치를 발령한다. 자립심과 책임감이 강해 힘겹게 가정을 꾸려왔지만 정작 자신의 독립은 위태롭다. 정처 없이 ‘귀로’를 맴도는 숫자가 매년 100만 명이다.

 

 

 

 ♣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없는 ‘가교(架橋) 세대’

 

책은 한달음에 읽힐 정도로 분량은 얇다. 삶이 그믐달처럼 오그라드는 줄도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온’ 50대의 삶이 ‘날것’으로 담겨 있다. 공고 출신 박 회장, 대기업 출신 대리기사 등 실제 베이비부머의 사례를 들어 국민연금 고갈, 부동산 거품 같은 한국사회 고질병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면서도 은퇴 후 상실감, 노년을 앞둔 공포 등 정서적 공허함도 따스한 시각으로 어루만진다.

 

송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직장에서 은퇴한 50대들이 갈 곳이 없는 게 큰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한국 시장에서 자영업은 이미 포화상태로, 은퇴 후 작은 식당이라고 해볼까하는 생각은 곧 망하는 지름길이 되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재취업이 쉬운 것도 아니다. 특히 단순 기술·기능직에 비해 좋은 대학 나와 번듯한 기업에서 고위직까지 오른 사람들일수록 기업들이 받아주기를 꺼리고, 그만큼 재취업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 고용센터에서 제공하는 각종 취업관련 프로그램을 이수하더라도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일 뿐, 대부분 50대 은퇴자들이 눈치 보면서 집에서 돈만 까먹고 있는 상태라고 할까? 게다가 자녀 결혼문제는 닥쳐오고, 모아놓은 돈은 점점 바닥나고... 부러움의 대상일 법한 ‘서울대 교수’인 저자도 팔순 넘은 부친을 부양하는 장남이며 두 딸의 학비를 걱정해야 하는 가장이다. 노후 문제를 해결할 자원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을 토로하고 있다.

 

사이먼 & 가펑클의 노래 제목으로 유명한 ‘이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는 1970년대 대학가 구호였다. 송 교수는 베이비부머를 가교(架橋) 세대면서 마지막 유교 세대라고 규정한다. 근대를 ‘살아낼 수밖에 없었던’ 자유주의자 김수영이 자신의 시 ‘거대한 뿌리’에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고 일갈했듯 베이비부머는 이단(異端)의 세대였으나 전통과 온전히 결별하지 못했다. 유교라는 굴레에서 온전하게 벗어나지 않았다. 충, 효 같은 낱말에 매여 살았기에 가난했으되 당당한 부모와 개성 넘치는 자녀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런데 현장에서 물러날 때가 되니 다리가 돼줄 사람이 없다. 이제 자신의 삶을 뒷받침해 줄 새로운 가교가 없는 것이다.

 

최빈국이던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밀어올리고 현장에서 물러나는 베이비부머들에게는 허무함이 엄습한다. 근대가 끝나는 절벽에서 현대로 나아가고자 쉼 없이 달려왔으나 여전히 교육, 주택, 부모 부양으로 허덕인다. 젊고 튼튼했던 허리는 점점 휜다. 힘들고 아파도 그저 묵묵히 참고 견뎌낼 뿐이다. 그저 그들은 소리 내 울지 않았다.

 

 

 

 ♣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공감과 위로가 필요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50대 베이비부모의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이고, 내 자식, 내 형, 내 동생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체감하고 적극적 대책마련에 나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정부가 월급쟁이 중산층 유리지갑에 손을 댄 세법 개정안 때문에 베이비부머들의 눌린 기를 또 한 번 크게 죽일 뻔했다. 과연 우리 부모님 세대들이 마음껏 소리 내 웃는 날은 언제 올까?

 

이 책 또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서글픈 현실을 고발할 뿐 앞으로 어떻게 해야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게 비단 베이비부머 세대와만 관련된 것도 아니요, 일자리정책, 교육정책, 주택정책, 복지정책과도 맞물려있어 “금 나와라 뚝딱” 같은 요술방망이 식으로 해답을 내놓기가 어렵다.

 

한국의 50대 절반이 이런 절망의 균열 상태에 내몰리게 된 이유는 결국 십시일반 자신들의 자산을 할애해서 공적 안전망을 만들지 않은 탓이다... 베이비부머들이 구축하고 자신이 스스스로 갇힌 저 지독한 양극화 구조는 한국 사회 전체로 그대로 증폭되고 젊은 세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음을 이제 인정해야 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겪고 있는 지금의 고통은 베이비부머 세대 스스로가 만든 탓도 있다. 결국 베이비부머 문제는 비단 정부에게만 맡겨놓을 것이 아니라 결국엔 우리 모두가 풀어야한다. 지금 우리 젊은 세대들은 그만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바라보지 말고 공동체적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볼 때다. 연대감 확인을 통한 공감과 위로는 곧 베이비부머에게 보내는 응원이다. 이를 통해 젊은 세대에겐 아버지 세대, 가장의 힘겨운 삶을 이해할 기회를, 장년층에게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가질 기회가 생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포용과 나눔. 배려가 필요한 때이다. 함께 아파하고 걱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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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9
너대니얼 호손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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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06] 주홍 글자

 

 

 

 

“그녀의 웃옷 가슴에는 화려한 주홍빛 헝겊에 금실로 꼼꼼하게 수를 놓아 환상적으로 멋을 부린 ‘A’ 자가 보였다. 그 글자는 아주 예술적으로 만든데다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공상을 마음껏 발휘한 것으로, 그녀가 입고 있는 옷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식적 효과를 내고 있었다.” (16쪽)

 

17세기의 미국 보스턴. 청교도정신으로 똘똘 뭉친 마을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고 사생아를 낳은 헤스터는 간통(Adultery)을 상징하는 주홍 글자 ‘A’를 평생 가슴에 달고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주위의 조롱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자못 당당하게, 진정한 속죄와 참회로 이웃에 선행을 베풀면서 딸을 키우며 살아간다. ‘A’는 간통의 상징에서 점차 ‘Able’(능력)과 ‘Angel’(천사)의 의미로 승화되기까지 한다.

 

다른 쪽에는 그녀와 간통한 목사 딤스데일, 전 남편 칠링워스라는 인간형이 있다. 이들 역시 보이지 않는 ‘A’를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딤스데일은 간통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죄책감에 의해 정신적인 고통(Agony)에 시달리며, 칠링워스는 그것을 알고 분노(Anger)에 찬 채 복수를 노린다.

 

넓게 보았을 때 딤스데일의 죄는 숨겨진 죄를 상징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내 묘사되는 병약한 모습과 죄를 숨기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모습을 비추어 볼 때 그의 죄가 헤스터의 죄보다 더욱 악한 것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다. 호손은 죄를 저지른 행위보다 자신이 저지른 죄를 숨기는 은폐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을 딤스데일의 죄를 통해 말하고 있다.

 

반면 칠링워드의 죄는 헤스터처럼 공개되어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드러난 죄는 아니지만 인간의 마음을 파괴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상징한다. 작품 전반에 계속적으로 나타난 인간애를 상실한 그의 차가운 모습과 사람의 마음을 해치는 자의 비참한 결말은 칠링워드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얼마나 사악한 죄인가를 한층 더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주홍글자 A를 평생 달고 다녀야 하는 헤스터는 공개적으로 ‘왕따’를 당한 채 변두리 오두막에 살며 바느질로 생계를 잇는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간통 사실이 폭로되는 것을 당당하게 견디면서 융통성 없는 청교도의 권위에 도전하며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산다. 그래서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딤스데일의 무덤 곁에 묻힌 그녀를 ‘청교도적 파우스트’라고 부르는 해석도 있다. 종교적 계율과 사회적 규범의 쇠사슬을 박차고 인간으로서의 본능에 충실하며 개인의 참다운 자유를 구하려 한다. 물론 헤스터는 딤스데일에게 도둑맞은 칠링워스의 사유재산, 한낱 남성의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녀는 이러한 현실에 저항한 페미니스트였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실제 헤스터는 딤스데일이 사망한 뒤 청교도 사회를 떠나 유럽에 머물다 뒷날 다시 보스턴으로 돌아와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남녀 간의 모든 관계가 상호 행복이라는 좀 더 굳건한 토대 위에 놓이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으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식을 기른 최초의 편친모(偏親母)일 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여성 상담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설은 이처럼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근대적 주제의 천착을 통해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받는 헤스터와 달리 딤스데일이 끝까지 자신의 죄를 숨기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죄를 실토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두 사람이 처한 사회적 지위와도 관련이 있다. 청교도 사회에서 간통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이지만 평범한 시민이 아닌 목사의 직분을 지닌 딤스데일에게는 더욱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는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7년 동안 자신의 죄를 털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헤스터와 딤스데일, 두 사람의 개인적 성품 차이일 수도 있지만 사회 구성원의 정직성은 사회적 관용 수준과도 관계가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보는 타인 또는 사회 전체의 시선을 의식한다. 그리고 원치 않던 낙인에 대해 좌절하고, 숨기고, 때로는 평생의 상처로 안고 간다. 그러나 그 낙인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헤스터가 ‘간음의 A’를 ‘유능함의 A’와 ‘천사의 A’로 바꿨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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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 슈퍼 리치의 종말과 중산층 부활을 위한 역사의 제언
샘 피지개티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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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진보 잡지 '먼슬리 리뷰'를 창간한 사회주의자 리오 휴버먼가 쓴 『The Truth about Socialism』(우리나라는 2011년에 '휴버먼의 자본론'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는 원래 '사회주의의 ABC'라고 지으려고 생각했다고 한다. 거창하고 어려운 담론이 아니라 쉬운 말과 사례로 풀어낸 '자본주의의 사회주의에 관한 입문서'란 뜻이었다. 결국 책의 제목은 '사회주의에 관한 진실'로 결정되었는데 사회주의의 참뜻을 알리면서 내용의 큰 줄기는 자본주의 비판이다.

 

노동자에게는 악순환일 수밖에 없는 자본가의 생산수단 소유와 더 많은 이윤 추구, 더 많은 자본축적의 과정을 여러 문헌과 증언으로 분석한다. 미국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해인 1929년 일반 대중은 매우 가난했다. 브루킹스 연구소가 그해 펴낸 <미국의 소비역량> 중 '1929년 미국의 소득분포' 표를 보면, 미국 전체 가구의 42%인 1200만 가구가 국민소득의 13%를 차지했다. 전체 가구의 0.1%인 상위 3만 6000가구의 소득도 13%였다. 휴버먼은 기계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노동자의 참상을 전하면서 "노동자도 하나의 인격체라는 사실이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가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가에게 노동자는 비용을 구성하는 한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 등에 글을 기고하는 언론인이자 노동전문기자로 유명한 저자 샘 피지개티가 쓴 『부의 독점은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읽으면서 2년 전에 읽은 휴버먼의 책이 떠올렸다. 두 사람 다 진보적인 입장에서 글을 썼다는 점 그리고 부의 독점을 막기 위한 사회적인 제도의 도입을 찬성하는데 기영한 사회주의의 활동 모습을 소개하는 점이 비슷하다. 샘 피지개티는 부자들이 많은 돈을 벌어야 이른바 '낙수효과'로 인해 경제 전체가 좋아진다고 말하는 신자유주의자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러나 여기서 샘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휴버먼처럼 자본주의의 속성을 비판하려는 건 아니다. 부자들의 탐욕과 이에 따른 금권정치가 만들어 낸 지배논리를 문제 삼고 있다.

 

미국은 암울했던 1928년 대공황 시기를 극복하고 1950년대부터 경제 사정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 시기야말로 미국 중산층의 황금기였다고 말한다. 돈 때문에 맞벌이를 해도 안 할 정도로 안락한 생활을 누리는 중산층이 많았던 것이다. 1928년 대공황 이전 최상위 1%의 슈퍼리치들은 전체 국민소득의 4분의 1을 거머쥐고 있었지만 1950년대에는 이들의 몫이 10분의 1로 줄어들 정도였다. 미국이 대공황의 터널을 탈출하여 중산층의 등장과 함께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제도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부자들에게 적용하는 누진 소득세 제도였다. 전쟁과 대공황을 겪으며 여론이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려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이를 제도화시켰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인 중 어느 누구도 세금을 내고 난 후 한 해 2만5000달러 이상의 순소득을 가져선 안 된다"고 못 박을 정도였다. 게다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세금 최고구간의 소득세율은 90%를 넘어갔다. 오늘날 부자들에게 90% 세율을 적용하면 당장이라도 경제가 무너질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 중산층은 그 어느 시기보다 안락한 삶을 누렸다.

 

중산층 황금기는 지금으로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진보적인 대안이 등장했다. 부자증세의 도입뿐만 아니라 강한 노조가 기업의 부를 소유주와 노동자가 공평하게 나눌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디트로이트 조약' 체결은 노동자의 힘이 중산층의 범위를 빠르게 확대시킨다는 것을 보여줬다. 요즘 정가에서 회자되는 독일식 사민주의 역시 강한 노조-강한 경영진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렇듯 반세기 전에 미국 국민은 서로 부를 공유했고 그런 분배 속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번영의 시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가 부과한 소득세의 짐을 떠안고 있었던 부자들의 반란이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소득세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오랜 진통과 갈등이 있었는데 그 반대편에는 금권정치에 익숙한 소위 1%의 부자들이 항상 서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정계에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줄 수 있는 정치인들과 결탁해서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소득세율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움츠려들었던 부자들의 어깨가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한때 90%였던 소득세율은 점점 떨어지게 되고 보수당이 집권하게 되면서 그 사이 부는 특권을 누리는 계층의 주머니 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에 미국 중산층 가족은 더욱 비틀거리게 됐다. 가난한 가정도 계속 늘어나게 되었다. 불평등 체제는 21세기를 들어선 이후 더욱 공고해졌다. 9·11 테러, 전쟁, 글로벌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더욱 굳어졌다.

 

책은 좋은 사회가 되려면 가난한 사람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고 부자들의 생활수준은 낮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변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양식 있는 부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의식있는 엘리트들이 고소득에 부과되는 높은 세금이 국가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해주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공감대가 필요한 것이다. 저자는 부자들의 저항을 누그러뜨릴 수 있게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누진세 도입을 주장한다. 재개 리더들이 생산과 번영을 위해 원만한 노사관계를 원하는 시대가 다시 돌아올 것을 그는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현실에 타협의 손을 내밀 수 있는 '의식있는 엘리트들'이 나올 수 있을지 의구심이 앞선다. 사실 샘이 말하고 있는 '연대와 공유의 경제'는 2년 전에 우리나라 사회에 화두가 된 적이 있었던 '자본주의 4.0'을 보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우리가 깊이 새겨볼 점이 있다면 부의 독점을 무너뜨려 평등하고 안정적인 사회를 만들어 낸 역사적 과정이다. 부자증세와 강한 노조는 그러나 거저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의 독점이 만들어 낸 불평등한 경제 구조에 대한 문제 인식 및 공감이 없다면 지금의 미국처럼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드는 '슈퍼 리치'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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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 열화당미술문고 210
김진송 / 열화당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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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O대'라는 글자로만 남은 화가

 

 

 

 

 

 

이쾌대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948~1949년

 

 

혹시 이쾌대라는 이름의 화가를 아는가. 올해가 이쾌대 탄생 100주년이다. 이쾌대는 이인성과 함께 우리나라 근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손꼽힌다. ‘월북작가’로 낙인찍혀 이름 없는 화가로 남아 있었다. ‘쾌’(快) 자가 빠진 채 ‘이O대’로만 알려졌다. 1991년 서울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리면서 그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보기 드문 대작, 그리고 근대미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군상으로 당시 미술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의 고향인 대구, 그 어디에서도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고 올해 문화계 계획에도 그와 관련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같은 지역 출신의 또 다른 천재화가 이인성(1912~1950)이 작년에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구시에서 이를 기념한 전시, 학술대회를 대대적으로 연 것에 비하면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그래도 위안을 삼아본다면 지난 달 27일에 대구미술관에서 이쾌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끝이다. 하지만 대구시 그리고 시민들은 화가 이쾌대에 대해 관심이 부족하다. 타 시도들이 저마다 연관 있는 예술가들을 문화 브랜드로 발굴하고, 스토리텔링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다. 한마디로 대구의 작가를 스타로 만드는 붐 조성에 실패한 것이다.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참석한 어느 미술 관계자는 “수창초교를 함께 다닌 이인성, 이쾌대를 잘 엮으면 대구의 훌륭한 브랜드가 될 텐데 아쉽다”고 했다.

 

 

 

 ♣ 혼돈의 시대에 낀 천재 화가

 

이쾌대는 1913년 1월 16일 칠곡군 지천면에서 태어났다. 대지주였던 아버지 이경옥은 창원 군수를 지냈던 인물로, 일찍이 신식문물을 받아들였다. 이쾌대는 1928년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면서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담임선생으로 화가 장발을 만나면서 미술을 권유받았다. 당시 장발은 “이쾌대만큼 데생력이 뛰어난 학생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편, 함께 서울 생활을 했던 12세 위의 형 이여성은 당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던 진보적 지식인으로, 미술에 남달리 조예가 깊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사회주의 관련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독립군 군자금을 마련하려다 체포돼 3년간 복역하기도 했고 언론과 미술 분야에 몸담는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이쾌대와 그의 아내 유갑봉 여사

 

 

 

이쾌대는 1932년 한동네에 살던 유갑봉과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특히 아내를 모델로 해서 많은 그림을 그렸다. 아내 유갑봉은 그가 북으로 간 후 소중하게 그림을 보관해왔다. 유갑봉은 포목점을 하면서 네 자녀를 키웠고, 198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사회의 반공 분위기 아래서 그림들을 벽장 속에 감춰두고 지켜왔다. 물론 물질적 유혹도 잘 이겨냈다. 이런 유갑봉 여사 덕분에 오늘날 이쾌대의 작품을 고스란히 우리가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쾌대는 1934년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했는데, 특히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 다양한 활동을 하던 이쾌대는 1941년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했다. 모든 미술 단체가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하기를 독려하고 있었으나 이쾌대가 중심이 된 신미술가협회는 지식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치열하게 자신의 새로운 양식을 개척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던 이쾌대는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48년 성북회화연구소를 열고 미술학도들을 가르쳤다.

 

해방 후 안정을 찾는 듯했지만 사회는 그와 상관없이 혼란스럽게 흘러갔다. 그의 형 이여성은 근로인민당 대표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면서 월북했고, 그때 남한은 정부수립 이후 좌익 소탕에 나서는 등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1949년 초 이승만 정부는 이쾌대를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시켰다. 미술가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반공 포스터전에 참가시켜 사상 전향을 강요했다. 6.25전쟁은 다시 이쾌대를 혼란에 빠뜨렸다.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미처 피란하지 못했던 이쾌대는 북한군의 점령하에서 다시 정치적 전향을 강요받았다.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실 때문에 자수를 강요당하고 조선미술동맹에 재가입해야 했던 것. 이들은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을 그려야 했다. 얼마 후,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다시 유엔군의 수중에 들어갈 무렵, 이들은 다시 혹독한 정치 보복이 닥쳐올 것을 직감했다. 미술동맹원들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북으로 갔다. 저자 김진송의 표현을 빌리자면 둘 다 신념에 의한 선택으로 보기에는 역사의 격량이 너무 거세었다.

 

서울이 탈환되기 일주일 전 이쾌대는 서울을 빠져나왔고, 국군에게 체포됐다. 그는 수용소에 수감됐고, 그 이후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가 좌익으로 몰렸다는 사실과 1953년 휴전이 되자 북을 선택해 갔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북으로 올라간 이쾌대의 소식은 몇몇 자료에 등장하지만 그다지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987년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몇 몇 연구가들은 지금도 북한에 남아 있는 이쾌대의 흔적을 발굴하가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사료가 여전히 부족한 상태인데다 북한 미술계에서도 이쾌대에 관한 언급을 쉬쉬하는 편이다. 그야말로 남북 양쪽에서 잊혀지고 있었던 것이다.

 

 

 

 ♣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나지 않은 독특함, 이쾌대만의 독창성

 

 

 

 

 

이쾌대 「무희의 휴식」1938년

 

 

이쾌대의 작품은 대개 인물풍속화다. 후기로 갈수록 당대 현실 속의 인물 즉 특정 상황 속의 인물을 묘사했지만 등단 초기만 해도 전통 속의 인물을 선호했다.「무희의 휴식」은 화사하기 그지없는 전통 복장의 젊은 무희의 좌상이 섬세하게 표현돼 있다. 그러나 그는 전통에만 한정 짓는 제작에만 머무르지 않고 진일보한 표현방식을 위해 실험했다.

 

 

 

 

 

이쾌대  「운명」 1938년

 

 

애매한 상황 속의 인물의 배치는 점차적으로 뚜렷한 시공간을 알리면서 존재의 이유를 확실하게 들어내든데 중점을 맞추고 있다. 그 같은 연장선상에서 30년대의 야심작으로 「운명」과 「상황」을 꼽게 한다. 「운명」은 좁은 방안에 누워 있는 남성 주위로 슬픔에 젖어 있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작품이다. 작품 「운명」은 구체적 사건이나 장소 혹은 인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화면에 나타난 사항만 가지고 볼 때, 가장과 같은 남성의 절망적 순간과 이를 슬픈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젊은 여성들의 특정 상황을 묘사했다는 점이다. 비극의 현장, 하지만 작품 속에는 그 구체성을 알리지 않고 있다.

 

 

 

 

이쾌대  「상황」 1938년

 

 

 

다만 제작년도인 1938년은 한 해 앞서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한 시기라는 점이다. 「상황」은 「운명」보다 적극적인 스토리텔링의 경우에 속하는 작품이다. 여타의 작품과 달리 서사적 구도는 무엇인가 엄청난 격동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화려한 옷차림의 무희가 춤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슬픔을 표하고 있는 젊은 여성은 상반신이 벗겨져 있는 상태이다. 게다가 방바닥에는 깨진 그릇 파편이 뒹굴고 있어 뭔가 격렬한 상황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어떤 상황, 분명히 어떤 구체적 사건을 도해화한 것 같으나 현재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이색 형식의 작품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가장 난해한 그림 중 하나일 것이다.

 

 

 

 

 

이쾌대  「2인 초상」 1939년

 

 

다만 「상황」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화면 중앙의 젊은 여성이다. 그의 자세는 춤추는 모습으로 ‘특정 상황’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식 전통복장, 암흑기 일제시대에 이러한 옷차림의 당당한 제시는 작가 의식의 단면을 확인하게 한다. 이쾌대는 화필을 들고 자신이 화가임을 천명한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같은 자화상도 더러 그렸지만 인상적인 작품은 「2인 초상」이다. 이 작품은 부부초상으로 부인을 전면으로 내세워 강건한 존재로 부각시킨 반면 화가 자신은 부인 뒤에서 하나의 실루엣으로 약화돼 있다. 부인의 그림자, 이색적인 부부초상화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페미니즘 측면에서 부상시킬 수 있다. 여성 강조의 부부초상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부부초상 작품도 사례가 없어 의미부여를 각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쾌대 최고의 대작, '군상' 시리즈

 

 

 

 

 

이쾌대  「군상 Ⅳ」 1948년

 

 

이쾌대의 그림은 잔잔한 감동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시선을 압도하는 벅찬 감동은 강렬하다. 예컨대 해방공간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스펙터클한 ‘군상’ 시리즈(‘군상-1 해방고지’, ‘군상 Ⅱ’, ‘군상 Ⅲ’, ‘군상 Ⅳ’)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서도 35명의 남녀가 나체로 한 덩어리가 된 ‘군상 Ⅳ’는 광복의 기쁨과 건국의 열기로 달아오른 격동기를 조형한 절창이다.

 

무엇보다도 해부학에 근거한 근육질의 인물들이 압권이다. 웅장하다. 그런데 이들은 비현실적인 관념 속의 인물이다. 단적인 예가 있다. 각 인물들의 포즈가 작위적이란 점이다.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처럼 포즈가 과장되어 있다. ‘칼레의 시민’의 작위적인 포즈가, 칼레를 구하기 위해 나선 시민들의 결연한 비장미를 극대화 해주듯이, ‘군상 Ⅳ’의 포즈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해방공간의 낙관적인 전망과 열정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비탄에 잠겼다가 서서히 일어서는 인간군상은 마치 빛을 향해 자라는 ‘향일성 식물’ 같다. 이 식물의 ‘머리’는 그림의 왼쪽에 놓여 있는 셈인데, 이 지점에 선 인물들의 눈동자가 유난히 빛난다. 이는 좌절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희망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구성이 독특하다. 보편적인 시선의 흐름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보통 책을 읽거나 그림을 볼 때, 사람들의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 위에서 아래로 이동한다. 그런데 ‘군상Ⅳ’는 이와 반대다. 인물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서서히 일어서고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불편을 감수하며 그림을 ‘읽는’ 수고를 치러야 한다. 그림의 무게중심은 왼쪽에 있다.

 

김진송은 이런 동세를 좌절에서 희망으로, 무질서에서 질서로, 혼란에서 안정으로 향해 가는 과정으로 읽었다. 역사의식을 지닌 작가가 해방 후의 혼란한 현실을 극복해야 하며 또 극복 가능하다는 의지를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만약에 이런 동세를 고려하지 않고 보면 어떻게 될까? 감상이 불편해진다. 일반적인 시선의 방향을 따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힘겹다. 인물들의 시선과 마주치며 오른쪽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보면 물살의 흐름을 타듯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서양화에 전통적인 조형방식을 접목한 것이다.

 

 

 

 ♣ 분단 대립의 희생양, 이쾌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이쾌대는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며 “서구적인 지성과 동양적인 감성을 융화”(김용준)시킨 역동적인 작품세계를 일궈갔다. 그 중에서도 ‘군상 Ⅳ’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해방공간에서 발견한 우리 민족의 희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하나의 ‘조형적 사상’이다. 서로 뒤엉킨 인물들의 역동적인 포즈와 풍부한 표정은 가슴 벅찬 ‘볼거리’를 제공하며,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았던 해방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역사적인 문맥에서 이탈하여, 작품 자체만 감상해도 심심하지는 않다. 그만큼 볼거리가 쏠쏠하다. 이러한 훌륭한 대작을 대구 시민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지 못했고 그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기만 하다.

 

남한에서는 월북화가라 해서 금기인물이었고, 북한에서는 김일성파가 아니라서 역시 금기인물이었던 이쾌대, 그는 분단시대의 대표적 희생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20세기 전반부 한국미술사에서 가장 뚜렷한 예술세계를 이룩했다는 점은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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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3-07-30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 분야에서 이런 이유로 잊혀져버린 이름들이 제법 있을 것 같아요.
남에서는 월북했다고, 북에서는 숙청당했다고 양쪽 모두에서 금기가 되어버린 사람들이요.

문외한이지만, 딱 보기에도 그림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특히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은 참 독특한 느낌이네요.
덕분에 좋은 그림 잘 보았습니다.

cyrus 2013-08-02 00:0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은빛님이 선물한 <현대사 아리랑>이 생각났어요. 최근에 납북 문학가들이 재평가받고 있다는 점에서 환영하지만 여전히 남북한 양쪽에서 외면받거나 아직까지 빛을 보지 못한 예술가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이쾌대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가장 독창적인 재능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외면받았죠.
 
기생충 제국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의 세계를 탐험하다
칼 짐머 지음, 이석인 옮김 / 궁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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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곁에 있는 기생충

 

그리스에서 기생(parasitos)이란 단어는 '음식의 곁'이라는 뜻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단어를 처음엔 사원의 제사를 돕는 제관'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 나중에는 귀족들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 주거나 자잘한 일을 하면서 밥을 얻어먹는 '식객'을 부를 때도 썼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은 생물학적인 기생 현상을 알고 있었다. 돼지의 혓바닥에 살면서 우박처럼 딱딱한 포낭을 만드는 생명체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록이 이를 말해준다. 사전적 의미의 기생충은 다른 동물(숙주)의 몸에서 영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벌레이다. 그래서 일하지 않고 남에게 빌붙어 사는 사람을 '인간 기생충'이라고 한다.

 

과거 우리나라 학교에서 단체로 회충약을 먹던 시절도 있었다. 그 때 그 시절을 TV 영상으로만 본 나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요즘 초등학생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니다. 그들이 기억하는 기생충은 작년에 영화로 개봉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던 ‘연가시’일 것이다. 물론 영화처럼 사람 잡는 변종 연가시는 존재하지 않지만. 하지만 기생충은 점점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굳이 숫자로 따져보자면, 14억 명 이상이 장 속에 뱀처럼 생긴 회충을 지니고 있고, 13억 명 정도가 피를 빠는 구충을, 그리고 10억 명이 편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 출간한 서민 교수의 <서민의 기생충 열전> 덕분에 다시 한 번 기생충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작년에 영화 때문에 기생충에 대한 편견과 오해로부터 비롯된 호기심의 시작으로 대중의 관심이 높아졌다면 이번에는 확실히 다르다. 기생충의 생태 과정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반응이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기생충이 대중 과학의 관심 대상으로 등장하고 부각받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이다. 그 때 나는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예비 수험생이었다. 마침 나온 기생충 관련 책이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이언스’ 등에 기고하는 과학 칼럼니스트인 칼 짐머가 쓴 <기생충 제국>이었다. 당시 이 책을 완독하지는 못했는데 마침 서민 교수가 쓴 책을 읽어보기 전에 잠시 세월의 흐름 속에 잊고 있었던 짐머의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 은밀하게 신비하게, 기생충이 살아가는 법

 

책 표지는 확대한 기생충의 얼굴 사진이 박혀 있다. 표지와 어울리는 부제는 다음과 같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생물의 세계를 탐험하다’ 떡 하니 자신을 바라보는듯한 기생충의 모습에 이 책을 선뜻 고르기가 쉽지 않은 독자가 있을 거라 본다. 곤충 사진을 싫어하거나 일종의 공포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생충을 둘러싼 ‘미지의 세계’는 위험하다기보다 오히려 신비하고 경이롭다. 괴기스러운 생김새와 달리 그들은 섬세하다. 기생충은 숙주의 생식능력을 없애기도 하고, 정신세계를 조절할 수도 있다. 2~3㎝짜리 흡충은 우리의 복잡한 면역계를 조롱하여 자신을 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최종 숙주를 위해 중간 숙주를 조종하는 것은 기본이다. 촌충에 감염된 물고기는 두려움이 없어져 수면 가까이 올라가 물새에게 ‘날 잡 수슈’하고 다닌다. 물론 촌충의 목적은 물새다. 기생충에게 몸을 빌려준 송사리는 멀쩡한 송사리에 비해 새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이 30배나 높다. 물새가 ‘병든 송사리’를 선호하도록 하는데도 어떤 강력한 힘이 발휘된다.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가지고 있다는 톡소포자충은 가장 성공한 기생충이다. 임산부나 에이즈환자가 아니라면, 대개 해롭지 않다. 이 유능한 기생충은 원래 고양이가 최종 숙주인데 쥐의 몸 안에서 뇌를 조작, 쥐를 고양이 쫓는 ‘자살특공대’로 만든다. 심리학자들은 톡소포자충으로 인해 인간 숙주의 인격도 바뀌는 것으로 본단다. 남자는 사회의 도덕적 규범을 지키려는 의지가 약해지고 여자는 밖으로 나돌기 좋아하고 인정이 넘친다는 거다. 하기야 촌충의 경우, 4억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그동안 지구는 공룡의 소멸 등 4차례의 대량멸종을 겪었지만 촌충은 살아남았다. 바퀴벌레의 영원한 동지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끈끈한 생명력을 자랑한다.

 

 

 

 ♣ ‘생태계의 파수꾼’ 기생충

 

칼 짐머의 주장은 기생충이 생명의 진화에 '절대적 기여'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는 생태계의 엑스트라 기생충에게 ‘생태계의 파수꾼’이라는 새 역할을 부여한다. 기생충이 숙주와 경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숙주와 기생충 모두 진화한다는 것. 그 사이 먹이 사슬은 정교해지고 지구 생태계는 탄력을 유지한다.

 

따지고 보면 둘의 관계가 빼앗기고 착취하는 일방통행만은 아니다. 상생과 보완의 증거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몇몇 기생충은 숙주의 면역체계를 보호한다. 아프리카 빅토리아 호수의 세차원들은 주혈흡충증에 자주 감염되는데 흡충은 흡충과 에이즈에 동시에 감염된 사람들보다 흡충에만 감염된 깨끗한 숙주에 더 많이 알을 낳는 것으로 조사됐다. 숙주가 면역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흡충이 나서 도와야 하는 이유다. 한번 주혈흡충에 감염된 사람은 새로 흡충에 감염되기 어렵다는 연구도 있다. 선배 흡충이 숙주의 면역계를 도와 나중에 도착하는 흡충을 공격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숙주 내 흡충의 숫자를 조절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만 생존에 유리한 한도 내에서이긴 하지만 기생충은 다양한 방식으로 숙주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 기생충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

 

징그러워 얌체 같아서 외면해오던 기생충. 하지만 태양과 물만으로 자생하는 식물이 아닌 다음에야 지구 위 어느 생물이 기생충의 혐의를 벗을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거대한 기생충인지 모른다. 저자는 인간이야말로 지구라는 숙주에 붙어사는 고등 기생충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맞춰 생명체의 생리를 전혀 새롭게 바꿨고, 마침내 자제력을 잃고 스스로 파멸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자제할 줄 모르는 기생충은 스스로를 파멸시키고 자신의 숙주마저도 그 대가를 치르게 하고 만다'는 기생충 사회의 평범한 진리를 인간은 곧잘 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기생충보다 나은 존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인간이 제대로 된 기생충으로 성공하고 싶다면 훌륭한 선배들에게 한참 더 배워야 한다.

 

그는 “우리가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위로한다. “인류는 처음부터 기생충이었지만 지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생명체로 자리해 모든 변화를 이끌 역량을 갖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먹이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앉은 기생충을 아는 건 그래서 지구를 알고 우리를 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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